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배냇저고리라.”
“어찌나 손이 야무지신지, 나도 배우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제법 좋은 걸 보면 고부갈등 걱정은 없는 모양이다.
무혁도 볼일이 있다며 떠나 있다고 하니, 안 팀장은 민재가 계속 눈에 밟혔다.
“차라리 민재도 여기에 와 있으면 좋을 텐데.”
“안 그래도 진 서방이 출장 간 사이에는 우리 집에 와 있을 거래요. 오늘은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어서, 모레쯤 온다나 봐요.”
“그래요?”
분명 홍옥자 여사가 손을 썼을 것이다.
무혁이 잠시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 민재의 정체를 밝힐 모양이었다.
“그 녀석도 참.”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저 늦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아침 잘 먹었습니다.”
업어 키운 거나 다름없는 시동생을 배웅하고 형수는 민재의 할머니를 살폈다.
“아직도 하고 계셔요?”
“응. 민재가 오기 전에 어서 보여주고 싶어서.”
조만간 손녀가 온다는 사실에 들뜬 건지 할머니는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렇게 좋으실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할머니는 민재를 친손녀보다 더 애지중지 아꼈다.
남자밖에 없는 집이라 이런 살뜰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다정한 사람들이 들어와 이 집에도 오랜만에 훈풍이 불었다.
부디 이 행복이 오래가면 좋을 텐데.
형수는 소녀처럼 즐거워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후회하지 않아?”
퍼스트 클래스에 나란히 앉아 제레미는 무혁을 힐끔 쳐다봤다.
이륙하던 시점부터 그는 계속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지금은, 이란 거지.”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저들 뜻대로 움직이게 두는 게 낫다.
바쁜 문제를 뒤로하고 무혁은 그저 눈을 감았다.
“여행은 즐거웠나?”
공항에 내리자마자 FBI 국장 로버트 켈스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특검 이야기가 오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개입이 있었던 덕분이다.
“지난번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레미를 거두고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기술은 좋아도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제레미를 두고, 무혁은 검찰 시절의 노하우를 마음껏 선보였다.
어지간한 범죄 사례는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
절대 기소할 수 없도록 법망의 허점만 교묘하게 파고드는 집요함에 결국 FBI가 신변 보호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대규모 마약 건은 국제 공조가 필요한데 정작 국무총리 쪽은 어떻게든 일의 규모가 커지지 않게 틀어막기 바빴다.
저쪽은 자기 아들도 걸려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조원식 하나만 꼬리를 자르고 쉬쉬해버릴 게 분명하다.
“아마 이번 일이 여기서 하는 마지막 임무가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
“아내가 임신했습니다.”
돌아가자마자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쓸모 많은 진무혁이 도망치는 건 달갑지 않다.
“뭘 제안해도 안 넘어오더니,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가겠단 건가?”
“그 정도 마약 사건을 넘겨드렸으면 실적에는 문제가 없을 텐데요.”
“허, 참. 기가 막히는군.”
이번 공조수사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그의 임기 역시 무사히 연장됐다.
능숙하게 거래를 걸어오는 진무혁은 자기 뜻을 한 번도 꺾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말린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터.
“그래서 복수는, 잘 되어가고 있나?”
“글쎄요. 그건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게 되겠죠.”
독이 독을 집어삼켰으니 조만간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무혁은 그 혼란 속에서 한발 물러난 채 잠시 관망하는 길을 택했다.
만약 홍 여사가 민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에게도 명분이 생긴다.
“국장님께서는 어머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하실 겁니까?”
“어려운 질문이군.”
어머니를 먼저 구한다면 아내를 잃은 상처가 남을 테고, 아내를 구한다면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터.
“보통은 그렇다고 하더군요.”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탓에, 무혁은 그 심정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민재 또한 그럴 줄 알았는데, 뒤늦게 나타난 ‘부모’의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성가셨다.
“만약 제가 나서서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평생 저를 원망하게 되겠죠.”
“그래서?”
“이럴 때는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일 테니까요.”
삼십 년을 타인으로 살아간 부모와 자식이 과연 무사히 어울려 지낼 수 있을까.
