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파티가 가까워질수록 시내도 시끄러워졌다. 근래 들어서 가장 큰 파티인 데다가 유명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숱한 이혼 경력에도 매력적인 카르만 헌터.
곧 자작이 될 질리언 허트.
재무부의 떠오르는 샛별 제데이아 테네브.
그리고 극악무도한 계모라고 소문이 자자하고, 난잡한 스캔들에 둘러싸인 엘리아나 로즈가 사교계에 데뷔한다.
파티에 참여하지 못하는 평민들에게도 그 사실은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호사꾼들은 이들에 대해 떠들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엘리아나 로즈는 그런 소문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게 반쯤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의 주목도 끌지 못하고 꺼져 버린 거품처럼 사라질 순 없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의 심장 안에 잠들어 있던 야망을 깨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용히 집안에 도움이 되면서 일생을 버리려고 했던 엘리아나에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아나는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작정이었다. 때론 도움받고, 때론 누군가를 짓밟으면서 위로 올라갈 것이다. 종국에는 로즈 가문의 이름은 그 어느 것보다 위에 있을 것이었다.
파티 당일, 엘리아나는 식사를 최소한으로 했다. 올리브 두세 알, 아몬드 세 알, 우유 한 잔 정도였다. 점심때부터는 그마저도 먹지 않았다. 잘록한 허리를 더 돋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계속 차고 다니는 이 이상한 머리핀은 뭐야?”
엘리아나의 머리를 높게 올리고 장미 장식과 깃털을 촘촘히 꽂던 베니는 엘리아나가 평소에 자주 하는 장미 머리핀을 들었다. 딱 봐도 시장 어디에서 산 것 같은 저렴한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는 피식 웃고선 정면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로 꽂아 줘.”
“여기에? 이거를?”
“응. 중요한 물건이거든.”
“또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영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라 다행이지만.”
베니는 엘리아나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얼굴 위로 하얗고 보송한 분을 발랐다. 입술은 5월의 장미처럼 빨갛게, 눈매는 또렷하면서도 꼬리를 위로 향하도록 했다.
뺨에는 특별히 제조한 옅은 파우더를 발랐다. 아주 약간의 생기가 돌게 만드는 파우더였다. 엘리아나는 화장과 머리를 공들여 마치고 나서야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마치 타락한 백조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청순한 이목구비는 아직 앳된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특히나 맑은 눈동자에선 여린 순수함이 얼핏얼핏 보이곤 했다. 그 상반되는 매력이 엘리아나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엘리, 정말 예뻐. 누구도 눈을 떼지 못할 거야.”
“고마워. 베니 덕분이야.”
엘리아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그녀의 차림은 테네브 부인의 드레스를 그대로 복원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거의 흡사했다. 거기에 질리언이 선물한 아마조나이트 목걸이와 율리시스가 선물한 머리핀까지 하고 나니 든든한 뒷배를 얻은 것처럼 힘이 나기도 했다.
엘리아나의 뒤에서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베니가 입을 열었다.
“다 잘될 거야.”
엘리아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자신이 헌터 가문의 얌전한 남작 부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돈에 팔려 온 스스로의 처지에 순응하며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면서 평생을 고요히 보냈을까?
엘리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면 카르만 헌터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해 준 것이었다. 자칫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한 남작 부인의 삶을 말이다.
엘리아나는 목을 쭉 뻗었다. 그러고선 꼿꼿하게 서서 높은 구두 위로 몸을 올렸다. 엘리아나의 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발바닥에 찌릿한 고통을 느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은 모두 견뎌 낼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일부러 카르만과 다른 시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샤르헨이 그러기를 원했고, 엘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당당하게 남작가를 가로질렀다. 하녀들은 화려함의 극치인 엘리아나를 보면서 모두 몸을 사렸다. 마치 잘못 걸리면, 뺨을 한 대 얻어맞을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상쾌한 마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러나 한 걸음을 채 내딛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다 부서져 가는 마차 때문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마르고 늙은 말에, 마부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이였다. 마차는 나무판자로 만든 허름한 것이었다. 엘리아나를 놀리려는 것인지 마차 위에 장미 넝쿨을 둘러 놓았지만, 꽃은 모두 시들어 있었다.
