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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1/121)

20화

엘리아나는 곧 주먹다짐할 것 같은 무리에게로 다급하게 걸어갔다. 그러고선 홀로 바닥에 앉은 남자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올리버 공작님!”

“…공작?”

“이런, 이런. 카르만이 바로 남작가로 오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또 이런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계셨나요?”

앉아 있던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엘리아나는 그에게만 보이도록 윙크하고선 몸을 돌렸다.

두꺼운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은 누가 봐도 그녀가 귀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것도 정숙하지 못한 소문의 중심에 있는 여인 중 한 명이라는 것도 말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입에선 ‘카르만’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것은 분명 헌터 남작의 이름이었고, 남작의 새로운 부인이 괴이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저잣거리에도 이미 소문난 부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분은 남작의 초청으로 콘테르국에서 오신 올리버 공작이시다.”

“…부, 부인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저자가 체스판에서 속임수를…….”

엘리아나의 커다란 목소리에 술집에서 나온 남자가 기가 눌려 말했다. 엘리아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체스 말을 빼앗듯이 들더니, 바닥으로 세게 내팽개쳤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누가 그걸 결정하지? 내 더러운 성격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 보지?”

엘리아나가 앙칼지게 말하자, 남자는 짐짓 겁을 먹었다. 상대는 몸집이 커다란 남자였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나한테도 손찌검해 보시지? 그 손을 당장 직접 잘라 줄 테니까!”

뱀처럼 표독스러운 엘리아나의 목소리에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남작 부인, 내가 잠깐 놀이 상대로 삼았을 뿐이오. 너무 그리 화내지 마시오. 이자도 못된 자는 아니니.”

남자는 엘리아나의 연기에 빠르게 동참했다.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를 향해 몸을 약간 숙이고선 완전히 다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공작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제가 물러서야지요.”

“공, 공작님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저자는 그냥 자신을 음유 시인이라고……!”

짜악!

엘리아나는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구경꾼들은 웅성거렸다. 작은 손은 큰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이 준 파장은 컸다.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저자? 혀가 잘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남자가 제 화에 못 이겨 씩씩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작 부인이라고 해도 남작의 미움을 받는 데다가, 가난한 가문 출신인 만큼 평민인 그가 어떻게 해보려면 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헌터 가문의 이름을 조금 더 믿고 뻔뻔하게 굴어 보기로 했다.

이 남자는 그 정도로 모험을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니까.

“거, 남작 부인이면 다야? 어디 갑자기 사람 뺨을 쳐? 남작가에서 천대받는 주제에!”

남자가 손을 거칠게 든 순간,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체인아머를 단단히 두르고 있는 위병 조셰프였다.

“남작 부인, 제가 늦었습니다. 광장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받고 바로 달려왔습니다만.”

“괜찮아, 조셰프. 괜히 소란을 피웠어. 콘테르국에서 온 올리버 공작을 마중 나왔는데, 이런 일이 생겼네. 질리언이 배웅을 해 준다고 했을 때 받을 걸 그랬어. 그랬다면 누가 나에게 천대받는 년이라며 욕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엘리아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소문 속 악녀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못 알아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기 돈은 여기 있습니다. 전부 여기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돈을 주머니째로 조셰프에게 떠넘기고선 허둥지둥 도망갔다. 엘리아나는 제 허리에 손을 올리고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무슨 재미난 구경이라도 났나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 난 사람 많은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엘리아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사람들이 재빠르게 흩어졌다. 조셰프가 사람들에게 어서 가라는 듯이 손짓하기도 했다.

“부인!”

광장의 반대편에서 베니가 뛰어왔다. 장식품을 다 산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는 뺨을 때리느라 아픈 손을 몇 번이나 털어 냈다.

“부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일단 남작가 쪽으로 가자. 이곳엔 아직 남은 사람들이 많아. 같이 가시죠, 올리버 공작.”

“그럼, 감사 인사는 조금 더 미뤄 두죠.”

네 사람은 동시에 남작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엘리아나는 마치 정말 공작을 대하듯이 정중했지만,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베니와 조셰프는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광장에서 조금 벗어난 구역에 다다르자, 남자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이쯤에서 인사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광장에서 꽤 멀어졌기도 하고요.”

