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남작가에 도착하자, 늘 그랬듯이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의 호위를 받으면서 자신의 방까지 향했다.
조셰프는 광장에서 그녀를 봤을 때부터 심장이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위기에 처한 것을 구했을 때는 아찔했다. 역시 허트가에 가는 길에 동행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근무 시간을 바꿔 주지 않은 동료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건 카르만이 아닌 자신이었다. 시정잡배들과 비교했을 때, 더 탄탄하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자신의 건장한 신체가 좋았다.
그러나 올리버 공작이라는 남자의 존재에 기분은 점점 하락했다. 그녀가 그를 보고 웃어 줄 때마다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조셰프는 괜히 자신의 가슴께를 쿵쿵 때렸다. 옆에서 걸어가던 베니는 그런 조셰프에게 말을 걸었다.
“체했어요? 가서 물이라도 마셔요. 부인 곁에는 제가 있으니까.”
“아닙니다.”
“오늘은 고마워요. 제때 도착하지 못했으면 부인께서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음부턴 조심해 줘요. 부인이 이 이상 쓸데없는 소문에 엮이지 않도록.”
쓸데없는 소문. 그 말은 화살이 되어 조셰프의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남작 부인과 한낱 위병의 스캔들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녀를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카르만 헌터는 바보 멍청이였다.
그러나 다른 남자들도 과연 바보 멍청이일까? 그건 아닐 것이었다. 그 올리버 공작이라는 남자만 봐도 그랬다. 그는 확실하게 엘리아나의 매력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 감히 물어볼 순 없지만, 자신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조셰프는 시무룩해진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엘리아나의 방까지 도착했다. 두 사람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하지 않던 엘리아나는 몸을 돌려 조셰프를 보았다.
“조셰프.”
“네, 부인.”
“날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오늘 그대가 없었다면 나는 광장에서 웬 남자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몰라.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도와주려다가.”
“당, 당치도 않습니다. 죽다니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끔찍하게 들리겠지만, 난 현실 감각이 좋은 편이거든.”
“…….”
“그대가 나의 전속 호위병이 되었으면 해. 봉급은 지금보다 두 배로 해서. 내가 직접 남작께 말씀드리겠어.”
“부, 부인.”
“난 내 사람들이 필요해. 오늘 그걸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깨달았어. 그리고 내 사람들이 내 곁에서 잘 먹고 잘살길 원하거든. 지금의 봉급으로는 집안 형편을 감당하기 어려웠지?”
“…….”
조셰프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조셰프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었다. 겪어 본 자만이 아는 슬픔을 공감해 주는 것이었다.
조셰프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엘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가 필요해.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내가 그대와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누군가 엿듣는 자가 있다면 수상하게 느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내용은 지극히 담백했다. 로즈 가문의 기사가 되는 것. 그녀는 거기까지 조셰프를 키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위병과 남작 부인은 어울리지 않지만, 기사와 부인은 어울리지 않을까. 조셰프의 생각은 순간 그것에 닿았다. 조셰프에게는 그것만큼 뚜렷한 동기가 있을 수 없었다.
“부인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일에 조셰프는 나를 변호하거나 부풀리는 데 동참하지 말고 침묵을 유지해. 그게 신변에 더 좋을 거야. 이유는 나중에 알려 주지.”
“네, 부인.”
“베니, 들어가자. 오늘 일이 너무 많았더니 피곤하네.”
방문이 열리고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사라졌다. 조셰프는 예를 갖춘 채로 제 앞에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내뱉지 못한 마음이 한 뼘 더 자라나고 있었다.
***
엘리아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콘테르국에서 온 율. 그자를 알아야 했다. 어쩌면 테네브 가문보다 더 제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다음부터는 모른 척해야 할 상대일 수도 있었다.
그가 적이 될 것인지, 아군이 될 것인지는 모두 그녀의 판단에 달린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도서관에 가는 길에 하녀들이 평소보다 저에게 더 깍듯하다고 느꼈다. 아마도 어제 광장에서의 소란이 벌써 소문난 모양이었다. 그 여파가 조금 과하긴 했지만,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소문은 대개 누군가가 직접 봤다는 사실로 신빙성을 얻기 마련이었다. 허황한 소문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이 되면, 거기에 양념처럼 덧붙는 부풀림은 은근히 용인되었다.
