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란히 선 둘 사이에서, 약통과 집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대화를 대신했다.
유난히 달빛 한 점 없는 밤. 작은 램프 불빛에 의지한 베스의 손그림자가 일렁일렁 남자에게 닿을 듯 말 듯 근처를 애태웠다.
아직 손에 감긴 붕대 탓에, 베스의 손에서 매끈한 약통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데베르는 말없이 약통을 옮겨 받았다.
‘약을 끊고 싶어.’
베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다신 이 남자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다짐이, 오늘 하루에만 몇 번째 무너진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널뛰는 마음에 가슴께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약통을 한 번, 허공을 한 번. 무언가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며 오르내리던 베스의 시선이 마침내 용기를 냈는지 제 옆의 사내에게로 천천히 올라갔다.
튀어나온 눈썹 뼈 밑에 자리한, 사나워 보이기도, 음울해 보이기도 한 눈매.
직설적인 그의 성격을 알려 주듯 곧게 뻗은 콧대.
오만하고 고집스러운 제국군의 대장답게 굳게 다물린 입술과 선이 뚜렷한 턱.
“안 해?”
자신을 보고 있단 걸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약통에서 눈길도 옮기지 않고 물었다. 건조한 물음에 귓바퀴가 빨개진 베스가 퍼뜩 시선을 떨구었다. 꼭 훔쳐보다 걸린 모양새였다.
램프 불빛이 붉어서 다행이었다. 불빛만큼이나 달아올랐을 얼굴이 얼추 숨겨질 테니까.
데베르는 부지런히 소분되는 하얀 약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턱도 없는 양,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헛짓거리까지 한다니. 저조차도 전쟁이 더럽게 지겨운 게 분명했다. 그의 속내도 모르고, 눈앞의 간호사는 할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만 드세요. 다섯 알 이상은 안 돼요.]
당부가 적힌 종이가 동그란 불빛 아래 내밀어졌다.
단정한 필체였다. 넥서스 여인들 사이에서 편지체로 유행하는 꾸며진 글씨체가 아닌 딱 베스다운 글씨체.
데베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들을 일도 없겠지만, 만약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꼭 이 글씨처럼 말할 것 같았다.
베스는 이 어색한 침묵을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불편했다. 이 낯선 남자가 자꾸만 익숙해져 가는 것이.
약제실, 작은 라이터 불빛에 비친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안도했단 사실이 자꾸만 가슴 한편에 체기처럼 걸렸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남자에게서, 마음을 놓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베스는 먼저 등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여자를 보는 데베르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총을 쥔 그의 앞에서 벌벌 떠는 베스 제인스를 처음 봤을 때처럼, 또다시 이상한 충동질이 올라왔다.
행동은 생각보다 항상 빨랐다.
어둠을 힘입은 데베르의 손이 주저 없이 선반으로 향했다. 곧 우박처럼 쏟아지는 약통과 트레이 소리에 여자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어두워서. 실수였어.”
진열대 한 층을 전부 바닥으로 쏟은 것치곤, 사과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는 베스를 보던 데베르는 기꺼이 수고를 감내하기로 했다. 보란 듯이 엉뚱한 곳에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넣는 꼴이 그러했다.
“여기 넣으면 되는 건가.”
이곳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이곳을 들락날락한 거로 치자면, 베스보다도 한 수 위인데 모를 리가.
하지만 앓는 이 빠진 듯이 내빼는 꼴이 심기를 거슬려서 그랬노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이 난리를 쳐도, 제게 다가오지 않는 게 골이 나서 그랬다고 할 수도 없고.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돌아오는 발걸음이, 체념한 듯한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베스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데베르는 제 발치에 주저앉아 약통을 줍는 베스의 작은 머리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 모든 게 작은 여자였다.
데베르의 손이 다시 한번 대범하게 움직였다. 이번엔 아까 전 건네받은 안정제 약통이었다. 가장 안쪽에 숨겨진 약통은 커다란 그의 손아귀 아래 너무도 쉽게 숨겨졌다.
데베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입가가 간질거렸다. 데베르는 스스로 인정했다. 지금 자신이 이 상황을 꽤 재밌어한다는 걸. 작은 강아지를 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내가 넣을게.”
기껏 주저앉아 약을 다 정리하고 나서야, 잘 정리된 트레이를 넘겨받는 그를 보는 베스의 입술이 부루퉁해졌다.
이런 표정을 보는 것도 재밌고.
휙 돌아서는 베스의 뒤를 따랐다. 그의 입꼬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항상 날카롭던 눈매도 잠시나마 유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한 램프 불빛에 비친 진열장을 본 순간, 그 모든 건 일순에 사라졌다.
한 번 본 건 웬만해서 잊는 법이 없는 남자다. 그날, 여자에게 휴대용 연고를 줬을 때를 분명히 기억했다. 한 칸이 비워졌던 트레이.
군의 모든 일을 제 손바닥 안에서 주물러야 직성이 풀리는 데베르가 약품 보급 일자를 모를 리 없었다. 다음 주나 돼야 도착하는 의료 보급품이 비워진 것도 아니고, 채워질 수는 없다.
결국은, 기어코 건네준 연고를 다시 집어넣어 놨단 거다. 저 고집스러운 여자는.
“왜 약 안 발라.”
두서없이 던져진 말에, 베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끔뻑이는 커다란 눈이 그가 하는 말에 감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해줬다.
대번에 코앞까지 온 남자가 램프를 내밀었다.
“들고 있어.”
데베르는 붕대가 감긴 베스의 손을 쥐었다. 깜짝 놀란 베스가 어깨를 틀었지만,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남자는 놔주지 않았다.
손을 빼내려고 애쓸수록, 램프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손바닥은 쓰려왔다.
“가만히 있어.”
