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류태한입니다.”
꽃을 만지는 손길이 다시 멈칫했다.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두고 장미 줄기를 다듬던 서은은 손끝에서 따끔한 감각을 느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
가시에 찔린 살갗에 붉은 피 한 방울이 맺혔다.
“또 이러네.”
해신 호텔에서 열린 창립 기념 파티를 다녀온 뒤로 내내 이런 상태였다. 서은은 꽃을 다듬던 꽃가위를 내려놓고 밴드를 찾아 손가락에 붙였다. 어쩐 일인지 마주했던 기억 한 조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류태한입니다.”
허공으로 뻗어 오던 커다란 손. 마디가 길고 곧은 손가락과 손바닥이 겹칠 때 느껴지던 뜨거운 체온. 그 손이 서은의 손을 움켜쥐었을 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류태한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창립 기념 행사는 해마다 돌아왔고, 그런 자리에는 꼭 해신 일가가 자리했다. 물론 입시를 앞두고 있거나, 일신상의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는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몇 년에 한 번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엄밀히는 그가 아버지가 계신 HSDC 투자 개발 면세 사업부로 발령받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말을 섞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서은과는 애초에 소속감이 다른 사람이니 한데 어울리는 것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우연을 빌미로 그들과 인연을 맺어 보려고도 한다지만, 서은은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희숙 역시 흔치 않은 자리를 기회로 여기는 부류였으니, 보이지 않는 계급을 가르는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마다 새삼 그가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깨닫곤 했다.
그러니 어울리지 않는 편이, 애초에 그 주변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서은에게는 안전하고도 편한 일이었다.
접점이 없는걸.
말을 섞어 보거나, 잠시 인사를 나누는 것 외에는 그와의 접점이 없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상대라는 점은 오히려 다른 누군가처럼 그에게 다가서지 않아도 될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류태한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제게 걸어왔을 때, 꼼짝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너무 뚝딱거렸나.”
부자연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다가, 그때의 인사 정도면 해신을 이어받아 회사를 이끌어 갈 오너가의 일원에게, 회사 구성원의 가족인 서은이 갖출 수 있는 예의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꾸 류태한입니다, 하던 중저음의 울림 좋은 목소리가 불현듯 생각나곤 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의 피지컬에 훤칠한 외모, 굵직하고 곧은 인상이 주는 안정감. 눈을 보고 인사를 나누며, 끝내는 피식 웃고 말던 남자를 떠올리던 서은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고개를 빠르게 털어 냈다.
“나 왜 이래.”
저녁에 있을 본가 모임에 가져갈 꽃을 준비하다 말고 이게 무슨 망념인가.
그날은 단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독특했을 뿐이다. 류태한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나눈 것도 눈에 띌 수밖에 없던 서은의 독특한 차림 때문인 게 분명했다.
어른이 되면 제 삶을 찾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사는 동안 부모님께 기대지 않으려 애써 온 서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아니, 실은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기견 봉사로 그런 자리를 피해 보려 했건만, 어설픈 궁리로 끌어낸 난감한 상황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서은은 고개를 들어 작은 아지트를 바라보았다.
성수동의 작은 플라워 숍, 세븐 어 클락. 7시를 뜻하는 소규모 꽃 가게는 서은이 홀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평생 업으로 생각했던 발레를 그만두고, 대학에 두 번째로 진학했다가 졸업하고도 딱히 어느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할 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승원이 소개한 플랜테리어 카페를 하는 육송이를 만났다. 식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육송이의 가르침 속에 꽃에 한참을 빠져 지냈다. 그러다 그녀의 권유로 작게나마 가게를 시작했다. 서울 전역을 뒤지다시피 돌아다니다 결국 자리를 얻은 곳은 와인 바를 잠시 운영했던 승원의 가게가 있던 건물이었다.
십여 년 넘게 승원의 부모님이 찻집을 운영하던 건물 1층을 저렴하게 임대해, 서은이 터를 닦은 지 3년. 주 수입은 주로 예약 주문을 통해 이루어지며, 수입이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는 제법 먹고살 정도는 되었다. 요즘은 길을 걷다 문득 문을 열고 들어와 꽃을 한 송이 사 가는 낭만적인 사람들도 늘어 가는 추세였다.
그래도 낭만이 죽지 않은 시대를 살아서 다행이었다.
서은은 꼼꼼하게 꽃다발 손질을 마무리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인생에서 발레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지난날. 그땐 이런 삶을 살 거라는 걸 꿈에도 몰랐지만, 살아 보니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이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럽다는 점이었다.
“휴, 다 됐다.”
순식간에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어 낸 서은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희숙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딸랑.
