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20화 (20/103)

20화.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건.

“무혁 군. 결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지검장님.”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무혁은 신부 대기실을 힐끔 바라봤다.

“잠시도 눈을 못 떼네, 그렇게 좋냐?”

“시끄러워.”

함부로 입을 놀리는 용식을 단속하고 무혁은 식장을 한 번 눈으로 둘러봤다.

남자 형제가 없는 민재의 축의금은 안 팀장이 대신 받고 있고 회사 동료며 법대 동기들이 제법 와준 덕분에 다행히 하객은 북적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그날 이후로 민재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몇 번이나 다시 삼키는 걸 보면 대강 짐작이 갔다.

‘이 결혼을 후회하는 거겠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무혁은 신부대기실을 바라봤다.

어쩌면 민재는 여전히 그 남자가 자신을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지?”

입구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창 너머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축의금을 받고 있던 안 팀장이 달려나와 상황을 확인했다.

“설마 그 자식이야?”

이 정도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힌다. 무슨 걱정인지 알고 있지만 무혁은 딱 잘라 부정했다.

“아닐 겁니다.”

소영하는 오늘 분명 제주도에서 촬영이 있다고 했다.

미리 결혼식 날짜를 HS엔터쪽에 흘려 놓았으니 굳이 나서지 않아도 성준범 이사 쪽에서 어떻게든 처리할 터.

“뭐야 저게?”

입구를 열어젖힌 검은 양복들 사이로 한 무리가 들어왔다.

화려한 깃털 장식으로 무장한 기악대의 행렬이 이어지자 안 팀장은 아연실색해 이마를 짚었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진짜!”

그들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반짝이 의상의 노인을 보며 안 팀장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간 행적이 묘연했던 안 전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번 기회에 혜성의 상속전을 취재하려는 기자진이 몰렸다.

“이건 대체…….”

“누가 무혁이 놈을 보러 왔대? 아이고, 민재야. 마침 잘 만났구나!”

어디까지나 신부 쪽 하객이라 못을 박으며 안 대표는 반갑다는 듯 민재를 덥석 껴안았다.

“안 떨어져요? 이 영감님이 진짜 노망이 나셨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소란을 일으킨 죄로 안 대표는 결국 기악대와 함께 퇴장당했다.

한바탕 요란한 주변이 수습될 동안 무혁은 불안해 보이는 민재에게 다가섰다.

“괜찮아?”

“아, 응. 괜찮아요.”

새하얗게 질린 채 또 손을 떨고 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그녀의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영하가 온 줄 알았어?”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사랑의 도피를 계획한 건 아닌 모양이라서, 내심 안도하게 되는 제 모습이 참 낯설었다.

“들어가 있어.”

긴장한 민재를 대기실로 돌려보내고, 무혁은 예식장의 입구를 노려봤다.

‘만약 소영하가 정말 민재를 데리러 온 거라면.’

좋아하는 남자 품에 안긴 채 잘 가라며 등을 떠밀어 줄 수 있을 만큼 호인은 못 된다.

그래도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온 걸 보면 민재는 여전히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인상 펴.”

버진 로드에 선 후에도 얼어붙은 공기는 좀처럼 녹을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쉽게 제 것이 될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예식이 시작됐다.

모든 순서가 지나고 드디어 마지막 순서가 남았다.

“신부 석민재 양은 신랑 진무혁 군에게 평생 진실한 사랑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대답을 망설이던 민재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맹세합니다.”

반지를 교환하기 위해 무혁은 베일을 드리운 제 신부를 마주 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기다려왔던 풍경은 이리도 완벽하고 아름답다.

결혼반지를 끼우고 무혁이 신부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할 거예요?’

‘해야지.’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수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재는 마지못한 듯 두 눈을 감아줬다.

“그러면 이제…… 어?”

촉촉한 연분홍빛 입술 위로 무혁의 입술이 포개졌다.

아주 잠깐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에는 분명 아무런 감정도 없어야 할 텐데.

오랜만에 맛보는 입술은 설탕처럼 달콤해서 좀처럼 놓고 싶지 않았다.

***

“우리 손녀사위는 참으로 믿음직스럽구나.”