무심한 목소리와 달리, 붕대를 푸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미련스럽긴.”
혼자 대충 드레싱 한 게 분명한 성긴 붕대는 금방 상처를 드러냈다. 아물어 가는 상처는 마지막 흔적을 남기는 중이었다.
발그레한 손바닥 한가운데 패인 한 줄을 데베르의 엄지손가락이 가만히 쓸었다.
“아파?”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능숙하게 한 손으로 연고 통을 열었다. 연고를 묻힌 손가락이 상처를 매만졌다. 끈적거리는 연고와 미지근한 체온이 만들어내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손끝이 간질거렸다.
“이러니까 나쁜 짓 하는 거 같지 않아?”
장난인지, 진심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 덤덤한 말투였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베스에겐 이해가 가지 않을 말이긴 매한가지였지만.
의중을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연고를 바르는 데만 몰두해 있었다.
냉랭한 창고 안의 공기가 어색하게 데워졌다. 간질거리던 손끝에서 이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그 떨림이 민망해 여린 손가락이 오므려지려는 순간,
“아니야?”
남자는 기어코 짓궂은 질문을 다시 뱉었다.
베스는 벙긋거리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놀리는 게 맞았다. 선명히 보이는 갈고리 진 남자의 입꼬리가 이를 증명했다.
치미는 짜증스러움에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베스의 손목을 쥔 손아귀에 약간의 힘을 더 실었다.
새 붕대가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남자는 언제 챙겼는지도 모를 붕대를 꺼내 들었다. 마땅한 가위는 찾지 못했는지, 붕대를 끊는 송곳니가 유달리 날카로웠다.
늑대 새끼.
누군가에게 들었던 그의 별명이다. 짙은 잿빛 머리와 눈동자에, 송곳니까지 반짝이니 제법 그 별명과 어울려 보였다.
“됐어.”
제 일을 끝낸 데베르는, 이번엔 먼저 창고를 나섰다.
“안 나와?”
멍하니 새 붕대가 동여매진 제 손을 보고 있던 베스는, 자신을 일깨우는 그의 재촉에 서둘러 걸음을 뗐다.
이상한 하루다. 부인이 말한 것처럼, 충격이 너무 커서 모든 게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바보 같고 미련한 제 모습마저 핑계 댈 수 있을 정도로.
데베르는 얌전히 제게로 걸어오는 여자를 느긋이 지켜봤다. 그의 옷을 걸치고, 그가 감겨준 붕대를 한 베스 제인스를.
여자는 문을 잠그기 위해 목걸이를 풀었다.
아, 그래. 목걸이까지 한.
베스는 늘 하던 행동들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평소엔 잘만 했는데, 데베르가 제 뒤에 있다는 생각에 목걸이를 채우는 손이 자꾸만 헛도는 것도 그랬다.
끝까지 한심한 꼴이야.
베스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든 어긋난 아귀를 맞춰보려 손을 꼼지락거렸다. 살짝 숙어진 흰 목덜미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흡.”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 뒤로, 제 것이 아닌 숨결이 느껴졌다. 베스는 조급하게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온몸의 감각이 목덜미에 집중되는 생경한 느낌을 겪어야만 했다.
작은 손 위에 살짝 겹친 남자의 손에서 목걸이는 우스울 정도로 쉽게 잠겼다.
“가자.”
고요 속에서 터벅거리는 둘의 발걸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처음으로 나란히 맞춰진 걸음이 거칠한 흙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막사와 간호 숙소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당연하단 듯이 자신을 따라오는 데베르에, 베스의 눈초리가 의뭉스러워졌다.
베스는 막사로 가는 길목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손짓을 따라갔다 다시 돌아온 남자의 서늘한 눈빛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네가 숙소에 가야 옷을 받아 가지.”
이 남자가 날 에스코트한다고 생각하다니.
이 추운 날, 겉옷까지 뺏어 입고 있으면서 한 대범한 착각에 베스의 귓바퀴가 또다시 새빨개졌다. 벌써 몇 번째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또 뭐에 골이 난 건지 갑자기 저만치 종종걸음을 치는 베스에 데베르는 마른 한숨을 뱉었다. 보폭을 넓혀 따라가자, 여자의 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숙소를 향해 갔다.
비위 맞추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데베르는 불만스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내리꽂았다.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저리 도망갈 일인가.
애써 맞춰졌던 발걸음이 다시 벌어졌다.
벌써 도착해 고장 난 숙소 문고리를 쥔 베스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군화가 보이자마자 냉큼 재킷을 건네고 문을 닫았다. 또 ‘나쁜 짓’이니 뭐니 짓궂은 말을 할까 봐 지레 안절부절못해 한 행동이었지만, 그 속을 모르는 데베르는 코앞에서 닫힌 문을 잠시간 멍하니 바라봤다.
내빼듯 달아나는 모습이 기가 찼지만, 그 감정이 불쾌함은 아니었다. 건네받은 옷에 밴 향 때문이려나.
가까이 갈 때마다 풍겨왔던 은은한 향이, 여자가 사라진 뒤에도 그에게 남아 있었다.
베스를 처음 본 날. 정확히는 정체가 불분명한 첩자인 줄 알고, 그 가녀린 목을 틀어쥔 날.
데베르는 그 얼굴보다 그 향을 먼저 맡았었다.
새카맣던 창문 중 하나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데베르는 캄캄한 어둠 속, 그 유일한 빛을 올려다봤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가 비쳤다.
아마, 베스겠지.
이내 불은 꺼졌다.
숙소 외벽에 기대선 채 시가를 꺼냈다. 매캐한 시가 냄새와 베스의 달큼한 향이 어지럽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베스는 몰랐다.
제 침대 머리맡 창문 밑에 그가 아직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