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ㅤ오후 햇살이 뺨을 긋고 지났다. 5월 초의 날씨는 포근함과 서늘함이 공존했다. 올해는 비교적 이른 여름이 시작될 거라던 예보처럼 부쩍 후텁지근해진 공기에 며칠 전의 서늘함은 없었다.
서은은 바람 속에 묻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전방으로 가까워지는 호텔 입구에 마음이 단단해진다.
역시 안 내키는데.
장충동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건물은 아버지가 지난 30년을 헌신한 해신 그룹의 창립 45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된 곳이었다.
오늘 서은은 이곳에 올 계획이 없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오늘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당부를 들어야만 했지만, 늘 엄마 희숙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듯 이번에도 그랬다.
“그 꼴을 하고 괜찮겠냐?”
나무가 우거진 호텔 입구로 진입한 차가 둥글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로비 앞에 멈춰 섰다. 용인에서부터 서울까지 운전대를 잡은 승원은 아무래도 서은이 마음에 걸리는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이상해?”
“말이라고 하냐. 이게 너의 현실이다.”
승원이 조수석의 선셰이드를 내려 주었다. 거울 속 모습과 눈이 마주친 서은은 잠시 굳었다. 화장 하나 하지 않은 민낯에 발갛게 익은 뺨. 누가 봐도 행사에 초청된 사람의 몰골은 아니었다.
“얼른 내려.”
“잠깐만.”
서은은 서둘러 머리 끈을 풀고 묶었던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슥슥 빗어 정돈했다. 셔츠를 탁탁 털자 미처 털어 내지 못한 봉사의 흔적이 희미하게 부유했다. 좁은 차내로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이게 대체 무슨 유난이냐는 듯 승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푸,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신경 쓰이냐?”
“어, 이제 와서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 생각하니까 등골이 오싹하거든.”
서은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창립 기념 파티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화통이 얼마나 불이 나도록 울렸던가. 아예 오지 않을 심산으로 일찌감치 다른 스케줄을 잡았건만, 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란 한 서린 음성 메시지에 결국은 차를 돌렸다.
서은의 머리로 식순이 대강 흘러갔다.
지금쯤이면 경건한 축사를 지나 식사까지는 마쳤겠고, 분위기는 다소 풀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둘러 가방에서 꺼낸 립글로스를 바르고 채비를 마쳤다.
“부디 살아 돌아오도록.”
“그래, 살아서 만나자.”
사지에 내몰린 전우와 도원결의를 하듯 승원이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서은은 그 주먹을 콩, 마주치곤 빙긋 웃었다. 그러나 차 문을 열었던 서은은 몰아치는 바람에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도로 차 문의 손잡이를 당겨 닫았다.
“왜.”
“후우, 안 되겠어. 이렇게 갔다간 엄마한테 맞아 죽어. 여기 뜨자, 승원아.”
“장난해?”
승원의 눈썹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온 김에 얼굴은 비치고 와. 이러려고 내가 귀한 시간 낭비해 가며 딱지까지 끊으면서 과속한 줄 알아?”
“벌금 내가 낼게. 근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안은 진짜 상상 초월이라고. 그런 곳에 이런 꼴은 너무….”
“알지. 너 지금 밑도 끝도 없이 구리다는 거.”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승원의 모습에 서은의 기세가 꺾였다.
“그래도 어쩌겠냐. 너희 아버님께서 귀한 장녀만을 목 빼고 기다리신다는데.”
딸 사랑이 남다른 주형국은 서은이 출발한 시점부터 경부 고속 도로를 지나, 한남 대교를 건너 장충동에 다다르는 순간마다 희숙을 통해 위치를 확인했다.
“아버지 보시면 기절하실 텐데.”
“그게 오늘 너의 운명이라 생각해라, 친구야.”
승원은 뒤늦게 굳어 버린 서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머쓱한 위로 사이로 경쾌한 뮤즈의 음악이 정신 사납게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어쩌다 이렇게 됐어?
비수 같은 가사가 서은을 조롱하듯 고막으로 파고든다. 희숙의 불호령에 오는 동안은 도착에만 급급했지만, 도저히 이건 아니었다.
“어차피 되돌리긴 늦었고.”
그때 승원이 긴 팔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용감해져라, 주서은.”
차창 밖 줄지어 선 고급 승용차와 정돈된 호텔 풍경이 말끔했다. 그곳을 누비는 모두가 가지런히 정돈된 풍경과 하나같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수한 차림의 서은만이 옥에 티 같았다.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놉. 갈 거야.”
“엄마만 보고 나올게.”
“과연.”
승원이 고개를 흔들며 창문 너머 영빈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국내 최고 기업 중 하나인 해신 그룹 소유의 호텔. 장충동 언덕 위에 곧게 뻗은 호텔 아래로 장방형으로 펼쳐진 한옥 건물. 해신 그룹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영빈관을 훑어보던 승원이 다시 고개를 돌려 평범하기 그지없는 서은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뭣하면 진한이를 방패로 쓰도록. 너희 어머니 진한이한테는 관대하시니까.”
