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폭로.
“오늘은 고생 많았어.”
무혁의 나지막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재밌었어요.”
특히 꼬리를 빼고 물러나는 조원식을 본 것이 그 무엇보다 통쾌했다.
무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서 주름진 드레스를 빳빳하게 펴줬다.
“드레스 잘 어울려.”
이제야 이 남자 입에서 칭찬이 나왔다.
조금은 우쭐해도 될 것 같아서 민재는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예쁘죠? 나도 거울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러게.”
그냥 예쁘다고 한마디만 덧대주면 참 좋을 텐데.
하여튼 여자 마음이라고는 지지리도 모르는 남자다.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며 방심하던 찰나 무혁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선배?”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자 곧 허리 부근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뭐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트 벨트를 매 주려는 건지도 모르고 설레발을 쳤다.
민망함에 애써 시선을 피하며 민재는 죄 없는 제 폰만 꽉 거머쥐었다.
저 남자가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지.’
그래도 오늘 하루는 무사히 끝날 모양이니까.
민재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깊은 밤이 내리고 일과를 마친 차들의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거리를 잠식했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나려나 보다.
곁에서 운전 중인 무혁의 옆 모습을 지그시 보며 민재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
“안 나가!!”
생방송 삼십 분 전, 대기실에서 파업을 선고한 소영하를 앞에 두고 매니저는 진심으로 퇴사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애를 두고 성 이사는 기어코 기름을 부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의 결혼 소식을 숨기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부터 이미 이런 사태는 예견했건만.
남이 싸놓은 똥을 치우고 있자니 절로 속이 뒤집어졌다.
“영하야. 지금 스태프들 다 너 때문에 기다리잖아.”
“내가 그 수법에 또 속을 것 같아?”
돈 주는 사람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온갖 핑계를 대며 달래보지만 한 번 써먹은 방법이 또 먹히진 않는다.
제주도에 가는 것부터 촬영을 미룰 수 없다고 핑계를 댄 데다 하필이면 오늘은 생방송이라 미룰 수도 없다.
“대체 어쩔 겁니까. 이거 생방송이라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떻게든 설득하겠습니다.”
피디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작가들은 시간이 없으니 대본만이라도 읽어 달라며 애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너 진짜 이럴 거야?”
“형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
죄 없는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막내 작가는 급기야 울음까지 터트렸다.
소영하를 다시 쓰면 성을 갈아버린다는 피디의 자조적인 외침에도 매니저는 일단 기다려 보라며 시간을 벌기 바빴다.
그리고 생방송 십 분 전.
“대본 줘.”
“여, 여기요!”
버티고 버티던 소영하가 마침내 대본을 펼쳐 들었다.
정확히 두 번 정독을 하며 화장을 고치니 정확히 삼 분 남았다.
“스탠바이!”
사람들의 애간장을 완전히 녹여버린 미친놈임에도 누구 하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다.
여전히 짜증 섞인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소영하는 톱스타의 아우라를 풍기며 카메라 앞에 섰다.
“3번 카메라, 들어갑니다.”
생방 직전 카운트가 시작되고 눈 앞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피가 마른 사회자는 애써 태연한 척 마이크를 다잡았다.
“오늘 생방송 스타토크 시간에는 정말 특별한 손님을 모셨는데요, 배우 소영하 씨를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배우 소영하입니다.”
촬영 전의 난리가 무색할 정도로 달콤한 미소에 사회자도 순간 말을 잃었다.
외울 시간이 거의 없었을 텐데도 소영하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대본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저거 인간 맞아?”
매니저에게는 스태프들의 저런 반응도 이젠 익숙했다.
처음에는 얼굴만 가지고 뜬 배우였다지만 요즘의 소영하는 한참 물이 올랐다.
밉다 밉다 해도 소영하의 업계 톱 자리에 올려놓은 저 연기력은 철저히 후천적으로 길러진 재능이다.
“괴물 같은 새끼.”
삼십 대 쓸 만한 남자 배우가 씨가 마른 지금, 이제는 연기력까지 충만하다.
매사에 건성이던 소영하가 진지하게 제 일에 집중하게 된 것도 분명 석민재를 만난 이후 즈음이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을까.’
