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87화 (87/103)

87화. 줬다 뺏는 게 어딨어!

성준범이 체포되고 HS엔터는 일약 혼란에 빠졌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소영하는 자신의 이름을 팔아 주주들과 임원들을 소집했다.

갑작스러운 회의 요청에 불안감이 일었다.

‘만약 이 상황에 소영하마저 나가버리면…….’

프랜차이즈 스타마저 나가버리게 된다면 그야말로 관짝에 못질을 하는 형국이다.

절망적인 예상과 달리 소영하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회사를 살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배우들도 빠지고 있고 내부 사정은 말이 아니다.

해외 매각설부터 시작해 흉흉한 소문만이 가득하건만 소영하는 기꺼이 대표 자리에 출사표를 던졌다.

“제가 막을 겁니다.”

흔들리는 주주들 앞에서 오히려 결심을 굳혔다.

그간 못 미더운 행적 때문에 불신의 눈초리가 쏟아지지만, 제 잘못을 만회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민재야.’

민재를 놓치고 난 후에야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옆에 있어 줄 것 같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처한 처지를 깨달았다.

회사의 간판을 넘어 이제는 얼굴이 되는 거니까.

앞으로 다시는 예전처럼 제멋대로 구는 것 따위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니 저를 믿고 힘을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대주주인 본사가 매각 결정을 내린다면 HS엔터는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

“잠시 실례합니다.”

매니저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미리 요청한 대로 때마침 본사에서 사람이 도착했으니 이걸로 제 어깨에 힘이 실리리라.

반색하던 소영하의 앞에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A&Z 진무혁입니다.”

가슴에 꽂힌 변호사 배지, 이번 인수 합병 건에서도 제대로 활약한 덕분에 이 안에는 벌써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제법 됐다.

성준범에게 다 넘어간 경영권을 되찾아 온 그는 사실상 홍 씨 자매의 복심腹心이라 불리고 있다.

“소영하 씨에게 일임하겠다고 혜성 본사에서 보내온 위임장입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서류를 건네주는 게 왜 하필이면 이 남자일까.

잔뜩 긴장한 소영하와 달리 무혁은 무슨 소리를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성준범 이사의 공백을 잘 부탁합니다.”

뒤에 혜성의 안주인이 있는 거라면야 기꺼이 힘이 실릴 터.

반색하는 사람들과 달리 소영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 남자를 보낸 건지 따져 묻고 싶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이의 있으신 분 계신가요?”

소영하가 표면에 나서 수습에 들어간다면 어떻게든 화제를 일으킬 수 있다.

관심이 모이는 자리에 투자도 몰릴 테지만 만약 소영하마저 무너진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젠 정말로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래도 성준범이 만들어준 소영하라는 이름이 지금은 회사를 살릴 유일한 희망이 됐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론에 만족한 주주와 임원들을 돌려보내고 회의실에는 소영하와 무혁, 두 사람만 남았다.

남은 자료들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무혁을 보며 소영하는 애써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도와준 겁니까?”

민재를 사이에 둔 연적이기에 더더욱 불편할 텐데, 무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소영하를 힐끗 봤다.

“민재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뭐?”

“내 아이입니다.”

더는 너 따위와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고.

쐐기를 박는 무혁의 한마디에 소영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재가 원래 결혼하려던 상대는 자신이었으니까, 급조된 결혼이 깨지기만 한다면 금방 제게도 기회가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라니.

“민재는…….”

“그쪽이 걱정해주지 않아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심한 말 속에도 제법 가시가 돋아 있다.

주먹을 꽉 쥐고서 소영하는 하고 싶은 말들을 애써 삼켜나갔다.

지금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민재에게 매달리다 자칫 회사에 타격이 가면 곤란하다.

하물며 임신이라니.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소영하는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달래기 바빴다.

“민재가 혜성 가의 딸이라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임신 소식만으로도 충격이 크건만 혜성 가의 딸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홍 여사와 민재가 많이 닮긴 했어도, 민재에게 가족은 할머니뿐이라고 했었는데.

“그 애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그쪽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나 보군요.”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영하를 두고 무혁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처절히 짓밟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조만간 세상에 알려질 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로 얼굴 마주하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만약 소영하가 민재와 또다시 얽히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구설에 오를 때는 HS엔터마저 무너지게 될 테니까.

“미련 한 방울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정리하세요.”

