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121)

31화

엘리아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올리버.”

율리시스는 자신들만이 아는 그 이름에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마차에서 내려왔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콘테르국에서 온 올리버 노튼 공작입니다. 제게 곤경에 빠진 레이디를 구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율리시스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곤 손을 내밀었다. 마차를 함께 타자는 뜻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율리시스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곤 영광이라는 듯이 그녀를 마차로 안내했다. 베니는 엘리아나의 드레스를 함께 들어 주었다. 마차가 원체 커다란지라, 드레스를 구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율리시스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 정말 아름답네요.”

“고마워요. 공작님도 정말 멋지신데요. 마치…….”

“마치?”

“백마를 탄 왕자님 같으시군요.”

백마를 탄 왕자님. 그녀의 언어유희에 율리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유머였다.

베니는 다시 돌아올 조셰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움직이겠다고 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율리시스와 함께 성으로 출발했다. 마차는 빨랐지만, 안정적이었다.

“누가 저런 못된 심술을 부린 거죠? 남작인가요?”

“그렇게 노골적인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의 애인이 질투가 좀 심하거든요.”

“아하.”

“올리버를 만나지 못했으면 큰일이 났을 거예요. 내 모든 계획이 망가졌을 거거든요.”

“하지만 엘리아나라면, 그 망가진 계획도 계획대로 다시 일으켜 세웠을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율리시스의 말에 엘리아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엘리아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았다. 온갖 술수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겨우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방심하지 말자.

엘리아나는 정신을 더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한순간의 방심이 만들어 낸 결과가 어땠는지, 방금 전 찬 바람과 함께 뼈저리게 느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가 스스로 다짐을 하는 사이, 율리시스가 입을 뗐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머리핀이 유일한 오점이 됐네요.”

“모르는 소리 말아요. 이 머리핀은 오늘 의상의 가장 포인트인걸요.”

“뭐, 나는 마음에 들지만요.”

율리시스가 입가를 쓸면서 말했다. 그의 입꼬리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그의 옷차림을 천천히 살폈다. 독특한 소재의 옷은 아름다운 금발과 대비되어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목 전체를 감싼 셔츠는 그의 목덜미에 있는 왕가 문양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율리시스 밀 왕자가 아닌 올리버 노튼 공작으로 완벽히 변신한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붙여 준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율리시스가 조금은 귀여웠다.

“애덤 노튼 공작은 우정이 깊은 건가요? 아니면 미래를 위해서 투자한 건가요?”

“음. 둘 다일 수도 있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죠.”

“무슨 뜻이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쓱 내어 준 것일 수도 있어요. 저도 노튼 가문을 고른 게 딱히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건…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대단한 것?”

“의심할 여지 없이 가볍게 선택하는 것. 그건 아주 깊은 신뢰 관계에서만 가능하잖아요.”

율리시스는 장난스러운 시선을 거뒀다. 적당히 넘어가려고 한 말이었지만, 엘리아나는 본질을 알고 있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다니까.’

율리시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선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정말 모든 걸 꿰뚫어 보네요.”

“그런 관계는 숨겨지지 않죠. 특히 노튼 가문은 그런 점에선 엄격하니까요.”

엘리아나는 짧게 대답하고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말들은 힘차게 달렸고, 그들이 탄 마차는 다른 마차보다 훨씬 빠르게 성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율리시스는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그런 걸 전부 알아보는 사람이라 정말 좋아요.”

“누구나 조금만 살피면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문제에요.”

“하지만 난 처음 만났어요. 당신 같은 사람.”

엘리아나가 율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으로 반짝였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이를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 없었다.

***

“뭐? 나 참. 누가 계모인지 모르겠군. 사람을 그렇게까지 괴롭히다니!”

질리언이 소리를 질렀다. 엘리아나가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그때 나타난 조셰프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상황을 전했다.

“오라버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은 너무 복잡해서 마차를 뺄 수가 없을 거예요.”

“미치겠군. 우리라도 들어가야 해.”

“하지만…….”

“개최자인 오델리 백작에게 파티에 지각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질리언은 이성적으로 말하면서도 입술을 깨물었다. 버틸 수 있는 만큼은 버티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오지 못한다면? 질리언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미 수많은 귀족이 모두 입장한 뒤였다.

“안 되겠다. 헬렌, 먼저 입장하자. 그러고서 나 혼자 연회장을 빠져나와서 그녈 데리고 올게.”