학창 시절부터 함께해 온 서은과 승원, 진한과 주영은 10년이 넘도록 끈끈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 네 명 중 하나인 진한은 이곳 해신 호텔 오너의 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류진한이 어디서든 환영받는 건 해신가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든 호감을 사는 그의 반듯한 인성 때문이었지만. 어른들에게 호감도가 높은 진한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희숙의 총애도 독차지했다.
“진한이는 집안 행사 참여하느라 바빠서 나 신경 쓸 겨를도 없을걸.”
“너도 마찬가지야.”
“오너 일가에 비할 바냐.”
“나 같은 소시민 입장에선 그게 그거야.”
같은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오너 일가보다 사장단 일가인 서은이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입장임을 인지시키는 음성이 명료하다. 토요일 점심 용인에서 서울까지 빛처럼 돌파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신 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내는 서은의 아버지. 그 밖에도 수십 개의 계열사 사장단과 그들의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때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그러니 이런 상태로는 아버지 위신에 흠집만 낼 게 뻔했다.
서은은 그간 아버지 주형국을 따라 들락였던 행사를 생각했다. 주최 측은 늘 그날이 세상의 마지막인 듯 호화로운 자리를 마련했고, 참석한 이들의 수준도 비슷했다.
“그만 뜸 들이고 가.”
서은이 오가지도 못하고 한숨을 내쉴 때 승원이 채근했다.
“잠깐만.”
“잠깐이고 나발이고. 그러게 여벌을 왜 안 챙겨선.”
그야.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으니까.
“괜히 나까지 욕먹게 하지 말고 들어가서 곱게 있어. 나이 서른이 다 돼 가는 마당에 사귀는 사람도 없이, 좋을 대로 어울려 다니는 것 좀 그만하라고, 벌써 너희 어머니 18번 들린다. 어차피 너한테 신경 쓸 사람 아무도 없어. 만약에 오늘 너한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지? 단단히 미친 변태 새끼야. 그런 놈은 꼭 조심하도록.”
명심하란 듯 덧붙이는 승원은 무어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서은을 등 떠밀었다.
“가.”
호텔 앞에 줄지어 늘어선 고급 승용차들과 비교되는 커다란 지프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창문에서 서은의 가방이 휙 날아왔다. 가뿐하게 가방을 품에 받아 안고 서은은 씩 웃었다.
“태워 줘서 고마워. 운전 조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렇다면 가 보는 수밖에. 손을 흔들며 승원과 인사한 서은이 행사가 열리는 영빈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신 그룹 창립 45주년을 축하합니다.
목적을 알리는 안내판 곁으로 창립일을 축하하는 화환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긴 행렬로 늘어선 화환과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호화스러운 위압감에 순간이지만 짓눌렸다.
역시 오늘은 봉사 활동을 건너뛸 걸 그랬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주서은!”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서은은 절망감에 후, 하고 큰 숨을 내쉬었다. 로비 앞을 서성이던 희숙이 서은을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너 옷이… 이게 뭐야?”
소매를 접어 올린 흰 옥스퍼드 셔츠에 청바지. 흙먼지가 덕지덕지 엉긴 운동화를 신은 서은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다. 차마 입을 떼지도 못하고 굳은 상태로 서은을 살피는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희숙은 아마도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너! 또 봉사 활동 다녀온 거야?”
한참 만에 겨우 전화를 받은 서은은 잠깐 볼일이 있어 늦어질 거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런 처참한 몰골일 줄이야.
날벼락 같은 호통을 쏟는 대신 희숙은 언성을 낮추었다. 서은이 배시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른 아침부터 승원과 용인에 있는 유기견 센터에 들른 일정은 한 달에 두 번. 벌써 수년째 둘째와 넷째 주 토요일마다 약속처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몇 해 전, 불미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승원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1년 중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승원에게 힘이 되고자, 그가 한국에 체류할 때마다 동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 자원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사료를 배식하고, 견사를 청소하며 톱밥을 깔아 유기견들을 돌보는 일. 켄넬 안에서 뒤엉킨 강아지를 옮기고, 견사를 청소한 뒤 밥그릇을 닦아 주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당연히 이곳에 오지 않을 심산으로 얄팍한 계산을 깔아 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은 뒤 유기견들의 산책을 시키기 직전, 전화에 불이 났다. 서은의 것뿐만 아니라 승원의 전화까지. 당장 튀어 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란 엄포에 결국 서은은 오전 타임을 끝으로 봉사 활동을 종료해야 했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그러니까. 오늘 우리 안 여사 기가 막히게 우아하네. 오전에 숍 들렀어? 세상에 어쩜 모공이 하나도 안 보여. 누가 엄마를 곧 환갑 앞둔 사람으로 보겠어? 열 살이 뭐야, 스무 살은 젊어 보이지. 우리 언니라고 해도 믿겠다, 엄마.”
곱상한 트위드 투피스에 우아한 진주 귀고리. 기품 있는 착장과 더불어 품격 있는 몸가짐이 과연 자리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먼저 선수를 친 서은을 향해 희숙이 욱하고 치받치는 것을 뱉는 대신 입술을 꽉 눌러 닫았다.
“거기는 너 아니면 봉사할 사람이 없다니?”
“응, 없어요. 항상 손이 부족한 곳이야. 일주일에 두 번을 가도 모자라.”
