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 임신했어요.”
샤르헨의 그 한마디에 카르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채였다. 샤르헨은 큰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카르만에게 다시 소리쳤다.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요!”
“잠깐, 그게…….”
요즘 들어 카르만은 샤르헨을 찾은 적이 없었다. 아이가 들어설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샤르헨은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는 카르만에게 분노하면서 말했다.
“엘리아나가 이 집에 들어온 날, 내 방에 머물렀잖아요. 그날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고요.”
그날. 그날이 마지막이었을 것이었다. 카르만은 뭐에 얻어맞은 듯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샤르헨은 배신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기쁘다고 달려와 안아 줘야 할 정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는 달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샤르헨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엉엉 울며 말을 이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의사를 열 명이고, 백 명이고 불러도 좋아요. 난 정말 임신했어요. 당신의 아이를, 이 헌터 가문의 대를 이을 아이를요!”
카르만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샤르헨에게 다가갔다. 샤르헨은 카르만이 자신을 일으키려고 몸을 숙이자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안겼다.
“카르만!”
“샤르헨, 미안하다. 내가, 내가 너무 당황해서…….”
“이제 가짜 수양딸은 싫어요.”
“…….”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샤르헨의 출산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카르만은 사고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샤르헨은 울먹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게 남작 부인의 자리를 주세요.”
울음기가 섞여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카르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엉거주춤 안았다. 엘리아나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엘리아나, 당신 정말! 어쩌려고 여기까지 잠입한 거요?”
“사실을 알아야겠으니까요. 그리고 잠입이라뇨. 난 그냥 남작님을 만나러 왔을 뿐이에요.”
“하녀로 위장했잖소!”
“이 옷이 마음에 들어서 입었어요. 내가 원래 옷차림이 독특한 거 알잖아요.”
“정말 못 말리는 여자군. 이러다 법정에 끌려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오?”
“그 전에 위대한 군인이자, 나의 훌륭한 친구인 질리언 허트가 구해 주겠죠?”
질리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엘리아나를 바라보다가 잭슨 시무스의 곁으로 가 그를 등지고 섰다. 그러고선 엘리아나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소?”
“남작님이 뭘 하려고 했었는지를 물었어요.”
“남작은 당신에게 뭐라고 했소?”
“직접 얘기 나누었다면서요?”
“나는 잭슨 남작이 얼마나 억울한지만 계속해서 들어왔을 뿐이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뇨! 질리언 경! 저는 진심으로 모든 걸 다 말했습니다!!”
질리언은 잭슨 남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작은 억울하단 감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남작, 하지만 법정에 가면 모두 쓸모가 없어집니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군수 물자 유통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겠지요. 나머지 사실들은 정상 참작이 될 뿐입니다.”
“게다가 국가 기밀 누설이나 내란 음모죄로 엮여서 더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요?”
“그렇소, 엘리아나.”
엘리아나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잭슨 남작님의 얘기 말고 내 얘기를 들어 줘요. 그리고 수도로 이동해요.”
“좋소. 바라던 바요.”
질리언은 아무리 엘리아나라도 냉정하게 판단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안이 너무 중대한 일이었다. 엘리아나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최대한 설득력 있게 말했다.
“잭슨 남작님은 지금 함정에 빠졌어요. 그만 빠진 게 아닐 거예요. 도미누스 왕자도, 조르디언 상단도 지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꼬리 자르기를 하려고 한 거예요. 남작님만 제거해 버리면 되는 문제가 아닌데도요.”
“애초에 그 불같은 성미의 도미누스 왕자와 거래하려 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오.”
“그러나 질리언도 들었잖아요. 국방 관련 사업에 대한 임명권이 달려 있었다고요.”
“그건 다 거짓일 것이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콘티노국에 몇이나 될 것 같소?”
“거짓이 아니었다면요?”
질리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왕실의 중역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엘리아나, 당신이 방금 한 추측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오. 모두를 적으로 만들 셈이오?”
“질리언, 난 그런 희생정신 같은 건 없어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건 맞지만, 부러진 사다리를 이용할 마음도 없죠.”
“돌려 말하지 말고, 정확히 설명해 보시오.”
“콘테르국에서 도미누스 왕자와 헨리우스 왕자의 왕위계승권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어요. 콘테르국의 국왕이 우려할 정도로요. 어쩌면 불필요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번엔 그 전쟁의 목적이 우리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이웃 나라요. 어째서 이웃 나라를 침범한단 말이오?”
“4년 전에 콘티노국이 흡수한 프데랑스도 친선 국가였어요. 그때 전쟁을 이끌었던 건 두 왕자였죠. 누가 더 공적을 쌓느냐에 몰두해서 프데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었다고요. 잊지 않았겠죠?”
“그때는 프데랑스에서 먼저 군수 물자 문제로…….”
