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기사로 남는 것은 (45/47)

외전 4. 기사로 남는 것은

레이가 아는 황제 폐하는 독특한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톡톡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당황스러운 건 변함없었다.

“피크닉을 갈 거야!”

바로 이런 때처럼.

레이는 황당함을 숨기며 심드렁하게 밖을 응시했다.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정무로 한창 바쁠 시기가 바로 지금 이 꽃의 계절이었다. 불의 계절을 앞두고 수확제를 준비하기도 바쁜 시기에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못 들었어? 피크닉을 갈 거라고 했잖아, 경.”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냐는 말입니다.”

“흐응, 어디일 것 같아?”

조용하던 집무실에 아실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레이는 아실리 대신 창문 밖 흰 꽃을 피운 나무를 응시했다. 마치 레이가 바라보던 곳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아실리가 말했다.

“꽃비 축제에 갈 거야.”

“……예?”

“이런. 경, 언제부터 청력이 떨어진 거야?”

아실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꽃의 도시에서 개최하는 꽃비 축제에 갈 거라고 했어.”

꽃의 도시에서는 매해 꽃의 계절에 온 꽃을 피워 내는 꽃비 축제를 개최했다. 전 대륙에서 피어나는 꽃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인 자리였지만 레이는 이것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한창 바쁜 이 시기에 그 먼 도시까지 가신단 말입니까?”

“응.”

“폐하의 공식 일정에 포함된 일정 맞습니까?”

“어허. 황제인 내가 가는 자리가 공식 석상이고 공식 일정인 법이지.”

“놀고 싶으시다는 말을 돌려 하고 그러십니까. 폐하 혼자만의 생각이시라는 거군요.”

“……이런 경, 말로 때리는 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야.”

아실리가 불만 어린 얼굴로 레이를 흘겨봤다.

“좋아, 일정이 필요하다 이거지?”

“어쩌시려고요?”

“기다려. 일정 만들어 올 테니까.”

“……만드시는 것은 상관없는데,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지요?”

“그거야, 경은 내 호위 기사잖아?”

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는 데인 님의 호위 기사입니다만.”

대체 그를 데인에게 보낸 사람이 누구인데. 하고 생각하며 무뚝뚝하게 응시했다.

“지금도 데인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폐하의 호위를 맡은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방싯 웃는 아실리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언제나처럼 놀리려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한 레이는 그대로 넘겼다.

“그래. 어쨌거나 지금은 날 호위하고 있잖아?”

“……뭘 꾸미고 계시는 겁니까?”

아실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꾸미다니. 표현에 주의해 주겠어? 내가 뭘 했다고.”

“……폐하의 표정이 오래전 황녀이실 때의 표정과 같습니다.”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가끔 이렇게 황녀일 적 표정이 묻어났다.

‘그때는 금지된 숲으로 몰래 빠져나가다 들켰었지 아마.’

뒷말을 삼킨 레이가 아실리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실리는 더는 대꾸하는 대신 씩 웃을 뿐이었다.

“일단 기다려.”

그래. 레이는 그래서 이때, 그저 지나가는 농담이려니 했다.

며칠 뒤 황실 직통 직인이 찍힌 서신이 날아왔다. 명을 받은 레이는 편지가 가리키는 장소로 나갔다. 그곳에는 아실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경!”

아실리는 누가 봐도 편한 차림이었다. 찡그린 레이가 얼른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그려진 신의 문자를 바라본 그는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출발해 볼까?”

“잠시만요. 폐하, 서신에는 공식 행사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짐이 움직이면 곧 공식 행사니라.”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던 황녀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장난기 넘치는 아실리였다. ‘경이 나를 호위해 줘야겠어.’ 하고 당당하게 나선 아실리를 바라보며 레이는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제 시력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둘밖에 보이지 않는데, 착각입니까? 황제의 외출에 호위가 겨우 하나라뇨.”

“나는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지.”

그제야 레이는 며칠 전 꽃비 축제에 가겠다고 한 말이 농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전 안 갑니다. 당장 아벤타 공작에게 알릴 겁니다.”

