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땐 우리 둘 다 어렸으니까.
- 석민재가 진무혁하고 헤어졌다고?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식에 다들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막 사법고시에 합격한 진무혁은 언제라도 프러포즈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건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석민재 쪽에서 매몰차게 차버릴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 무혁이 놈이 다 알게 되어도 괜찮은가 보군.
- 제발 말하지 마세요.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부모가 누군지도 모를 근본 없는 년이.
조원식의 협박이 원인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진무혁과 헤어진 건 모두 민재 본인의 선택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분명 열심히 살아왔는데. 정말로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좀 숨통이 트이려는 순간 소영하의 말 한마디가 또다시 민재의 일상을 박살 내버렸다.
“다 울었어?”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런 걸까.
정신이 반쯤 나가 있다가 무혁의 목소리에 번득 정신이 들었다.
어느샌가 그의 품에 안겨 있어서 새하얀 셔츠에 눈물 자국이 묻어났다.
이 이상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물러나려는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무혁은 담담히 말했다.
“나로는 의지가 안 되는 건가.”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민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진무혁이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영하가 지긋지긋한 인간이라 치가 떨린 것뿐이다.
애초에 결혼이 급했던 민재에게 무혁은 최고의 남편감이 되어줬다.
좋든 싫든 지금은 부부 사이니까.
손목으로 눈물을 훔치고 민재는 힘겹게 미소지었다.
“하긴, 이미 벌어진 걸 어쩌겠어요. 나는 괜…….”
“내 앞에서까지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어.”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무혁이 선수를 쳤다.
갈 곳을 잃은 말에서 쓴맛이 났다.
입안 가득 남은 감정의 파편들이 질척거려서 속이 울렁거린다.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
“미안해요.”
결혼한 후에도 소영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처럼 민재의 일상을 어지럽혔다.
이런 것도 어떤 의미론 엄연한 계약 위반일 텐데, 무혁은 엉망이 된 민재의 머리를 더 엉망으로 헝클어트리며 피식 웃었다.
“왜 미안해. 네가 시킨 거 아니라며.”
명쾌한 대답에 이번에는 정말 진심으로 웃음이 터졌다.
배배 꼬아 들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성가신 기색 하나 없이 무너져내린 민재를 가만히 안아줬다.
이렇게 비참할 때는 타인의 온기가 필요하다.
무혁은 그저 힘없이 축 처진 민재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줬다.
“이러려고 한 결혼이잖아. 너 혼자 다 짊어질 필요는 없어.”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무혁의 말에 어쩐지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울컥하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민재는 제 눈앞에 선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만약 이 사람이 여기 없었다면 혼자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마 불가능했을 테지.
기대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도 진무혁에게 점점 의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참 야속하기만 했다.
“정말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내가 괜찮게 할 거야.”
단호한 그의 목소리가 울림을 더했다.
민재 자신조차도 제 문제에 대해 저리 확신할 수 없는데, 진무혁이 저렇게 단언하면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 말을 듣고 나니 민재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어차피 웃으며 헤어질 수 없게 된 이상,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울면서 징징거린다고 해결될 문제였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니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나.”
“언제?”
“축제 날 밤.”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 남자는 타이밍 좋게 제 앞에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다.
처음에는 참 별로였는데. 이 남자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민재 자신도 몰랐다.
따스한 무혁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서 민재는 옛 추억을 떠올렸다.
***
- 자, 한잔해야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막 대학에 입학했던 때였다.
제 앞에 놓인 막걸릿잔을 바라보며 민재는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 어허, 어디 하늘 같은 선배가 주는 잔을 안 받으려고 그래.
민재보다 한참 학번이 높은 선배는 서른이 넘었다고 했다.
나이로 찍어 누르는, 요즘 말로 꼰대질을 하는 상대의 겁박에 민재는 쉽사리 거절의 뜻을 표할 수 없었다.
- 하지만 전…….
막걸리 위에 사이다가 얹히고 사람들의 시선이 민재에게 가득 몰렸다.
말로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도저히 마시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에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한 잔이면 괜찮을 것이다.
눈을 딱 감고 단숨에 들이키자 눈앞의 선배는 손뼉을 쳤다.
- 아이고, 잘 마시네. 이렇게 잘 마실 거면 한 잔 더 줘야지.”
- 네?
한 번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잔이 채워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작정하고 달려드는 선배는 얼굴이 빨개진 민재를 보며 무척 신나 보였다.
- 너 귀엽다. 내 여자친구 할래?
아니,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젓자 선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너 같은 새낀 싫다잖아.
- 그렇게 안 봤는데. 애가 싸가지가 없네.
대뜸 차가운 조롱에 말문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거절한 죄로 민재의 앞에는 또다시 술잔이 놓였다.
이 핑계든 저 핑계든 결국 술을 먹이겠다는 의도는 변함이 없다.
- 마셔.
반쯤 명령조임에도 상대가 제일 고학번이니 누구 하나 민재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이 없다.
차라리 이 자리에 오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저 사람은 작정하고 민재를 불러다 이 자리에 앉힌 게 분명했다.
- 제가 속이 안 좋아서요.
또다시 가득 찬 잔을 보니 속에서 구토가 밀려올 것 같다.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한데, 강압적인 분위기에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잔에 손을 뻗었다.
- 적당히 하시죠.
민재보다 먼저, 커다란 손이 술잔을 낚아챘다.
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는 손에 든 술을 맞은 편에 앉은 선배의 바지춤에 그대로 부어버렸다.
삽시간에 벌어진 난리에 테이블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 이…….
- 작년에 징계위원회까지 부쳐지신 분께서,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이러시면 곤란하죠.
- 진무혁!
