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귀신이라도 봤어?”
으레 퉁명스러운 말이 던져졌다.
데베르가 대충 벗어 던진 외투가 바닥을 뒹굴었다. 베스는 이미 닫힌 방문을 재차 확인했다.
“도둑놈 들어온 것도 아니고.”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에 베스는 기가 차 멍하니 잘난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마치 제자리인 양 베스의 침대에 엎드린 채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면 그게 도둑이지 뭔가요]
이전 창고에서와 달리, 잔뜩 휘갈겨진 글씨를 들이밀었다. 무심하게 들여다보던 남자는 종이판을 휙 빼앗더니, 대뜸 아직 열려 있는 창밖으로 종이판을 든 손을 올렸다.
베스는 기겁을 하며 얼른 창문을 닫았다. 저번에 격리실에서 펜을 집어 던졌듯이, 종이판도 던질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잔뜩 그를 노려보는 까만 눈에 데베르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대충 반대편 구석으로 집어 던진 나무 종이판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데베르는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실수.”
걸음을 옮기는 베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상처라곤 없던 흰 손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뒤집었다.
“거의 다 나았네.”
흉하게 베인 자국이 있던 자리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데베르의 엄지가 천천히 그 흔적을 쓸었다. 이마저도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는 듯이.
베스는 그 미묘한 느낌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말했던 ‘나쁜 짓’이 또렷하게 기억을 타고 떠올랐다.
얼굴 반쯤을 침대에 묻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손에서부터, 팔, 어깨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베스는 괜히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입고 자나 봐.”
그렇게?
그제야 자신이 어떤 차림새로 있는지 알아챈 베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누가 간호 숙소에 남자가 들어올 거라고, 그것도 창문으로 들어오리라고 상상이나 할까.
당연하게 베스도 편안한 슬립 차림이었다.
급하게 발치에 떨어진 외투를 남자의 얼굴 위로 던졌다. 당장 욕지거리를 뱉을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로 그녀가 가운을 걸칠 때까지 묵묵히 있었다.
“내가 짐승 새끼도 아니고.”
물론 외투를 걷었을 때 냉랭한 눈길까지 피할 수는 없었지만.
던져진 옷가지 탓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서늘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눈 아파.”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베스가 못마땅한지 다시금 불퉁한 말이 이어졌다.
“어깨가 작살나서 못하겠어.”
데베르의 말마따나, 오른쪽 날갯죽지와 등줄기에 칠한 약 때문에 셔츠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쓸데없이 미안한 표정 짓지 말고. 빨리.”
성급한 재촉에 베스의 손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머리칼로 향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쳤다. 덜덜대는 군용차 짐칸에서 새벽바람을 맞으며 떠올렸던 것과 같은 감촉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 남자는 또다시 베스의 앞에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저를 살려내고. 함께 죽는다 생각했는데, 함께 살아난 남자.
“마을에 다녀왔어.”
시간을 확인한 베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꿰매기만 했는데 해가 질 수는 없었다.
“목걸이 찾으러 간 거였는데.”
이 상황에 목걸이라니.
베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말도 안 된다 싶었지만, 이 남자라면 지극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때론 말도 안 되는 짓을 잘도 하는 사람이니까.
“장터의 흔적도 없을 정도야.”
베스는 뻗어있던 팔을 조심스레 거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궁색할지언정 사람 사는 생동감은 있던 곳이었는데. 그런 곳이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걸까.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 얼굴을 뜯어보던 노파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젠 데베르가 손을 뻗어 베스의 어깨 위로 내려온 굽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 노파는 살았을 거야.”
그 말이 무슨 기도 응답이라도 되는 듯, 베스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얼굴을 하는데 어떻게 내가 거짓말을 안 하겠어.
데베르는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이 여자가 믿을 수 있도록.
“그 나이까지 살아남은 자면 눈치껏 피난 갔을 거야. 거기는 소문이 빠르잖아.”
진위를 확인하려고 그의 눈동자를 좇는 까만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장담해.”
비로소 베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데베르가 여전히 제 머리칼을 꼬아대며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어제의 여파 때문인지 그와 닿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본능에 충실했던 포옹이었지만, 그와의 거리감이 줄어든 건 분명했다.
“전쟁은 곧 끝날 거야.”
확신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내가 끝내기로 했으니까.”
가히 오만한 말이었지만, 데베르 클리프의 입에서 나오니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전쟁이 끝나면 넌 어디로 돌아가지.”
돌아갈 곳.
대답을 찾지 못한 눈동자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스로에게도 답할 수 없는 걸 섣불리 말할 수는 없었다.
“고향이 코펠인가.”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그럼, 웨인?”
데베르는 더 물으려던 것을 멈췄다. 답하기를 난처해하는 말간 얼굴이 보였기에.
사실 고향 따위 어디든 상관없었다. 답하기 싫은 게 있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도 그러니깐.
이 여자에게선 하나만 받아내면 충분했다.
“전쟁이 끝나면-”
“베스! 자니?!”
우렁찬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이어 삐걱대는 나무계단 소리가 적막한 숙소 층계를 울렸다.
“듣고 있는 거야?”
베스의 손이 데베르의 입을 막았다.