“어어, 그렇게는 안 되지!”

레이가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눈앞에 새하얀 빛이 터졌다. 하얗던 빛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눈앞에서 휘어진 자색 눈동자처럼 고운 빛으로.

레이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장소가 바뀌었음을 빠르게 알았다. 아실리가 신력을 쓴 것이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레이에게서 손을 떼어 낸 아실리가 씩 웃었다.

“이걸로 경도 공범이야.”

미소한 아실리의 가슴에서 제국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바람의 신물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레이가 제 뺨을 부여잡으며 끙 신음을 흘렸다.

“경, 저길 봐.”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으로 꽃잎이 떨어졌다. 마치 눈처럼 살랑살랑 떨어지는 꽃 사이에서 눈부신 금발을 가진 아실리가 미소하고 있었다.

“너무 예쁘다 그렇지?”

이미 각성하고 성년이 된 지 4년이 흘렀으나 가끔은 이전의 모습이 겹쳐 보이곤 했다. 지금처럼 말갛게 웃을 때.

‘정작 그 나이 때는 이렇게 웃지 않았으면서.’

잠시 고개를 숙였던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실리는 그런 레이를 이끌고 대로로 향했다.

이미 꽃비 축제가 시작된 도시는 건국제의 수도처럼 혼잡했다. 복작복작한 사람이 가득한 거리는 꼭 언젠가 함께 수도 대로를 누비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경, 이러니까 옛날 나 황녀일 적의 건국제가 생각난다. 그치?”

아실리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아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을 황후 폐하는 어찌하시고 혼자 보십니까?”

아실리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그 아모르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 깜짝 선물을 주는데 당사자를 데려올 수는 없잖아?”

“저 외에도 좋은 동행인은 많습니다.”

“정말, 귀찮다는 얼굴 하지 말아. 데인도 아모르와 같은 달에 생일이잖아? 더구나 타국에 나가 있고.”

“플뢰온 님이 섭섭해할 겁니다.”

“오라버니가 이 거리에 나오기나 할 것 같아?”

“……그건 그렇군요.”

“그리고 나도 같이 나오는 건 사양이야.”

고개를 돌린 아실리가 분명 싸울 거라고, 하고 투덜거렸다. 흔들리는 금발을 바라보던 레이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레베카에게 말했다간 당장 반대했을걸? 아마 크은일 났겠지. 여유가 생기셨나 봅니다, 주인님하고 서류가 아주 그냥…….”

과장되게 팔을 벌리던 아실리가 머쓱했는지 제 뺨을 긁적였다. 뺨에 그인 흉은 여전했으나 그녀도 주변인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경이 나랑 숨 좀 돌리자고.”

활짝 웃고는 돌아선 아실리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음에 만날 수 있어?>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가 아주 잠깐 쓰게 웃었다. 늘 무뚝뚝하던 표정이 흐려질 정도로만 아주 잠시.

* * *

레이 아퀴타 플레람.

그는 비교적 세가 약한 신전의 신관 아래서 태어났다. 네 형제 중 유일하게 신관으로 발현하지 못했으며 이 까닭에 그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구나. 북쪽의 이민족을 모조리 쫓아낸다지.”

그런 그가 유일하게 두각을 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검이었다. 그는 신관도 아니면서 검의 신관에 필적하는 실력을 보였다.

“너도 거기 다녀오거라.”

그의 아버지는 그것만 믿고 그를 이민족과의 전투가 일어나는 곳으로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알았지만 완벽한 축객령이었다.

발달이 덜 된 북쪽의 땅은 험난했다. 검에 뛰어난 것과 살아남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험난한 전투 속에서 그의 전투 실력은 날로 발전했으며, 꽃을 피웠다. 매일같이 일어나던 전투 속에서 두각을 보이던 어느 날, 레이는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구했다.

“……괜찮습니까?”

이미 이곳에서 1년이나 보낸 레이는 한눈에 그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지휘관임을 알아봤다.

