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책과 세계
‘수습을 할 때인가.’
한참을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던 것 같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문뜩 눈을 깜빡였다.
우습게도 이성과 두뇌란 게 제 역할을 하는 순간 황궁을 보수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마 카스토르의 습격으로 또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을 것이다. 수습은 내 몫이지 않을까.
대신 이젠 그란 적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이 땅의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비록 누구도 그 축복을 실감하지 못한다 해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돌 부스러기가 흩어지고 나무가 죄 꺾인 정원은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일기장이었다. 다 헤지고 찢어진 표지를 만져 본다. 아주 느린 손짓으로. 이젠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살아 있어?”
만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중간에 뻥 뚫린 구멍 때문일까. 쓸어도 보고, 모서리를 만져도 보았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새삼 슬프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미 넘칠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니까.
‘펼치면 아무렇지 않게 예지할 것만 같아.’
다시 한 번 예언이 나타날까 무서웠다. 그렇게 한참을 펼칠 각오를 하지 못하고, 일기장만을 바라볼 때였다.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인기척은 대놓고 존재를 드러냈지만 나는 한참을 더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걸.’
번아웃 증후군에 걸린 듯이 혹은 죽을 만큼 달린 사람처럼 무기력과 공허감이 손끝도 까딱하고 싶지 않게 했다. 그러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분명 텅 비어 있었는데. 어느새 눈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새벽하늘과 대조되는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궤적을 그렸다. 잠시 카스토르인가 경계했지만 그 오해는 손쉽게 허물어졌다. 전혀 다른 얼굴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자색이었다. 황금색과는 판이하게 다른 색이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도 의미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당신이 왜 이곳에 계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손안에 든 일기장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죽음의 신이시여.”
믿기지 않지만 이 남자는 죽음의 신이었다. 칼타니아스의 환영에서 본 신과 얼굴과 똑같았으니까. 더구나 신력에 예민해진 몸은 찌릿찌릿한 감각을 쉼 없이 전하고 있었다. 눈앞의 대상을 경배하라고 말이다.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어째서 신을 보면서 태연한 건지 나도 모르겠다. 오래전 나라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놀라고 기뻐하거나 혹은 두려워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저 또 다른 의무가 생긴 건가 싶은 무정한 감상뿐이다.
“그렇지 않다. 이곳은 현실이며, 네가 아는 현재가 맞으니, 의심하지 마라.”
묵직한, 그러나 깨끗하고 아려한 음성이 착각이 아님을 인정했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네요.”
“넌 미치지 않았다.”
그는 딱딱한 어투였으나 다정한 음색이었다. 의아함에 머리를 들었다. 왜인지 호의가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어째서 여기 나타난 건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다.
“이제 쓸모를 다해 죽기라도 하나요?”
날 선 음성이 새어 나갔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 거였다면…….’
왜 그동안 내가 불행에 몸서리 칠 때, 아니 조금 전까지 카스토르와 생명을 걸고 싸우는 동안엔 왜 나타나지 않았단 말인가. 아, 전능한 신이라서 방조한 건가? 그런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났던 걸까.
“이제야 나타날 수 있게 된 거다.”
죽음의 신은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내게 대답했다.
“나는 수정에 봉인되었고, 봉인한 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나를 봉인했던 주신의 힘이 사라진 것이지.”
주신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신을 봉인했었던 수정을 떠올리며 가만히 죽음의 신을 응시했다. 카스토르와 싸우는 동안 황궁에서도 큰 일이 있었던 걸까.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는 신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그는 마지막 시간이 엉킨 공간을 만들기 위해 땅에 깃든 주신의 힘을 모조리 빨아들여 사용했지. 그 과정에서 수정을 봉인했던 힘도 사라졌다.”
그래서 수천 년 만에 풀려 나왔고, 나는 황궁을 산책하는 신을 보게 된 건가. 기묘한 상황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럼 당신은 산책 중이셨나요?”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무성의하게 물었다.
“아니. 나는 너를 만나러 왔다.”
신의 음성엔 숨길 수 없는 호의가 묻어났다. 이번엔 분명히 느꼈다. 표정엔 거의 변화가 없으면서도 음색은 다정하다.
참 이상하게 여겨졌다. 내가 죽음의 신을 본 것은 칼타니아스 옆에서 청초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너는 이 땅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주신의 기운을 모아 새로운 신이 될 뻔한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를 막은 자. 이 땅을 멸망으로부터 지켜 냈지.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 신을 대표해 너에게 보상해 주려 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말에,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저 황망한 기분이었다.
“보상?”