“얼굴은 이게 뭐야. 촌년같이. 어휴, 내가 못 살아.”
희숙이 탄식과 함께 파우치에서 화장품을 꺼내 서은의 얼굴에 성급히 펴 발랐다. 이런 자리를 질색하는 서은을 알기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지만, 설마 개털을 휘날리며 등장할 줄이야.
“내가 이럴까 봐 한 달 전부터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내가 한 달 전부터 안 온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잖아.”
“너! 이놈의….”
기집애, 하고 목소리를 꾹 누른 희숙이 다시금 입술을 잘근 물었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녀에게 쏟아졌다.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이게 뭐야. 아버지 회사 창립 기념 파티니까 중요한 자리라고 내가 어제도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잖아.”
“미안, 못 봤어요.”
읽지도 않고 지워 버린 메시지를 떠올리며 서은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희숙의 눈가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조금 더 하면 폭발하겠구나. 본능적으로 짐작한 서은은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시간이 좀 여유로웠으면 예쁘게 하고 왔지. 근데 엄마가 하도 빨리 오라고 성화여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어.”
“하여간 나는 승원이랑 너,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엄한 짓 하는 거 정말 스트레스야.”
“엄한 짓이라니. 엄마, 버려진 생명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존엄하고 보람찬….”
“입 다물어, 기집애야!”
철퍽. 곧장 서은의 등으로 손이 날아왔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찰진 소리. 묵직한 타격음은 경건한 봉사 활동의 취지를 단숨에 박살 냈다.
“아야!”
서은이 일부러 과장되게 휘청거리며 엄살을 떨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리며 모녀를 보았다. 희숙은 얼굴이 새빨개져 분을 삭였다. 이미 면역이 생긴 희숙의 손바닥쯤이야 별것도 아니었지만, 희숙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탁월한 연기였다.
“어휴, 속이야.”
한숨을 내쉬는 희숙을 보며 서은은 씩 입술을 당겨 웃었다.
“맞고도 좋댄다. 어?”
“좋기는. 내장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구. 우리 안 여사 아직 손맛 안 죽었네.”
“내가 못 살아.”
희숙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들어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게 내가 안 온다고 했잖아요.”
“그 봉산지, 뭔지를 꼭 오늘 같은 날에도 해야 했냔 말이야. 아버지가 널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제발 오늘만큼은 아버지 위해서 신경 쓰라고 했잖아. 정장은 못 입을망정 청바지에 운동화가… 어휴!”
다시 봐도 기가 찬다는 듯 속사포 같은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서은은 더 큰 잔소리 폭탄이 이어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했다.
“나 여기 온 건 확인하셨으니까 먼저 갈게요.”
“가긴 어딜 가? 아버지가 너만 기다리셔. 아버지 얼굴은 보고 가.”
“이 꼴로?”
“그러게 말이다. 그 꼴로, 어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어 낸 희숙이 길 건너 매장에 가서 뭐라도 사 입으라며 신용 카드를 꺼내었다.
“거기 옷 한 벌에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안에 해인이 있죠?”
“말 돌리지 마, 기집애야. 해인이는 아침부터 저 알아서 미용실까지 다녀오더라.”
“역시 우리 집 기둥은 내가 아니라 해인이라니까.”
동생이 대신해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니 안심이었다.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해인은 제법 유능한 연주자였다. 잦은 공연으로 드레스와 세팅이 익숙한 음악가이니, 이런 자리에도 면역이 생겼겠지만 서은은 아니었다.
“서은아.”
“엄마, 우리 피차 결말을 알고 있는 일에 힘 빼지 맙시다.”
눈치가 빤한 서은이 애살맞게 시선을 찔러 넣으며 속삭였다. 혹여 어느 집 자제를 갖다 붙이기라도 할까 봐 먼저 선을 그어 냈다는 걸. 그 속셈을 꿰뚫은 희숙이 서은의 머리카락에 붙은 톱밥을 떼어 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장단이 가족 단위로 모이는 자리는 흔치 않았다. 각 계열사를 대표하는 이들의 가족. 최소한 비슷한 수준의 또래를 만날 기회였다. 잘만 하면 근사한 혼맥으로 맺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왕이면 괜찮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희숙의 심정이었다.
물론 욕심이라는 건 희숙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도 딱히 없는 스물아홉의 딸에게 조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는 게 욕심이면 어떤가.
슬슬 혼담이 오갈 시기가 되자 서은 또래의 자녀를 가진 주변에서 결혼 소식이 빈번하게 들려왔다. 올봄만 해도 다녀온 결혼식이 몇인데.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딸을 보니 가슴에 돌덩이가 박힌 것 같았다.
“부모 속도 모르고.”
“아니까 목에 칼이 박히는 것 같은 심경을 참고 견디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날카롭게 곤두선 희숙의 품에 파고드는 딸의 애교도 오늘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네가 뭣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어? 이런 데 와서 두루두루 둘러보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눈도장이라도 찍고, 그러면 좀 좋아?”
“어우, 우리 엄마 엉큼하셔라.”
희숙의 목적을 확인한 서은이 입술을 늘어뜨려 웃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할 일을 하시면 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고. 나 이런 자리 불편해요. 알잖아.”
“사람이 어떻게 저 좋은 일만 하고 살아?”
