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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37화 (37/206)

37화

반쯤 불이 꺼진 병원의 바닥엔, 깊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잠들지 못하는 자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리깔렸다. 마지막 전투의 열기가 쉬이 가라앉혀질 건 아니었다.

쏟아지던 비명과 울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종전에 대한 설렘이 조심스럽게 피어났다.

아더는 전사자들에 대한 애도는 종전에 대한 기쁨으로 대신하자 말했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오늘까지 생존자들에게 살아남았단 죄책감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네스는 다리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잠든 게일의 옆에 앉아있었다. 파리한 얼굴은 불안과 안도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베스는 조용히 사 층으로 향했다.

데베르는 엎드린 채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감긴 붕대는 새 나온 피로 검붉었고, 사이사이로 보이는 흉터 또한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이 남자에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없어도 될 흉터만 더 남겼을 뿐.

닿으면 아플세라 데베르의 어깨 상처를 허공에서 훑는 베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서로가 가까이 있지 않다면, 이 남자가 먼저 저를 부르지 않는다면, 항상 어긋날 것이다. 들것에 실려 가는 그를 발견했는데도 닿지 못한 것처럼.

내 목소리는 이 남자를 부를 수 없으니까.

잠든 데베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

전하지 못할 말인 줄 알면서도 하는 고백이었다.

[내가 부르면 돌아봤으면 좋겠어]

깊어지는 새벽, 닿지 못할 고백만이 늘어가고 있었다.

* * *

병동이 모자라 비교적 경상자들은 통원 치료를 받거나, 하루에 한 번꼴로 막사로 오는 왕진을 기다렸다.

이 시간만큼은 베스도 데베르에 관한 생각을 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오전에 시작된 진료는 날이 저물 때가 돼서야 끝났다.

“이제야 끝났네. 어휴.”

바든이 길게 숨을 몰아쉬며 기지개를 켰다.

베스도 그제야 간이 병원용으로 만들어진 어둠침침한 막사를 나왔다.

짙은 보랏빛이 무서울 만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점점 선명해지는 달무리가 보였다. 데베르와 목숨을 걸고 비탈길로 몸을 던졌을 때도 꼭 이런 하늘이었다.

비탈길이 아니라, 보랏빛 바다에 뛰어드는 것 같았는데.

베스는 서둘러 짐을 차에 옮겨 실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해야 했다. 그가 깨어났을지도 모르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바든은 “배가 많이 고픈가?” 따위의 실없는 소리를 중얼댔다.

“어? 황자님.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돈 베스의 눈이 아더와 마주쳤다. 아더는 급히 시선을 옮겼다.

“몸은 괜찮으세요?”

걱정이 가득 담긴 물음에 아더는 입술을 뻥긋댔다.

“설마, 어디 다치셨나요? 그렇다면 지금 저희가-”

“없습니다.”

얼른 말을 잘랐다.

“전……. 아무 곳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목덜미를 타고 열기가 훅 올라왔다.

“정말 다행이네요”

진심 어린 말이 저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베스의 까만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게 느껴졌다.

이건 수치심이었다. 두려움이었고, 나약함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제 꼴을 우습게 여길까 걱정하는.

“조심히 가십시오.”

도망치다시피 등을 돌리자, 곧 멀어지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나서야 이미 비어버린 길을 돌아봤다. 당연히 그 자리에 서 있던 베스도 사라진 뒤였다.

“뭘 보겠다고 거길 가.”

조용한 자책이 이어졌다.

“아직도 살아있어?”

기가 찬다는 듯한 아더의 물음에 보초병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다 답했다.

오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령관은 지금만큼은 데베르 대장만큼이나 살벌한 기운을 풍겼다.

빛 한 점 없이 밀폐된 막사 안으로 아더가 들어섰다.

“안녕.”

전장의 흙먼지를 말끔히 씻어낸 아더는, 예의 그 사랑스러운 넥서스 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 날 어쩔 셈이야!”

의자에 포박된 채 질러대는 사내의 고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두려움을 더욱 잘 보여줬다.

“다물어. 나불대는 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더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 기이한 살가움이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긴장을 만들었다.

사내는 덩치가 우스울 만큼 덜덜 떨어댔다. 그 꼴사나운 진동을 아더는 지긋이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기민하게 상대의 변화를 알아채는 중이었다.

“날 죽여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새, 생각해 봐. 어차피 넥서스가 이겼잖아. 나 하나 죽인다고 뭐가 달라져? 원하는 대로 다 줄게. 다, 다, 전부.”

비식거리는 아더의 입술에서 상대에 대한 멸시가 흘러나왔다.

“고작 코바흐 따위가, 넥서스에 뭘 줄 수 있지. 살고 싶으면 예를 보여. 지금 네 목숨은 길가의 개새끼만도 못하니까.”