이제 나가면 되겠다, 생각하며 채비를 할 무렵 문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렸다. 지난해 일본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승원이 가져온 선물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겠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입구를 향했을 때, 서은은 출입구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남자를 보고 멈칫 굳었다. 내부를 둘러보며 안으로 걸음을 딛는 남자는 류태한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꽃집에 용무가 있다면 뭐겠습니까. 꽃 사러 왔지.”
태연하게 내부를 한 바퀴 빙 둘러본 시선이 다시금 서은에게 향했다.
그건 그렇지만.
현재 시각 5시. 일반적인 회사원이라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가 있을 회사 본사에서 서은의 가게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서은은 잠시 입을 벌리고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상황을 살폈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찾은 것 같지 않은 기세가 역력한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단호한 구석이 있다. 짧은 시간 머릿속으로 여러 사정을 나열하다 서은은 생각을 멈추었다.
꽃집에 용무가 있다면 꽃 사러 오는 것뿐이겠지.
그의 말이 맞다. 서은은 입술을 기울여 웃는 태한에게 화답하듯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그날은 잘 들어갔습니까?”
“네, 그럼요.”
“다행이네요.”
그 후 한바탕 소란을 겪을 거라 생각했던 우려와 다르게 의외로 희숙은 잠잠했다.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서은을 본 형국의 반응도 희숙과 비슷했다. 물론 언짢아하긴 했지만.
당시 그곳에 혼돈을 가져다준 서은의 등장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는 건 진한과 어머니 희숙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괜히 뺨이 민망하게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상무님도 잘 들어가셨죠?”
“그럼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은을 응시했다.
“나를 기억하네요.”
“어떻게 잊어요.”
서은이 수줍은 듯 희미하게 입술 끝으로 웃었다.
다른 이유를 다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었는걸요. 그러나 속으로만 생각하며 제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실내였음에도 서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그의 시선이 사선으로 가로질러 왔다.
키가 이렇게 컸었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서은의 얼굴로 그늘이 질 만큼.
마천루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곳에서도 봉우리처럼 불쑥 솟아 있는 그를 보며 체격이 크겠구나, 짐작했고 그가 다가왔을 때 짐작이 사실임을 실감했던 그날처럼 다시금 긴장감이 서은의 발목을 휘감았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마주 보고 서 있으려니 그 존재감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겁이 날 정도로 또렷하게 닿는 눈빛 때문일까. 서은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그러쥐었다.
“혹시 찾으시는 꽃이 있나요?”
“꽃? 아아.”
서은에게 시선을 내린 태한은 곧게 편 가녀린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는 걸 눈치챘다. 연한 살구색 원피스에 짙은 초록색의 앞치마.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꽉 그러쥔 손등에 마디가 하얗게 일어난 상태였다.
“프리지어.”
그가 쇼룸 안에 노랗게 꽃을 틔운 프리지어를 가리켰다.
“꽃다발로 부탁해요.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실 테니, 대표님 취향껏.”
별 고민 없이 선택을 끝낸 그가 싱긋 웃었다. 그가 뱉어 낸 대표님 소리에 서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대표라고 하기엔 아주 작은 규모의 가게였지만, 그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프리지어는 끝물이라 지금이 마지막 철인데, 운이 좋으시네요.”
“예감이 좋은데요.”
나긋한 음성에 서은은 다만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가게를 찾는 손님을 대하듯 평범하게 응대하려 했다. 그러나 태한의 시선이 뺨을 스치고, 손등을 스치고, 늘어놓은 꽃을 지나 다시 서은의 눈을 푹 찌르듯 파고들 때면 순간적으로 손이 잘게 떨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은 채로 침착하게 서은은 꽃을 만졌다.
테이블 위로 서은이 꺼낸 프리지어와 새하얀 조팝나무 가지, 노란색 비올라와 은방울꽃이 놓였다. 테이블 너머 최소한의 동선 안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능숙했다.
“선물이시죠?”
“시작을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시선이 덤덤하게 건너왔다. 서은은 당연히 그 상대가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저런 남자에게 여자가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괜히 친근감을 다지기 위해 이것저것 묻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고객들도 많으니까.
줄기를 다듬은 꽃을 한데 겹치며 포장하는 동안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구경했다. 정확히 꽃다발을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 내는 과정을 구경하는 건지, 서은을 구경하는지 모호한 시선이었지만.
서은은 관심 속에서 연한 노란색과 흰색 습자지를 겹치고, 같은 계열의 두 가지 색의 리본으로 밑동을 곱게 묶었다.
“다 됐는데, 어떠세요? 프리지어 주변으로 노란색 비올라를 얹어 봤어요. 은방울꽃도 조금 넣고요.”
“이건 뭡니까?”
태한은 꽃다발 속 하얗게 꽃을 틔운 조팝나무를 가리켰다.
“조팝이요.”
“좆밥?”
“…….”
“…….”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음성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잘못이 있다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이름 지어진 아름다운 꽃 탓이다. 그게 아니라도 그렇다고 되뇌며 서은은 태연히 굴었다.