“1절만 해요. 1절만.”
이제껏 키득대던 서은의 얼굴이 한층 진지하게 변했다.
“어릴 때 이미 질리도록 겪어 봤잖아.”
부모 손에 이끌려 곱게 단장하고 조용히 자리를 지킬 때마다 하루 종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비슷한 또래의 어느 집 자제들은 물과 기름처럼 하나같이 섞이기 어려웠다. 뭣 모르는 애들 사이에서도 카스트처럼 급이 갈리는 걸 알고 하는 소린지.
물론 평범한 가정 출신인 희숙이기에 더 성화일지도 모른다. 아버지 주형국을 만나 3년 연애 끝에 결혼한 뒤로 평생을 남편의 삶에 헌신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창립 기념일은 내년에도 돌아오잖아. 내가 내년에는 풀 세팅해서 우리 엄마 위신 세워 드릴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잠깐만이라도 들어갔다 가.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너는 안 왔냐고 물어보시는데 내가 얼굴이 다 화끈거려서….”
“정말 이렇게 인사드려도 돼?”
서은이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 희숙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또다시 어휴, 하는 한숨이 이어졌다.
“인사는 됐고, 잠깐 들어왔다 가. 밥도 안 먹었을 거 아냐?”
“응, 배 엄청 고파.”
서은이 주린 배를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내내 한숨을 쉬면서도 희숙은 서은의 손을 꼭 붙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
피로연장은 예상대로 호화로웠다. 로비를 통과해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는 길목까지 수국이 한창인 제주도의 어느 길가를 옮겨 놓은 듯 아름다웠다. 푸릇하게 잎이 만개한 나무 아래로 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늘 느끼건대 해신 그룹은 과하다. 연례행사로 돌아오는 일들조차 톱스타의 초호화 결혼식보다 화려하다니. 그럼에도 초록으로 싱그럽게 물든 광경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파주에서 플랜테리어 카페를 운영하는 육송이의 공방을 찾았을 때처럼, 머리 위로 쨍하게 떨어지는 햇살 아래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흔들려 나는 향기가 기분을 띄웠다.
서은은 들꽃이 아름드리 피어난 듯한 풍경 속에서 조용히 해인이 있는 곳을 찾아 착석했다. 정도를 넘어선 지각에 해인이 동그란 눈을 홉떴다.
이제 온 거야? 그 꼴을 하고? 화장도 안 했니?
정지한 시선 속에 담긴 뜻을 묵인하고 서은은 배시시 웃었다.
“너무 그런 얼굴로 보지 마. 이래 봬도 급하게 찍어 바른 거니까.”
근사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해인은 새벽부터 숍에 들렀다는 말처럼 오늘은 더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세련된 동생을 보며 서은이 머쓱해하자, 곧 해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씩 웃었다.
“아버지는?”
“저쪽에서 이야기 나누고 계셔.”
“나 아버지 오실 때까지만 조용히 여기 처박혀 있다 갈 거야.”
이미 식사가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과 커다란 꽃 장식 그리고 기프트 박스가 놓여 있었다. 서은은 다가온 직원을 향해 식사는 됐어요, 하고 디저트만 요청했다.
하얀 디저트 접시에 연한 핑크빛으로 색을 낸 돔 형태의 초콜릿 케이크는 소담하다. 돔 머리 위에 하얗게 오른 생크림과 라즈베리, 딸기가 데커레이션 된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음, 맛있어.”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리는 발로나 초콜릿의 위엄에 서은은 조금 전 소란도 잊고 잠시 행복을 만끽했다. 혀끝에서 달콤한 풍미가 진득하게 느껴졌다.
“밥 안 먹었어?”
“나 오늘 이게 첫 끼야.”
“그러게 좀만 일찍 오지. 식사 괜찮았는데.”
해인은 맛있게 냠, 하고 케이크를 밀어 넣는 서은을 보며 은근히 섭섭한 투로 말했다.
“아버지가 어찌나 언니만 찾으시던지. 종일 서은이 언제 오냐, 서은이 오고는 있냐, 네 언니한테 전화 좀 해 봐라…. 고막이 닳겠어.”
“엄마한테 들었어.”
“아버진 언니가 이런 꼴로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하실 텐데. 기함하시겠다.”
“나도.”
이런 꼴로 이렇게 용감하게 이곳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다며 서은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봉사가 그렇게 좋아?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는 꼭 그렇게 빼먹지 않고 가더라.”
“좋아서라기보단 나라도 도우면 좋은 거니까. 생각보다 돌봐 줄 애들도 많고.”
“그렇게 돌보는 게 좋으면 결혼해서 언니 아기를 낳아서 보는 게 더 좋을 텐데.”
“야, 너까지.”
아직 결혼에 뜻이 없는 걸 알고도 은근히 조카부터 바라는 해인을 보며 서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근래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 모든 대화가 결혼으로 귀결된다. 이것이야말로 개혼의 의무가 있는 혼기의 영역에 들어선 장녀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해인은 킥킥거리며 제 몫으로 나온,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디저트 접시를 서은에게 밀어 주었다.
“얼른 먹어. 이것도 다 먹어.”