지금껏 굳건히 혼자 버텨온 민재와 달리 홍 여사는 아직 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욕심은 분명 화를 부르게 될 테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잔인한 남자로군. 내 딸의 남자친구였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아내는 앞으로도 단 한 사람뿐일 테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은퇴하더라도 중요한 건엔 협조하죠. 다만 이번에는 제레미도 함께 데려갈 겁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다루기 까다로운 진무혁이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면 저쪽에선 제레미를 마음대로 부려먹을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그에게 있어 제레미는 제 손으로 직접 구한 목숨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민재도 마음에 들어 하니 데려가도 문제는 없을 터.
“어차피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무혁은 충분히 경고했지만 홍 여사의 욕심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잔인한 제 본성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 적어도 민재에게만은 언제까지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신세 질 일 따위 만들지 않는 진무혁이 굳이 부탁이라는 표현을 썼다.
상대가 거절할 수 없도록 함정을 파는 것만 봐도, 역시 제 딸의 남자친구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한 남자다.
모든 것을 관망하겠다는 무혁의 바람을 들어주며 로버트 켈스는 앞으로의 변수를 빠르게 계산해나갔다.
***
“조만간 갈게요.”
할머니에게 연락을 넣고 민재는 휑한 집 안을 둘러봤다.
소란스럽던 두 사람이 미국으로 떠나고 잠시나마 혼자가 되자 이 집도 유난히 더 넓어 보였다.
“쓸쓸하네.”
임신한 탓인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할머니 댁에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다.
홍 여사의 남편인 성 회장의 병문안이라고 했다.
- 잘하면 의식이 돌아올 것 같은데. 혼자 보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
민재 역시도 할머니의 첫 수술 때 수술실 밖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누구든 혼자 남는 건 괴로운 법이니까.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물은 뭐였지.”
제레미가 주고 간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민재는 고민에 빠졌다.
차가 세워져 있는 지하주차장에 내려간 것까지는 좋은데.
면허도 없는 몸인지라 민재가 트렁크를 여는 법을 알 길이 없다.
“이거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혼자 낑낑대며 이것저것 만져봐도 역부족이다.
그러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버려서 하는 수 없이 다음 기회에 열어보기로 했다.
“민재 씨, 그동안 잘 지냈어?”
오늘도 직접 마중 나온 홍 사장은 올 블랙의 정장을 입었다.
일단 명목이 병문안이라 그런지 평소의 요란한 행색이 아니라 조금 놀랐다.
“음료수나 꽃을 사가는 게 나을까요?”
“의식도 제대로 못 차리는 양반인걸. 얼굴을 비춰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혜성의 전성기를 이끌어온 재계의 신화인데 홍 사장은 인정사정없이 무자비한 혹평을 쏟아냈다.
“아무리 잘나면 뭐 해. 그딴 놈을 후계자로 삼았으니 그 모양이지.”
성 회장이 쓰러지고 혜성 본가마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뒷수습은 결국 모두 아내인 홍 여사의 몫이 됐다.
홍옥자 사장은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불쌍한 우리 언니. 숨만 겨우 붙어서 오늘내일할 거였으면, 차라리 진작 놔주면 좀 좋아?”
“놔주다뇨?”
“그래 보여도 남편으로서는 썩 나쁘진 않았거든.”
옆에서 지켜보는 옥자는 애가 탔지만, 성 회장은 끝내 아내를 놓아주지 않았다.
“차라리 나쁜 놈이면 버리기라도 쉽지, 어설프게 좋은 사람은 이래서 문제야.”
바람이라도 피우면, 몹쓸 짓이라도 하면 차라리 내치기라도 쉬웠을 텐데.
인간 대 인간으로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니만은 끔찍하게 아꼈다.
그러니 언니 역시도 남편을 포기하지 못했다.
아이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난 시간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그런 언니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옥자 역시도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민재 씨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어?”
“좋은 분들이었어요.”
다행히 석민재는 제법 좋은 부모를 만났던 모양이었다.
특히나 엄마 쪽은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다 민재를 만났다고 했다.
“봉사활동이라.”
