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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21화 (21/103)

21화. 그땐 나한테 뭘 해줄 건데?

“그렇고 말고, 소영하가 와도 우리 진무혁 변호사님이 훨씬 나을걸?”

일부러 콕 집어 제 이름을 언급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소영하는 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 성 이사님 특별 지시야. 무조건 잡아둬야 해.

코디와 매니저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혼자만 바보가 될 뻔했다.

매니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자신도 혼자 비행기 예약 정도는 할 줄 알았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소영하 아니야?

촬영장을 몰래 달아나 택시를 타고 요금 대신 사인을 하고 내렸다.

그러고는 김포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를 잡아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석민재가 결혼을 한다니.’

집 나간 멘탈을 부여잡느라 반쯤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는데 그 일 이후로도 민재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분명 끝이라고 말을 듣긴 했지만, 소영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작 그 잠깐 사이에 남자가 생겼다고?’

석민재는 애초에 감히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울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는 여자가 아니다.

힘들게 성 이사가 보낸 직원들을 따돌리고 겨우 플라티나 호텔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하객들이 나오는 모양새로 보아 예식은 진작 끝나버린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누구든 잡고 사정을 물어봐야 하는데. 마침 아까 제 이름을 언급한 곱슬머리 여자가 부리나케 계단을 따라 뛰어 올랐다.

“내 정신 좀 봐. 지갑이, 어?”

“저기요.”

일부러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여자의 반응은 언제나와 같이 평범했다.

“소영하?”

경악한 표정과 삿대질은 기본에, 반말을 듣는 건 예사다.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이후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참으로 익숙하다.

“네, 소영하 맞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라며 훈수를 늘어놓던 일반인도 막상 실물을 만나면 악수와 셀카부터 청한다.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수첩에 사인부터 해달라고 내밀었다.

“오영지에게, 그렇게 써 주세요.”

원래 이 일이 이런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평소 가지고 다니는 매직으로 수첩에 사인을 해주며 소영하는 민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나한테 그 정도로 관심을 안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었지.’

굳이 호감을 보이지 않더라도 조금은 신기해할 법도 한데, 민재는 관심 없는 태도로 제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관심을 끌어보려고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였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석민재는 그러지 않았다. 그랬던 주제에, 갑자기 자신을 버리고 결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예식장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묻어가듯 이야기를 꺼낸 건데.

“결혼식은 진작 끝났는데, 민재 씨 보러 온 거예요?”

아직 용건은 말도 꺼내지 않았건만, 오 뭐라는 일반인은 어째서 민재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까.

“그럴 리가요.”

정말로 놀라긴 했지만 소영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부정했다.

“아니긴 무슨. 미련이 남으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질척거리는 건 좀 그렇네요.”

천하의 소영하에게 질척거린다니.

일부러 아픈 곳만 콕콕 찔러대니 황당한 기색을 감출 길이 없다.

“사인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적당히 하세요. 우리 민재 씨는 그쪽한테 아까운 사람이거든요?”

“영하 씨,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느새 소속사 직원들이 탈출한 소영하를 찾으러 플라티나 호텔까지 달려왔다.

“성 이사님이 찾으십니다. 어서 돌아가셔야죠.”

“잠깐만!”

그런 구질구질한 이유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건만, 여자는 벌써 저 멀리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보지만 이미 늦었다.

제대로 해명할 틈도 없이 직원들이 소영하를 그대로 잡아 차에 태웠다.

***

“알았어.”

달아난 소영하를 잡아 왔다는 보고에 성준범 이사는 못마땅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입단속을 시켰음에도 소영하는 이렇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목을 매고 있다.

“그럼 이제 시작하시죠, 조 대표님.”

이 고생을 시키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소영하의 새 영화 성적이 제법 잘 나왔다.

덕분에 실적이 생겼으니 이제 다음 주주총회도 순조로울 듯 보였다.

“회장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쓰러지셨으니 사모님께서도 힘드시겠습니다.”

“그 여자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옆에 붙은 불여우가 문제인 거지.”

