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새벽 미명이 닿은 데베르의 얼굴은 한층 더 음울해 보였다. 깊이 꺼진 눈가와 예민한 성정 탓에 며칠 새 각이 더 잘 드러난 얼굴은, 일개 보병 군복을 입고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겨댔다.
각을 맞춰 전부 시동이 걸린 전차와 군용차의 엔진소리가 좌중에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제 몸에 끼워진 총의 탄창을 확인하는 데베르에게 아더가 다가왔다. 아더 또한 계급장도 브로치도 없는 똑같은 말단 군복을 입은 채였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아더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들을세라 잔뜩 낮춘 목소리에서도 희미한 떨림이 전해졌다.
“지금이라도 그 부분만 바꾸자.”
“황제의 명인가.”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길게 못 가. 주어진 건 하루야.”
데베르는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는 이미 앞으로 있을 전투를 내다보고 있었다. 지독하게 목표에만 초점이 맞춰진 시선이었다.
평소 승부사 노릇 따위 질색했지만, 지금은 별수 없었다.
제가 해야 하고, 저만이 할 수 있다.
“가난한 병사라 하기엔 머릿결이 너무 좋군.”
무뚝뚝하게 던져지는 농담에 아더는 설핏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끝이 개운치 못한 웃음이었다.
거대한 무리의 군대가 제 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으로 걸어가는 데베르의 걸음에 맞춰 치켜드는 얼굴들 위로 긴장감이 서렸다.
무리의 맨 앞, 시동이 걸린 군용차의 보닛을 주저 없이 밟고 올라선 데베르가 제 밑의 병사들을 둘러봤다.
그 단단한 모습을 병사들은 동경하고, 두려워했다.
“마지막 전투다.”
그는 침묵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무리 바깥에 특별히 세워진 병사들이 통역병처럼 데베르의 말을 전달했다. 개미 떼같이 서 있는 군대 전체에 군대장의 말이 삽시간에 퍼져갔다.
“넥서스는 돌이키지 않는다. 오직 승리만을 가져갈 뿐.”
푸른 빛이 더욱 깊숙이 그들 사이로 들어왔다.
“모두 건국기념일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건국기념일은 넥서스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는 명절이자, 풍요로운 연말의 상징이었다. 건국기념일과 고향이란 말에 얼핏 밝아지는 병사들의 얼굴은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보다 빛났다.
“살아서 보도록. 해산.”
말을 끝맺으며 데베르는 먼저 군용차에 탔다. 이를 시발점으로 모든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로 뛰어갔다.
때에 맞춰 게일이 이끄는 공군 전투기 부대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지나갔다.
“출발해.”
마지막을 위한 모든 것이 시작됐다.
* * *
넥서스군이 우회할 것이라 예상한 코바흐군이 수세에 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분명 전투부대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중앙을 칠까. 데베르는 바로 이 허점을 파고들어 그야말로 ‘미친 짓’을 하는 중이었다.
브리틴으로 도망치고 싶어 안달이 난 바텀의 멱살을 잡다시피 해, 그들의 기갑전력 모두를 이 전투에 쏟아부었다. 태연하게 ‘황제께서 원하신다’라는 말 또한 잊지 않았다.
전화선까지 끊은 마당에, 데베르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
‘코바흐 황태자 놈이 마지막 전투에 끼어들었대.’
데베르는 이 정보에 모든 걸 걸었다.
코바흐의 황태자. 정부의 자식이란 소문이 넥서스까지 파다한 자였다. 굳이 마지막 전투에 뛰어드는 건, 끝물인 전쟁의 공을 가로채고 싶은 것이리라.
후계의 정통성을 확실히 하고 싶은 황족 놈은 대체로 생각하는 꼴이 비슷하기 마련이니.
데베르는 지금 그 황태자를 생포하러 가는 길이었다. 알아서 기어들어 온 종전 기회를 마다할 군대장은 없었다.
아더와 데베르가 이끄는 정예군은 어느덧 코바흐 중앙군과 맞닿은 곳까지 도착했다. 백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코바흐군이 보였다.
“열 시 방향.”
아더가 속삭였다.
“황태자께서 목숨을 거셨네.”
전차 뒤에서 뒹구는 꼬락서니가 어지간히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인정받고 싶단 생각 하나로 전장에 뛰어든 멍청한 놈.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더는 그 꼴사나운 코바흐 황태자의 작태에서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전차 뒤에 붙어선 데베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 한 번에 모든 전차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총알이 철제를 스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쾅쾅 쏘아대는 포탄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끔찍하게도 땅을 진동시켰다.
적군의 반격에 몇몇 전차들이 불타는 게 보였지만, 데베르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전차는 사정거리가 생명인데, 그딴 것은 상관없다는 듯 들이닥치는 넥서스의 기세에 황태자의 부대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차에서 뛰어내린 데베르가 연막탄을 터뜨렸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황태자.
“으아악!”
제 등 뒤로 덮쳐든 인영에 황태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키는 데베르보다 작았지만, 워낙 살집과 근육이 두툼해 포악스럽게 몸을 뒤흔들자 그 위에 매달린 데베르도 함께 흔들렸다.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든 남자가 칼을 쥔 손을 마구잡이로 위로 휘둘렀다.
“윽.”