평소 달콤한 디저트를 유난히 좋아하는 서은의 입술이 씩 풀어졌다. 행복하게 오물거리는 서은을 보며 해인이 빙그레 웃었다.
“나밖에 없지?”
“응.”
“많이 먹어, 언니야.”
주형국을 닮아 외향적인 해인과 다르게 서은은 가정적인 희숙을 빼다 박았다. 알뜰살뜰하게 무언가를 돌보는 것도, 무언가를 만들어 나누는 것도, 포근하고 가정적인 성격까지.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데도 우애가 좋은 건 다행이었다.
물론 우애가 좋은 서은이 결혼하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섭섭하겠지만. 그래도 언니를 듬뿍 사랑해 줄 근사한 형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은을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할 때였다. 눈이 마주친 서은이 다른 건 손도 대지 않고 커피만 홀짝이는 해인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곧 정규 앨범 발매지?”
“응. 다음 주에 홍보 영상 촬영 있어.”
“그래서 그런가. 얼굴 많이 상했다, 해인아. 너 지금보다 3kg만 찌면 더 예쁠 텐데. 지금은 너무 말랐어. 해골 같아.”
서은이 볼이 핼쑥하게 팬 해인의 깡마른 손목을 손으로 쥐었다 놓았다.
“어쩔 수 없지. 공연 끝날 때까진 이 선에서 유지해야 돼. 그러니까 나 대신 맛있게 드세요, 자매님.”
반도네온 연주자인 해인은 공연을 앞두면 항상 예민해졌다. 날짜가 픽스 된 순간부터 공연이 끝나는 날까지 모든 단계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곤두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 전 스트레스로 밤마다 폭식을 이어 가다, 공연 당일 옷이 너무 몸을 조여 잦은 실수를 반복한 뒤로는 줄곧 그래 왔다.
“너 그거 알아? 나 발레 관두고 몸무게 7kg이나 는 거.”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모은 해인이 어쩐지 전보다 인간다워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봐야 이제 겨우 체중이 50kg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발레를 할 때는 운동선수 못지않은 연습량에 내내 몸무게가 42kg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전투적으로 먹고 하루 종일 연습에만 매달려 살다 보니,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으러 다닐 시간도 없었다.
사치와 같은 여유를 누리기 시작한 것도 무용을 관둔 뒤부터였으니, 이렇게 달콤하고 근사한 디저트를 남기는 건 서은에게 있어 죄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먹고 싶은 거 땡길 때 마음껏 먹는 거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되게 행복한 일이더라.”
“그렇지.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거야. 맞다. 언니 내 공연 안 잊었지?”
“그러엄. 다음 달 첫째 주, 서울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오후 5시.”
서은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친구들도 다 데려와. 승원 오빠랑 주영 언니도. 진한 오빠한테는 아까 만나서 초대장 줬어.”
“벌써?”
“오빠 오늘 되게 근사하더라. 평소랑 달라서 놀랐잖아.”
서은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한이는 어려서부터 옷태가 훌륭했다. 그런 녀석이 작정하고 차려입었다면 얼마나 근사할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근데 언니.”
말이 나온 김에 서은이 고개를 빼고 진한을 찾을 무렵이었다. 해인이 문득 서은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언니 아직 해신 삼 형제 못 봤지?”
“해신 삼 형제?”
“왜, 진한 오빠네 큰집. 우리도 어릴 때 보고 못 봤잖아. 오늘 셋 다 왔거든? 근데 셋 다 대박이야. 셋이 떡대가 막 이만해서, 키도 막 이렇게 크고.”
손을 들어 해신의 삼 형제에 대해 설명하는 해인이 흥분해 말이 빨라졌다.
“셋 다 다른 타입인데 다 잘생겼어. 첫째는 유부남이니까 패스하고, 둘째는 되게 화려하게 생겼는데 우직하더라. 나는 셋째가 제일 취향이야. 뭐랄까. 이미지는 되게 날카롭고 냉한데 나도 모르게 멍해지더라니까? 근데 싸가지는 없겠더라.”
“응.”
해인의 들뜬 음성을 흘려들으며 서은은 언젠가 보았던 해신의 삼 형제가 어떻게 생겼나 떠올렸다. 셋 다 체격 조건이 월등해서 눈에 띄었던가. 모임이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시끄러웠던 기억이 났다.
“저기. 저기 있다.”
해인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안경 쓴 미남이 첫째고, 뺀질거리게 생긴 애가 셋째야.”
해인이 말한 안경 쓴 미남은 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예민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럼에도 정중함이 온몸에 배어 있고, 오히려 그래서 더 다가가기 쉽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곁에, 해인의 말을 빌리면 뺀질거리게 생겼다는 셋째는 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였다. 아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드를 포함해 키가 제일 크고 체격도 가장 좋아 보였다.
“막내가 잘생겼네.”
“그리고 저 남자가 둘째.”
십 대 소녀처럼 들떠서 종알대는 해인의 설명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서은은 오물거리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객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띤 남자. 적당히 호응하며 너그럽게 웃는 남자의 시선이 허공을 여유롭게 훑는다. 빈틈이 느껴지지 않은 절제된 움직임, 그러나 느긋함이 배어난 모습에 절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잠시 시선이 이어졌다.