남편인 회장이 쓰러지고, 시름에 빠진 사모님은 줄곧 병간호를 하며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곧 열릴 임시 주주총회까지 계열사만 모두 장악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전 회장의 사람들부터 쳐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불여우. 사모님의 여동생인 홍 사장은 제 언니를 대신해 어떻게든 이번 일에 관여하려 손을 뻗었다.

소영하의 기사를 물었던 스타커넥트도 수정일보 산하 언론사였기에, 이야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상당히 공을 들였다.

“정말로 성가시단 말이지.”

애초에 석민재. 그 여자만 없었더라면 모든 게 수월했을 텐데.

저쪽은 얌전히 결혼을 해줬다지만, 정작 소영하는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이렇게 미련을 떨고 있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A&Z에선 뭐라고 합니까?”

“그대로 소송 진행하자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도 아닌 여자 하나 잘라버리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A&Z는 타격까지 감수해가며 그 여자를 보호하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결혼 상대가 조 대표님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면목이 없습니다.”

조 대표가 후계자로 애지중지 키웠던 변호사가 사랑에 눈이 멀어 경쟁사인 A&Z에 가버렸다는 이야기는 성준범도 들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또 그 여자일 줄이야.

“피차간에 곤란하게 됐군요.”

“방종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 그 못난 녀석도 곧 정신을 차릴 겁니다.”

제 딸을 두고 그 여자의 손을 잡은 이상 무혁도 조만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아직 어린 호랑이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제게 반항할 모양이지만 그래 봐야 결국은 제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속에 품은 칼을 숨긴 채 조 대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

결혼식이 끝났다.

완전히 지친 민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저녁은 어떻게 할래?”

“대충 먹어요.”

메이크업 지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함이 밀려왔다.

정장만 겨우 벗고 네발로 기듯 잠옷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이대로 잠이 들까 말까 하던 찰나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긴 한데.’

저 소리를 들으니 씻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모든 귀찮은 일은 내일로 미루고 이대로 잠이 들려던 순간.

“안 일어나면 또 키스한다?”

무혁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자 그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한 얼굴로 엉망진창인 민재를 내려다 봤다.

“씻고 나와. 저녁은 먹고 자야지.”

예나 지금이나 저 시어머니 기질은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그가 방을 나가고 민재는 분노를 삭이며 일단 화장부터 지워냈다.

긴 속눈썹을 떼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밋밋해진 거울 속 얼굴이 참 낯설다.

그리고 새로 받은 결혼반지까지.

“어색하네.”

누가 봐도 유부녀라는 표시가 되어줄 테지만. 씻다가 괜히 잃어버리면 곤란하니 단단히 챙겨뒀다.

대단치는 않지만 사소한 변화들 덕분에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짜 결혼한 거구나.”

예식을 치르고 나서 무언가가 드라마틱하게 변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샤워까지 마치고 방을 나오니 주방에서는 벌써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진짜 남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치마를 두른 진무혁은 꽤 괜찮은 하우스메이트였다.

“잘 먹었습니다.”

밥 한 공기를 깔끔하게 비워내고서 민재는 곧장 할머니의 병원에 전화부터 걸었다.

벌써 병원은 소등이 끝난 시간이라 저녁 담당 간호사가 대신 할머니의 안부를 알려줬다.

“결혼식 축하드려요. 안 그래도 할머님이 오늘 무척 기분이 좋으시더라고요.”

“다행이에요.”

“며칠 상황 보고, 외박도 가능하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정말요?”

투병 생활을 이어나가며 할머니는 몇 년째 집에 걸음 한 번 하지 못했었다.

반가운 소식에 민재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님은 어떠시대?”

“정말 좋아진 모양이에요.”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병세가 나았으니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이네. 와인 한잔할래?”

오늘은 어쩐지 축배를 들고 싶어서 민재는 무혁이 건넨 잔을 냉큼 받아들었다.

아무리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그의 입술을 볼 때마다 결혼식 도중 유난히 진했던 키스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진짜 미쳤나 봐.’

아까 키스 얘기를 했던 탓인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친부모님 찾는 건 어떻게 됐어?”

다행히 무혁의 질문이 들뜬 마음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차분하게 이성을 되찾고서 민재는 죄 없는 와인을 들이키며 쓴웃음만 지었다.

“모르죠.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할머니가 고이 건네준 주머니는 가방 한구석에 적당히 구겨 넣었다.