정신없는 예식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진무혁의 만행에 분노할 겨를도 없이, 할머니는 감격에 젖은 채 눈물까지 보였다.

“여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놈만은 절대 아니옵니다.”

“아 제발, 좀 가시라니까요!”

끝까지 훼방만 놓는 제 아버지를 안 팀장이 겨우 막았다.

결혼식을 핑계로 오랜만에 만난 업계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민재는 곁에 선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끝이구나.’

소영하가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쯤 되면 사실상 걸어다니는 인간 재해 급이라 잠시 얼굴을 비추기만 해도 그 여파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

“신혼여행도 못 간다니, 일이 뭐가 그리 바쁘길래?”

“월요일엔 또 출근해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아이도 가지려고 하면 회사는 그만…….”

“일. 계속하고 싶어요.”

분명 무슨 얘기를 할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주름진 손을 꼭 잡고서 민재는 예상되는 뒷얘기를 원천 차단해버렸다.

“이래 보여도 할머니 손녀가 꽤 쓸만한 사람이에요. 저기 우리 팀장님, 나 없으면 안 된다고 아주 신신당부했었다니까요?”

“……그랬어?”

할머니도 안심시킬 겸 민재는 회사에서의 활약상을 나름 여럿 읊어냈다.

특히나 폭주하는 안 팀장을 전담할 수 있는 건 사실상 민재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또 웬 노망난 늙은이인가 했더니, 저이가 네 회사 높은 사람이란 말이지?”

“네. 팀장님도 저렇게 도와주시고.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진 서방 때문에 하는 말이지.”

할머니의 걱정은 또다시 무혁에게로 돌아왔다.

오늘 예식장에 온 수많은 손님은 사실상 진무혁 하나만 보고 참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려 붙들어 매요. 할머니 손녀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내 말 한마디면 아주 꼼짝 못 하는걸요.”

“병원 가는 차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무혁이 들어오자마자 민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닫았다.

설마 들었나 싶지만, 무혁의 태도는 어째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못 들었겠지?’

싱글벙글 웃는 할머니를 배웅하며 민재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지 무혁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 내심 안도했다.

“진 서방, 앞으로 잘 부탁하네.”

마음 같아서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집에서 지내게 하고 싶긴 하지만 병원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외출도 겨우 받은 처지라서, 민재는 아쉬움을 담아 저 멀리 떠나가는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줄곧 손을 흔들었다.

마음이 후련하다고 해야 할지, 아주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누가 잡혀 산다고?”

이 문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진무혁은 역시 다 듣고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냥 말이 그렇다고요.”

“민재야, 결혼 축하해!”

뭐라고 쏘아붙일 새도 없이 손님들의 배웅을 하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버티면서 민재는 무혁과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나저나, 아깐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잠시 숨을 돌릴 겸 굽 높은 웨딩 슈즈를 아예 벗어던지고서 대기실 쇼파 위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잠시, 근처에 아는 사람이 와서.”

“아는 사람이요?”

“내 고용주.”

분명 결혼까지 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민재에게 삼억의 포상금까지 내건 희대의 악덕 고용주.

거기에 진무혁의 부의 원천도 대부분 ‘그 사람’ 덕분이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했었다.

조원식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와 별개로 혜성 가는 지금 양아들인 성준범 이사와 그의 양어머니인 혜성 사모님이 기업의 소유권을 놓고 벌이고 있다고 했다.

“만나보고 싶어?”

“내가 왜요?”

민재는 절대로 싫다며 고개를 젓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굳이 그런 거물과 안면을 터놓는다 한들 딱히 제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생겼지 도움이 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혹시 모르잖아. 무슨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게 될지.”

“됐네요. 그럴 시간에 집에 가서 잠이나 잘래요.”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저쪽은 아까부터 한 시간 째 너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말이야.”

피곤이 몰려오던 와중에도, 두 시간이란 말에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진무혁은 아예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서 남의 일인 양 히죽 웃고만 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 오늘 결혼식이라고 했더니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애초에 도장을 찍은 시점에서 선택권 따위는 없었던 거다.

기다리든 돌려보내든 그거야 모두 민재의 마음이지만 그 이후의 뒷감당 역시는 네 몫이라고.

기어이 벼랑 끝에서 등을 떠밀어주는 친절에 속에서 분노가 한껏 끓어올랐다.

