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121)

87화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다. 엘리아나는 양초 하나에 의지해서 끝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늦은 밤임에도 재소자들이 고문받는 소리와 욕설, 누군가 끝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발 조심하십시오, 영애.”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아나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선 마지막 층까지 다다랐다. 그곳은 딱 한 명의 재소자만이 있었다.

트로이 조르디언.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후라서 그런지 한쪽 눈밖에 뜨지 못했다. 입술도 다 터져 있었고, 손과 발은 묶여 있었다.

“뭐야……. 오늘은 방법을 바꿨나? 예쁜 계집애로 나를 고문이라도 하게?”

“철창을 열어 줘요.”

“위험합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얘기를 못 해요. 어차피 저 사람 팔다리가 다 묶여 있잖아요.”

“하지만…….”

“내가 책임질게요.”

무섭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를 하기에 철창과 그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엘리아나는 멜번이 감옥 창살을 열어 주자마자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좋아. 치마를 들추고 춤이라도 춰 보라고, 또 알아?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로이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런 미친…….”

또 한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로이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손발이 묶여서도 발정하는 짐승들이란…….”

“뭐야?”

“나 기억 안 나요? 당신이 죽인 존 조르디언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여잔데.”

“몰라, 젠장. 내가 어떻게 알아?”

퉤. 트로이 조르디언은 엘리아나에게 침을 뱉었다. 엘리아나는 자기 얼굴에 튄 침을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러고선 그것을 트로이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예의 차려요. 내가 누군지 알면 지금 그 상태로 무릎 꿇고 목숨이라도 구걸하게 될 테니까.”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 내 인생은 이미 끝났으니까.”

트로이는 미련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모진 고문에도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여기를 나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재판정에 섰을 때도 불리하지 않으려고 상단에 관해 허튼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살아 나가서 복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숫자를 읽을 줄 모르면서 카드 게임에 참여한 사람과 같았다.

자신의 앞에 놓인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점을 잔인하게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바깥 상황을 모르나 보군요. 바깥은 전쟁 직전이에요.”

“…무슨 소리야? 전쟁이라니?”

“콘테르 왕국과 콘티노 왕국 사이에 싸움이 나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디컨 조르디언은 당신 생각과 달리 똑똑하게 줄을 잘 갈아탔어요. 도미누스가 아니라 헨리우스 왕자 쪽에 섰거든요. 군수 물자를 대 주는 사업도 잘 풀리고 있어서 상단이 신뢰를 잃을 일은 없는 것 같더군요.”

“그, 그게 어쨌다는 거야!”

트로이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엘리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디컨 조르디언이 상단을 이끌고 떵떵거리면서 잘살길 원하나 보죠?”

“…어쩔 수 없지. 난 술수에 걸려들었고, 여기에 이렇게 바보처럼 붙잡혀 있으니까.”

“거짓말.”

“뭐?”

“자기 실력을 믿고 있는 거겠죠. 실무라곤 하나도 모르는 애송이 디컨 녀석이 상단을 말아먹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죠? 이곳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나가기만 하면 유산을 받아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면 된다고, 그러면 조르디언 상단보다 큰 상단을 꾸리면서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 꿈꾸면서요.”

“닥쳐……! 그런 꿈 같은 거 꾸지 않아!”

“그래요. 꿈 깨야 해요. 헨리우스가 전쟁에서 이기면 당신부터 죽일 거거든요.”

“어디서 미친년 하나가 굴러 들어와서 사람 염장을 질러? 썩 꺼져! 험한 꼴 당하고 싶어?”

트로이가 사슬에 묶인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엘리아나는 그런 트로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잘 들어. 내가 이곳을 빈손으로 나갔을 때, 당신에게 주어지는 건 끝없는 열등감과 사형 선고뿐이야. 당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다 될 줄 알아? 나는 목격자이자 증인이야. 내가 나불거릴 수 있는 한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할지 모르겠어?”

“이, 이거 놔……!”

“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어. 밑바닥부터 쌓아 온 경력? 웃기지 마. 빛도 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거야. 네 동생이 네가 했던 모든 사업을 집어 먹고, 네 형제 같은 식구들을 모두 죽일 때!”

“닥쳐!”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엘리아나는 그의 얼굴을 거칠게 밀어냈다. 트로이는 말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 뭐야. 너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이런 미친년이…….”

“지금 상황에서 나같이 미친년 아니고서야, 당신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그걸 못 알아보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잘 죽으라고. 명복을 빌게.”