행사의 주축답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한눈에 신경을 앗아 간 남자. 존재감은 콕 집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삼 형제 모두 대단했지만, 눈길이 머무르게 되는 건 류태한이었다. 그건 서은의 테이블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관심과 선망이 담긴 얼굴로 어떻게든 말이나 한번 섞어 볼까 싶은 욕망이 선연했으니까.
마치 사극에서나 보았던 군주를 실물로 옮겨다 놓은 듯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는 이곳 세상을 군림하고 있는 듯했다.
“저 사람이 류태한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가 부르실 때마다 모임 꼬박 참여할걸. 되게 잘생겼지?”
확실히 평범한 사람들과는 기세가 다른 남자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기품이나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작은 동작에서도 절도와 우아함이 배어났다.
테이블과 그들 사이에 멀지 않은 거리를 사람들이 오갔다. 그럼에도 서은의 눈에는 오로지 류태한, 그 하나만 보였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허공을 가로지른 시선 끝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팽팽한 시위를 떠난 활처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끝내는 서은에게 날아온 시선이 몹시 까맣고 선명했다.
순간 서은은 손에 들린 포크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겹과 겹이 맞물려 빈틈없이 하나가 되듯 멀리서 전해지는 눈빛은 친절하다. 그의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보다 월등히 큰 키와 체격. 어디서든 돋보일 것 같은 류태한이라는 남자는 그날, 그곳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석이 된 듯 아름다웠다. 남성적으로 굵은 선이 시원스레 뻗어 내린 와중에 고귀한 느낌을 감추지 못하는 성골의 자태랄까.
가늠하는 시선 끝에서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미소가 세세히 눈 속으로 박혀 들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쿵.
그리고 다시 느리고 세차게 튀어 올랐다. 마치 들켜선 안 되는 실수를 한 것처럼.
쿵.
귓속까지 커다랗게 울리는 맥동에 서은은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쾅, 쾅, 쾅.
귓속에서 터질 것처럼 맥이 뛰었다.
나 왜 이래?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이 어지러웠다. 전신으로 희미한 열감이 솟구쳤다. 목덜미가 뜨끈해진 것 같아 서은은 손등을 들어 뺨을 훔쳤다. 숨을 가다듬는 동안에도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뭐야, 나 보고 웃었어. 세상에.”
곁에서 그쪽을 힐긋거리는 해인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다른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속 안 가득 혼미할 정도로 열기가 차올라서. 뜻하지 않은 생경함에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도 몰랐다.
서은은 천천히 침착한 손길로 남은 디저트를 입 안으로 긁어 넣었다. 내내 속에서 이름 모를 감정이 부드럽게 물결쳤지만, 그건 그저 비현실적인 이곳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같은 것이려니 했다.
“뭐, 우리랑은 상관없는 사람들이긴 하다만. 그래도 죽이지?”
“그러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서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조금 전 류태한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새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허공을 뒤적이는 서은의 눈동자로 실망이 스쳤다.
해신 그룹 둘째, 류태한.
자연스럽게 뇌리에 입력된 이름 석 자를 곱씹으며 두리번거릴 무렵, 등 뒤에서 누군가 서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
여자는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아마 그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 때문일 것이라고, 태한은 생각했다. 연회장에 그득한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방인을 보듯 하얀 셔츠 차림의 서은을 힐끗거리며 지나쳤다. 그럼에도 여자는 주눅이 들거나 눈치를 보는 기색도 없이 제 앞에 놓인 디저트를 행복한 얼굴로 먹었다.
작게 한 입, 또 작게 한 입.
가뜩이나 작은 입에 한 입 거리도 되지 않는 디저트를 몇 번이나 쪼개 넣는 건지.
입 안에서 초콜릿이 녹을 때마다 음미하며 싱긋 웃는 걸 보며 귀여운 인상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작은 체구에 동그란 얼굴. 그 안에 쌍꺼풀이 짙은 동그란 눈과 적당한 크기로 솟아오른 코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하얀 목덜미를 스치며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은 윤이 돌았다. 일행에게 연신 배시시 웃는 미소가 포근했다. 입술이 기울어지며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면 여자의 인상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부드러움. 여자에게 느낀 첫인상은 그랬다.
주형국 사장의 맏이, 주서은.
태한은 케이크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그 순간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한 여자를 잠시 지켜보았다.
서은에게 눈길이 닿은 건 그녀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였다. 호텔 앞에서 누군가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순간, 정확히는 등을 한 대 얻어맞고도 속도 없이 웃는 모습이 우스워서였다.
올해로 창립 45주년을 맞이한 본가의 행사가 한창일 때였다. 호화롭고 성대한 창립 행사는 그룹을 밑바닥에서부터 일으켜 세운 류중환 명예 회장의 축사로 막을 올렸다.
모든 일의 근원은 뿌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철칙으로 평생을 살아온 왕회장의 뜻대로, 오늘도 영빈관은 초청된 그룹 계열사 사장단의 가족까지 빈틈없이 자리를 채웠다. 가족 중심의 경영 철학. 그 밖에 경영 방침으로 내세운 기업의 기조와는 상관없이, 이 자리에 사람이 많이 모인 건 공치사를 즐기는 왕회장의 고약한 취미 탓이었다.