잔뜩 찌푸려진 눈가가 형형하게 노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급하게 남자의 팔을 잡아당기자, 마지못해 일으키는 기다란 몸뚱이는 느릿하기만 했다. 애가 탄 베스는 먼저 창문 두 쪽을 활짝 열고 그를 올려봤다.
“여기로 꺼지라고?”
베스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잡아끄는 성화에 못 이겨 창턱을 밟으면서도. 데베르는 재차 “여기로?”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미치겠네.”
어쩔 수 없이 뛰어내린 데베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지만, 그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창을 닫기가 무섭게 딕시가 들이닥쳤으니까.
“안 자고 있었네? 병원은 얼추 정리됐어. 내일 아침에 같이 가자. 오늘 넌 푹 쉬어야 해. 다들 네가 큰일 났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 베스 제인스가 어디 보통 간호사야?”
딕시가 어젯밤을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베스는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온 신경은 등 뒤에 쏠려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열나니? 창문 좀 열까?”
베스는 깜짝 놀라 창문을 몸으로 막았다.
딕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래? 너 괜찮아?”
후다닥 딕시에게 다가가 외투를 벗기고, 문가로 밀어냈다. 잽싸게 구석에 던져진 종이판도 주워 펜을 휘갈겼다.
[피곤하지? 얼른 씻어]
“으응, 그래.”
영문도 모르는 딕시를 욕실로 집어넣고 나서야, 베스는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닫힌 문을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다시 창문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창가 밑에 서 있었다. 짙은 잿빛이 달빛을 받아 은빛처럼 반짝였다.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던 베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침대 위에 떨어진 외투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딕시가 발견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좀 더 뻗어 봐.”
데베르는 굳이 다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베스도 별다른 불평 없이 제 팔을 더 뻗었다. 내쫓듯이 창문으로 내몬 게 미안하기는 했으니까.
“조금만 더.”
상체가 조금 더 나오자, 밤을 닮은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날리는 머리칼에 베스의 눈가가 설핏 접혔다.
그 순간, 데베르는 가볍게 벽돌을 밟고 발돋움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닿을 듯 가까워진 눈동자에 베스가 얼른 고개를 뒤로 뺐지만, 그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왜, 어제도 이러고 있었잖아.”
나직한 한 마디가 성급한 입맞춤 사이로 흩어졌다.
잔뜩 발개진 베스의 입술과 달리, 남자의 입술은 겨울밤의 찬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외투가 어딘지 모를 허공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입술 새로 미온한 열기가 넘어왔다. 차분하게 내리깔린 잿빛 속눈썹이 바로 앞에 있었다. 입술이 잠깐 떨어지는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는 숨 사이로 그의 향도 함께 삼켜졌다.
그가 뱉던 말보다 훨씬 부드러운 온기가 안을 훑어냈다. 진득하게 자신을 따라오는 그 때문에 베스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을 뗀 데베르의 반질거리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베스는 홀린 듯 달빛을 등진 그를 바라봤다.
“엇.”
잡아먹고 싶을 만큼 멍한 얼굴을 한 여자를 놀리고 싶어, 일부러 휘청이는 체하자 더 놀란 베스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발갛게 달궈진 볼만큼이나 새빨간 입술이 뻐끔거리는 게 눈앞에 보였다. 데베르는 더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베스는 따라 웃지도 못하고, 여전히 멍하니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만 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처음 보는 휘어진 눈가가, 시원하게 말아 올려진 입꼬리가,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그렇게 만들었다.
데베르는 완전히 넘어올 듯이 몸을 기울였다.
아까 전의 입맞춤과 달리,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서 낯간지러운 마찰음이 났다.
“베스! 저녁 먹었어?”
그새 다 씻은 딕시의 목소리였다.
베스는 확 떠밀 듯이 창턱에서 남자를 밀어냈다. 이번엔 정말로 바닥으로 떨어진 그가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창은 이미 닫힌 후였다.
벌컥 문을 연 딕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너 오늘 뭔가 이상해. 아픈 거 아니야? 창문 좀 열자니까.”
베스는 창턱에 올라앉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데베르는 비밀이라곤 없는 낡은 숙소 창문을 올려다봤다. 까만 뒤통수 옆으로 새빨간 귓바퀴가 보였다.
저 작은 머리통을 씹어 먹고 싶다 하면 또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
외벽에 기대선 데베르는 느리게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온기가 아쉬웠다.
“전쟁이 끝나면.”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
아마, 그 말까지 들었으면 더 얼빠진 표정을 보여줬을 텐데.
설익은 웃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됐다. 아껴보고 싶을 만큼 아까운 얼굴이니까.
이 층을 밝히던 불이 꺼졌다. 데베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가를 다시 한번 올려다봤다.
항상 올려보기만 하던 창가로 올라선 건 충동이었다. 못 오를 곳이 없는 제게, 유독 베스가 있는 이 낡은 숙소의 창문만이 높게 느껴졌다.
그게 싫었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인데, 너는 못 오를 곳이라 말하는 것 같아 괘씸했다. 너는 평생 그 밑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존재라고 말하는 듯해 끔찍했다.
그래서 그 틈을 부서트리고 싶었다.
그리고, 충동이 이성을 이긴 오늘 밤.
올라선 창가의 맛은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