엘리아나는 말을 마치고선 철창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일부러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가 죽어도 전혀 아쉽지 않단 듯이 말이다

“얘기 다 끝났어요.”

“네? 정말이십니까?”

“네. 다시 잠가요. 그리고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어차피 가망도 없는 목숨, 이렇게 죽으라고 놔두죠. 가요.”

멜번이 철창을 잠그자, 엘리아나는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모든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잠깐, 잠깐만!!”

엘리아나가 계단의 코너를 돌 무렵에야 트로이 조르디언이 소리쳤다. 멜번이 내려가려고 하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젓고선 멈춰 있으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젠장……. 가지 말라고!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 개자식, 디컨을 내 손으로 죽이기 전까지는 못 죽는다고!”

트로이의 절규 소리에 엘리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멜번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율리시스가 말했던 지혜의 여신다운 모습이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가 트로이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철창 밖에 서서 자신의 거래 조건을 얘기했다.

“헨리우스가 지면 조르디언 상단은 반란죄로 양국에서 신뢰를 잃고 붕괴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걸 대신할 상단이 필요하겠죠. 솔직히 그게 당신이 추후 운영하게 될 상단이라고 자신할 순 없어요. 그건 트로이 조르디언, 당신의 실력으로 해내야 할 문제죠. 약속할 수 있는 건.”

“…….”

“절대 죽지 않게 해 줄게요. 사형을 무조건 피할 수 있게 증언하겠어요. 그리고 반드시 헨리우스를 이기겠어요. 우리가요.”

트로이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릅뜨면서 답했다.

“…내게 뭘 원하시오?”

엘리아나는 그의 말에 활짝 웃었다.

***

답은 빠르게 나왔다. 트로이 조르디언은 조르디언 가문의 사유지의 자세한 지도가 나와 있는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실무자로서 가장 많은 일을 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최신의 문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물건들은 모두 아내가 가지고 있었다.

멜번은 그의 한쪽 손을 풀어 주고서 편지를 쓰게 했고, 트로이의 아내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면서 지도를 꺼내 주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투리스와 멜번이 며칠 동안 산을 헤맨 것이 어이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 지도는 내가 몇 장 똑같이 만들어서 보내 줄게요. 이런 종이는 찢어지기가 쉬워서 날씨가 변덕스러운 데미테우스 산맥에서 사용하긴 어려워요. 수일 내로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아마 질리언을 통해서 보낼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트로이 조르디언이 다시 상단을 꾸리려고 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찍은 거예요. 웬만하면 그 모진 고문에 못 버티고 불어 버릴 법도 한데,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걸 보고서요. 아마도 아버지가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겠죠. 사람들은 그가 자존심이 강하고, 뚝심 있는 뱃사람의 거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더군요. 존 조르디언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도 했죠. 그걸 바탕으로 그냥 걸어 본 거예요.”

“…….”

“어차피 처음부터 나를 작부 취급하는 걸 보니, 순순히 말은 안 할 것 같아서 세게 나간 거고요. 그러고 보니 손 아파 죽겠네. 멜번 경, 사람을 때릴 때 안 아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이건 뭐, 때리는 사람이 더 아픈 것 같아요.”

엘리아나는 뒤늦게 트로이의 뺨을 때렸던 손을 탈탈 털면서 후후 손을 불었다. 멜번은 그녀의 그런 순수하면서도 대범한, 그러면서도 천재적인 재능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지혜의 여신이로군.’

멜번은 말을 잇지 않고 자신의 손수건을 건넸다. 엘리아나는 밝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 미소는 마치 그녀가 오늘 하루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듯이 해맑았다.

특히 누군가에게 총을 겨눠지거나, 감옥에서 침을 맞은 일 같은 것 말이다. 엘리아나는 길었던 하루를 떠올리면서 작게 하품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 수는 없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빼곡하게 길이 표시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도는 그러면 양피지에 그려 주실 건가요?”

멜번이 묻자,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특별한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비밀이에요.”

엘리아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서는 다시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트로이 조르디언 말대로 최근에 다시 그려진 지도였다. 아마도 유서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이후로 여러모로 준비해 온 듯싶었다. 엘리아나는 지도를 꼼꼼히 보고선 말을 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게 해 드릴게요.”

“그게, 가능합니까?”

엘리아나는 미소 지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승리를 위하여.”

멜번은 왜인지 엘리아나의 미소가 어떤 장수의 무기보다도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들의 편인 이상, 승기는 이미 이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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