“조, 팝. 이라는 꽃이에요.”
“아아, 조, 팝.”
“…….”
“…….”
친절하게 정정해 주었지만, 서은이 일부러 강조해 뱉은 것과 태한이 따라 뱉은 어감은 묘하게 달랐다. 듣기 좋은 나긋한 음성과 다르게 욕설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가까스로 끌어당긴 서은의 입술 끝이 경련했다.
“네, 맞아요. 조팝.”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은에게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턱을 당기고 비스듬히 고개를 내린 태한의 두꺼운 상체가 금방이라도 서은에게 쏟아져 내릴 것처럼 맞붙었다.
“좀 그렇습니까?”
“뭐… 가요?”
바짝 다가선 그에게서 풍겨 온 시원한 바다 향기가 서은의 향기와 묘하게 뒤섞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입술을 틀어 슬며시 웃었다.
“미안합니다. 평소에 언어 습관이 별로 좋지 못한 혈육이 있어서.”
그의 말에 영빈관에서 보았던 나머지 둘 중 위일까, 아래일까 생각했다.
“수고했어요. 예쁘네요.”
서은이 전한 꽃다발을 손에 쥐고, 그가 눈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투였지만, 오해하기 좋은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차라도 한잔합시다.”
“아….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어요. 뭐 마실 거라도….”
“다음에요.”
꽃을 만질 때는 그렇게나 침착하던 서은이 뒤늦게 허둥거리자 태한이 피식 작게 웃었다.
“또 봐요.”
그가 꽃을 들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시야를 가득 채웠던 커다란 뒷모습이 금세 멀어졌다. 한 손에 쥔 꽃다발이 저렇게 작았던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꽃다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은은 태한이 완전히 사라진 뒤, 주저앉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피곤해.
어쩐지 기가 다 빠진 느낌이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입구를 바라보며 서은은 조금 전 태한의 손끝에서 흔들리던 프리지어 꽃다발을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의 응원.
당신의 앞날.
그 의미를 알고 가져간 건가. 묘하게 꽃을 든 모습이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서은의 마음이 오랜만에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금 설렜다.
***
판교에 있는 본가는 저녁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 가득 희숙이 정성껏 요리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와 나물을 버무린 참기름 냄새, 신선한 해산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엄마, 나 왔어요.”
작약 다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나온 희숙이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방긋 웃었다.
“웬 꽃을 다 가지고 왔어?”
“그냥. 엄마 이거 좋아하잖아.”
꽃다발에 얼굴을 박아 넣었던 희숙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이, 시스터.”
손을 닦고 나오자 해인이 방문을 열어 얼굴을 빼꼼 내밀어 인사한다.
“너는 집에 있으면 엄마 좀 돕지.”
“지금까지 돕다가 이제 막 쉬려고 들어간 순간 언니가 온 거야. 나를 늙은 엄마나 부려 먹는 패륜아 따위로 보다니.”
실망이란 듯 해인이 울상을 하고 번쩍거리는 집 안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오늘 청소는 바쁜 와중에 이 몸이 다 하셨다고!”
“잘했어, 주해인. 최고야.”
서은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자 해인이 그제야 웃는 얼굴로 조금만 누워 있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서은은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닫고 온 거야?”
“그래야지.”
“손님은 없었어?”
“예약 주문은 오전에 다 처리해서, 바쁠 건 없었어.”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다녀간 태한이 뇌리를 스쳤지만 잠시였다.
“고생했다.”
“고생은. 엄마가 다 하시는구만.”
이미 식탁 가득 한 상을 차려 놓고도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희숙의 손길이 분주했다. 통통, 듣기 좋게 칼질하는 소리에 서은은 마음을 놓았다.
새롭게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자취를 이유로 독립한 게 스물세 살의 일이니, 벌써 서은이 이 집을 떠나 산 지도 6년이었다.
이 동네에서 발레 교습소를 운영하는 친구 주영의 학원에 지나가다 들르긴 해도, 본가를 찾는 날은 드물었다.
살다 보니 그랬다. 가족 간의 사이가 소원한 게 아니어도 괜히 잠깐 얼굴만 비쳐도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희숙을 보면 괜한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희숙은 그런 점들을 못내 섭섭해했다. 동생 해인이 아직 독립하지 않고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지만, 해인도 반도네오니스트로 밴드를 꾸려 가며 잦은 방송과 공연 그리고 현업으로 인해 집을 비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적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한 달에 두 차례. 희숙은 일부러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 식구들을 불러들였다. 일찌감치 장을 보고, 정성껏 한 요리로 배를 채운 뒤에는 온 가족이 함께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주일을 시작하는 게 희숙의 유일한 낙이었다.