그런 나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신이 끄덕였다.
“하. 하하하…….”
공허함 사이로 화가 치밀었다.
“필요 없어요.”
이제까지 팽개쳐 두고, 버린 아이를 찾아온 부모처럼 보상 운운하는 건 뭔가? 그것도 이제야, 전부 잃고 겨우 승리한 지금에서야!
“심정은 알겠으나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분기가 치민 나의 음성에도 신은 차분했다.
“나는 저승을 다스리는 신. 나의 권한으로 내릴 수 있는 보상 또한 이와 관련한 것들이지. 나는 너에게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보상을 주겠다.”
저승을 흐르는 강은 스틱스강으로, 이 강으로 흐르는 것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강에 대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뜻하므로.
“……뭐?”
그러니 지금 신의 말은 본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그게 무슨…….”
“네가 생각한 것이 맞다.”
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를 모든 것이 시작한 순간으로 되돌려 주겠다.”
절벽에서 내몰린 듯한 아득한 얼떨떨함이 가슴을 덮쳤다.
“돌아간 너는 각성하지 않은 상태로 갈 것이다.”
“그 말은…….”
“죽어도 반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신이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돌아가는 순간은, 그것을 줍는 순간이다.”
손가락은 정확히 일기장을 지칭했다.
“돌아가겠나?”
솨아아. 바람 소리가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추운 걸까. 서늘한 공기가 솜털까지 훑고 지나간다.
일기장을 처음 줍는 순간이라. 아마 아올레시아의 방을 청소하던 말이겠지. 바람이 머리칼을 알알이 세는 동안 나는 몇 번을 입을 열고 닫았다가 간신히 쥐어 짜냈다.
“과…… 거는 바뀌지 않는다고. 신마저 바꿀 수 없다고…….”
“그 말은 사실이다.”
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변하지 않은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네가 죽음을 반복하며 미래를 바꾼 것과 비슷한 방법이라 해 두지.”
일기장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간 적은 있다. 하나 7일과 같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돌아간 시간 속에서 너는 그것을 택할 수도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것이라면 역시 일기장이겠지.
“다시 이 순간이 온다 해도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무슨 악마의 속삭임인가. 애써 태연하려고 비웃음과 함께 미간을 찌푸려 봐도 신은 미동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그럼……. 카스토르를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신이 느리게 말했다.
“확답할 수는 없으나,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바뀔 것이다.”
카스토르와 처음 마주친 것은 일기장을 발견하고 나서 아모르를 찾았을 때였다. 일기장을 발견하지 않고 만약 돌아간다면 하베르미아의 달 10일엔 자리를 피해 마주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걸림돌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죽는 것보다는.
“하, 하지만 카스토르와 루스벨라도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간 적 있다고…….”
“그것과는 다르다. 너는 각성 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니.”
신은 놀란 나를 응시했다.
“네가 단 한 번도 죽지 않는다면 신도 신력도 관련 없는 삶을 살며, 더는 같은 시간을 반복할 일도 없이 편안히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겠지.”
그랬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공허로 쌓인 벽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 가는 없는 건가요?”
“그렇다.”
이런 좋은 기회가 아무런 불행 없이 주어진다고?
반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더 소중히 여길 것이다. 주변 이들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뀌겠지. 어쩌면 일기장을 얻으며 생겼던 수많은 불운을 비껴갈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생겨났다.
‘루스벨라도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이젠 모든 사정을 아니까. 물론 카스토르와 루스벨라를 피하는 일이 쉬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어진 기회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이자 유혹인지도 모른다.
나는 두 손을 꽉 마주 잡고 신을 응시했다. 입술을 축였다. 내 시선은 오아시스를 찾는 사막의 표류자처럼 갈급했다.
“정말로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건가요? 정말로……?”
뜻밖에 죽음의 신이 입술을 다물었다. 어째서? 조금 전까지는 대가가 없다고 해 놓고서.
“부작용을 듣고 싶나?”
역시나. 모든 것이 순조로울 리가 없지.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로 인해 태어날 예정이었던 자가 태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죽고, 누군가는 꿈을 잃는다. 이는 과거로 돌아간 네가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일이다.”
나는 멈칫했다. 당장이라도 알겠다 외칠 준비를 하던 혀가 뿌리에서부터 묶인다.
“네가 누군가의 인생보다, 네 자신을 우선시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부작용이다.”
신은 다정한 음색으로, 서리보다 차가운 말을 뱉는다. 그럼에도 경건하게 들리는 것은 신이라서일까.
“선택하겠나?”