“고맙습니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새하얀 머리칼이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오던 소년은 레이의 손을 잡고 옷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5일 밤을 꼬박 지새운 전투는 힘에 부치긴 하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 힘들어할 겁니다.”

그러자 웃을 듯 말 듯 나긋한 표정을 한 소년이 제 팔을 흔들었다. 도무지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짐승같이 털이 돋아난 팔이었다.

“보다시피 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신관 나고 사람 났습니까? 사람이고 신관이지.”

이미 신관들의 텃세에 질릴 정도로 당해 본 레이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다치면 아프고 피가 나는 건 나나 지휘관님이나 같습니다.”

“…….”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를 응시했다. 곧 작게 미소한 그가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와 같은 소릴 하는군요. 신관을 싫어한 분이셨죠.”

“그 점은 저와 같군요.”

“나는 헤르난데즈 폰 디볼로입니다. 당신은?”

“레이 아퀴타 플레람. 아시겠지만 신관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검을 가볍게 휘두른 레이를 바라보던 헤르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두 사람은 같은 전투에서 자주 얼굴을 부딪쳤다. 비신관 중 뛰어난 실력을 가진 레이나 전투에 괄목할 능력을 가진 짐승의 신관인 헤르난이기에 필히 가장 치열한 곳에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한 사람이네요. 신관도 아니면서 신관보다 강하다니.”

“공작님께서 입바른 말도 하십니까?”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요? 전투에 있어선 제 눈만큼 정확한 요소는 없습니다. 내가 제일 강하니까요.”

“네. 다시 보니 겸손과는 먼 곳에 계신 분이시군요.”

소년이 웃었다.

“당신은 존경을 어디다 팔아먹은 부하고요?”

“직속 지휘관도 아닌데 존경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레이와 헤르난 사이에 싹튼 것은 전우애였다. 언제나 최소한의 군대만 배치하는 곳이 바로 이 전투 지역이었기에 헤르난이라 해도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곤 했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짐승의 신관도 등을 맡긴 이에게는 달랐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고 헤르난이 수도로 떠나는 날이 돌아왔다.

“나 내일 돌아가요.”

“그렇습니까?”

애초에 헤르난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잠깐 배정받았으나 이 급한 불이 1년이나 흘렀던 것이었다.

“돌아가면 또 보려나.”

“못 보죠.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보겠습니까.”

“그런가. 그럼 가기 전에 선물을 줄게요.”

“선물?”

헤르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르난이 돌아간 어느 날 레이는 선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레이 아퀴타 플레람. 그대에게 동쪽 땅의 도시로 차출을 명한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도시였다.

북쪽에 있던 레이는 몰랐으나 이 시기 제국에는 기이한 역병이 잠시 돌았다. 신력도 잘 듣지 않는 그 역병을 피해 동쪽으로 피신한 귀족들이 많았는데, 그런 이유로 호위가 많이 필요했다.

‘선물이라더니.’

아무리 호위가 필요하다지만 북쪽은 사람이 적다. 그러니 차출을 명할 이유는 없었다. 레이는 이 명에 헤르난의 입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동쪽 땅의 도시로 온 레이는 그곳에서도 전투만 없을 뿐 꽤 치열한 하루를 보냈다. 신관인 검사들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던 탓이었다.

퍽.

“이익. 다시, 다시 한번 하자!”

“몇 번을 해도 소용없을 건데. 내가 더 쎄서.”

“이익! 방심한 거다!”

레이가 달려드는 검사를 발로 차며 심드렁히 말했다.

“아, 그놈의 방심은 매번 하는 모양이군.”

“젠장!”

느리게 고개를 기울인 레이를 보며 검사가 성을 냈다. 그러나 가볍게 검을 채우며 돌아서는 레이를 붙잡지 못했다.

“강해 봐야 하찮은 비신관 주제에!”

소리 지르는 검사의 말이 안 들린다는 듯이 귀를 후벼 주었다. 이것이 그네들이 가장 열 받는 방식이란 걸 이미 체득한 레이였다.