“네, 제가 버려진 보육원에서 꽤 오래 하셨어요.”
“거기가 어디였는데?”
양주 인근이었다는 설명에 홍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민재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 애가 버려진 곳도 거기였었지, 참.”
“그 애라뇨?”
“누구긴, 무혁이 말이야. 친척들이 고아원에 버렸다는 얘기 못 들었어?”
“버렸다고요?”
조원식이 데려다 기른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보육원에 버려졌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친척들이 아무도 안 키우겠다고 해서 버린 걸 조원식이 데려다 키운 거지.”
입양이란 말을 듣고도 유독 태연했던 건 그 이유였던 걸까.
보육원 쪽과 대신 이야기를 나눌 때도 묘하게 능숙하긴 했었다.
왜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걸까. 일부러 숨긴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쓰였다.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러게, 왜 굳이 얘기를 안 한 걸까?”
불신의 씨앗이 싹을 틔운 채 홍 사장의 차가 성 회장이 입원한 다원대학교 병원에 도착했다.
VIP 병동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민재는 줄곧 무혁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그래서 말을 안 했던 걸까.’
처음 본 날부터 좋아하게 됐다고 했지만, 무혁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지금까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진무혁은 비밀이 너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VIP 병실 앞에 도착했다.
“민재 씨, 왔어?”
익숙한 듯 간호 중인 홍 여사는 침대에 누운 남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역시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갈 곳 잃은 손을 꼭 누르며 민재는 어색하게나마 병상에 누운 성 회장을 봤다.
투병 생활이 길어져 많이 야위긴 했지만, 눈을 감은 모습만 봐도 엄청난 미남이다.
“우리 남편, 잘 생겼지?”
애써 미소짓는 모습만 봐도 사랑이 묻어났다. 힘겹게 웃는 홍 여사가 너무 애처로워서 민재는 그녀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아줬다.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은데, 이 이가 문제지.”
의식을 찾지 못하는 데다 조혈모세포 이식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홍 여사는 민재에게 애원하듯 부탁했다.
“혹시 모르니까, 민재 씨도 검사 한 번만 받아주면 안 될까.”
“제가요?”
“응. 사례는 꼭 할게. 부탁이야.”
만약 민재가 아이를 낳으면, 버려지는 탯줄로 이식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검사라도 한 번 받아달라는 부탁을 차마 모질게 거절할 수 없었다.
‘이걸 어쩌지.’
검사 전 동의서에는 친자 확인 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낳아준 부모님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어색해졌다.
차라리 옆에 무혁이 있었다면 좀 더 담담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마음이 급해 보이는 홍 여사를 보니 민재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저, 이거 돌려드릴게요.”
지난번, 과일을 싸줬던 수 보자기를 건네자 홍 여사는 민재의 가방에 다시 넣어버렸다.
“괜찮아, 이건 민재 씨가 가지고 있어.”
“하지만 이건…….”
친정어머니가 준 소중한 물건일 텐데도, 홍 여사는 대답 대신 민재를 꼭 안고서 한참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나는 민재 씨가 진짜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
“여사님.”
“엄마, 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될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 보이는데, 민재는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그 말 한마디가 대체 뭐라고.
삼십 년을 찾아 헤맨 딸이 그리도 가슴에 사무쳤는지 홍 여사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아린아.”
혹시라도 또 잃어버릴까, 옷깃을 꼭 잡고 홍 여사는 민재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언니. 그만.”
오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옥자가 나서 제 언니를 겨우 부축했다.
감정이 폭발해버린 탓이었을까.
겨우 이성을 찾은 홍 여사는 눈물을 닦고 사과부터 했다.
“많이 놀랐죠? 미안해,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
“……아니에요.”
링거가 꽂힌 메마른 손에 주름이 졌다.
병상에 누운 성 회장을 보며 민재 역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적당히 핑계를 대고서 민재는 홀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런 거였구나.”
어릴 땐 길러준 부모님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제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사람을 모두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확신이 섰다.
‘무혁 씨.’
유독 불안해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나니 이제야 그의 기분을 좀 알 것 같았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 민재 앞에 성큼 발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