하필 오른쪽 어깨를 찔린 데베르가 남자의 몸통에서 떨어졌다. 분노와 공포로 점철된 남자는 앞뒤 재지 못하고 곧장 데베르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죽으라고오!”
한데 엉긴 둘이 참호로 떨어졌다.
데베르는 한 손으로 악에 받친 남자의 목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칼을 쥔 손아귀를 붙들었다.
“으으윽!”
“크흡!”
졸린 목이 시퍼레질수록, 칼날도 점점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한계가 머지않았다.
덩치에 깔린 데베르의 눈에 살기가 넘실댔다.
“컥!”
돌아간 칼날은 황태자의 목을 조금 빗나가, 얼굴로 향했다. 데베르의 얼굴 위로 제 것이 아닌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극한의 고통에 사력이라도 생긴 건지, 칼날이 다시 데베르를 향했다. 한번 찔린 어깨에 다시 한번 칼날이 들어왔다.
“제길.”
칼날이 몇 번 그 자리를 파고들건 상관없었다. 데베르는 정신없이 내지르는 칼은 무시한 채,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시퍼런 힘줄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일어섰고, 하얗게 질린 손마디에 쥐어짜는 듯한 악력이 실렸다.
일순, 남자가 한 번 부르르 떨더니 혀를 축 빼며 쓰러졌다.
“데베르!”
아더가 참호 위에서 황태자의 늘어진 몸체를 끌어 올렸다.
산만 한 덩치를 끌고 가는 탓에 속도가 느렸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코바흐군의 총알이 비처럼 흙바닥을 두드렸다.
“읏.”
군용차에 올라타기 직전, 데베르의 옆구리로 뜨거운 게 스쳤다. 불에 덴 듯한 익숙한 고통에 절로 잇새가 꽉 물렸다.
“다 됐어! 데베르, 이제 타!”
거칠게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몸이 들썩일 때마다 독사의 독처럼 온몸으로 고통이 서서히 퍼져갔다. 멀어지는 총탄 소리와 함께 시야가 점멸했다.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수고, 데베르? 데베르!”
넥서스 후송 깃대가 보였다.
그때, 베스에게도 저 깃대만 보고 달리라고 했었는데. 그러면 살 수 있다고.
가물가물한 눈앞으로 얼핏 그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그가 살았음을 알고 서럽게도 울던 그 하얀 얼굴이.
마침내 끝났다.
데베르는 안심한 듯 정신을 잃었다.
* * *
부상병을 기다리는 병원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몰리 부인의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어젯밤, 데베르는 그녀를 찾아왔었다.
보안 때문에 모든 걸 말해 드릴 수는 없지만, 돌아오는 시각이 늦어질수록 패전과 가까우니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깨진 창틈 사이로 붉은 석양이 길게 들어왔다. 붉게 물든 하늘처럼 부인의 마음 또한 벌겋게 태워지는 것만 같았다.
제발, 다쳐서라도 좋으니 돌아오길.
끔찍한 조건부 소원조차 간절한 정도로 마음은 참담했다.
애타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특히 전투에 사랑하는 이를 보내놓은 이들의 애달픈 마음은 감히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어? 차 소리 들려요!”
딕시가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온다!”
엔진 소음과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들 준비해!”
베스와 아이네스가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착한 후송 차량에서 부상병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호송되다 차 안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병원 마당 한쪽에 쌓였다.
베스는 무리를 헤집고 들어갔다. 브로치를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얼얼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야전 병원의 참혹했던 전장을 떠올리게 했다.
“비켜!”
들것을 든 병사 하나가 아프게 베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반쯤 돌아간 베스의 시선 끝에 피투성이 형체 하나가 들어왔다.
“비키라고! 데베르 대장님이시라고!”
저게 그 남자라고.
가까이 다가가려던 베스는 저보다 훨씬 큰 병사들 때문에 또다시 밀쳐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빼 멀어지는 들것을 바라봤다.
눈에 익은 잿빛 머리칼이 보였다. 흙투성이가 되고, 핏물이 들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 머리칼이.
베스는 미친 듯이 인파에 몸을 부딪치며 무리를 헤쳐나갔다. 확인해야 했다. 저 남자는 살아있다고. 살아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쫓아 들어가는 베스를 막은 건 몰리 부인이었다.
“베스, 데베르는 내가 볼 테니 자네는 바깥의 경상자를 챙겨요.”
눈물로 가득한 새카만 눈동자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감정이 앞서면 보일 것도 보이지 않아. 데베르를 믿으렴. 자네는 자네 일을 해야 해. 여긴 모두 각자의 일을 해야 하는 곳이야.”
“게일!”
찢어지는 오열이 부인의 목소리를 덮었다. 고개를 돌린 곳엔 정신을 잃은 채 실려 온 약혼자를 보고 쓰러지는 아이네스가 보였다.
베스는 거칠게 눈을 비비며 숨을 골랐다. 잘 쉬어지지도 않는 숨이었다. 올라오는 눈물은 꾸역꾸역 가슴 저 밑으로 눌러냈다.
내 일을 해야 할 때.
당신이 그랬듯이, 지금은 나 또한 내 일을 해야 할 때.
베스는 기도처럼 그 말을 되뇌며 등을 돌렸다.
사방이 고통에 찬 비명과 울음으로 잠겨 드는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