어찌 방식이 이리 비슷할까. 지난한 전쟁 속에서나 평화로운 여기나 패턴이 뻔했다. 뻔했고 귀찮았다. 그리고 짜증도 났다. 어차피 그들 말처럼 비신관에다 플레비(비신관 귀족)도 되지 못한 그는 출세 가도가 막혔다. 앞이 밝은 이들과는 달랐다.

뚜벅뚜벅 걷던 레이가 멈춰 섰다. 그가 지키는 구역 한가운데서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파스스―

바람이 불고 그를 가로막고 있던 여린 풀숲이 흔들렸다. 그 사이로 금색이 삐져나와 있었다. 레이는 곧 작은 소녀를 발견했다. 울먹이던 소녀 또한 레이를 보았다.

“흡, 너 누구야?”

그건 레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원래 묻기 전에 소개가 먼저 아닙니까?”

다른 귀족 같았으면 대번에 경을 쳤을 것이나 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가? 나는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 너는?”

“…….”

레이는 낭패감을 느꼈다. 하필이면 황족을 만날 것은 무어란 말인가.

“레이입니다.”

“레이.”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레이, 넌 왜 여기 있어?”

그제야 보게 된 소녀의 눈동자는 낮에 뜬 별처럼 반짝거리는 자색이었다. 꼭 자수정 같기도 했다.

“제 순찰 구역이니까요.”

“순찰해?”

“네. 저는 병사니까요.”

“왜 병사야?”

“……예?”

“강한데 왜 병사야?”

말문 막힌 레이가 망설이는 동안 아실리가 입을 열었다.

“저기서 많이 봤어. 늘 싸웠는데 맨날 이겼잖아.”

“여기 자주 오셨습니까?”

“응.”

아마 소녀는 시비 거는 신관 검사들을 본 듯했다.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구경꾼이 없는 건 아니라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런 조그만 관객도 있을 줄은 몰랐다.

“강한 사람은 검사라고 했어.”

“그 말은 틀리지 않으나, 저는 못 될 겁니다. 신관이 아니거든요.”

“무슨 상관이야?”

레이가 멈칫했다.

“신관이든 아니든 강한 거잖아.”

천천히 고개를 든 레이가 소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오래전에 그의 아버지가 어린 그를 광에 가둔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 그날처럼 고요한 적막감이 주변으로 먼지처럼 가라앉은 듯했다.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다른데?”

“강한 능력을 가져도, 비신관보다 신관이 더 많은 것을 받으니까요.”

레이가 작게 눈을 찌푸렸다. 흔들리는 금색 머리칼이 작은 창으로 쏟아지던 햇살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게 잘못된 거네.”

아주 어린 소녀가 태연히 뱉은 말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로막았다. 부끄러웠다. 겨우 제 허리까지 오는 어린아이의 말에 감동하는 자신이.

그러나 이렇게 느끼는 그 또한 채 성인이 되지 못한 열여섯 살이었으나, 그는 자각 못했다. 레이는 얼른 말을 돌렸다.

“……어째서 황녀님이 이런 곳에 계십니까?”

“우와. 내가 황녀인 건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네.”

“그거야…….”

칼타니아스란 성을 지적하려던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그보다 왜 여기 계시는 건가요?”

그러자 잠시 입술을 깨문 아실리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 나는 여기 도망? 도망 나왔어.”

“도망이요?”

“응. 저기에…….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아서.”

손가락을 들어 올린 아실리가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저택이었다. 대신전을 겸하는 이곳에는 역병을 피하기 위해 고위 귀족들이 거주했다.

“자꾸 징그럽다고 하거든. 저건 사람이 아닐 거라고 그러고.”

레이가 아실리의 뺨을 향했다. 소녀의 뺨은 한쪽이 우글우글 우그러지고 붉은 속살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는 전쟁에 익숙한 레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나 귀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신 겁니까?”

“응. 작게 말하는 체하는데 다 들리거든. 그 사람들은 모르나 봐.”