나는 흐리게 웃었다. 분명 흔들렸다. 어떤 리스크가 있던 알겠노라 할 작정이었다. 지금도 당장 받아들이겠다 외치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끝내.
“거절하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마는 것은.
“나는 더 이상 누구의 희생 위에서도 살고 싶지 않아요.”
내게 삶이란, 누군가의 피와 살과 사랑으로 일컬어진 희생 위에서 피었기에.
“그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이라도 마찬가지야.”
아쉬움과 슬픔과 원망과 절망이 얼룩져 눈물로 뺨을 적시더라도. 희생을 짓밟고 이곳에 온 나는 택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가 아는 누군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거잖아…….”
온전한 행복은 희생에 있지 않다. 또한 돌아간다 한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의 죽음을 모욕하지 말라는 플뢰온처럼 그들의 희생을 무로 돌려서 나는 과연 모두가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던 이들을 잃었다.
희생을 바탕으로 만든 기회는 결국 나를 좀먹게 될 것이다. 나를 잘 알았다. 결벽증적이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희생을 피하고자 하는 나는 어쩌면 이미 망가진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이 시간을 살아 증명하겠어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러나 여기까지 해냈다.
신은 내 선택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깊은 시선으로 나를 담으며.
“알겠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음색과 달리 자색 눈동자는 호의를 품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눈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보상은 어떤가.”
신은 변함없는 음성으로 또 다른 것을 내보였다.
“너는 원래 다른 세계의 영혼. 네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 주겠다.”
“아니요.”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는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예요.”
저쪽 세계에 쓰인 ‘지안’도 나의 이름이나, 이미 오래전 루스벨라의 환상에서 저쪽 세계에 있는 소중한 이들과 작별했다. 이곳에서 살겠노라 결심했다.
“그립지 않나?”
“그리워하기엔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나는 이곳에 소중한 것을 두고 가지 못할 거예요.”
비록 그 소중한 것이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일지라도.
“그러니 그 보상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방금 신이 웃었나? 웃을 듯 말 듯 한 신의 입술은 다시 바라보면 반듯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그렇군. 어떤 것도 보상이 될 수 없다. 이건가.”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네 소원은 무엇이냐.”
나는 신의 긴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며, 같은 머리색이 이리도 다른 느낌을 줄 수 있구나 싶었다.
“……왜 제게 보상을 주시려 하죠?”
문뜩 물었다. 멸망을 막아 내서, 라고 하기엔 다른 이유가 느껴졌다.
“너는 칼타니아스와 같은 운명이지만 다른 결과를 맞이했지. 그것이 기쁘고, 또한 슬프다.”
‘칼타니아스’, 하고 담는 순간 신의 얼굴은 놀랍도록 부드러운 표정을 그렸다. 소중한 이를 잃은 자의 애수를 품은 눈은 풍랑을 마주한 쪽배처럼 애처롭고,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지만 역시 신이었을까. 눈을 깜빡이는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어떤 뜻인지 모를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소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텅빈 공동을 바라보는 순간 떠올랐다.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나요?”
나는 아마 차마 울지 못할 얼굴이었을 것이다. 내 소원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던 데인은 아직 살아 있을까? 중상이라던 레이 경은? 살아 있으나 평생 만날 수 없는 헤르난은 어떻게 됐을까. 전부 서쪽에서 쓸쓸한 끝을 맞이했지. 나 때문에, 나를 위해 희생한 자들.
“그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돌아왔다. 고개를 숙이자 끅끅.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알고 있었어요.”
고개를 들어 지고하신, 그래서 끝내 모습조차 비치지 않았던 신을 보았다.
“신 따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거란 걸.”
보랏빛이 춤을 추듯 일렁이는 신의 눈동자는, 짙은 보라색부터 연한 자줏빛까지 시시각각 색을 달리한다.
“이제 와 보상이라고? 소원이라고.”
마침내 나타난 신은 고매했다. 저 빛은 자수정처럼 찬연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여기까지 내 힘으로 왔어.”
당장이라도 숭배를 해야만 할 듯이 엄숙한 모습은 아름다운 동시에 겨울에 핀 매화처럼 고아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세계는 내가 지켰어.”
살을 내어 줬다. 피를 내어 줬다. 이 시간은 내가 살점을 바쳐 얻어 낸 미래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이것으로 당신들이 필요 없음이 증명된 거야.”
신이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지?
“필요 없어. 알아들어?”
도망칠 생각은, 언제고 해 봤지 않았겠나. 과거로 도피하는 것은 결국 똑같은 비극을 낳을지도 모를 가능성이 함께했다. 신이 주는 보상은 전부가 도피였다.
