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121)

56화

“두 번째 입으니까 꽤 익숙한데요?”

“그렇게 입어도 부인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부인도 그러실 거예요. 이런 일이 없으셔야겠지만.”

엘리아나는 시무스 집안의 하녀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로 돌려 보았다. 머리카락 색을 감추기 위해서 머릿수건을 더 큰 것으로 두르고, 얼굴에 있던 화장도 깨끗하게 지웠다.

콘티노국의 군인들이 잭슨의 침실을 지키고 있어서 면회는 아내와 하녀만이 가능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잭슨 남작의 갈아입을 옷과 가운, 수건 등등을 높이 쌓아서 들었다. 시무스 부인이 앞장을 서고 엘리아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남작의 목욕을 도와 드리려고 합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긴 시간은 안 됩니다.”

“어차피 하녀도 한 명뿐이라, 긴 시간을 들이긴 어렵고 닦아 드리고만 나올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체인 아머를 입은 병사가 문을 열자, 시무스 부인과 엘리아나는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 시무스 부인이 나타나자마자 잭슨 남작은 우는 소리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데이지, 어디 갔다가 오는 것이오?”

“당신이 꼴 보기도 싫어서 좀 나갔다 왔어요.”

“데이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얼마나 그대가 그리웠는지. 아얏!”

시무스 부인은 간지러운 소리 하지 말라며 잭슨의 다친 부위 근처를 살짝 눌렀다. 그랬더니 잭슨은 눈물까지 보이면서 몸을 비비 꼬았다.

“악……! 부인, 정말 아프오. 정말.”

“인사해요. 엘리아나 로즈 헌터 남작 부인이에요.”

“뭣? 엘리아나? 그……!!”

“쉿. 조용히 해요.”

엘리아나는 수건에 물을 적셔서 잭슨의 얼굴을 닦아 주는 척 다가가 속삭였다.

“시간이 많이 없어요, 남작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줘요. 지금 남작님의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고, 잘못하면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써서 사형을 면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난 정말 억울하오, 헌터 부인.”

“그러니까 그 억울함을 풀어야죠. 당신을 쫓는 건 누구였죠?”

“도미누스 왕자 패거리요. 내가 어딘가에 가는 족족 사람들이 죽이러 왔소. 복면을 하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확신하오. 그들에게 의약품과 무기를 빼돌려 주면, 내게 큰 국방부 사업 하나를 물어다 주기로 했소.”

국방부 사업이라면 돈도 되고, 명예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잭슨을 어느 정도 위치에 올려놓고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했던 것이 뻔했다.

물론 잭슨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첫 번째 보낸 배는 풍랑을 만나 해적에게 털려 버리고, 두 번째 배는 보내기도 전에 사라졌소. 물건도 전부 없고, 돈도 없고……. 도미누스는 자길 속였다며 나를 헨리우스 왕자의 패거리라고 윽박질렀소.”

잭슨은 그 상황이 여전히 생생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매일 살해 협박 편지를 보내고, 돈을 구해 왔더니 위약금까지 두 배를 물라고 하지 않소. 그건 터무니없었소. 나중에는 아예 돈도 필요 없고 물건으로 무조건 내놓으라고 했소. 조르디언에서는 그 이상 물건을 빼 줄 수 없다고 하고. 나로선 진짜 미치고 팔짝 뛰는 노릇이었소. 물건이 없을 뿐인데 헨리우스와 협력을 했네, 말았네. 자기 혼자 망상에 빠졌다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콘티노국에서 남작이라는 지위는 멍청이들에게만 주는 것일까. 큰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잭슨을 보며, 엘리아나는 한숨을 쉬면서 잭슨의 얼굴에 수건을 올려놓은 채로 시무스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사업 임명권까지 가지고 있는 거면 이미 왕실 내부에 잠입한 자가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것도 중요한 직책이겠죠. 그자를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야겠어요.”

“군수 물자를 빼돌리려고 한 시도들은 어쩔 수 없이 인정되겠죠?”

“아직 조르디언을 완전히 믿을 순 없어요.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물건을 되찾거나, 해적과 협력해서 적당한 값을 쳐주고 다시 받았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귀족도 평민도 아니에요. 모든 계산법이 돈에 맞춰져 있죠. 잭슨 남작님은 그저 당한 것일 수도 있어요.”

“뭐라고? 내가 당했다고요?!”

“쉿.”

엘리아나는 잭슨에게 입을 다물라고 주의를 준 뒤에 시무스 부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옆 나라의 왕위 계승 문제만 엮인 게 아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죠?”