턱을 괸 아실리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낯선 이가 있어서 울지 못한 것뿐이었다. 아실리에게는 많은 기억이 혼재했다. 전생에서의 삶,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 어느 쪽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는 아직까지는 어린아이였다.

“도망은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질 나쁜 말들을 즐기는 그 사람들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레이가 검을 옆에 두고 아실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턱을 괴며 무뚝뚝하게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십시오.”

눈을 깜빡이며 레이를 바라본 아실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어떻게 하는데?”

아실리를 응시한 레이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 편을 만드세요.”

아버지에게 쫓겨나 전장을 연연하고 신관에게 배척받은 그가 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한 사람이라도 만드시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황녀님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이미 있네요.”

“응?”

대꾸하는 대신 상체를 일으킨 레이가 바지를 탈탈 털었다. 그는 아실리의 한마디에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지만…… 어쩐지 낯이 간지러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황녀님은 역병을 피해서 여기 오신 것이죠?”

“응? 응. 그렇대.”

“그렇군요.”

검을 든 레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순찰 시간이 훌쩍 넘긴지라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멀어지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실리가 벌떡 일어났다.

“저기, 다음에 만날 수 있어?”

돌아선 소년과 아이의 눈이 교차했다. 말간 눈을 바라보며 레이는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신분 차를 느꼈기에 말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다음 날 그 자리에 갔지만, 레이는 아실리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황녀가 돌아갔다는 이야길 들었다. 레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역병이 완연히 물러간 시기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아실리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실리를 바라보며 실망하지 않았다. 고귀한 사람이 하찮은 저를 기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얻은 게 없지는 않았다. 그는 그림자만 바라봐도 행복하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켜 주고 싶은 감정이었다.

* * *

‘그때는 옆에서 어떤 사람인지 지켜보고 싶었던 건데.’

천천히 고개를 든 레이는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를 보았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경, 왜 멍하니 있는 거야? 얼른 이리 와!”

왜 당신만 보이는 걸까, 그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웃었다. 이미 어떤 감정인지 아주아주 오래전에 자각하고 말았지 않았나.

“가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

레이는 아실리가 내미는 꽃다발을 받았다. 새하얀 꽃잎에 물을 떨어트린 듯 안에서 옅게 퍼진 하늘색, 줄기는 녹색이었다.

“경, 이게 라이어티의 꽃이래.”

조금 전 아실리가 순금을 주고 산 꽃이었다. 꽃과 순금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가치였으나, 이 꽃을 아는 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40년에 단 한 번 꽃의 대신관만 피울 수 있는 꽃말입니까?”

“응. 여러 색으로 개량돼서 원하는 색을 고를 수 있다네.”

하늘색과 녹색. 아실리가 고른 꽃은 누가 봐도 단 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아모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 꽃을 보지 못했대.”

“……그렇군요.”

“응. 그리고 이건 데인 거.”

아실리가 왼손을 들었다. 거기에는 탐스러운 붉은 잎을 가진 라이어티가 있었다.

“이 꽃은 한 번 피면 100년은 시들지 않는다고 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건 꽃의 대신관이 키울 때 이야기 아닙니까?”

“아니, 이 꽃도 그럴 거야.”

아실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잡았으니까.”

레이는 아실리의 밝은 미소보다 씁쓸한 얼굴에 익숙했다. 한편으로 더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제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가.

“선물을 이거 말고 보려면 더 둘러봐야겠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지?”

“예. 아마 아벤타 공작님이 깨닫기 전까지 아닙니까?”

일선에서 물러나 검의 대신관직만 맡게 된 전 공작 대신 공작위에 오른 레베카를 떠올린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들켰을지도 모르죠.”

“……무서운 소리 하지 말래? 진짜 그럴 것 같잖아.”

“무서워하실 거면서 저지르긴 왜 저지르셨습니까.”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인 아실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경은 무드가 없어, 무드가. 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경같이 건방진 검사님은 또 없을 거야.”

“영광이군요.”

