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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화 (19/206)

19화

아더와 데베르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텀 대령이 늦는군.”

아더가 말을 던졌지만, 데베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그의 표정엔 회의에 늦는 대령에 대한 역정도, 마치 작전이 실패하기를 기다린 양 곧바로 제 심복을 붙인 황제에 대한 불쾌함도 보이지 않았다.

지독스럽게 평온한 얼굴로 술잔을 느릿하게 돌릴 뿐이었다. 함께 마시겠냐는 뜻을 담아 잔을 까딱였지만,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일이 귀찮게 됐네.”

낮게 읊조리는 아더의 덜덜 떨리는 다리가, 그의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바텀이 등장한 건, 데베르의 두 번째 잔이 막 비워지려던 때였다. 대령은 넉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어이구! 늦은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그 능글맞은 첫인사에 아더는 나직이 욕을 읊조렸다.

“앉지.”

아더의 딱딱한 하대에, 바텀의 단추 같은 눈이 슬쩍 제 앞의 두 사람을 훑었다. 데베르는 도착한 이를 보지 못했다는 듯 술병을 기울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크흠, 바텀이 부러 한 헛기침 소리에도 데베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 탐욕만큼이나 축 처진 바텀의 볼이 씰룩였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아더는 차갑게 응시했다.

말이 연합군이지, 브리틴은 넥서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다. 산업부터 경제, 문화 그 어느 것 하나 넥서스에 비길 바가 안 됐지만, 넥서스의 산하 군이 아니라 연합군인 이유는 단 하나.

현 황제의 모친이자 선 황후인 베스티아의 모국이란 이유.

선 황후는 국가 간 친선이라는 대외적 이유를 대며 선황과 국혼했지만, 그 실상이 가망 없는 전쟁을 피하고자 한 자발적 항복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황후를 향한 브리틴의 충성이, 그대로 그녀의 외아들 호이든에게 향한 건 당연했다.

늘 제 위치에 전전긍긍하던 호이든에게 이보다 좋은 뒷배가 있을까. 데베르의 작전 실패를 빌미 삼아, 잽싸게 황제 친위대나 다름없는 브리틴 군을 보낸 것만 봐도 수는 뻔했다.

“클리프 공작께서도 안녕하십니까.”

바텀은 그 알량한 자존심에, 기어코 데베르를 공작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아더야 명색이 황족이니 감히 덤빌 생각은 못 했지만, 데베르 정도야. 비록 넥서스보단 작을지언정 자신도 브리틴에서는 왕족이자 공작인데.

무엇 하나 온전히 믿지 못하는 호이든에게 브리틴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감히, 황제의 친의를 힘입어 반역을 꾀하지 못하도록, 브리틴 군에게 대령 이상의 직위를 허락하지 않은 게 이를 증명했다.

바텀은 군 계급에서 데베르가 제 위라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깔짝거리며 기어올라보는 거였다.

“브리틴은 좋은 나라군.”

애매한 도발을 아는지 모르는지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데베르에, 바텀 뿐만이 아니라 아더의 얼굴에도 의문이 피어올랐다.

데베르는 여상한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잔을 들이켰다. 적막한 막사에서 목울대가 위스키를 넘기는 소리와 잔 속의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내리깔린 잿빛 눈동자는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 깔보는 눈빛이 향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넥서스에선 늦는 대령 따위 살려두지 않거든.”

바텀은 제가 삼킨 침 소리가 너무 크진 않았나 싶어 눈알을 굴렸다. 뻗댈 때는 언제고, 긴장을 숨기려 꼼지락거리는 살찐 손이 우습기만 했다.

아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웬일로 참는다 싶더라니. 결국은 ‘네가 넥서스였으면, 내 손에 죽었을 거다. 그나마 연합군이니 봐주는 거다’라고 말하는 거였다.

선을 넘나들며 데베르를 간 보던 바텀이 그 속뜻을 못 헤아릴 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은, 납작 엎드려야 할 때를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다는 것 정도.

“죄송합니다. 전선에 도착하고 군사들을 정비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연합군이 도착한 게 언제인데 고작 그따위 같잖은 핑계를 댈까. 데베르는 그제야 눈앞의 멍청한 꼭두각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그림자 속에 숨은 황제를 떠올렸다.

이미 전쟁의 끝물까지 온 마당에 귀찮은 개새끼 한 마리 달고 다니는 것쯤이야.

데베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한 걸 말해 봐.”

생각보다 유하게 넘어간 데베르에, 바텀은 숙인 고개를 들어 분위기를 슬쩍 살폈다. 운이 좋았다.

바텀은 손에 든 전차 도면을 협탁 위에 펼쳤다.

“브리틴에서 새로운 전차를 개발했습니다. 제국군이 선두로 국경선 좌측에서 진군하시면, 제가 브리틴 군을 이끌고 우측을 공습하겠습니다. 일종의 가짜 전투인 셈이죠. 그놈들은 데베르 대장님이 이끄시는 1군이 넥서스의 최고 전력이라 생각할 테니깐요. 허를 찌르는 거죠.”

아더의 허탈한 헛웃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지 않은가. 넥서스가, 아니, 데베르가 총알받이가 돼주면, 브리틴이 한 몫 챙기겠다는 것.

“황제께서 이번 작전은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대체 호이든은 누구의 황제인지. 넥서스 군을 볼모로 잡고, 전쟁 공은 브리틴이 취하게 하겠단 말인가.

데베르에게 전쟁 공을 넘길 바엔, 그 누구에게도 공을 돌리지 않겠다….

“호이든….”

아더는 침음을 삼키며, 그 이름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저열하게 구는 걸까.

“좋은 수군.”

“뭐?”