“오라버니,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할 거야.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조셰프라고 했나? 이따 자네의 말 좀 빌리겠네.”

“네.”

질리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밖엔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질리언 허트는 엘리아나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자신의 가문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당장 그녀를 데리러 갔으리라. 하지만 그러기엔 허트 가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게다가 곧 자작의 지위를 받기 직전인 상황인 만큼, 다른 귀족들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하는 점도 있었다.

질리언이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오늘 온 마차 중에 가장 큰 것 같았다. 질리언은 잠시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마차에서는 금발의 젊은 청년이 내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은 마차 문을 활짝 열고 안쪽의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고선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풍성한 드레스와 잘록한 허리,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같은 여자였다.

“엘리아나!”

질리언이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엘리아나는 싱긋 웃으면서 질리언과 헬렌에게 다가왔다.

“너무 늦진 않았겠죠? 사고가 있었어요. 조셰프,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올리버 공작 덕분에 낭패를 면했어요. 여기는 콘테르국의 명문인 노튼 가문의 올리버 노튼 공작입니다.”

“질리언 허트입니다.”

“반갑습니다. 다만, 시간이 촉박하니 입장부터 할까요?”

“좋습니다.”

엘리아나는 곧장 몸을 틀어서 헬렌과 손을 잡았다.

“헬렌, 손이 차갑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를 기다리게 하다니, 친구로서 자격이 없네요.”

“아니에요. 엘리아나가 무사히 와서 다행이에요.”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려요.”

“누가 만들어 주신 덕분에요.”

헬렌이 배시시 웃자, 질리언은 허탈하게 웃었다. 누군가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졸여 본 것도, 헬렌이 이렇게 밝게 웃는 것도 모두 오랜만이었다.

“노튼 공작 먼저 들어가세요. 그다음엔 허트 가문. 그다음에 제일 지각쟁이인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율리시스는 장난치듯이 남은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기사들과 함께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엘리아나는 헬렌의 머리와 옷을 한 번 다듬어 주었다. 그러고선 질리언의 옷깃도 만져 주었다.

“나, 난 되었소.”

“연회에선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죠. 모두 질리언 허트를 눈독 들이고 있는 만큼이요.”

“난 그다지 인기가 없소.”

“본인 생각이겠죠. 이렇게 잘생긴 해군을 본 적 있나요, 헬렌?”

“아마 없을 거예요.”

푸흐흐 하면서 두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자, 질리언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자, 어서.”

엘리아나는 두 사람을 연회장으로 살짝 밀었다. 헬렌은 후, 하고 숨을 내쉬고선 엘리아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어서 가서 보여 줘요. 헬렌 허트가 여전히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엘리아나.”

“그렇죠, 질리언?”

“물론이오. 한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지. 내 사랑스러운 누이.”

헬렌은 볼을 붉게 물들이고선 용기를 얻은 듯 걸음을 뗐다. 엘리아나는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선 조셰프에게 말했다.

“조셰프, 불쌍한 베니가 혼자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에게 가 봐 줄 수 있겠어?”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부인의 입장을…….”

“그건 걱정하지 마. 보란 듯이 모두를 집중시킬 테니까.”

“부, 부인.”

“베니와 함께 꼭 연회장으로 와 줘. 난 두 사람이 필요하니까.”

“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조셰프가 말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엘리아나는 그가 떠날 때까지 시선을 주다가 몸을 돌렸다. 입구를 지키는 남자가 엘리아나를 힐끗 보고선 명단을 살폈다.

“입장하십니까? 부인.”

“네.”

“어느 가문에 어떤 분이십니까?”

“로즈 가문의 엘리아나 로즈.”

엘리아나 로즈라는 이름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보았다. 이미 악독한 계모라는 소문이 자자한 그녀였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에게 싱긋 웃어 주고선 문 앞에 섰다. 문지기는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름을 적은 쪽지를 전했다. 허둥지둥하며 문이 열리자, 환한 빛이 쏟아졌다.

엘리아나 로즈는 그 빛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안쪽에서 쪽지를 받은 목청 큰 시종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로즈 가문에서 오셨습니다. 엘리아나 로즈 양입니다!”

그 목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엘리아나에게로 쏟아졌다. 양옆으로 활짝 열린 문 가운데에 서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에게로. 엘리아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가장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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