이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그 후로 그들은 한참을 거리를 돌아다녔다. 중간에 출출함을 느껴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했고, 고급품을 파는 가게에서 보석으로 세공된 꽃을 보거나 생화를 엮은 화관을 사이좋게 나눠 쓰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레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경! 경! 저거, 저거 해 봐! 경을 위한 거다!”

중간에 아실리가 그의 손을 잡고 이끌고 간 곳은 간이 검투장이었다. 간단한 울타리만 친 공터에 전문 검투사가 있었고, 가에는 구경꾼이 가득했다. 아실리가 그를 들이밀었다.

“가라, 레이몬!”

“……그건 뭡니까?”

“경은 몰라도 돼. 빨리 가서 1등하고 와. 최대로 배팅할게!”

“아니, 무슨 황제 폐하께서 도박을 하십니까?”

듣는 귀를 생각해 낮게 중얼거리는 레이에게 아실리는 씩 웃어 주었다.

“어허, 서민의 경제를 체험하는 것도 짐의 역할이니라.”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십니까?”

“얼른!”

떠미는 손에 못 이겨 억지로 참석한 레이가 준비된 검투사 외에 모든 도전자를 눕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와, 정말 한 번을 봐주지 않네.’

아실리가 웃겨 죽으려 했다. 저런 고지식한 면이 참 레이 경답다는 걸 알까?

“경 덕분에 오늘 부자 됐네.”

“……전부 돌려줘 놓고서 무슨 소릴 하십니까.”

아실리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래도 한순간은 부자였잖아.”

이미 제국의 모든 것을 가진 황제는 전혀 황제답지 않게 미소했다.

“어차피 내게 영원히 남는 것은 없을 테니까.”

레이가 멈칫했다.

“예?”

그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표정은 이미 그녀 얼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새 아실리의 어깨 뒤로 석양이 걸렸다. 주홍으로 물든 얼굴, 눈동자로 태양이 담겼다.

“오늘 즐거웠다. 그렇지? 선물도 사고.”

“…….”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어. 경도 즐거웠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레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조용히 미소한 아실리는 손을 휘저었다. 어느새 그녀 손에 들린 것은 라이어티 꽃이었다.

“신기하지? 강대한 신력은 이런 것도 만들게 하더라. 신력이 닿았던 거라면 뭐든 내 손에 있는 거야.”

“……네.”

“신관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해 보이잖아. 그런데, 경. 사실 지금의 대신관들은 하나씩 고질적인 저주를 앓고 있어.”

빙글 돌아선 아실리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레이를 향했다.

“지금 이 도시의 주인인 꽃의 대신관들은 대대로 손대는 모든 것을 꽃으로 만든다고 해.”

이미 저주를 앓는 꽃의 대신관을 만났던 아실리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 대 대신관은 낳아 준 부모를 한 떨기 꽃으로 만들고 말았대. 1년도 채 살지 못할 꽃으로 말이야.”

“…….”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시대를 바로잡고 싶었어. 하지만 이미 나온 피해자들은 어쩌지 못하는 것을.”

“폐하.”

“경, 비단 신관만의 일일까? 힘을 받지 못한 비신관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해.”

자색 눈동자가 레이에게 머물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였다.

“누군가는 거기까지 생각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하더라. 그 누군가들은 항상 나이 든 신관이었지. 내가 이상할까?”

“제게 폐하는 늘 신기한 분이셨으니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 고마운 말이네.”

웃는 것과 동시에 심각한 표정이 아실리에게서 기화되어 날아갔다. 후후후. 실없이 소리 내어 웃던 아실리가 고개를 들었다.

“경과 놀고 싶었을 뿐인데 심각한 소리를 했어. 나도 참.”

레이가 멈칫했다.

“저랑…… 말입니까?”

“응. 오랜만이지 않아? 이런 일탈도. 건국제가 생각나기도 하고?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했지만.”

“그렇죠.”

“이제는 평화로운 시대니까.”

레이는 아실리를 바라보며 찬찬히 오늘을 떠올렸다.

그녀가 오늘 그와 무엇을 했던가?