“콘티노국에도 콘테르국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것도 공작이나 후작, 최소한 백작급의 높은 자리에요.”

“설마…….”

“우리가 상상한 사람 중엔 없길 바라야겠지만, 그중에 있을지도 모르죠.”

엘리아나 왕실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국방 인사권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왕실 기사단장인 루스 윈이었다.

그러나 그 말고도 그런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있었다. 행정부의 원로 관료인 잉그 오델리, 그리고 개국 공신인 제리크 헌터였다. 그 정도 되는 힘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런 거래를 제안할 수 있으리라.

엘리아나는 문득 제리크 헌터의 아들이자, 자기 남편인 카르만 헌터를 떠올렸다. 제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며 과민하게 반응하던 그를 말이다.

제리크 헌터는 개국 공신이었다. 그가 국가를 배신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놈팡이인 척 그런 수작을 꾸미고 있었던 것일까? 엘리아나는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질리언 허트입니다. 씻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잠시 옷을 갖춰 입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질리언 허트라는 말에 시무스 부인의 눈이 커졌다. 엘리아나는 순간 어디로 숨어야 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질리언 허트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을까? 엘리아나는 짧게 고민하고선 시무스 부인을 안정시켰다.

“제가 나갈게요.”

“엘리아나.”

“괜찮아요.”

엘리아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문을 열었다. 어차피 남작을 씻기고 있던 중이 아니었으니 채비할 시간은 필요 없었다. 질리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마주한 녹색 눈동자에 입을 벌렸다.

“그…….”

“부디 들어오세요. 남작께서는 채비를 마치셨습니다.”

엘리아나는 보통의 하녀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아주 잠시 굳었던 질리언은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고선 방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섰다.

***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카르만의 시종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카르만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샤르헨 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들르겠다고 해.”

“몹시 중요한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도 몹시 중요해.”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정리한 남작가의 사용인 현황을 보고 있었다. 어디에 몇 명의 인원이 쓰이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 일손은 늘 모자라고, 어디에 있는 일손은 늘 넘쳐 나는지 말이다. 균형도, 봉급 차이도 모두 엉망이었다.

특히나 위병들은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서 모두 훈련이 되지 않은 신입이거나, 오래되었지만 직급이 낮고 훈련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뿐이었다.

서류를 읽으면 읽을수록 카르만의 얼굴은 구겨져 갔다. 자신이 수도에 있는 헌터 가문의 일에만 너무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안주인이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큰 문제인가. 이걸 과연 샤르헨이 해낼 수 있을까.’

엘리아나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샤르헨은 달랐다. 샤르헨은 정원에서 어렵게 키워 낸 식물처럼 가냘팠다. 조금만 덥고 추워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풀이 죽어 버리는 식물처럼,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원래의 사랑스러움은 그 환경이 모두 갖춰져 있을 때만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엘리아나가 네 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이후로, 샤르헨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완전히 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자신감과 사랑스러움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불안함과 분노만이 남았다.

거짓말을 계속하고, 스트레스를 사치로 풀었다. 특히나 페페가 횡령을 저지르고 있었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큰 배신이었다. 장차 이 남작가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집사를 두더라도 소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 남작님. 들여보내 주시지 않으면 밖에서 계속 기다리시겠다고…….”

시종이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카르만은 한숨을 내쉬고선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평소보다 폭이 넓은 드레스를 입은 샤르헨이 천천히, 우아한 걸음걸이로 카르만의 서재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정인을 이렇게 문전 박대할 정도로 그렇게 바쁘신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페페가 저지른 일이 생각보다 커. 아버지가 아시기 전에 수습해야 해서 그랬어.”

“가문의 일이라면 제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 알고 그러시는 거죠?”

“아냐, 정말 일이 많아. 페페가 저지른 것뿐만 아니라 샤르헨, 네 이름도 여기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 배신감을 어떻게 너에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샤르헨. 이건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어.”

카르만은 솔직하게 말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어야 할 샤르헨이 그깟 보석 때문에 부정한 청탁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만의 불편한 심기에 샤르헨은 꼬리를 내리듯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저도 몰랐어요. 나중에 가선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그땐 이미 받은 것들로 카르만과 내 사이를 갈라 놓겠다며 협박했다고요.”

“…….”

예전이라면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 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인지 카르만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선 샤르헨과 눈을 마주쳤다.

“알겠어.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믿어야지. 그래서 무슨 일이야?”

“…꼭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야 해요? 당신은 변해선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가 될 카르만 헌터는요!”

“…뭐?”

샤르헨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 임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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