‘이 인간이 진짜.’

다 들킨 마당에 이제는 최소한의 위선조차 떨지 않겠다는 건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마침 예식장의 스태프가 두 사람을 찾아왔다.

“두 분 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혼 축하드리고 앨범은 이 주 후에 액자랑 같이 댁으로 배송해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높아지던 언성을 가라앉히고 민재는 바닥난 인내심을 필사적으로 긁어모았다.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까.

좋든 싫든 일단 도장은 찍었으니 어디까지 가든 갈 데까지는 가 봐야 한다.

분명 그렇게 다짐하긴 했었는데.

“난 역시 선배가 정말 싫어요.”

“영광이야.”

잔뜩 화가 난 민재는 팔짱까지 끼고서 사이좋은 부부 흉내를 내며 무혁을 따라나서야만 했다.

지금 보니, 자리가 거의 파할 때까지도 문 변호사를 비롯한 A&Z 변호사 상당수가 처음 보는 양복 입은 사람들과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만약 서로의 회사에 방문하거나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꼬투리를 잡힐 수 있지만, 경조사는 예외다.

예식장에서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귀에 익은 내용이 바삐 오갔다.

“도착하셨습니다.”

별관에서 본관으로 돌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특실로 안내받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복도를 걸으며 민재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애써 가라앉혔다.

“얘가 그 애야?”

분명 괜찮을 거라고.

호기롭던 결심은 어느새 물에 젖은 설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붉은색으로 무장한 중년 여자를 보는 순간 민재는 저도 모르게 숨을 꼴깍 삼켰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사자처럼 부푼 파마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 심히 범상치 않다.

아무리 구두를 신었다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무혁과 시선이 맞을 정도의 장신이었다.

‘저 정도면 구두 신고 백팔십오는 된다는 건데.’

바지 끝단이 워낙 길어 구두의 굽 높이가 보이지 않는다.

잘고 풍성한 컬이 가득한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용맹하며 매끈한 손톱 위에는 진짜 다이아몬드 같은 게 반짝였다.

“이쪽은 수정일보 사장인 홍…….”

“루비 홍입니다. 결혼 축하해요.”

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마주 잡았다.

‘무섭다.’

어쩐지 알아서 숙이지 않으면 그대로 잡아 먹힐 것만 같다.

잘못 얽혔다가는 정말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

민재는 놓아주지 않는 손에 힘을 뺀 채 얌전히 루비 홍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겨줬다.

“잘도 찾았네. 정말 신기해.”

악수를 겨우 벗어났나 했더니 다시금 손목이 잡히고, 자칭 루비 홍 여사께서는 민재의 턱을 쥐고서 얼굴 요모조모를 샅샅이 살피고 들었다.

“제 아내입니다. 무례한 행동은 삼가십시오.”

“신기하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젠 사람이 아니라 아예 짐짝 취급까지 하다니.

‘그래도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건 역시 목숨이지.’

함부로 말대답 한마디라도 했다간 그대로 썰려버릴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하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보통 날 보면 많이들 무서워하던데.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렇게 여유가 넘치고, 대단한데?”

“과찬이십니다.”

A&Z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 포커페이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민재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 십 분쯤 만지작거릴 즈음, 홍 사장은 흡족하다는 듯 손을 내리고서 순순히 민재를 놓아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석민재 씨. 다음에 또 만나요.”

처음의 무서운 인상과 달리 홍 여사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잔뜩 포식한 사자와 같아서 민재는 괜한 오한이 드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두고 봐, 다 죽었어.”

마스크는 물론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소영하는 플라티나 호텔 별관을 향해 달렸다.

갑자기 CF를 찍는다기에 급하게 제주도까지 왔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 석민재의 결혼식 날일 줄이야.

“이런.”

저쪽에서 한 무리의 하객들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급하게 몸을 숨긴 채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니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민재 씨가 그렇게 숨긴 이유가 있네.”

석민재가 숨긴 상대는 자신이지 그 남자가 아닌데, 아무래도 이야기의 흐름이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고 말고, 소영하가 와도 우리 진무혁 변호사님이 훨씬 나을걸?”

곱슬머리를 한 여자 하나는 한술 더 떠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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