의외인 건 카르만이 자신을 호출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마도 정보가 느리거나, 혹은 샤르헨과 어떤 처벌을 내리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헌터 가문도 불쌍하군. 이런 우유부단한 놈이 차기 가주라니.’
자신이 카르만이었다면 새벽에 동이 트자마자 불러다 놓고 예절 교육을 기초부터 다시 시켰을 것이었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지켜야 하는 수준에서부터 남작 부인의 수준까지, 몇 날 며칠이고 고문처럼 시킬 것이다. 그 정도로 위험한 사안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가 적어도 자신을 소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대처법을 생각해 둔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아나는 야망 없는 남자는 질색이었다. 남작의 자리에서 영원히 머물다 죽을 것이 아니라면 욕심을 내서 기사단을 꾸리고, 전쟁에 나서거나 정치의 중심부로 들어서야 했다. 이렇게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챙기겠다고 변두리에 남아 조용히 제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카르만을 생각하면 속이 갑갑했다. 얼간이도 그런 얼간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줏대라도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매력 없는 남자.
엘리아나 로즈는 카르만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하물며 엘리아나의 아버지조차 아픈 몸으로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체력이 약한 그는 자식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 애썼다. 가정 교사가 따로 없었던 로즈 가문의 아이들이 모두 학문에 애정을 품고 있으며, 남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진 것은 그런 아버지의 노력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대에서 가난을 피할 수 없을지언정, 다음 세대의 로즈 가문이 부흥할 수 있는 아주 약간의 씨앗이라도 남기길 원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아버지의 노력이 좋았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에는 그런 집념이 있었음을 엘리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야망. 엘리아나는 그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빈털터리로 쫓겨날까 두려워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점점 꿈틀거렸다. 더 높은 곳에 올라,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로즈 가문. 그것이 꿈처럼 아른거릴 때면 엘리아나는 짜릿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선 콘테르국과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책상 위에 펼쳤다. 헌터 가문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캐면 캘수록 더 값비싼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아나는 샤르헨의 머리에 꽂힌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핀보다 제 손으로 찾아낸 이 금 같은 정보들이 좋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줄 테니까.
“율, 율, 율.”
엘리아나는 남자가 남긴 한 단어의 힌트를 가지고 왕족의 이름들을 훑었다. 찾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제 정세를 다룬 문서에서 그 이름을 확인했다.
“율리시스 밀.”
콘테르국의 다섯 번째 왕위 계승 후보. 그러나 문서에서는 그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기도 했기에 깊이가 없었다. 또한, 율리시스를 왕위 계승자로 주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도 있었다. 천성이 유머러스하고, 모두에게 친절한 탓에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다는 짧은 평가뿐이었다.
반면,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는 매번 피를 튀기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으키지도 않아도 될 전쟁을 일으키며 공적을 쌓기에 바빴고, 현왕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들기 위해서 애썼다. 콘테르국의 왕이 왕위 계승자를 못 박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첫째 왕자가 후계로 임명되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둘째 왕자의 군사술이 출중했다. 그러나 첫째 왕자도 그에 못지않게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다. 둘 다 타고난 군인이자 전쟁광들이었다.
셋째 왕자는 첫째, 둘째와 달리 자신의 정치적인 면모를 뽐냈다. 그는 법무부에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는 부처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실무를 보고 배우고 의견을 개진하면서 왕의 눈에 들려고 했다.
넷째는 콘티노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외교적인 부분에서 눈에 띄려고 했지만, 공주와 진짜 사랑에 빠져 버린 탓에 왕권에서 일부러 멀어졌다. 형들의 피 튀기는 싸움에 자기 가족이 다칠까 봐 미리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다.
형들이 워낙 파란만장하게 지내는 탓에 율리시스 밀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었다. 누가 보면 그가 왕위 계승자 후보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 같았다.
콘테르국은 최대 5명까지 왕위 계승자를 둘 수 있었고, 이에 맞춰 현재의 왕은 13명의 왕자와 공주 중 5명의 후보를 올려 둔 터였다. 나머지 8명은 계승권이 없는 공주이거나 아예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율리시스 밀이 다섯 번째 왕위 계승자가 된 이유는 머리가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보고서에 짧게 적혀있었다. 그러나 그도 넷째와 마찬가지로 왕권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아서 콘테르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 밀의 초상화가 그려진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코에 있던 점의 위치까지 똑같았다.
“율리시스 밀.”
엘리아나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 비밀스러운 왕자의 이름을 내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