냉담자나 다름없는 허술한 신앙을 가진 서은이었지만, 그나마 이게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희숙을 돕는 사이 해인이 맥주를 잔뜩 사 들고 들어왔다. 모처럼 네 식구가 단란하게 모인 자리니 술이 빠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저녁때가 되어 퇴근한 주형국이 첫술을 뜨며 식사가 시작되었고, 요리 솜씨가 좋은 희숙의 손맛에 네 식구 모두 기분 좋게 저녁을 먹었다. 해인이 사 온 맥주 열 캔이 거의 동날 즈음, 형국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은퇴를 할까 한다.”
“네?”
사과를 깎던 서은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은퇴를 하시겠다니요?”
“아빠!”
맥주를 홀짝거리며 형국의 비위를 맞추던 해인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은을 휙 돌아보았다.
“이만하면 이번 생에 내가 목적한 바는 다 이루었고.”
“아니, 아버지.”
서은이 새빨간 껍질을 벗기던 사과를 내려놓았다.
평일 저녁 갑작스럽게 희숙에게 저녁이나 먹자며 본가로 들르라는 호출을 받은 건, 모처럼 시간을 내 가게로 찾아온 주영과 커피를 마시며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주영의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고 있을 때였다.
별일은 아니고 아버지가 네 얼굴을 보고 싶어 하셔서.
얼굴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으니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창립 기념 파티에서 그 소란을 겪고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쩐지 수화기 너머의 희숙이 뜸을 들이는 것 같은 느낌에 전화를 끊고도 조금 이상하던 차다. 그렇게 약속한 시간에 본가를 찾았건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은퇴 선언이라니. 서은이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채로 두 눈만 끔벅거릴 때였다.
“나는 다 정리하고 네 엄마하고 시골로 내려갈 거야. 가서 농사도 짓고, 좀 여유롭게 살고 싶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
해인이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가 뭐예요?”
그랬다면 창립 기념 파티에서 그렇게 해신 일가와 친밀하게 군 건 뭐였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형국을 보자, 그 곁에 앉은 희숙이 대신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오랜 숙원이었어. 은퇴하면 고향에 내려가서 소소하게 농사짓고 조용하게 사는 거.”
“아니, 그래도 아버지 지금까지 잘해 오고 계셨는데….”
“너희 아버지도 힘드셔. 평생을 직장 생활하시느라 기계처럼 살았는데, 이만하면 아주 훌륭하지. 이제 은퇴하시고 엄마랑 꽃구경도 가고, 미뤄 뒀던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우리 편하게 살 거야. 엄마는 그러기로 했어.”
안온하게 전해지는 희숙의 이해심에 형국이 아내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엄마!”
“아니, 아버지!”
“누가 너희더러 우리 노후 책임지라고 했니?”
동시에 해인과 서은이 입을 모으자, 희숙이 미간을 찌푸리며 핀잔했다. 무어라 덧붙이려던 두 딸이 입을 꼭 다물었다.
아직 창창하신 아버지가 은퇴를 하신다니 별안간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류태한이 갑작스럽게 가게로 찾아온 것도 이것 때문일까. 서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굴지의 해신 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내 온 아버지가 평생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왔다는 건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부산 기장에서 네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평생을 가장으로 살아온 주형국이었다. 오로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달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노고는 더 듣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자식들을 키워 낸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그의 성공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동생들의 희망으로서 자리를 지켜 내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지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동생들을 입히고 가르치며, 시집 장가를 보내고도 여전히 구차한 삶을 버리지 못한 이들까지 거두어 먹이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하루를 편히 쉬지도 못하고, 스스로에게는 인색했던 분이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에 서은은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도 못했다. 그저 머릿속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이제부터 어떤 포지션으로 부모님을 부양할지에 대한 계산이 복잡하게 뒤섞일 뿐.
자식에게 손을 뻗지 않겠다고 말은 해 왔지만, 평생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모두 쉬지 않고 달려온 아버지와 알뜰하게 살림을 해 온 어머니 덕이라는 걸 서은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은퇴는 언제로 계획하고 계신 건데요?”
“올해 안으로. 그러니 은퇴 전에 누구라도 데려와.”
“아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반년밖에 남지 않은 기간을 두고, 덧붙인 형국의 제안에 두 딸이 황당하고 허탈하게 그를 응시했다.
“이제 갈 때도 됐잖아.”
“…….”
서은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래, 내 친구 미숙이 딸은 이번에 아기 낳았다더라. 정규네도 손자 봤고, 나만 없어, 나만. 나만 사위도 없고, 손주도 없고. 동창 모임 할 때마다 이젠 다들 손주 자랑만 해.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몰라. 그거 은근히 소외감 느낀다니까.”
“그래, 이만하면 오래 기다렸지.”