단호하게 쐐기를 박고 무혁은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지금은 어떻게 잘 넘어갔다곤 해도 만약 홍 여사가 민재와의 일을 알게 된다면, 그땐 절대 무사히 넘어가지 못할 거였다.

책임만이 무겁게 남은 상황에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혹시라도 민재를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조차 더없는 미련이 되고 말았다.

“민재야.”

이 모든 걸 지켜보는 것이 어쩌면 제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징벌일지도 모른다.

때늦은 후회를 삼키며 소영하는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어떻게든 붙잡아 보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

“흑…….”

속에서 치미는 설움이 울컥 맺혔다.

알아서 살라고, 대신 너무 잘 살지는 말라고.

돌아서던 민재를 떠올리자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닫힌 문 너머 오열하는 소영하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무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집에 가야지.”

임신한 아내를 외롭게 두는 건 새신랑의 미덕이 아니니까.

기특한 석민재.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무혁은 핸들에 손을 얹고 유유히 액셀을 밟았다.

***

두 사람이 화해하자 제일 행복해진 건 역시 제레미였다.

“민재, 이거 못 먹겠어.”

“젓가락질 연습 더 하라고 했잖아.”

무혁이 생선 가시를 발라주면 민재는 그걸 다시 제레미의 숟가락 위에 얹어줬다.

알아서 하라며 노려보는 눈빛이 제법 매섭긴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제레미는 모두 무시하고서 뻔뻔한 얼굴로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헤헤, 난 민재가 제일 좋아.”

“얼굴 많이 봐 둬. 넌 곧 돌아가야 하니까.”

“뭐? 왜!!”

“비자, 곧 끝나잖아.”

희희낙락한 제레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하고 무혁은 아예 민재 앞에 생선 조각을 내밀었다.

“아, 해.”

“그냥 여기 줘, 내가 먹을게.”

“어서.”

서러워 보이는 제레미를 애써 못 본 척하고 민재는 생선 조각을 받아먹었다.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다. 그래도 같이 있을 땐 심심하지 않았었는데 아쉬움이 앞섰다.

“허전해질 것 같아. 어쩐지.”

“그리고, 제레미랑 같이 나도 잠깐 미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미국?”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으니까. 며칠이라도 직접 얼굴을 비춰야 하거든.”

그가 돌아온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막상 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나 걸려?”

“일주일 정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은 할머니 댁에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 사진도 찍고, 손을 잡고 마트에 들려 맛있는 것도 잔뜩 사 왔다.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는 너무 좋은데 또 잠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괜히 서러워졌다.

“팔짱, 껴도 돼?”

“그런 걸 왜 물어봐.”

무혁의 팔을 꼭 안고서 민재는 괜히 뺨을 비볐다.

꾸러미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증거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비교조차 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지만 홍 여사가 자꾸 눈에 밟혔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서, 함부로 물어봤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민재. 이건 내 선물이야.”

식사를 마치고 제레미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차 키?”

“어차피 그 차는 여기서 타려고 받은 거니까. 난 이제 못 타니 이건 민재가 가져.”

“난 면허도 없는데?”

설령 면허를 따더라도 초심자에게 그 새빨간 스포츠카는 심히 부담스럽다.

질색하는 민재의 손에 제레미는 꿋꿋이 차 키를 쥐여줬다.

“그 차를 나라고 생각해줘. 세차도 자주 해주고 예뻐해 줘야 해.”

“그러니까 난 아직 면허가 없…….”

“내가 타지 뭐. 승차감 자체는 괜찮은 차거든.”

리본까지 묶어놓은 차 키를 무혁이 집어 들었다.

“그건 싫어,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부부 재산은 공동 소유인걸. 운전은 내가 하는 게 더 안전해.”

“그럼 그냥 놔둬! 내가 계속 탈 거니까!”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을 뚝뚝 흘리며 제레미는 무릎을 꿇은 채 민재의 허리를 꽉 안았다.

“가기 싫어.”

“제레미.”

“그냥 민재 옆에 있을래. 거긴 너무 외롭단 말이야.”

돌려보내기 싫은 건 민재도 마찬가지다.

가끔 미운 짓을 골라서 하긴 하지만, 제레미가 온 뒤로 어쩐지 동생이 생긴 것 같아 싫진 않았다.

“다시 데려올 수 있는 거야?”