오만한 얼굴을 한 남자 선배의 이름은 분명 민재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진무혁. 한국 최고라 손꼽히는 서원대 법학과의 전설이기도 한 그의 별명은 분명.
‘괴물……이라고 했었지.’
동기들이 하는 말만 듣고 괴팍하게 생긴 줄 알았는데, 괴물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반듯하게 생겼다.
날렵한 턱선과 오만한 눈매가 자리에 앉은 상대를 내려다보니 위압감을 더했다.
‘성질 더러워 보인다.’
사실 민재가 무혁에게 받은 첫인상은 최악에 가까웠다.
- 이 새끼가!!
- 형! 그만 해요.
진무혁이 나서준 후에야 주변 사람들이 일어나 상황을 정리했다.
고학번 선배는 술에 젖은 옷을 닦으며 죽일 듯한 눈으로 민재를 노려봤다.
그래도 어차피 평소에는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아예 술자리를 떠나버리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민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든 싫든 덕분에 살았다. 깍듯이 인사부터 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 넌 입이 없어?
- 네?
상대는 고학번 선배니까. 함부로 거절했다가는 보복이 두려운 게 당연하다.
뭐라고 대꾸라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속에서 안 받은 술이 울컥 올라왔다.
- 웁…….
- 이리 와.
무혁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민재를 끌고 가 여자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삼십 초만 늦었어도 정말 못 볼꼴을 보일 뻔했는데.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나오니 진무혁은 어느새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 민재야. 괜찮아?
뒤늦게서야 동기들이 다가와 민재의 안부를 물었다.
- 민재야, 너 무혁 선배랑 아는 사이야?
- 아니. 오늘 처음 봤어.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얼굴은 처음 봤다.
전혀 사정을 모르는 민재를 두고서 동기들은 잠시 주저하다 속사정을 들려줬다.
- 원래 저 선배 이런 자리는 절대 안 오는 사람인데, 그래도 아까 무혁 선배가 안 도와줬으면 너 진짜 쓰러질 때까지 먹였을 거라더라.
잘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다는 이유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선배들 사이에 미운털이 박혔단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명문대란 이름이 우스워지는 꼴이라 허탈함이 앞섰다.
오래 앉아 있기에는 불편해서 짐을 챙기는데, 어느새 사라진 줄 알았던 진무혁이 민재 앞을 막았다.
- 이거 마셔.
편의점에서 갓 사 온 건지 손에 든 비닐봉지 안에는 술 깨는 약이 가득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는 모양이라 민재는 얌전히 받아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 감사합니다.
아무리 미운 말을 지껄였어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민재가 진무혁에게 품은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
일학년 수업은 고학번과 겹치지 않아서 민재는 한동안 그때 일을 아예 잊고 살았다.
- 어?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도서관 입구에서 그때 그 고학번 선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
민재는 아예 처음부터 못 본 척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 너, 거기 서!
대체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러는 건지.
만만한 동네북으로 보인 건지 고함까지 치며 따라오니 방법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 멀리 진무혁이 보였다.
- 선배님!
술 깨는 약까지 챙겨줄 정도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당장은 마음이 급해서, 민재는 냅다 뛰어 곧장 무혁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 후배의 돌발 행동에 무혁의 주변에 선 선배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 너, 거기 안 서!
뒤에서 들리는 호통과 함께 민재는 무혁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속삭였다.
- 제발 살려주세요.
뒤따라 오는 개차반의 얼굴을 확인한 무혁은 대뜸 민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갑자기 넓은 어깨에 꼭 감싸 안기자 절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야, 진무혁. 둘이 설마 사귀는 거야?
아니라고 돌이키기에는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뒤쫓아오던 진상 선배조차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멈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갔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경꾼들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순순히 민재를 놓아줬다.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민재의 학교생활을 훨씬 편하게 해줬다.
- 네가 그 진무혁 여자친구라며?
얼떨결에 학과 전체에 소문이 난 것도 모자라 교수님들조차 석민재가 누구냐고 물었다.
여우를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뛰어든 격이라, 난감한 민재를 두고 무혁은 태연히 물었다.
- 남자친구 있어?
- 아뇨.
- 잘됐네. 적어도 나랑 사귀면 아까처럼 누가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야.
참 멋없는 고백이지만 둘 다 어렸으니까.
콧잔등을 쓸며 엉뚱한 곳을 보는 게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행동이라는 걸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정말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동기들에게 들은 이야기만 해도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굳이 먼저 나서서 사귀자고 해줬단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나도 연애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 역시 민재처럼 처음이라는 말에, 지금 생각하면 엉겁결에 코가 꿰인 셈이다.
“그땐 왜 그랬어요?”
“비밀이야.”
몇 번이고 물어봤음에도 무혁은 지금까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진무혁은 대체 뭐 때문에 제게 고백했던 걸까.
상황에 떠밀려 시작한 연애였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한 대학 시절은 정말로 행복했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무혁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소영하와 만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그땐 우리 둘 다 어렸으니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돌아서는 민재를 잡지 못한 건 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물이 가득 고인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 민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이번엔 날 믿어.”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달라붙었다.
이러면 안 된다. 한 번 깨졌던 관계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물며 두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계약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분명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는데, 거절하기에는 진무혁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다.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모든 게 편해질까.’
그렇게 천천히 무혁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쾅, 쾅, 쾅.
입술이 막 닿기 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막무가내로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기자가 벌써 온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겁먹은 민재를 두고 무혁이 인터폰을 살폈다.
화면 너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들어가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정말로 손목이 부러질 때까지 두드리고도 남을 위인이다.
겁먹은 민재를 방에 들여보내고서 무혁은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오빠.”
“조장미.”
이 정도면 정말 지독한 악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스크 인형처럼 창백한 얼굴과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조원식의 딸, 장미는 무혁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