갑자기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나 싶더니, 형국을 비롯한 나머지 식구들의 시선이 서은에게 쏟아졌다. 주해인, 너까지 왜 이래. 알 수 없는 위기감에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서은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좌로, 우로 살펴도 기대감 가득한 시선은 사방에서 서은을 압박했다.
“…….”
서은은 뜻밖의 통보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약속은 지킬 수 있을 때나 하는 거다.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갑자기 누구라도 데려오라니. 딱히 뇌리에 스치는 얼굴도 없었다. 설마 이럴 거라고는 예상을 못 해서, 아버지의 은퇴가 갑자기 제 결혼으로 귀결될 줄은 몰라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숨을 죽였다.
기껏 잘 먹은 게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최후통첩 같은 형국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대답을 고를 무렵, 근엄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서은이, 알아들었냐?”
난데없이 폭탄이 떨어졌다.
***
“나 소화제 좀.”
설거지를 마치고 해인의 방문을 열자, 입 안에 약을 털어 넣던 해인이 똑똑, 캡슐 두 알을 꺼내 건넸다.
“하, 죽겠다.”
“나도 체했어.”
먹은 건 맥주뿐이지만, 해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넌 알고 있었어?”
“내가 알았으면 언니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겠지.”
꿈에도 몰랐다며 해인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문을 닫은 작은 방 안에서 자매는 심각했다. 서은은 해인이 누운 침대 앞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셔?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시다거나.”
“건강은 이상 없으시댔어. 얼마 전에 건강 검진 결과도 괜찮다고 하셨거든. 아, 물론 혈압이 높으셔서 그건 계속 약을 드시고 있긴 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니 아버지 은퇴 전에 누구라도 데려와.”
마지막 쐐기를 박은 음성이 떠오르자 허, 하고 웃음이 터졌다. 명백한 경고였다. 이만하면 오래 기다렸다는 형국의 말이 이명처럼 귀에 맺혔다. 서은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때가 된 거지. 내가 늘 염원하던 형부를 맞이할 때가.”
“야, 주해인.”
“그러니까 빨리 누구라도 데려와 봐. 올해 들어서는 청첩장 날아올 때마다 엄마 종일 우울해하신다니까.”
“없는 사람을 갑자기 어디서 데려와?”
“그게 이제, 언니가 발휘해야 할 능력인 거지.”
숨겨 온 비장의 카드 같은 게 없냐며, 해인이 속을 긁었다. 서은은 복잡한 머리를 싸매고 궁리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하신 건지. 부모님의 심중을 헤아려 보려 애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고?”
“일은 무슨. 그냥 엄마 아빠는 이제 언니가 결혼했으면 하시는 거야.”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결혼을 운운하는 부모님의 태도는 서은에게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언니 심란할까 봐 그냥 나만 알고 넘어갔거든. 근데 엄마 요새 좀 많이 초조해하셔. 주변에서 자꾸 결혼 소식 들리면 언니는 언제 가냐, 뭐 그런 거 어른들끼리는 의례적으로 묻곤 하잖아.”
“…….”
“물론 결혼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하물며 장난도 아니란 거 알지. 지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결혼식 이어지는 거 매년 사계절이면 있는 일이야. 근데….”
말끝을 흐리는 해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서은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당분간 부모님한테 신경 더 쓸게.”
“근데 언니.”
해인이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서은을 응시했다.
“이건 근본적으로 개혼이 성사돼야 사라질 근심이야.”
딱한 감정과 기대감이 반반 섞인 눈길을 보내며 해인이 덧붙였다.
“어려서부터 그랬잖아. 우리 아버지 목적한 바는 반드시 이루셔야 두 다리 뻗고 주무시는 분이라는 거. 그런 아버지의 최애가 누구야. 언니야. 아마 지금 아버지 인생 최대 목표는 언니를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시켜서 잘 사는 거 보시는 걸걸. 아버지 건강이 천년만년 허락된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현직에 계실 때 가는 게 좋은 건 사실이니까.”
“…….”
“내리사랑 몰빵으로 받았으면 보답할 때도 됐고. 안 그래?”
이런 순간이 도래할 때면 속이 갑갑했다. 공기가 되어 흩어지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승승장구하는 아버지의 벌이에도 불구하고 빡빡하게 살아야만 했던 시절,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길라치면 모든 기회는 서은에게 주어졌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던 회사원 월급으로 슬하의 자식 둘 중 하나에게 올인한다면 당연히 맏이인 서은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서은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 과외 선생님을 붙여 주고, 그림에 흥미를 가지면 미술 학원에 보내 주었다. 음계에 관심을 가졌을 땐 당장 집에 피아노를 들였고, 그런 식으로 악기를 섭렵하는 동안 모든 혜택을 독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세종 문화 회관에서 열린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돌아와 무용이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다음 날 희숙과 함께 당장 학원에 보내 준 것도 아버지였다.
