67화
소년이 말한 전쟁은 아이의 집안까지 도착했다.
“올리비아, 난 무사할 거야. 이 나라에서 전쟁이 한 두 번이야?”
“당신은 단 한 번도 징집된 적이 없잖아요! 세상천지 어떤 군대가 다리가 불편한 사람을 보병으로 부를 수 있냐고요!”
여자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여자를 안아 든 남자는 등을 토닥였다.
“올리비아, 괜찮아. 다 괜찮아.”
“그들이 한 짓이 분명해요. 당신을 전장으로 보내려고, 흑, 그 사지로 내몰려고!”
여자의 통곡이 남자의 품에 묻혔다.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남자의 눈이 계단참에서 고개를 빼곡히 내밀고 있는 제 딸에게 향했다. 깜빡이는 커다란 눈에 두려움이 한가득했다.
“아가.”
작은 부름에 아이가 쪼르르 뛰어 내려왔다.
남자는 아내를 의자에 앉히곤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작은 팔이 남자의 목을 감쌌다.
“싸우러 가세요?”
소년은 전쟁은 싸우러 가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빠도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아빠가 화내는 걸 본 적 없는 아이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니, 아빠는 우리 가족을 지키러 가는 거야.”
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의 편지가 오지 않듯이 아빠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 아가도 벌써 여덟 살이야.”
남자는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아빠가 떠나기 전에 이름을 지어주고 가야지.”
“여보!”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말의 뜻을 아는 여자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남편은 이미 자신이 전쟁에서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생겨서도 안 됐다. 이 아이의 존재는 언제까지나 비밀이었으니까.
“우리 딸 이름은 베스야. 베스.”
“베스…?”
아가라는 부름이 더 익숙한 아이는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기 전의 이름이 베스였단다. 이젠 우리 딸이 엄마의 이름을 가지고 훨훨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렴.”
엄마 이름은 올리비아인데. 이름이 두 개일 수도 있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가까이서 본 아빠의 눈이 너무 슬퍼 보여 입을 다물었다.
“얼른 돌아오세요, 아빠.”
“그래.”
먹먹한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남자는 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온 집안의 공기가 죽어버린 것 같았다. 여자는 텅 빈 눈으로 일어나 집안을 배회하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아이는 매일 밤 다락방 창턱에 올라가 소년과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가. 오두막에 가서 놀고 있어.”
마을의 남자는 모두 사라졌다. 자연히 집을 방문하던 부인들의 행차도 그쳤다. 아이는 이전보단 조금 더 자유롭게 오두막을 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재미는 없었다.
소년이 없는 오두막은 지루하기만 했다.
“데베르.”
어느새 먼지가 소복이 쌓인 바닥에 소년의 이름을 썼다. 그러고 보니 이젠 자신도 이름이 생겼는데 소년은 아직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이는 부엌에서 몰래 가져온 편지와 우표를 들고 다락으로 향했다. 펜을 꼭 쥔 채,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여서 하고픈 말을 적었다.
“데베르에게. 안녕? 나 아가야. 편지가 안 와서 내가 먼저 보내는 거야. 웨인에서 뭐 하고 지내? 나는 너무 심심해. 네가 없어서….”
편지를 따라 읽는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 참!”
가장 중요한 걸 깜빡한 아이는 얼른 편지 귀퉁이에 마지막 말을 적었다.
“나 이제 아가 아니야. 베스야. 기억해.”
만족스런 표정으로 펜을 놓은 아이는 집에 도착하는 우편을 얼추 흉내 내 봉투에 우표까지 붙였다.
이젠 이걸 집배원에게 주기만 하면 되는데.
아이의 고민이 깊어졌다.
엄마는 절대 집 밖의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했는데, 이걸 어쩌지. 며칠을 다락 창턱에 올라가 집배원이 오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도착하는 우편이 적어진다는 걸 아이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젠 제법 짧아진 치맛자락을 팔락거리며 오두막에서 홀로 뛰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엄마!”
엄마의 비명이었다. 마을에서도 외딴곳에 있는 아이의 집에서 나는 소리는 오두막까지도 잘 들렸다.
곳곳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힘껏 집으로 내달렸다. 늘 굳게 닫힌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에 숨을 멈췄다.
“으읍!”
“얼마나 속여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풍채 좋은 남자가 엄마의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고 있었다.
“카시우스 정부 노릇을 하라고 보내놨더니 넥서스 놈이랑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어?!”
남자가 철썩, 여자의 뺨을 때렸다.
“어디까지 거짓말이야! 빌어먹을 네 가족을 살려준단 조건으로 첩자 노릇을 시켰더니 물을 먹여?!”
“거짓말은 네가 하는 거겠지! 이미 우리 가문은 모두 몰살당했다는 거 알고 있어!”
여자는 묶인 손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대들었다. 또다시 남자의 손이 허공으로 높이 들렸다.
“하지 마!”
날카롭게 찢는 비명에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우리 엄마한테 손대지 마!”
아이를 보고 잠시 커진 남자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애새끼까지 있군.”
“안돼! 안돼! 아가! 가! 얼른!”
“뭐해?! 안 잡고!”
벽에 붙어서 있던 남자가 문가로 달려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작은 조랑말처럼 이리저리 몸을 잽싸게 틀며 뛰는 아이를 잡기란 어려웠다.