“아니, 대체 움직일 수는 있는 거예요?”
베니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아직은 쓸 만합니다. 에구, 바퀴야.”
노인이 고개를 마구 끄덕인 순간에 작은 바퀴 하나가 굴러갔다. 마차는 당장 부서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유치한 술수에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샤르헨이 수를 쓴 게 분명해요!”
베니는 씩씩대며 말했다. 조셰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급히 마차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야.”
엘리아나는 조셰프를 말렸다. 지금 마차를 찾는 일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알 만한 귀족이라면 모두가 참석하는 파티였다. 과연 남은 마차가 있을까? 아니.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그저 조셰프만 발바닥이 뜨겁도록 뛰어다니게 될 뿐이었다.
이번에는 샤르헨이 현명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보인 빈틈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연회장에서 설전을 나누는 것보다 엘리아나를 불참시키는 게 샤르헨의 입장에서는 나았다.
엘리아나는 보통 똑똑한 것이 아니었고, 사교계에서 사랑받던 샤르헨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대로 파티도 불참해 버리는, 소문 속의 계모로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머리가 아팠다.
도착 시간도 매우 중요했다. 허트 가문과 입장 시간을 맞춰 놓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가 계획한 모든 것이 마차 하나 때문에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엘리아나는 말을 타는 법을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화려한 의상으로는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
“젠장.”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눈을 감았다.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신이 큰 부분을 놓친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
카르만은 연회장 안에서 파티의 입구가 위치한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원래라면 도착했어야 할 엘리아나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샤르헨은 친한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 어느 때보다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카르만은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한 명에게 손짓했다.
“남작 부인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없는데.”
“마차 줄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카르만은 잠시 생각하다가 돌아서는 시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잡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카르만은 시종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전부 확인하고, 남작 부인의 것이 없다면 바로 남작가로 내 마차를 돌려보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르만은 말을 마치고선 몸을 돌렸다. 파티는 아직 시작 전이었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왜인지 걱정이 되었다. 카르만의 눈과 샤르헨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샤르헨은 사르르 녹을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화려한 차림이었다. 도착한 영애들은 모두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어디서 맞춘 것이며, 어디서 구한 보석이며 자기들끼리 장신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바빴다.
카르만은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복한 얼굴 위로 울고 있던 엘리아나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금세 회복했다. 남작가의 부실한 행정까지 자신에게 나무랄 만큼 말이다. 페페는 그날 이후로 횡령 흔적을 지우려다가 적발되었고, 그대로 모든 남작가의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엘리아나는 본격적인 업무는 파티가 끝난 후에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 준 서류만으로도 이미 그녀가 남작가를 완전히 달라지게 하리라는 건 증명된 셈이었다.
“엘리아나.”
카르만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면서 2층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런 자신의 옆얼굴에 샤르헨의 시선이 닿아 있는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샤르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카르만의 시선은 샤르헨 쪽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
엘리아나는 조셰프를 파티가 열리는 성으로 보냈다. 허트 남매에게 이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조셰프는 말에 올라타서는 곧장 성으로 향했다.
조금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입장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방해가 거셀수록 더 해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조바심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마차는 수많을 것이었고, 그중에 허트 가문의 것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혹시 타이밍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베니는 혹시나 엘리아나가 파티에 참석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녀를 제대로 달래 줄 정신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그 생각에만 집중하는 순간, 힘찬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근사한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런 마차 옆에 있는 초라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차는 남작가를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섰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마 네 마리가 이끄는 검은색 마차였다. 테두리가 온통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엘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엘리아나는 한 단어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구세주. 자신을 구해 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