친부모가 뒤늦게 먼저 찾아와주기라도 했다면, 만나볼까 고민이라도 해봤을 테지만.

지금에 와서야 자신을 버린 부모를 먼저 찾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나저나 아까 그 사람은 대체 뭐예요?”

“말했잖아. 클라이언트라고.”

혜성의 회장님은 성준범을 후계자로 낙점했다지만, 사모님 쪽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경영권을 누가 쥘지 주도권 싸움이긴 한데, 당장은 사모님 쪽이 불리하긴 해.”

“그래서요?”

“그래서 날 찾아온 거지.”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답답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무혁은 좀처럼 여유를 잃는 법이 없다.

하지만 상대는 성준범이다.

HS엔터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소영하와 만나는 동안 지겹도록 겪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 사람 손에 들어가면 혜성도 십 년이 못 가 고꾸라지겠지.”

골치 아픈 일 얘기가 이어지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말이 없으니 술이 술술 넘어갔다.

“한 잔 더 줘?”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는 배시시 웃었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아른거리는 불빛 아래 진무혁이 오늘따라 참 잘생겨 보였다.

제 손으로 저버려야만 했던 첫사랑은 십 년이 지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졸려?”

“안 졸려요.”

자는 걸 억지로 깨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일 얘기를 할 때는 한없이 진지한 주제에 막상 둘이 되면 적막이 흐른다.

‘일을 위해서라면 결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생각을 하니 울컥 화가 치솟았다.

거실 창 너머로 지나는 차들과 거대한 빌딩 숲을 등지고 민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혁을 내려다 봤다.

술이 좀 들어가니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던 속내가 나오기 시작했다.

“선배는 일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죠?”

“뭐, 그렇지.”

굳이 부정하지 않는 뻔뻔한 저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말로 감정 하나 없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한 심술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일 때문에 키스한 거예요?”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었던 거라면 그런 키스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야속한 마음을 담아 민재는 무혁의 코끝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든 반응을 끌어내려 도발해보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민재의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취한 것 같은데.”

“그럼 내기해요. 질문에 대답 못 하면 마시는 걸로.”

민재는 손수 무혁의 잔에 와인을 따라 들이밀었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진무혁답게 그는 기꺼이 술잔을 받아들고 옆자리를 내줬다.

“아까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유학 가서 만났어. 혜성 사모님 치료 때문에 같이 미국에 왔었거든.”

강력한 첫인상도 그렇고 두 사람의 관계가 한없이 수상했다.

왜 굳이 내로라하는 유명한 변호사들을 내버려 두고 굳이 진무혁에게 이 일을 맡긴 건가 싶지만, 질문순서는 다시 무혁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헤어지고 나서 내 생각했어?”

또르르 흐르는 보랏빛 액체를 앞에 두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민재는 결국 대답 대신 술잔을 깔끔히 비워냈다.

“그러는 선배는요?”

곤란한 질문은 그대로 되돌려 줘야 한다.

하지만 무혁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너무나 쉽게 입을 열었다.

“했지. 아주 많이.”

“거짓말.”

민재는 차마 꺼내기도 힘든 말이 저 입에서는 어쩜 저렇게 쉽게 나오는 걸까.

며칠 전, 누군가와 전화를 나누며 즐겁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자 순간 속에서 불이 일었다.

“다른 여자 앞에서 그렇게 웃어놓고서.”

취기가 오른 탓인지 꾹꾹 눌러놓은 본심이 잘도 나왔다.

소영하와 만나는 자리에는 반드시 자신을 대동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저 몰래 제 얘기를 하고 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다 들었어요. 내 귀로 똑똑히 다 들었다고요.”

확실하다고 부르짖는 민재의 말에, 무혁은 제 통화 내역을 살폈다.

딱히 흠 잡힌 짓을 하고 다닌 적은 없건만 수많은 통화 중 업무적인 것들을 빼고 나니 황용식 하나가 남았다.

‘설마 그걸 들은 건가?’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씩씩대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슬그머니 함정을 팠다.

“아니면 어떡할래?”

“응?”

“만약 이게 네 오해면, 그땐 나한테 뭘 해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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