아이는 항상 다락에서 보던 마을의 풍경을 떠올렸다. 오두막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부인들이 매일 모여 잡담을 나누는 나무가 보인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와달라고 외치면.
역시나,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뒤쫓아오는 발소리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아이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를 때려요! 도와주세요!”
웬 여자아이의 외침에 부인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무슨 소리예요?”
“이 마을에 여자애가 있었나?”
“저기! 저기! 검은 머리 여자애요!”
“어머, 뒤에 남자는 뭐야?”
아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려던 찰나였다.
“읍!”
두툼한 손이 입을 틀어막더니, 아이를 안아 올렸다.
“오랜만에 친척 집에 왔습니다! 애가 장난기가 많아서요!”
아이는 거짓말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작은 머리통은 남자의 손에 파묻혀 있었다.
남자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처음 겪는 고통에 온몸이 아려왔지만, 울 틈도 없었다. 엄마는 더 엉망인 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얘야, 잘 들으렴. 네가 네 어머니를 저렇게 만든 거란다.”
엄마를 때린 남자는 무릎을 꿇더니 눈을 맞췄다.
아이가 벌벌 떨며 기어가자, 남자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봐라, 네 건방진 말 한마디로 네 어미가 어떻게 되는지.”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마지막 기억이고 싶었다. 그건 감히 기억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잔인했으니까.
“얘는 어떡할 거예요?”
구석에서 로브를 걸친 여자가 물었다.
아이는 넋이 나간 얼굴로 미동도 없는 제 엄마의 손만 잡고 있었다.
검정 로브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는 얼른 제 엄마를 보호하듯 작은 몸으로 감쌌다.
“이 여자를 빼닮았는데, 쓸데가 있지 않을까요?”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이 아이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품평하듯 돌려봤다.
“흠.”
남자도 이번엔 좀 더 면밀히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수가 그려졌다. 일생일대의 과업을 겨우 여기서 그칠 순 없었으니 당연했다.
“보호구역에 갖다 놔. 봐서 쓸만하면 그때 생각해보게.”
남자는 손에 낭자한 피를 닦지도 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릿한 피 냄새에 아이가 구역질을 해도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고작 네 말 몇 마디 때문에 어머니가 이렇게 됐는데, 끝까지 어머니를 지켜야지. 안 그러니? 엄마는 아저씨가 병원에 잘 모셔놓으마. 알겠다고 해야지?”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보호구역에 도착한 아이는 늘 겁에 질린 채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발작을 하는 통에, 먹을 것도 빵 몇 조각을 던져주는 게 전부였다.
골목은 무서웠다.
낮에는 사람들이 시체처럼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밤이 되면 그 시체들이 일어나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매캐하고 요상한 냄새를 매일 맡는 것도 고역이었다. 잔뜩 취한 사람이 욕지거리할 때면, 바로 그때의 기억이 올라와 애를 먹었다.
“굶어 죽는 게 목적이냐?”
골목 끝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걸어왔다. 아이는 등을 더 바짝 벽에 붙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미한 등불에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비쳤다.
“얘는 내가 데려간다.”
“뭐, 할멈 맘대로.”
돈을 세던 남자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꼬마야. 예쁘게 크고.”
“퉤! 빌어먹을 소릴 하는 네 놈 입부터 찢어버릴 테다!”
“할멈 말하는 것 하곤, 진짜!”
“아가! 따라와라!”
아가. 오랜만에 듣는 그 소리에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노파는 긴 골목을 돌고 돌았다. 마침내 가장 깊숙한 곳에 나타난 방 안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잔뜩 잠에 취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듣자 하니 말을 못 한다는데, 여기서 말까지 못 하면 험한 일밖에 할 게 없어!”
노파는 서랍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각종 해독제와 주사기가 들어있었다. 노파는 느릿하지만 노련하게 주사기에 해독제를 채워 넣더니, 쓰러진 한 남자의 팔뚝에 바늘을 꽂았다.
“귀족 나리들 뒤치다꺼리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난 이래 봬도 이 보호구역에서 병원 노릇을 하는 사람이야.”
노파는 주사를 놓은 남자의 목에 맥을 짚더니, 숨을 확인했다.
“죽어가는 놈들 살린다고 생각하렴. 보아하니 똑똑하게 생겨 금방 배울 것 같으니까.”
아이는 조심스레 상자 안에 가득한 병들을 만졌다. 이내 남자가 몇 번 투레질 소리를 내더니,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나리도 정신 차렸으면 얼른 나가쇼! 웬, 목숨 갖고 장난질하기 싫으면!”
노파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다음 사람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뒤를 돌아 아이를 확인했다.
검은 머리. 유난히 말간 얼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몰래 해산을 도와주었던 남작 부인.
“지랄 같은 팔자군!”
노파는 중얼거리더니, 다시 아이를 불렀다.
“아가! 멀뚱히 보고 있지만 말고 늙은 할멈을 도우렴!”
아이는 빠르게 배웠다. 키가 자라는 속도보다 배움의 속도가 빠른 아이였다.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 보호구역에서 새로운 거라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뿐이었다.
어느새 소녀가 된 아이는 할멈보다 능숙하게 해독 주사를 놓을 줄 알았다. 나름 입소문이 나, 일부러 소녀에게 해독을 부탁하는 귀족 놈들도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해독 주사를 놓는 소녀와 노파의 방 안으로 보호구역의 문지기가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할멈! 그분이 찾으셔!”
“그분?!”
문지기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노파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작과 그 아들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