물론 이런 자리가 아니면 직계와 방계가 더불어 모이는 게 어렵다는 걸 이해하는 바다. 행사 내내 왕회장이 거느린 가족과 기업 식구들은 하나같이 숭배하듯 그에게 감사해했다. 지나친 칭찬과 덕담, 감사와 끊임없는 관심. 아마도 행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나 오늘은 유난히 신경이 곤두섰다. 그건 어딜 가나 혼맥을 엮어 보려는 기세가 지나친 탓이었다.
평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해신의 위엄이 새삼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결혼. 정략이거나 연애결혼이거나. 무엇이 되었든 서른이 된 태한에게도 순서가 돌아왔다. 2년 전, 해신 그룹의 장손인 류태준이 정략결혼을 한 뒤로 잠시 묻어 두었던 사실이다.
이번 행사에는 유독 사장단 가족의 미혼 자녀들이 많이 참석했다. 아마도 혼기가 찬 태한을 염두에 둔 참석일 테다. 행사 시작 전부터 눈도장을 찍기 위해 스쳐 간 얼굴이 얼마였던가. 하나하나 소개를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기억에 남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점점 가열되는 분위기는 자칫 중매로 이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후계를 보고 싶어 안달 난 왕회장에게 젊은 미혼 남녀란 보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태한은 결국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연회장을 벗어났다. 갑갑하게 목을 조이던 넥타이 매듭을 슬쩍 풀어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호텔을 바라보았다.
“후우.”
의무를 철갑처럼 두르고, 예의와 매너로 무장한 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꽤나 에너지가 많이 빼앗기는 일이다.
류중환 회장이 다섯 명의 자식 중 가장 아끼는 장남, 류성웅과 해신 아트센터의 서정주 관장.
태한은 조부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생을 이런 삶을 살아와 모든 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 슬하의 아들 셋. 태한의 형인 장남 류태준과 동생인 류태조를 포함한 자신이 곧 공룡 같은 해신 그룹을 이끌어 갈 주역이 될 것이었다.
그룹의 창업주 류중환의 경영권 승계는 몇 해 전 큰 잡음 없이 류중환의 다섯 자식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고, 장남은 장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해신의 전신을 물려받았다.
장남인 아버지를 둔 덕에 삼 형제는 각자 맡은 바를 다하고 있었다. 장남 류태준은 2년 전, 태성 그룹의 장녀 한은성과 인수 합병 같은 정략결혼을 한 뒤 해신 전자를 책임지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태한이었다. 서른쯤 가정을 꾸려 자리를 굳히는 일은 이 집안 남자들의 타고난 숙명이었다.
태한의 처지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이제껏 결혼에 관해 큰 압박이 없었던 건, 정식으로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이제는 태한도 가정을 꾸릴 적절한 나이가 되었고, 사람이 모이는 자리마다 그의 혼사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젯거리였다.
자신의 혼사였지만, 아직 아무런 확신도 없는 그 혼사에 관한 일들이 내심 그에게 부담이 되었다.
한숨 돌리고자 나선 길 끝에서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침묵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그의 앞으로 누군가 휙 지나갔다. 다급하게 영빈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여자.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가방을 둘러메고 여자가 스쳐 간 순간 바람이 커다랗게 일었다. 길가에 핀 라일락 가지를 뒤흔들고 가는 듯한 싱그러운 향기에 태한은 고개를 들어 홀린 듯 여자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영빈관.
임원 중 누군가의 가족인가. 연관을 지어 생각하는데, 곧 여자가 다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건물 밖으로 끌려 나왔다.
단아한 차림에 인자한 인상. 태한은 여자가 HSDC 투자 개발 면세 사업부 주형국 대표 이사의 아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지정석을 돌며 인사를 나눌 때 본 얼굴이었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단아하게 인사하며, 큰딸은 오는 중이라며 우리 서은이, 서은이 하던 게 생각났다.
저 여자가 주서은인가.
태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때 별안간 주형국의 처가 주서은의 등짝을 내리쳤다.
“아야!”
발길을 떼려던 태한의 걸음이 멈칫, 다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놈의 기집애, 하며 윽박을 지르는 주형국의 처와는 다르게 한 대 얻어맞고도 여자는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맞고도 좋댄다. 어?”
“좋기는. 내장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구. 우리 안 여사 아직 손맛 안 죽었네.”
옥신각신하는 모녀의 음성에 태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죽어도 오기 싫었다는 여자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는 여자의 엄마.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왔다. 모녀 사이는 그래도 좋은지, 주서은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주형국의 처에게 쉴 새 없이 파고들었다.
“왜 이래. 이거 놔.”
“엄마아.”
여자는 자그마했다. 작고 귀엽다는 게 조금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키는 대략 163cm쯤. 단정한 셔츠 아래로 군살 없는 몸 선이 아담하지만 유연했다. 적당히 탄탄한 허벅지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와 몸을 피하는 순간조차 왜인지 모르게 우아한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목을 빼고 시선을 45도쯤 내려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이 바라보는 모습도.