집안의 모든 기대와 혜택이 돌아오는 동안 해인은 방목형 육아 속에서 조용히 제 할 일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탐색하고 준비하면서.
해인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느 날 문득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반항과도 같은 선포를 한 날. 동생은 결투를 신청하듯 아버지와 단둘이 나가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음악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며 브이를 그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언니, 이제 효도하자.”
“결혼이 어떻게 효도야?”
“무슨 소리? 인생 최고의 효도지. 나도 근사한 형부 갖고 싶어. 내 친구들이 가끔 형부 찬스 쓸 때마다 부러워 죽겠다구. 물욕은 돈이라도 써서 해소할 수 있지, 형부 욕심은 언니가 아니면 해결해 줄 수 없단 말이야.”
해인은 소원이라며 천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게 소원이라고 하면 꼭 이뤄 줘야 하는 거냐고.
서은은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고등학교 안 가고 독학해서 음악 하겠다고 투쟁할 때 이후로 이렇게 간절해 본 적이 없어, 언니.”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양심에 가시 같은 가책이 비죽 솟았다. 숙연한 침묵 속에서 자매는 각기 사념에 잠겼다.
희숙의 말대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게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이라는 건, 서은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주서은의 스물두 살. 동생과는 비할 바 없이 온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요란하게 살아왔던 삶을 접고 말았던 그때. 자랑스러운 집안의 기둥이 되고자 했던 서은의 좌절 이후, 이제 우리 집에 예체능은 없다고 못 박았던 아버지의 심경이 어땠을지.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서은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침대 밑에 놓인 보면대와 그 앞에 소중하게 놓인 반도네온을 응시했다. 이젠 해인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악기를 보며 늘 부채감처럼 떠안고 있던 감정이 복잡하게 피어올랐다.
장녀의 의무. 맏이의 책임감. 그런 것들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그래도 요즘이 어떤 시댄데. 비혼으로서의 삶도 존중받으며 오히려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 가는 추세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는 걸, 서은은 알고 있었다.
결혼. 그게 지금 당장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의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하나.
그저 하루하루 무탈히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입 밖에 내지 못한 감정들이 거미줄처럼 속에서 복잡하게 엉겨 붙었다.
멍하니 악기를 향한 채 생각에 잠긴 서은을 보며, 해인이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불편한 적막을 가르고 서은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볼게.”
“언니 부담 가지라고 한 소리는 아니야. 다 알지. 언니 충분히 힘든 거 알아. 근데 내가 뭐라도 해 주고 싶어도 스물다섯에 언니 대신 결혼을 할 수는 없잖아.”
해인이 리더로 있는 재즈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해인의 애인은 대학 시절부터 함께 음악을 해 온 사이였다. 동종 업계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오랜 관계가 주는 편안함에 두 살 많은 남자 친구는 좀 더 빨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지 않나.
“그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주해인. 넌 아직 해야 할 게 무궁무진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 무렵의 서은은 두 번째 대학에 진학해 하루가 마치 48시간인 것처럼 살았다. 한국대 무용과에 진학해 2학년 1학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예 새롭게 시작하고자 진로를 달리했을 때니까.
그런 부담을 벌써부터 동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개혼은 서은의 몫이었다.
“그전에 연애부터 하라구. 상식적으로 누굴 만나야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라구요. 근데 언니는 아무도 만날 생각을 안 하잖아.”
문제는 바로 그것이라며 해인이 푸념 같은 충고를 늘어놓았다.
“가만있으면 품에 별이 떨어지냐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평생 그렇게 수절하고 살 거야?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답답하단 듯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치는 해인은 곧 제가 뱉고도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현듯 튀어나온 말 한마디에 과거가 견인된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 퓨즈가 나간 것처럼 정신을 잃었던 순간. 이미 까마득히 잊힐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문득 떠오르는 그 순간은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서은은 급격히 고요해졌다. 굳은 뺨이 창백하다. 무섭도록 잠잠한 서은을 보며 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의 아니게 서은의 상처를 헤집은 꼴이었다.
“하여간 입이 방정이야. 미안.”
손바닥으로 제 입을 찰싹 내리치는 해인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며 사과했다.
“아냐.”
사실인걸. 해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서은은 다만 씁쓸하게 웃었다.
“그니까 내 말은, 아버지가 걱정되니까 좀 더 신경 쓰잔 그런 뜻이었어.”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허공으로 뻗어 온 해인의 주먹에 서은이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갖다 댔다. 콩, 도드라진 뼈마디 사이로 애정과 동맹, 그 어딘가에 걸쳐 있던 우애가 각인되었다.