“제, 제 말은 데베르, 아니, 데베르 공작에게 말을 좀 잘해달란-”

쾅, 소리를 내며 흔들린 협탁에 사내가 움칠 떨었다.

“난 처음부터 네 놈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제 나라에선 황태자인 놈이 적군 앞에서 빌빌 기어대는 꼴이라니. 그것도 고작 제 목숨 하나 구하자고.

“마음 같아선 당장 죽여버리면 좋겠는데.”

그 말에 덩치의 의자가 크게 움직였다. 손발이 묶인 탓에 둔탁한 무게감이 바닥을 쿵쿵 찧어댔다.

“안 돼, 안 됩니다. 제, 제 처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자님은 아시겠죠. 입지를 위해서. 그래, 정말 그것만 위해서 전장에 나온 겁니다. 코바흐군이 넥서스에 뭘 했는지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모두 아버지, 아니, 황제가 결정한 겁니다.”

속사포 같은 변명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아더는 들은 체도 안 하고, 긴 다리를 꼰 채 주먹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분명 어제 그 개싸움 같은 전투에 몸을 던졌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상처 하나 없었다.

팔자 좋은 황자란 소리를 그렇게 듣더니, 정말 운명이 그렇게 변하기라도 한 걸까.

“황자님도 저와 같은 처지잖습니까!”

더없이 초조해진 사내는 결국 뱉어선 안 될 말을 뱉고 말았다.

멍하니 초점 잃은 황금색 눈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사내는 아차 싶었지만 던질 수는 이게 전부였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봐야지 않겠는가.

“황자님도 황제 정부 소생의 처지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내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아더의 주먹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사내의 주둥이를 뭉갰다. 남자치고 고운 손이었지만, 무식할 정도의 힘은 전혀 곱상하지 않았다.

“감히 천박한 네 피와 날 비교해?”

“으으읍!”

퍽, 하고 사내의 얼굴에 주먹이 다시 한번 내리꽂혔다. 뼈와 살이 뭉개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막사를 채웠다.

막사 밖에서 소란에 귀를 기울이던 보초병들은 점점 잦아드는 신음에 아마 죽었으려니 저들끼리 예상하는 중이었다. 바깥의 사람도 이럴진대, 정작 사내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건 아더뿐이었다.

어디 한 구석이 고장 나 버린 것처럼 초점 풀린 눈은 사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은, 뭉개진 사내의 얼굴 속에 보이는 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증오하는 인간이 뭔 줄 알아? 나랑 닮은 새끼야.”

살고 싶어 안달 난 모양새가 처음부터 심기를 거슬렸었다.

여유 없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천한 출생에 대한 자기 연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 같은 게 나를 닮아? 말해! 이 개새끼야! 네가 나를 닮아?”

아더는 미친 듯이 멱살을 흔들었다. 눈을 까뒤집은 사내는 대답할 수 없는데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 * *

이젠 당연하단 듯 데베르의 치료에 대한 모든 것은 베스에게로 넘어갔다.

‘전담 간호사’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또 저 남자가 무슨 꿍꿍인가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단 생각에 싱거운 웃음도 났다.

남자는 어젯밤과 다르지 않았다.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것이다.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짙어지던 하늘은 기어코 새카매졌고, 어김없이 하얀 달빛이 엎드린 남자에게 닿아 부서졌다.

얌전히 잠든 얼굴을 보던 베스는 문득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가린 앞머리를 치웠다. 그러자 가만히 감긴 눈매가 온전히 보였다.

베드 옆 귀퉁이에 걸터앉아 조심스레 부드러운 잿빛 머리칼과 속눈썹을 쓰다듬었다. 전해지는 온기만큼 따뜻하고 좋은 꿈을 꾸라고. 그 마음을 담아 날 선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응답하듯, 감긴 눈이 천천히 열렸다.

베스는 닿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남자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꿈인가….”

잔뜩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스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쓸었다.

“네가 이럴 리가 없는데….”

베스의 손 위로 데베르의 손이 겹쳤다. 베스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갔다.

처음 보는 그의 무방비한 시선이었다. 그 어떤 계산도, 이해도 들어있지 않은 데베르 클리프란 남자의 눈은 생각보다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기다렸어?”

물음 끝의 희미한 떨림조차 숨김없이 전해졌다.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베르는 한참을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자신을 기다렸다고 말하고, 얼굴을 쓰다듬는 베스를.

“꿈인가 보다.”

다시금 눈을 굳게 감았다.

단 한 번도, 제 꿈속은 달콤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 게 현실일 리가 있을까.

“깨지 말아야지.”

뭐든 상관없다.

꿈이든, 현실이든 깨어나지만 않았으면.

데베르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깨지 말아야지. 깨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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