질리언은 군수 물자까지 이야기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콘테르와 프데랑스 사이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원인은 프데랑스가 콘테르국에 맞서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군수 물자가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당한 양이었고, 그를 알게 된 콘테르 국왕은 격노하여 작은 프데랑스를 삼켜 버렸다.
군수 물자. 그때도 군수 물자가 문제였다.
“만약 콘테르 국왕이 조르디언 상단을 통해서 우리가 민간 군수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고 오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리 없소. 우리가 명백히 도미누스의 잘못임을 밝히면.”
“팔은 안으로 굽어요. 도미누스가 그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까요?”
“젠장. 하지만 이걸 콘테르국에 알릴 방법이 없잖소. 잭슨 남작에게 중형을 내리지 않으면 콘티노국 전체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오해를 살 수 있소.”
“오해가 아니라 진실이에요. 누군가, 더 큰 세력이 지금 콘테르국 후계자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엘리아나, 너무 멀리 갔소. 우리가 손쓸 수 없는 범위까지.”
엘리아나는 질리언의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말을 멈추라는 뜻이었다.
“콘테르국과 소통할 수 있어요. 그것도 왕실과 직접이요.”
“그게 무슨 소리요? 왕실의 누군가를 안다는 말이오?”
엘리아나는 되도록 그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과 잭슨 남작을 한 번 바라보고선 질리언과 눈을 마주쳤다.
“콘테르국의 다섯 번째 왕위 계승 후보. 율리시스 밀 왕자를 알고 있어요.”
“…엘리아나, 당신은 대체.”
“당신도 만난 적이 있어요.”
“…뭐라고?”
“올리버 노튼 공작.”
“…….”
“그 사람이 율리시스 밀이에요. 콘테르국의 국왕이 이번 사태에 대해서 이상함을 먼저 느끼고 율리시스에게 이 사건을 맡겼어요.”
“이럴 수가.”
시무스 부인은 입을 가렸고, 질리언은 눈썹을 찌푸렸다. 엘리아나는 험한 분위기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질리언, 율리시스와 함께 왕궁으로 가세요. 그리고 국왕과 독대하세요. 다른 사람을 들여선 안 돼요. 적어도 루스 윈, 잉그 오델리, 제리크 헌터, 제데이아 테네브 이 네 사람은 절대로 안 돼요.”
“제데이아 테네브는…….”
“그 사람은 꽉 막힌 사람이에요. 굉장히 보수적으로 굴 것이고, 외교적으론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잭슨 남작님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그는 속은 것이에요. 질리언과 율리시스가 잡아야 할 대상은 더 크고, 위험한 시한폭탄이에요.”
엘리아나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종합한 그대로를 말했다. 그러자, 질리언은 한숨을 내쉬더니 엘리아나에게 말을 이었다.
“이 상황을 종이에 적어 주시오. 내가 율리시스 밀을 직접 만나 그대가 전했다고 하겠소. 그리고 그대는 이대로 헌터가로 돌아가서 채비하시오.”
“채비라니요?”
“이 상황을 나나, 율리시스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엘리아나 로즈 당신이오.”
“…….”
“함께 수도로 갑시다.”
엘리아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로즈 가문을 위해서 무엇이 옳은 일일지를 잠시 생각했다. 이대로 카르만 헌터의 집에서 돈을 빼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더 위험하더라도 이 일에 깊이 뛰어드는 게 나은가.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그렇듯이 위험하더라도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는 쪽이었다.
베니는 그러다가 다 녹아 버린 신화 속 밀랍 날개처럼 곤두박질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늘 더 잃을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요. 언제 떠나죠?”
“원래는 오늘 떠나려고 했소. 더 시간이 필요하오?”
“아뇨. 그럼 내 서신을 율리시스에게 전해 주세요. 짐을 싸서 바로 나오죠.”
“좋소.”
엘리아나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질리언은 늘 빠르고 결단력 있는 그녀의 이런 면이 좋았다.
“시무스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도에서 돌아오는 대로 들를게요.”
“엘리아나, 괜히 우리 때문에 너무 위험해지는 게 아닌가요?”
“저 스스로 직접 선택한 일이에요. 누구 때문은 없어요.”
시무스 부인은 시원시원한 대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보다 더 호방한 여성은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짐짓 짓궂게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렇담 엘리아나의 여비는 시무스 가문이 전부 부담하겠어요. 잭슨의 비상금도 많이 찾아냈거든요.”
“아, 아앗. 여보, 그 돈은……!”
“사양하지 않겠어요, 부인.”
카르만 헌터도 관여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에 헌터 가의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를 표한 엘리아나는 곧장 자리를 잡고서 율리시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이 판단한 내용, 그리고 그 근거를 일목요연하게 테르어로 써 내려갔다. 혹시 다른 콘티노인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질리언은 콘테르국의 왕실 언어를 유려하게 써 내려가는 엘리아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그가 홀린 듯이 말하자, 엘리아나는 펜촉을 떼고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어요?”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주 잠깐. 질리언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