이제껏 가만히 작전 같지도 않은 작전의 계획을 듣던 데베르의 입에서 나온 ‘좋은 수’라는 말에, 아더가 발끈해 소리쳤다.

데베르의 표정은 진중했다. 그 얼굴로 말하는 ‘좋은 수’라는 말은 진실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더와 전력을 계산해 보도록 하지. 잠시 시간이 있는 동안 연합군을 완벽히 정비하도록.”

깐깐하게 토를 달 줄 알았던 데베르의 의외의 호평에 더 놀란 건 바텀이었다. 데베르 클리프는 그저 전쟁 광증이 났을 뿐, 공에는 관심 없다더니.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싱글벙글한 바텀이 나가자마자, 아더는 거칠게 협탁을 내리쳤다.

“뭔 소린지 이해를 못 했어?”

“이해했어.”

“저 전술대로 가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아더는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지금. 황제가. 너를-”

“황제가 나를 사지로 몬다, 이건가.”

화를 참는지 뚝뚝 끊기는 그의 말을 데베르가 완성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더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지독한 외로움이 그를 괴롭혔다. 황제는 자신과 데베르를 한패로 보고, 데베르는 황족을 한패로 보는 듯해서.

정작 나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은데.

“걱정 마.”

지나치게 여유로운 목소리로 데베르는 말했다.

“우린 살아서 갈 거니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핏 미소까지 짓는 데베르를 아더는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전화선은.”

“아, 아직 복구 중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군대장과 사령관의 등장에 병사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망할 코바흐 새끼들.”

적군을 향한 욕설임에도, 진땀을 빼는 건 눈앞의 가련한 통신병이었다.

일전, ‘여명’ 작전이 실패했을 때 뒤이어 온 후방군 덕에 참패는 막았지만, 진지의 전화선은 박살이 났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진지와 가까운 전방 병원 전화선은 살아남았단 거였다.

데베르의 발걸음이 병원 쪽으로 난 숲길로 향했다.

“누구한테 전화하게?”

병원에 들어와, 전화가 있는 병원장실까지 가는 동안도 데베르는 침묵을 지켰다.

“징글맞게도 대답 안 하네. 뭐, 애인한테라도 전화하는 거야?”

“그럴지도.”

데베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아더는 그 모습에 질색을 했다.

“너는 진짜 농담은 하지 마라. 진담보다 소름 끼치니깐.”

아더는 이젠 포기한 듯, 병원장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희미하게 수화기 너머로 쇠를 긁는듯한 연결음이 들려왔다.

“게일 대령, 이곳으로 와 줘야겠어.”

“데베르!”

게일이란 이름에 벌떡 일어난 아더가 곧장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무슨 생각이야.”

“지금 작전 회의 중 아니었나.”

“그러니깐! 아까 바텀 놈 작전이 좋다며.”

“아, 그거.”

데베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었는데.”

아더가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는데, 결국 한다는 게.

“황명 거부는 즉결 처형이야.”

데베르가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황제와 척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게 조금이나마 데베르를 친구로서 지키는 길이자, 황제의 눈이 된 제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법이다.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그걸 대답이라고….”

고저 없는 그 대답에 아더는 기운이 빠졌다. 그 사이, 데베르는 다시 수화기를 제 손에 쥐었다.

“게일, 말한 그대로야. 즉시 이곳으로 오도록.”

전화를 끊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둘의 입씨름은 멈추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더의 일방적 독백이었지만 말이다.

아더는 끊임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바텀을 설득하자, 이조차 안된다면 제가 황제에게 연락하겠다 등 나름의 궁리를 쏟아냈지만, 데베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기 공작 온다. 공작 온다.”

한창 일지를 정리하는 베스의 곁에서 딕시가 은밀히 중얼거렸다.

자칭 ‘미남 레이더’인 딕시는 근처에 아더나 데베르가 올 때면, 경보하듯 그들의 존재를 주변에 알리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들은 베스의 시선이 복도 너머를 반듯하게 걸어오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어젯밤, 가볍게 셔츠에 재킷만 걸치고 있던 데베르가 아닌, 제국의 두려움의 상징인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워진 황금빛 단추와 감색 제복엔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아더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전투가 있는 걸까.

그가 다가올수록 붕대에 감긴 손이 또다시 간질거렸다.

‘이러니까 나쁜 짓 하는 거 같지 않아?’

떠오른 기억에 베스는 얼른 작성하던 일지에 코를 박았다. 행여 사람들 앞에서 그가 이상한 말을 걸까 걱정이 스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데베르는 베스를 지나쳤다.

잔뜩 숙인 고개를 든 베스는 펜대로 일지 한구석을 쿡쿡 찍었다. 물론, 데베르 공작과 인사할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제멋대로 찾아오고, 맘대로 말 걸더니.

베스는 품에 일지와 차트를 챙겨 들었다. 괜한 민망함에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베스를 급히 붙잡은 건 아이네스였다.

“베스, 편지 왔어.”

편지?

툭, 하고 떨어진 종이 뭉치들이 어지럽게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놀랐어? 간호학교 때부터 네겐 편지가 오지 않아 마음이 늘 그랬는데. 다행이야.”

아이네스는 밝은 얼굴로 편지를 건넸다.

“네 부모님이 보내셨나 봐.”

아이네스가 내민 봉투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베스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 위에 적힌 ‘베스 제인스’란 이름이 선명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아이네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베스의 손에 편지칼을 쥐여줬다. 서툴게 편지를 뜯는 통에, 깔끔한 봉투 입구가 엉망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편지지라 보기 어려운 누런 종이 한 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제발. 제발 아니길.

「베스, 삼촌이다.」

끔찍한 예상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

베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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