생전 반항과는 인연이 없이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살아가던 소영하가 이제는 성준범 이사에게 말대답까지 하는 지경까지 왔다.
석민재가 소영하에게 준 영향이 얼마나 큰지 옆에서 지켜봐 온 매니저는 뼈저리게 느꼈다.
현장에서 감독이 대본을 패대기쳤을 때도 신경 하나 쓰지 않았는데.
소영하가 처음으로 연기 연습을 알아봐 달라던 날은 지금도 기억이 났다.
- 내 연기가 그렇게 별로야?
답지 않게 심각한 물음에 코웃음을 쳤었다.
애초에 연기력보다는 얼굴로 승부를 보는 편이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소영하는 단세포 주제에 그 일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 민재가 그랬어. 일에 감정을 함부로 끌어들이면 안 되는 거라고.
촬영장에서 스태프와 싸운 이후에 사과까지 한 것도 석민재의 말 덕분이었다.
소영하가 만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바람 한 번 피우지 않고 푹 빠진 건 분명 그 여자 하나뿐이었다.
너무 깊이 빠져든 것 같아 걱정했는데 석민재는 SNS도 안 하고 입도 무거워서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 타령만 안 했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회사 측에선 소영하를 다루기 쉬워진 것도 사실이라 연애만 한다면야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원하는 건 다 들어줬을 테지만 결혼은 예외다.
차라리 상품 가치가 없었다면 상황이 나았을지도 몰라도 요즘의 소영하는 그야말로 물이 올랐으니까.
쓸 만한 남자 배우의 씨가 마른 요즘 같은 때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게 생겼으니 회사는 결국 석민재를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걸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카메라 뒤에서 화면을 모니터링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화면발을 정말 귀신같이 잘 받았다.
저런 천연덕스러운 연기만 봐도, 아마 화면 너머 시청자들은 방송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눈치조차 채지 못할 것이다.
[ OK ]
실시간 반응을 확인하던 스태프가 스케치북을 높이 들었다.
오랜만에 소영하가 나온 만큼 화제성이 좋아서라도 이번에 난리 친 일은 그대로 묻힐 공산이 높았다.
어차피 이 바닥은 인기가 전부니까,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한들 결과만 좋으면 허물 따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중간에서 갈려 나가는 매니저만 고달플 뿐.
그래도 이대로 끝나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마무리될 테니 매니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상으로…….”
“잠깐,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줄곧 대본을 철저히 지켜나가던 소영하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시작했다.
저게 뭐냐고 피디가 사인을 보내는 순간 매니저와 소영하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나 얄미운 눈빛이 심상치 않다.
저건 분명 무언가 흉계를 꾸밀 때 나오는 바로 그 눈빛이다.
‘내가 얌전히 물러날 줄 알았지?’
모두가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고분고분 무릎을 꿇어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소영하는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카메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한마디만 하고 싶어서요.”
“네?”
당황한 사회자를 내버려 두고 카메라들은 본능적으로 소영하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비록 절 버리고 떠났지만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이 방송을 보신다면 부디 행복하세요.”
찰나의 순간 감정이 복받쳐 소영하의 눈가가 붉어졌다.
벅차오른 눈물이 떨어지고 네 대가 넘는 카메라가 여러 각도에서 그런 소영하의 모습을 전국 방송으로 송출했다.
밤 열 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 생방송으로 전국민이 보고 있는 방송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다.
이미 나간 말은 돌이킬 수도 없고, 당황한 사회자가 눈치를 보며 질문했다.
“떠났다는 게, 설마 헤어지셨다는 건가요?”
“며칠 전에 다른 분과 결혼했습니다.”
일을 이렇게 벌여놨으니 내일은 온 나라가 뒤집어질 터.
“그럼 오늘 자리해주신 배우 소영하 씨께 감사 인사드리며 저희는 육십 초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경악하는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소영하는 홀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
꾸벅, 고개를 떨구다 잠에서 깨어난 민재는 갑자기 소름이 돋아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차는 고가도로에 올랐다.
“추워?”
“막 깨서 그런가 봐요.”
어깨를 움츠린 채 민재는 반짝이는 한강의 야경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울거리는 조명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아마 곧 집에 도착할 테니까 물어볼 타이밍은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선배 혹시 로또라도 당첨된 거예요?”