유난히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
60분이 모여 만들어지는 한 시간. 그 시간이 스물네 번 모여 완성되는 하루와 그 하루가 다시 일곱 번이 모여 채워지는 일주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본가를 다녀온 뒤로 한동안은 잠잠했다. 갑작스럽게 결혼 타령을 한 게 미안했던지 희숙에게는 몇 차례 연락이 왔다. 바쁜 걸 핑계로 희숙의 전화를 대충 받아넘기며 평정을 되찾을 무렵, 평정을 깨뜨린 건 한밤중에 걸려 온 해인의 전화였다.
- 언니, 아버지가 이상해.
자정을 넘겨 술에 만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한동안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서 있다고, 아무리 말을 걸고, 등을 밀어 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하염없이 베란다 아래를 바라본다는 연락이었다.
“내가 아버지 따로 찾아뵐게.”
서은은 해인을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은퇴를 결심한 이유가 반드시 있으리라.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이 하나씩 늘어 간다는 점이 모종의 신호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리하여 발길이 닿은 곳은 해신 호텔 아케이드.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오전에 집을 나서자마자 이곳을 찾은 건 달리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세요?”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점원 한 명이 친절하게 서은에게 다가왔다.
“남자 넥타이를 보고 싶은데요.”
“선물하시게요?”
“네.”
용도를 물은 점원은 색색으로 정렬된 실크 넥타이를 보여 주었다. 형형색색 톤이 정렬된 넥타이 사이에서 서은은 포근한 핑크색 넥타이를 골라내었다. 부드럽게 광택이 흐르는 핑크 톤의 바탕에 브랜드의 로고가 빽빽하게 새겨진 디자인이었다.
“아버지께 선물하려고 하는데요. 이건 60대가 쓰시기엔 요란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고객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넥타이 색상이 많이 튀지 않는 차분한 핑크색인 데다, 로고가 경쾌한 느낌을 살짝 눌러서 오히려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제품이에요. 이번 시즌 신상인데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젊은 층에서도 인기가 많지만, 어르신들 선물로도 반응이 좋거든요.”
“제 눈엔 역시 이게 예뻐서.”
서은이 처음 고른 핑크색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었다.
해인의 전화도 전화지만 본가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머리에서 아버지의 은퇴 선언이 떠나질 않았다. 편안한 노후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씀과 다르게 어쩐지 그날 저녁 아버지는 침울했다. 그리고 간밤의 폭음까지.
“이걸로 할게요. 포장해 주세요.”
그런 아버지를 위해 고른 핑크색 넥타이가 잠시나마 위안이 되길 바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선물을 고르는 것도 오랜만이다. 몇 년 전 주형국이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브리프케이스와 지갑을 새로 사 드렸지만, 여전히 그는 서은의 선물을 고스란히 오렌지색 상자에 넣어 둔 채로 장롱 깊은 곳에 간직했다.
매번 볼 때마다 손때 묻은 오랜 가방을 고수하는 아버지께 새 걸 들지 왜 아직도 그걸 버리지 못했냐며 물을 때마다, 주형국은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기만 했다.
아까워서 그래.
진귀한 보물을 대하듯 흐뭇해하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더 심란했다. 생각해 보면 주형국이 아낌없이 사용하는 건 겨우 넥타이 정도였다.
“우리 딸내미가 힘들게 돈 벌어서 선물한 건데. 나중에 좋은 자리에나 써야지.”
자식을 생각하느라 자신을 지워 버린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입 안이 씁쓸했다.
그때였다. 매장의 자동문이 열리며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누군가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과 함께 매장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곳곳에 흩어졌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추고, 서둘러 모습을 드러낸 점장이 깍듯하게 달려 나와 환대를 한다.
“어서 오세요, 상무님.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희가 준비를 해 뒀을 텐데요.”
“아닙니다.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서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들어선 남자는 류태한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근사한 슈트를 차려입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그는 점장을 향해 너그럽게 웃었다.
“지난번에 보내 드린 셔츠는 어떠셨어요?”
“사이즈도 잘 맞고 좋던데요.”
“다행이네요. 마침 오늘도 국내에 딱 한 점 들어온 제품이 있는데 보자마자 상무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해 뒀습니다.”
“감사합니다.”
태한이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넥타이 코너 앞에 선 서은을 발견한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너그럽던 그의 눈가로 의아한 빛이 스쳤다. 그래 봐야 고작 열 걸음 남짓의 거리. 간극을 좁히는 대신 빤한 시선이 전해졌다. 서은은 머쓱한 감정을 감추고 입술을 당겨 웃었다. 이윽고 그가 빙긋 입술을 기울이며 까닥하고 고개를 숙인다. 서은 역시 가볍게 묵례했다. 주변의 시선이 서은에게 모여들 즈음이었다.
한 박자 늦게 열린 입구를 통해 여자 하나가 안으로 성급히 들어섰다.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
또각또각 매장을 울리는 하이힐 뒷굽 소리가 다급하다. 여자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은 듯 태한에게 곧장 다가가 그의 팔에 제 팔을 은근히 밀어 넣었다. 모델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체형을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장신에 덩치가 큰 태한의 곁에서 한없이 가녀리게 보인다.
