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달빛도 잘 들지 않는 곳.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두 사람의 숨과 드문드문 들려오는 데베르의 낮은 목소리만이 서로의 존재를 알려줬다.
잠을 깨우기 위한 의미 없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디저트, 계절, 향 따위를 묻는.
몇 번 제 대답을 쓰던 베스는 이젠 그럴 힘마저 없는지 죽은 듯이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시체를 안고 있긴 싫어.”
지금껏 가볍게 손가락으로 톡톡, 치던 베스는 대충 주먹을 말아 남자의 등을 쳤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퍼졌다.
혹시나 코바흐군이 올세라 작은 모닥불 하나 피우지 못한 채였다. 온몸으로 나는 겨울은 살을 엘 정도로 매서웠다.
하지만 데베르는 이 여자와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지금, 이상스러운 안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건 이상하다고밖에 설명 못할 마음이었다.
“베스.”
아까 전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베스.”
나직한 재촉이 이어졌다.
“대답해줘.”
고개를 조금 숙이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도 베스의 향이 들어왔다.
그 향에 데베르는 조금은 아득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꼭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으니까.
“이렇게 살지 말까.”
습관처럼 움직이려던 베스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렇게…. 어렴풋이 짐작했던 그의 삶을 오늘에서야 가까이서 봤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사이의 가장 끔찍한 시간.
그 시간으로 삶을 채운 이 남자에게 과연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지 말라고 하기엔 그 덕분에 살았고, 이렇게 살라고 하기엔 그의 삶이 지옥일 텐데.
“넌 살리고, 난 죽이잖아.”
가볍게 던졌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무게가 베스를 붙잡았다.
남자를 감싼 팔을 풀었다. 힘이라곤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얼추 일으키자, 맞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거친 손을 쥐었다.
[당신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또 저번처럼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손가락에 힘을 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도]
채 끝까지 쓰지도 못한 손이 남자에게 잡혔다. 작은 손을 쥔 커다란 손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너는….”
데베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이 짙어 다행이란 생각이 스쳤다. 속절없이 이 여자의 한마디에 흔들리는 제 모습 따위 그 누구도 보지 못할 테니까.
가는 팔을 잡아당기자 저항 없이 여자의 몸이 끌려왔다.
“추워.”
핑계를 대며 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온종일 흙바닥을 뒹굴어도 이 여자의 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언제든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당황한 듯 허공을 맴돌던 베스의 팔도 조심스레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너는 실수한 거야.”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톡톡 치는 손가락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실수한 거야.”
넋 나간 듯 같은 말을 되뇌며 데베르는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실수는 누가 한 걸까.
짐승 새끼인 줄도 모르고 목덜미를 내준 너일까.
아님, 기어코 연약한 목덜미를 붙들고 놓지 않을 나일까.
첫새벽 빛이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틈을 타고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에 데베르는 눈을 번쩍 떴다.
날이 밝아올 때에서야 설핏 잠이 든 베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말없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 손짓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데베르는 바위틈 깊숙이 베스를 밀어 넣고 재킷으로 덮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를 죽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얼른 찾아!”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의 외침이었다.
데베르는 가만히 엎드렸다. 여기서 코바흐군을 만난다면 이보다 낭패는 없었다.
뱀처럼 엎드린 채, 가장 먼저 제게 다가올 병사를 기다렸다. 성인 남자의 무릎만큼 오는 풀숲이 그의 몸을 적절하게 숨겨줬다.
풀숲 사이로 군화가 점점 가까워졌다.
“억-”
뭔가를 발견한 병사가 소리를 치기도 전, 먼저 덮친 데베르가 병사의 입을 틀어막고 총을 빼앗았다. 그의 무자비한 손아귀에 억눌린 병사의 질겁한 눈빛이 선명했다.
“넥서스?”
천천히 손을 떼자, 병사가 막힌 숨을 토해냈다. 가까이서 군대장을 본 게 처음인 병사는 입술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데베르 대장님!”
뒤늦게 데베르를 발견한 게일이 소리쳤다.
그 또한 평탄치 못한 어제를 보냈는지 머리엔 붕대가 둘둘 매여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온 한 무리의 넥서스 군이 보였다.
“대장님이 실종되셨다 해서 찾는 중이었습니다.”
목소리엔 깊은 죄책감이 묻어났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베스도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 베스 간호사도….”
게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의 참패 이후, 생존명단에 베스 제인스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점이 코바흐군과 맞닿은 최전선이었기에 그녀의 사망은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뭘 보고 있어. 후송해.”
데베르의 살벌한 명령에 근처 병사들이 얼른 베스를 군용차로 데려갔다.
차 안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낯선 곳을 달리는가 싶더니, 이내 익숙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어제의 폭격으로 낯익은 풍경들은 낯설게 변한 지 오래였다.
불에 탄 나무, 곳곳에 퍼져있는 전차, 이름 모를 이들의 시체까지.
“보지 마.”
