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튿날, 엘리아나는 아침부터 하겐과 모자 공방 하녀들을 불렀다. 베니까지 다섯 명이었다. 엘리아나는 복잡한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펴 놓고선 말을 이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역의 지도야. 우리는 어두워도 읽을 수 있고,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지도를 만들어서 전달할 거고. 그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방패가 될 거야.”
“…….”
“함께해 주겠어?”
“네.”
하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지도를 만들 수 있죠?”
다른 하녀가 묻자, 베니가 크고 질 좋은 가죽을 가져와 잘랐다. 엘리아나는 일정한 크기로 잘린 가죽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위에 바늘과 실을 올렸다.
“수를 놓을 거야.”
천 위로 울퉁불퉁 올라와 있는 실의 촉감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게 할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것이었겠지만, 하겐을 비롯한 하녀들은 모두 전문적으로 옷을 수선하는 일을 수년간 해 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베니와 엘리아나도 손 지문이 닳도록 삯바느질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엘리아나는 아주 값싼 모슬린을 지도 위에 댔다. 투명한 모슬린에 비치는 지도를 그대로 베껴서 그려 냈다. 그러면 하녀들은 이를 따라 탄탄한 가죽 위로 자수를 놓았다. 자수를 다 놓은 다음에 모슬린을 살살 움직이면, 값싼 모슬린은 쉽게 찢어져서 사라졌다. 남은 건 가죽 천 위로 예쁘게 수놓아진 지도뿐이었다.
처음엔 작업이 더뎠으나 점점 익숙해지자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지도는 복잡한 지형도 섬세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장인들의 손에 의해서 다시 탄생했다.
엘리아나는 쉬지 않고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냈다. 전쟁터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지도를 말이다.
***
삼 일 동안 엘리아나와 하녀들은 총 스무 장의 가죽 지도를 만들어 냈다. 엘리아나는 양초 공방에서 만들어 놓은 양초 열 상자와 함께 가죽 지도를 질리언에게 가지고 갔다.
물론 모자를 콘테르국으로 수출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였다. 실제 모자가 들어 있는 상자는 두 개밖에 되지 않았다. 항구에서 만난 질리언은 배 안쪽에 실린 상자 속 유난히 짧은 양초들과 가죽 지도들을 보고선 입을 쩍 벌렸다.
“이걸 다 수놓은 것이오?”
“아마 날이 궂을 때도 움직여야 할 때가 많을 텐데, 종이나 양피지는 곤란하니까요. 이렇게 하면 젖어도 번지지 않고 잘 쓸 수 있을 거예요.”
“양초는 왜 이렇게 짧고 작은 것이오?”
“웬만하면 등불을 쓰거나, 큰 양초를 쓰겠죠. 이건 아주 좁은 길을 갈 때 쓰거나, 병사들 개개인이 보유하고 있을 비상용 양초에요. 최대한 가볍고 작게 만들었어요. 작다고 무시하면 안 돼요. 우리 가문 양초 장인이 웬만한 것들보다 더 길고 밝게 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아무래도 엘리아나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전쟁터가 아닌가 싶소.”
“글쎄요. 난 드레스가 젖거나 구겨지는 건 질색이에요.”
엘리아나는 일부러 깐깐한 귀족 부인처럼 말하고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질리언은 부드러운 유머 감각까지 지닌 엘리아나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물건 확인이 끝나자,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헌터 가문 쪽은요?”
“아무래도 이번에 군수 물자를 약탈당한 일로 인해 피해가 상당한 것 같소. 나에게 그것을 되찾을 방도를 찾아 달라고 하더군.”
“어차피 폴 테일러를 다시 잡을 계획이었잖아요.”
“내 손으로 놓아 준 놈이니 내 손으로 다시 잡아넣어야지.”
“아마 급하니 웃돈을 주고서라도 무기를 더 들여오려고 할 거예요.”
“제데이아가 때를 맞춰서 블러 백작의 자금줄을 옥죄면 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오델리 백작도 돈을 주지 않을 거고요.”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급하게 전투를 시작할지도 모르오.”
“그건 율리시스가 맡아야 할 몫이겠죠. 그도 준비하고 있을 거고요.”
엘리아나는 우아하게 부두와 이어진 갑판에 발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시무스 부인 댁에서 부인들과 차를 마시기로 했어요.”
“한시도 쉴 틈이 없군.”
“왜요? 달리 내가 필요한 일이 있나요?”
질리언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뭐, 필요하다기보다는……. 헬렌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해서, 식사나 함께하려고 했소.”
“이런……. 그냥 차만 마시는 거라면 취소했을 테지만, 오늘은 다른 얘기도 함께하는 자리라서 안 돼요. 의약품 물자 관련 얘기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은 정말 전장에 있어야 할 전사나 다름이 없소.”