오랜 시간 무용을 한 듯 가지런히 정돈된 우아한 선을 가진 몸. 서은은 마치 연인처럼 태한에게 몸을 밀착한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빠가 골라야 하는 거 알지? 난 남자 물건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니까.”
문득 가게를 찾아 시작을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던 태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아마도 그 프리지어 꽃다발의 주인인 듯싶었다. 빠르게 상대를 탐색하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때, 서은은 여전히 태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짙고 깊은 새카만 눈동자. 포박당한 느낌이 들게 하는 눈이다.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외면하려는 찰나, 태한의 팔짱을 끼고 선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혹시 주서은 아니야?”
팔짱을 뿌리치고 순식간에 여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 기억 안 나? 민정이.”
기억난다. 한림은행 은행장을 지낸 조부와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로펌을 운영하는 아버지, 예술 대학의 교수인 어머니를 둔 무용과 수석이었다.
서은보다 키가 큰 여자는 턱 끝을 당기고 서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곡선을 그린 수려한 외모와 웃을 때 오른쪽 뺨에 깊게 팬 보조개를 보니 정확하게 기억이 났다.
“어, 기억나. 민정이.”
“어머, 야, 너무 반갑다. 너 어떻게 지내? 그때 이후로 연락이 안 돼서. 종종 생각나긴 했거든. 너 그렇게 자퇴하고서 소식 궁금해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반갑게 안부를 묻는 한민정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들썩거렸다.
“잘 지내지? 우리 몇 년 만이지? 7년? 아니, 8년이다, 얘.”
“그러게. 반갑다.”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민정을 마주했다.
“쇼핑 왔어?”
“응, 선물 사려고.”
“남자 거네?”
서은이 서 있던 남성용 코너를 둘러보며 민정이 웃었다.
“남편?”
“아직 결혼 안 했어.”
“아아, 애인 선물 고르는구나?”
아버지, 라는 말을 하기가 껄끄러워 서은은 난감하게 웃었다. 이런 곳에서 자퇴한 대학 동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라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최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두 손을 꼭 그러쥐었다.
“다리는 이제 괜찮은가 봐?”
호기심이 역력한 한민정의 눈이 서은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서은은 일부러 여유 있게 입술을 슬쩍 끌어당겼다. 곤란하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제 멀쩡해.”
“너 그렇게 되고 갑자기 자퇴해서 말이 많았거든. 다리를 다시는 못 쓰게 됐다고 하기도 하고, 유학 갔다는 말도 있었는데 잘 사는 것 같네. 살도 오르고, 보기 좋아.”
한민정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들쑤셨던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하필이면 몇 걸음 뒤에서 류태한이 모든 걸 듣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했던 조금 전과 다르게 쏟아지는 시선은 진중하기만 하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시선에 서은은 문득 가슴에 돌덩이 하나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탓인가. 어쩌면 기분이 저조한 탓일지도. 참견할 생각 따위는 없는 듯 무심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 맞다. 영웅이랑은 연락해? 걔 곧 결혼해.”
갑작스레 터져 버린 폭약 같은 소식에 서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서은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민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나치게 차분한 얼굴 아래로 인내가 깔렸다.
“아니, 딱히.”
“하긴. 동기들 소식은 잘 모르겠다. 내가 애들 만나면 소식 전해 줄게.”
“아니, 괜찮아. 나 이제 가 봐야 하거든.”
마지막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서 최대한 정중하게 또박또박 목소리를 냈다.
“그래. 나도 일행 있어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보자.”
가볍게 손을 흔든 민정이 태한에게 되돌아갔다.
“아, 피곤하다. 어제 너무 무리했나 봐. 오빤 괜찮아?”
허탈하게 굳은 서은의 귓가로 남녀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흘러갔다. 서은은 죽은 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갑자기 발끝으로 기운이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파삭, 하고 꺼져 버릴 것 같아서 잠자코 섰을 때 선물 포장을 마치고 다가온 점원이 서은의 안색을 살폈다.
“고객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하신데.”
“괜찮습니다.”
물건을 건네받자마자 도망치듯 매장을 벗어났다.
서늘한 바람 속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차츰 정신이 들 무렵 쇼윈도에 멍하니 넋을 놓은 서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형편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암흑 속을 헤매던 그 시절과 조우하는 것 같았다. 창에 비친 서은은 한없이 작고 볼품없었다. 그 모습이 싫어 고개를 돌리려는데도 도무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은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너는 이제 끝났어.’
반사된 유리창 속에 박제된 서은이 잠식당하고 있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는 발끝으로 설 수 없는 그 시절 그때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럴 리가 없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