그게 아니고서야 도무지 지금의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부모님의 유산도 빤한 데다, 검사가 아무리 잘나가 봐야 공무원 월급은 로펌 변호사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사치를 누리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데.
무혁은 피식 웃으며 민재를 힐끔 바라봤다.
“그게 궁금했어?”
“뭔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서. 모르겠어요.”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던 학창시절과 달리, 이제는 범접하기도 힘든 거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도 그렇고.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보면 볼수록 지금의 무혁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투자를 좀 했어. 그게 대박을 쳐서 돈을 상당히 많이 벌었지.”
“얼마나요?”
“아마 원화로…….”
달러가 기준이라면서 무혁은 제 통장에 남은 잔고에 대해 읊어줬다.
손목에 찬 시계와 주상복합 아파트가 귀엽게 보일 정도의 금액을 듣고 민재는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짜예요?”
“난 어차피 피붙이 하나 없으니까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 돈은 다 네 것이 되겠지.”
“말도 안 돼.”
만약 민재에게 그런 잭팟이 터졌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고 세계 일주라도 떠났을 텐데.
내일 아침 식사 메뉴를 말하듯 태연하기만 한 그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지만, 한 편으로 홍 사장 같은 거물과 어울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허언은 아닐 것 같았다.
“미국에서 좋은 분을 만났거든. 그분께 많은 걸 배웠지.”
“좋은 분이요?”
“그 얘기는 차차 해줄게.”
차가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 무혁은 말을 끊고 운전에 집중했다.
편안해 보이는 그와 달리 민재는 어쩐지 후회가 밀려왔다.
‘이걸 어쩌면 좋아.’
만약 정말 무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재산을 노린 제 소행이라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결혼 생활이 끝날 때까지 이젠 저 인간의 안위까지 염려해야 한다.
“설마 이것도 선배가 산 건 아니죠?”
“가방 챙겨.”
드레스와 보석을 가리켜 보지만 대놓고 시선을 회피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홍 사장이 유독 무혁의 이야기를 계속 물어보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제 촉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모두 저 인간이 꾸민 흉계가 분명하다.
“선배!”
“벌써 네 번이나 선배라고 불렀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자꾸 교묘하게 빠져나가려는 저 인간의 시커먼 속을 누가 알까.
종이가방을 대신 들고 뻔뻔하게 올라가는 무혁을 잡고서 잔소리를 하려는 데 갑자기 가방에서 벨이 울렸다.
“잠시만요.”
클러치에 넣어둔 폰을 꺼내 보니 오 대리의 번호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민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민재 씨, 어떡해. 쟤 진짜 미쳤나 봐.”
“뭐?”
“아, 미쳤어. 지금 당장 그 방송 좀 틀어봐!”
“지금 밖이야.”
대체 뭐가 나왔기에 이렇게 호들갑인 건지.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횡설수설하는 오 대리의 말이 끊어져서 들렸다.
“소…… 미쳤……. 아 진짜, 제정신…….”
“뭐?”
“소영하 저 인간 진짜 미쳤나봐!!”
엘리베이터에 쩌렁쩌렁할 정도로 커다란 외침에 오 대리의 목소리가 진무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당장 검색부터 해봐!”
일단 전화를 끊고 민재는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이미 실시간 검색어 최상단에 위치한 소영하의 이름 아래로 수십 개의 코멘트가 쏟아져 내렸다.
“이게 뭐야.”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걸 무혁이 겨우 부축해줬다.
빠져나오지도 못할 개미지옥처럼 어딘가에서 소영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민재는 발을 꽉 조이는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민재야.”
“내가 시킨 거 아니에요.”
또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분명 즐거운 날이었다.
그토록 미웠던 조 대표에게 물도 먹였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도 받았다.
그런데 소영하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분명 끝이라고,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다고 단언했건만.
그는 이토록 지독한 방법으로 끝내 민재를 진흙탕 속에 처박아 버렸다.
“나 어떡해.”
무혁의 소매를 잡고 민재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장 내일 아침 회사 앞으로 기자들이 찾아오면, 할머니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상태가 좋아졌다 해도 할머니의 여린 심장은 그 정도 규모의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결혼도 했고, 이제야 겨우 그 남자에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건 민재 혼자만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