“난 전장은 무섭다고요.”
엘리아나는 전혀 무섭지 않은 말투로 말을 하고선 질리언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몸조심해요. 질리언.”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엘리아나는 피식 웃고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수많은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제리크 헌터의 것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조금도 엘리아나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부인들끼리 다과회를 하거나, 모자 공방을 운영하는 것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카르만 헌터가 누굴 닮아 그렇게 허술한가 싶었더니…….’
엘리아나는 속으로 혀를 짧게 차곤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누군가의 시선이 끈질기게 붙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편견이라는 것을 깨지 않는 이상, 아무리 따라다녀 봐도 자신이 하는 일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엘리아나는 확신했다.
***
“멍청한 디컨 조르디언! 고작 해적 하나를 관리 못 해서 질리언 허트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다니!”
제리크 헌터는 크게 화를 내면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디컨 조르디언이 잭슨 시무스 사건 이후로 해적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 주지 않은 탓에 보복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폭약과 관련된 물자를 전부 약탈당하는 큰 복수였다.
“그때 몇천 디온만 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그딴 돈 좀 아낀다고 했다가 이게 뭐야!”
디컨 조르디언은 어떻게든 인티그레스 왕국에서 다시 물자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인티그레스에서는 그만큼의 물건을 다시 준비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게다가 가격을 네 배나 올려서 부르는 탓에 쉽사리 가져올 수도 없었다.
“블러 백작 쪽은?”
“아무래도 꼬리가 밟힌 것 같습니다. 재무부 전체가 조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조사 담당자는?”
“잉그 오델리 백작입니다. 아무래도 재무부와 연관이 없는 부서가 선택된 것 같습니다.”
“젠장. 그래서 오델리 백작이 요 며칠 연락이 닿지 않았군. 뭔가 알아낸 것 아니야?”
“그런 건 아닌 건 같습니다만, 왕실에 거의 갇혀서 지내는 것 같다는 소문입니다.”
“오델리 백작도 뭔가 걸린 것인가?”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제리크 헌터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분명 잘 풀리던 것이 직접 남작가에 온 후로부터는 엉망진창이었다. 정확히는 카르만과 엘리아나를 이혼시킨 이후인 것 같았다.
“엘리아나 로즈, 그 계집애가 연관이 없는 게 확실한가?”
제리크는 베르겐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베르겐은 보고된 내용을 읊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엘리아나 로즈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자 사업을 크게 여느라고 요즘은 시무스 부인과 다과회에 열심히 참석 중이라고 합니다. 질리언 허트를 만난 적이 있으나, 콘테르국에 모자를 수출하는 건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확실해? 그 계집애가 노튼 가문 쪽에 붙어서 콘테르 왕국을 도와주고 있는 건 아니고?”
“정보원이 상자 속에 든 모자를 항구에서 확인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질리언 허트와 인연이 닿아서 하는 것이 겨우 그런 일이라니, 한때나마 헌터 가문에 그런 여자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 창피하군! 돈만 밝히는 머저리 같은 계집애. 평민이랑 다를 바가 뭐가 있어!”
제리크 헌터는 모든 게 화가 났다. 자신이 내친 며느리가 잘나가는 사업가가 된 것도, 잘나가는 집안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도 말이다. 심지어 그녀의 인맥은 콘티노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콘테르국까지도 뻗어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그녀를 숙청하고 말리라. 제리크 헌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첫 만남에서 자신에게 뻣뻣하게 굴던 엘리아나의 얼굴을 생각하면 열이 뻗쳤다.
평생에 걸쳐 누구에게건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리크는 그런 분노 때문에 그녀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직언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전투를 빨리 시작해야겠어. 전장에서 나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제리크 헌터는 칼을 빼 들었다. 그러고선 벽에 걸린 콘티노 왕국의 국기를 그어 버렸다.
전사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 주지 않는 나라에 미래는 없었다. 적어도 제리크 헌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콘티노 왕국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다시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제리크 헌터가 말이다.
“이 헌터 가문만 할 수 있는 거야. 나라를 다시 바로 세우고, 영토를 넓히고, 제국으로 나아가야 해. 전사의 피가 끓는 이들을 전장에서 맘껏 뛰게 하고, 승리하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야지!”
제리크 헌터는 금방이라도 누구의 목을 벨 것처럼 칼을 높이 들었다.
베르겐은 어느 순간부터 분노 없이는 말을 잇지 못하는 주인의 모습이 서글펐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것일까. 헌터 가문의 막대한 재산은 헨리우스 왕자의 군대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대로 그가 전쟁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헌터 가문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이었다.
‘차라리 엘리아나 로즈를 쫓아내지 않고 여기서 공방을 계속 운영하게 했더라면, 적어도 내년 사용인들의 봉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저 높게 치솟은 검이 자신의 목으로 향할 수도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