베니는 입가가 터진 미남을 노려보면서 엘리아나의 곁에 찰싹 붙었다. 그러고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부인,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분은 대체 누구고요?”

“모르는 사람이야. 내가 올리버 공작이라고 이름을 붙여 드렸지.”

엘리아나가 웃자, 금발의 남자는 따라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올리버 공작. 그렇게 위엄 있는 직위는 받아 본 적도 없는 한낱 음유 시인인데 말이죠.”

남자는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했다. 허리를 약간 숙인 인사에 엘리아나는 무릎을 살짝 굽혀 답했다. 그러고선 조셰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주머니를 집어서 그에게 던졌다. 그는 순발력 좋게 주머니를 잡아챘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와는 180도 달라진 목소리였다.

“콘티노 사람들은 콘테르 사람들과 달라요. 성미도 급하고, 다혈질이죠.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니,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남작 부인.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뵙고 보니 더 화끈하시군요. 연기도 훌륭하시고요.”

“그쪽이야말로. 진짜 이름이 뭐죠, 올리버?”

“잠시 머물다 떠나는 시인의 이름 따위. 아무렇게나 기억해 주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훤칠한 키에 미소년 같은 얼굴의 소유자였다. 피부는 고왔지만, 거친 손을 보면 검술을 단련한 자였다. 체형이 호리호리해 보이는 것은 옷을 자신의 치수보다 훨씬 크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드러나는 몸 선은 꽤 다부졌다.

“요즘 시인들은 검으로 시를 쓰나 보군요.”

엘리아나가 날카롭게 지적하자, 남자는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검을 들지 않아 봐서 모르겠네요. 콘티노국에선 그런 기이한 게 유행인가 봅니다. 나중에 또 뵙지요. 감사했습니다, 헌터 부인.”

“엘리아나 로즈.”

“네?”

“내 이름은 엘리아나 로즈예요. 헌터 부인이나, 남작 부인이 아니라.”

엘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그에게 다가가 살가운 포옹을 했다. 남자는 당황하여 얼어붙은 듯했지만, 엘리아나는 작별 인사를 하듯 가볍게 안으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만나요.”

“…….”

“왕자님.”

엘리아나는 그가 들을 정도로만 속삭이고선 멀어졌다. 그러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엔 남작가로 놀러 오세요. 체스라면 저도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거든요. 함께 한다면 재밌는 게임이 되겠네요, 올리버.”

“부인이 무서워서 갈 수가 없겠는걸요. 어떻게 알았죠?”

남자는 크게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물었다. 엘리아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던걸요.”

엘리아나는 부채로 자기 목을 톡톡 두드렸다. 남자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제 옷을 추슬렀다.

“체스 판에서 돈을 따면 옷부터 마련할 생각이었는데, 그전에 당신을 만나 버렸군요.”

“옷은 깃이 높은 걸로 사는 게 좋겠어요. 그게 당신의 긴 목에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베니, 가자.”

“이대로 가는 건가요? 나에게 더 묻지 않고요?”

남자는 당황했다는 듯이 말했다.

콘테르국에서 온 왕족. 그는 어떤 이유로 이곳에 방문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게 신분을 속이고자 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그런 장단에 맞춰 주되, 다음을 기약하고자 했다.

곧 있을 사교 파티는 근래에 열리는 어느 파티보다 성대했다. 음유 시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이 남자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면 반드시 참석할 것이었다. 이야기는 그때 풀어도 늦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피식 웃고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금색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아름다웠다. 엘리아나는 빛나는 보석을 닮은 눈을 피하지 않고선 말을 이었다.

“나에게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은 남자와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나는 ‘그 소문의 여자’이니까요.”

“보통이 아니군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럼 이만.”

엘리아나가 몸을 틀었다. 그러자 조셰프와 베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남자에게서 조금 멀어졌을 즈음,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율!”

“…….”

“이렇게만 말해도 당신은 내 이름을 찾아낼 거라고 믿어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

“…….”

“엘리아나 로즈.”

율이라는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악의나 계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이 서로의 목표에 도움이 될 것임을 말이다. 아마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서로서로 알아본 셈이었다.

엘리아나는 짧게 고개를 숙여 답하고는 몸을 완전히 돌렸다. 남작가로 돌아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율. 그 한 글자의 힌트가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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