발레를 했나. 예쁜 선을 가진 여자에게 시선이 꽂힌 태한은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따가운 햇살 아래서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을린 듯 붉어진 뺨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속 쌍꺼풀이 선명한 커다란 눈매와 적당한 크기로 오뚝 솟은 코, 짓궂게 웃으면서도 즐거워하는 표정이 인상적인 자연스러운 미인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옷차림은 형편없었지만, 움직임 하나하나가 물 흐르는 듯해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웃는 게 저렇게 포근한데.
좌절 속에 한숨을 내쉬는 주형국 처의 반응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그게 여자를 향한 첫 번째 호기심이었고, 그 호기심이 두 번째가 된 건 피로연장에서 고개를 파묻고 디저트를 음미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주서은이 시야에 들었을 때, 태한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디저트를 오물대는 작은 입술이 행복에 겨워 벌어진 순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간지러움을 억누르고 조금 더 관찰할 무렵이었다.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섰다.
동그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서은이 긴장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곧 상대를 확인한 그녀의 입가가 다시 부드럽게 벌어졌다.
“쌤, 여기서 보네요?”
“야, 김도현! 와, 너.”
입술을 냅킨으로 꾹 찍어 내고 다가선 남자를 향해 웃어 주는 얼굴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너 왜 이렇게 근사해?”
“오늘 좀 그렇죠?”
감탄을 연발하는 서은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귀를 찔렀다. 조금 전 주형국의 처 앞에서 뺀질거리던 것과 다른 상냥함이었다.
그녀 앞에서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웃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파운드리 사업부장 김경문 사장의 아들이었다. 그와 인사를 나눴던 기억을 뒤적이며 그들을 눈여겨보는 내내 가슴 깊은 곳이 또다시 영문을 모르고 간지러웠다.
“쌤도 오실 줄 알았어요. 근데 왜… 농활이라도 다녀오셨어요?”
“거의 근접해.”
“네?”
“응?”
두 사람이 잠시 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와중에도 남자의 시선은 서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제가 맞혀 봐요? 또 남 일에 오지랖을 서프라이즈하게 부리셨죠?”
“도현이 네가 예전부터 감이 좋았어.”
“아, 남 좀 그만 도와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나만 알면 돼. 나만.”
서은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체구에 비해 큰 가슴이 반동으로 흔들렸다. 아래로 힐끔 향한 시선을 들어 올린 남자의 귀가 언뜻 붉어진 듯도 하다.
“근데요, 쌤. 쌤 오늘 여기서 스타 된 건 알아요?”
“알지. 그래서 아까 우리 엄마한테 등짝도 한 대 맞았잖아.”
여전히 흘깃대는 시선 속에서 서은은 고개를 당당히 들고 인정했다.
“사실 저도 엄마한테 맞을까 봐 빡세게 입고 왔잖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에 동병상련의 웃음이 번졌다.
“근데 쌤은 이래도 예뻐요.”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그런 기특한 립 서비스를 배웠어.”
“진짠데.”
남자의 말대로 그런 꼴을 하고도 예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계속 눈길이 가는 거겠지만.
피로연장에 들어선 이후로도 줄곧 태한은 서은이 있는 곳을 찾아 힐끔거렸다. 주형국 아내의 손에 이끌리던 순간부터, 눈에 담았던 서은의 반응이 웃기면서 귀엽기도 했고, 이곳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 공작새처럼 한껏 치장한 사람들 가운데서 오히려 신선하기도 했다.
“쌤 전화번호 안 바뀌었죠?”
“아니, 바꿨어.”
“뭐야, 번호 줘요.”
남자가 서은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서은은 거리낌 없이 번호를 찍고 돌려주었다.
“나중에 저 술 한 잔 사 주세요.”
“그래.”
흔쾌히 대답하는 서은의 모습에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태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흠칫 놀라 얼굴을 굳혔다가, 곧 머쓱하게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왜 쳐다보지? 모호하게 중얼거리며 서은에게 무어라 속닥거린다. 아마도 류태한이 이쪽을 보고 있다, 속삭인 것 같다. 미간을 긁적대며 남자가 중얼거린 뒤에 주서은이 고개를 돌렸으니까.
그렇게 세 번째, 서은과 눈이 맞았다.
무방비하게 웃고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당혹스럽게 얼어붙는가 싶더니, 서은은 작은 고갯짓과 함께 태한을 향해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웃음기 어린 나긋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발이 절로 움직였다. 태한은 그대로 걸음을 떼어 내 사람들 틈을 헤집었다.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서은에게 다가갈수록 서은의 동그란 눈이 의아하게 벌어졌다.
“류태한입니다.”
태한이 지체 없이 손을 내밀었을 때, 서은이 입술을 말아 물고 동그래진 눈을 끔벅였다.
가까이서 본 여자는 훨씬 더 작았다. 여자의 이마가 태한의 가슴팍쯤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다.
“아, 주서은이에요.”
서은은 청바지에 손을 슥슥, 문질러 닦아 내고 태한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손끝으로 감겨든 체온. 부드러운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눈앞으로 불꽃이 번쩍 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태한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끔벅이는 서은을 조금 더 깊게 바라보았다.
“주형국 사장님 따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주 사장님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깍듯하고 예의 있게, 움켜쥔 손을 꽉 쥐고서 말한 순간 여자가 웃었다.
쿵, 쿵.
속 깊은 곳에서 무겁게 진동하는 기묘한 울림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