“체류 기간이 사흘 정도 늘어나긴 하겠지만 노력해볼 순 있겠지.”

“정말?”

제레미가 옆에 있으면 이것저것 부려먹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토록 가기 싫어하는 앨 굳이 떼놓는 건 싫다.

“제레미. 좋은 삼촌이 되어줄 수 있어?”

“그럼. 물론이지. 내가 아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둘이 살기에 이 집은 너무 넓으니까. 민재는 이제 습관처럼 제 배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시끌벅적해진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우리 여기서 계속 사는 거 맞지?”

민재의 물음에 무혁은 바로 제레미 쪽을 쳐다봤다.

아직 확정된 건 없으니 입을 다물라고 그리도 일렀건만, 저 가벼운 입은 기어코 사고를 친 모양이다.

“민재는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응. 난 여기가 좋아.”

“그럼 계속 살아야지.”

그 한마디에 모든 게 결정됐다.

그래도 당분간만 집을 비우기로 하고, 무혁은 전화를 들었다.

“접니다.”

홍 여사의 바람대로 잠시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했으니까.

더는 시간이 없다.

“남편의 병세가 많이 좋아졌어.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인 걸 보면 조만간 의식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해.”

“그렇습니까.”

“남편도 민재를 만나면 기뻐하겠지. 우리에겐 가족만의 시간이 필요해.”

홍 여사는 삼십 년 만에 되찾은 딸을 독점하고 싶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민재에게도 제대로 선택권을 줬으면 해.”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뒤로 홍 여사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민재의 마음이 완전히 기울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조만간 성준범이 보석으로 나올 겁니다. 그땐 정말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준비는 모두 해 뒀으니까.”

성준범이 밖에 나오게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해코지를 하고도 남는다.

물론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무혁 자신이었지만.

탐욕을 버리지 못한 성준범은 어떻게든 제 발로 무덤을 팔 터.

이제는 화려한 조명 아래로 공주님을 돌려보낼 시간이다.

홍 여사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무혁은 잠시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다.

“차 트렁크에 선물을 넣어놨어. 내가 가고 나서 열어봐야 해.”

“무슨 선물이길래?”

“그건 보면 알아. 난 정말로 민재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주는 거야.”

벌써 눈물의 이별 준비를 시작하는 제레미를 보며 무혁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애의 솔직함을 절반이라도 닮았다면, 제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할 수 있었을 텐데.

민재가 모든 걸 알고 나서도 제 곁에 있어 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그렇게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어서 돌아와야 해.”

마냥 해맑은 민재를 보니 속이 쓰렸다.

“잘 다녀와.”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일말의 불안이 남아 있다.

만약 민재가 정말로 부모 쪽을 택하게 된다면 홀로 남은 그는 어떻게 될까.

“내 생각, 계속해.”

“오늘따라 왜 그래?”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이 또한 민재를 위한 거니까.

웃고 있는 민재를 마주하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마저 굳어버렸다.

무혁은 말없이 민재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

안 대표의 저택, 어제 느지막이 퇴근한 안 팀장은 입이 댓발로 튀어나온 채 형수에게 아침을 얻어먹었다.

“민재가 벌써 임신을 했다니, 참 기쁜 소식이네. 안 그래요, 도련님?”

“하나도 안 좋거든요.”

진무혁은 민재의 임신 사실을 알기 무섭게 퇴사 각을 세웠고, 특검까지 거절하는 바람에 남은 일은 모조리 제게 쏠리게 됐다.

홍옥자 사장 쪽에서도 협조적이라지만 상대가 현직 국무총리다 보니 수사는 쉽지 않아 보였다.

“무혁이 그놈, 완전 약았다니까요.”

“남자는 좀 약아도 돼요. 그래야 자기 사람을 잘 챙겨주죠.”

“형수님!!”

거의 엄마뻘인 형수는 마냥 민재와 무혁의 편을 들기 바빴다.

하지만 입안의 혀처럼 유능하던 민재가 사라지고 나니 안 팀장은 하루하루가 고달픈 외기러기 신세가 됐다.

“그러고 보니, 여사님은 잘 계셔요?”

요즘 들어 사건이 워낙 많은 탓에 안 대표도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바쁘세요. 아기 배냇저고리를 직접 만드실 거래요.”

“배냇저고리요?”

“응. 민재를 처음 데려왔을 때, 친부모가 입힌 배냇저고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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