그저 실없이 돌아다닌 것처럼 보였지만, 아실리는 결코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플뢰온을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걸까? 레베카는? 그는 그녀가 이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 그가 그녀와 한 것은 꼭…….

“경, 있잖아. 아마 이 꽃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야.”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손에 쥔 꽃을 흔들던 아실리가 말했다.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영원한 꽃. 난 이 꽃을 바라보며 언제나 행복하겠지. ……이 꽃을 들었던 사람을 떠올리며.”

레이는 아실리 손에 들린 것이 아모르의 것도, 데인의 것도 아님을 알았다.

새로운 꽃이었다.

“이건 경 거다?”

꽃은 남색이었다. 아주 짙은 남색.

“어째서 제게 이 꽃을 주십니까?”

“그냥.”

꽃을 내민 아실리가 푸스스 웃었다. 여인이 된 얼굴 위로 소녀의 얼굴이 겹쳤다. 열일곱 살의 아실리였다.

“나는 경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바람이 불었다.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씁쓰레한 미소를 드러냈다.

“오래전에 경에게 말조차 못하게 했던 날이 있었지. 마음은 막을 수도 어쩌지도 못할 것임을 알면서 그때 나에게는 여유가 없었고……. 그걸 무기로 경에게 잔인한 짓을 했어.”

아실리가 그때의 소녀처럼 웃었다.

“미안해, 경.”

그는 오래전 날들을 떠올렸다. 그는 늘 씁쓸하고 쓸쓸한 얼굴을 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한 번쯤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에도…… 그 상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미안할 예정이라서, 미안해.”

레이가 천천히 내밀어진 꽃을 받았다.

“사과 받을 일이 아닙니다.”

본래 그는 꽃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꽃은 꽃. 나무는 나무. 어릴 적부터 전장에 익숙한 눈은 좀처럼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했다. 소녀의 미소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황제는 무치의 존재,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부터 폐하께서 그리 사과를 잘하시는 분이었습니까?”

이 순간부터 이 꽃은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

“검이 되겠다고 한 것은 접니다. 검은,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 묻고 싶군요.”

“무엇을 묻고 싶은데?”

아실리를 바라보며 레이가 드물게 진심을 꺼냈다.

“저는 당신의 명에 따라 진심을 다해 데인 님을 섬깁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겠지요.”

“응.”

“……저는, 잘하고 있습니까?”

늘 우묵하며 잔잔한 눈이 작게 흔들렸다.

자신답지 않은 말을 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떨림을 인내했다. 언젠가 한 번은 묻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아실리는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레이.”

많은 것을 대신해 그의 손을 붙잡은 아실리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너는 내 생 최고의 기사님이야.”

천천히 눈을 감은 레이가 작게 웃었다. 꽃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가 빼며. 이것으로 족했다. 아니, 모든 보상을 받았다 여겼다.

그는 욕심이 없었기에, 단 한 번 하나만을 바랐다. 사람도 아니었고 사랑도 아니었다.

그저 말 한마디가 그의 바다를 가득 메우는 공기고 빛이었다.

“그거면 됐습니다.”

* * *

꽃이 만개한 어느 날.

“안녕하십니까, 레이 플레람 아퀴타입니다.”

“저건 뭐 저렇게 각 잡고 인사를 하냐? 나한텐 안 저랬잖아?”

“그만해, 형. 아실리에게 처음 인사하는 자리잖아.”

봄이었다. 꽃이 피었으나, 꽃에 무심했던 청년은 알지 못한 계절.

“음, 안녕. 나는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야.”

“황녀님을 처음 뵙습니다.”

그는 황녀와 재회했다.

“응. 얘기는 많이 들었어, 경이 그렇게 강하다며?”

“……그런 편이긴 합니다.”

다시 만났으나 소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을 먼저 알고, 처음을 가장했던 날.

“그렇지만 신관은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상관이야.”

“…….”

이 순간이 운명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날.

“강한 거에 신관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어. 대단하다.”

평생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다시 듣는 순간 삶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잘 부탁해.”

“……예.”

당신을 지키는 검이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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