의중을 모를 잿빛 눈동자는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코바흐군이 어찌나 밀고 들어왔는지, 병원 또한 온전한 꼴이 아니었다. 후퇴한 전선일지언정 지켜낸 게 용하다 싶을 정도의 참패였다.
“아더 메이너를 잡아 와.”
데베르의 흉흉한 기세에 병원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병사들의 부축을 받은 아더가 절뚝대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표정은 모든 걸 예상한 듯 의연했다.
옆에 선 병사의 장총을 뺏어 든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어딘가 한 곳이 비틀어진 웃음이 주는 기묘한 느낌에 누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잡아 오라 했더니, 모셔 왔군.”
기다란 총구가 아더를 향했다.
“그걸 믿고 상관에게 불복종한 채 독단적인 행동을 한 건가.”
굳게 잠긴 아더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넥서스에서 불복종은 즉결 처형이지.”
방아쇠가 살짝 당겨지자, 무리를 뚫고 게일이 뛰어 들어왔다.
“대장님, 제 잘못입니다. 제가 대장님께 전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더 메이너, 네가 끌어들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데베르는 게일은 보지도 않은 채, 아더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총구가 흠 없이 깨끗한 아더의 이마에 닿았다.
“자네는 나를 알지.”
모두가 안다. 데베르 클리프라면 사령관인 아더 또한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군대장이 황제는 아니지.”
아더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폐하께서 명하셨고, 나는 따랐을 뿐이다.”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것 같던 고백은 생각보다 뻔뻔하게 흘러나왔다. 제 입으로 황제의 속내를 말하고, 황궁의 끄나풀이 자신임을 밝히는 고백.
그리고 이제, 가장 뱉고 싶지 않던 말을 뱉어야 할 때다.
“클리프가는 넥서스 황제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나.”
황자라는, 황족이라는 이름뿐인 대의를 내세워 공작 따위 눌러보겠다는 같잖은 말.
“그래.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 개 같은 짓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
아버지 카시우스의 맹세였다. 야망으로 점철된 그는 황제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될지도 모를 넥서스에 대한 맹약을 한 것이었지만.
데베르의 총구가 천천히 내려갔다.
“맹세의 대가로 나는 군대장이 됐고, 자네는 지금 내 관할이지. 지금은 전시이고.”
상대를 깔보듯이 내려보는 잿빛 눈동자는 한치의 우위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넥서스에서 전시는 모든 이해관계를 앞서지. 나와 계급 놀이를 하고 싶나, 아더 사령관.”
데베르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오만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질 텐데.”
보기 좋게 역공한 데베르의 태도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막사에 구금하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팔이 결박된 아더가 병원 밖으로 끌려갔다.
섣불리 물러나지 못하는 무리 틈으로 몰리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터진 등을 다시 꿰매고자 데베르에게 작게 손짓했다.
그 사이, 아이네스가 얼른 제 약혼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행여 군대장의 눈에 띄었다가 게일이 화를 당할까 두려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베스는 가장 구석에 서서 멀어지는 데베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모두에게 두렵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끔찍했던 어제를 뒤로하고, 지독한 오늘이 다시금 왔단 뜻이었다.
* * *
병원은 복도 곳곳의 창이 깨져있었고, 특히 약제실은 포탄으로 날아간 거나 다름없었다.
다들 부서진 벽돌을 치우고, 그나마 건질만 한 비품들을 찾기 위해 잔해를 뒤지고 있었다. 베스 또한 그 틈에 섞여들었지만, 이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베스. 조금이라도 내 죄책감을 덜어 줘.”
울먹이는 아이네스의 말에 베스 또한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숙소는 전투의 여파를 비껴가 있었다.
엉망이 된 데베르의 재킷을 털고, 흙먼지 범벅인 몸을 씻어냈다. 드러난 팔다리며, 옷이 찢어진 등허리까지 상처가 가득했다.
그 남자는 얼마나 많이 다친 걸까.
피범벅이 된 셔츠가 눈에 선했다. 그 가파른 비탈길을 저를 안은 채 뒹굴었으니, 아마 온몸이 상처투성이일 것이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노곤한 몸을 침대에 기대자,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지새웠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손안의 연고 통을 만지작거릴수록 그가 보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로 괜찮다고 하는 말이 듣고 싶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땐,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잠기운이 남은 눈이 다시 감겼다.
탁.
몸을 벌떡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탁.
잘못 들은 게 아니야. 확신이라도 주듯 작은 돌멩이 하나가 머리맡 창문을 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얼른 창을 열자, 차가운 밤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
“자고 있었어?”
창가 밑에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있었다.
“혼자 있어?”
잠이 덜 깨서 꿈을 꾸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은 묻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베르는 벽돌이 얼기설기 튀어나온 외벽을 한번, 제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베스를 한번 번갈아 봤다.
“비켜 서봐.”
그 말을 끝으로, 데베르는 벽돌 몇 개를 짚더니 너무나 쉽게 창턱에 올라섰다.
베스는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그를 얼빠진 얼굴로 마주 봤다.
“혼자 있다며.”
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