끝없이 피 흘려 이 자리에 있는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과거 운운할 때부터 느꼈어.”
지난날 그토록 찾았던 신은 겨우 이 정도였나. 나는 이런 존재를 찾아 우짖었나.
“사실 카스토르는, 당신들도 어찌할 수 없던 거지?”
엉망으로 망쳐진 인간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 게 무슨 신인가.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이 떨어진다.
“꺼져.”
실망은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잦아들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절대자에게 희망을 버렸으니까. 그랬기에 이 자리까지 왔으니까.
“모든 불운과 절망을 꺾어 이 자리에 있듯,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정해.”
신을 만나 후회하는 초대 황제가 이 순간을 봤다면 즐거워했을까.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황제, 당신은 보고 있나? 지금 나는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나는 신의 손을 거절했으니까.
사납게 뇌까린 나의 말은 대화의 끝을 뜻했다. 신이 수긍하거나 불쾌해하리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 그게 네 대답인가?”
새까만 머리칼이 너울처럼 흔들렸다.
신은 나의 침묵을 받아들였다.
“운명에 따라, 네가 겪은 불행을 알고 있다.”
“그래서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무릎 꿇어 앉은 자와 무심한 신. 쓸쓸한 풍경 속 나에게는 더는 신을 향한 경배도 경탄도 없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 너 하나로 한정되었다.”
잠시 말을 멈춘 신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면 행할 텐가?”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찬찬히 미소했다. 신이 말한 바를 이해했으니까.
“거래하자는 건가요?”
다시 말을 높인 나의 음성엔 어디에도 존경이 담기지 않았다.
“너는 무엇을 줄 수 있지?”
신의 말에 미소가 더욱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래. 이런 식이어야지.’
수많은 유혹을 딛고 이 자리에 섰다. 과거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의문스러운 신의 호의보다는 이쪽이 편했다.
“무엇이든지.”
줄곧 생각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죽은 플뢰온부터. 데인과 레이와 그리고 헤르난. 그들 모두 내게 모든 걸 주고 희생당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라 우기지만.
그렇다면 나 또한 돌려주면 되지 않겠는가.
“내 무엇이라도 내주겠어요.”
당신들은 나의 선택을 비난할까. 아니, 슬퍼하겠지. 그러나 그들 없는 세상이 내게 더욱 끔찍했음을 알고 있을까.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다.
“너는 무엇을 원하지?”
단순히 소원을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와 같지만 비교할 수 없이 고매한 색의 눈동자를 보노라면 마음이 거울처럼 투영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라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절로 입이 열렸다.
“나의 행복이 완전해지기를.”
메마른 표정 속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단 한 사람이라도 빠진 나의 세상은 완전하지 못하니까.”
신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너는 무거운 대가를 지게 될 것이다. 너는 저승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이들 대신 인과를 짊어지겠지.”
각오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이 땅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신이 될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노라면, 신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주신은, 나의 형은 갈기갈기 찢어진 칼타니아스의 영혼을 찾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은 것은 원념과 원한뿐이었지. 풀어 줄 형이 죽음을 택했기에 나는 수정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담담히 풀어놓던 신은 나를 바라보고는 보일 듯 말 듯 미소했다.
“이천 년, 긴 시간이었지. 나의 신력이 모두 수정에 녹아 흩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순간 얼굴 위로, 칼타니아스의 죽음을 보며 오열하던 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신은 차분하게 말했다.
“앞으로 모든 신관이 천천히 신력을 잃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신력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가 찾아오겠지. 하지만 너는.”
잠시 보랏빛이 일렁였다. 그 움직임이 조금 서글프게 보였다.
“모든 이들이 힘을 잃어 가는 시간에도 홀로 강대한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몸 그대로 인간 이상의 수명을 갖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시선은 그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네가 짊어지게 될 진정한 대가다.”
나와 같이 강대한 신력을 가졌던 루스벨라는 죽고, 카스토르는 먼 곳으로 사라졌다. 그들만큼이나 강한 이는 나 혼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내 눈에 망설임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리하겠어요.”
모두가 다시 살아나 전부 행복한 세상을 맞이한다면, 좋으리라. 그 시간이 한정되었다 해도 언젠가 홀로 남더라도. 나는 그 시간을 추억하며 버티리라.
“모두를 살려 주세요.”
신이 마침내 웃었다.
“네가 나의 마지막 신관이겠구나. 너는 이 땅의 최후의 신관이 될 것이고.”
놀랍게도 그의 손 위에는 구멍이 뻥 뚫린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내게 건넸다.
“돌려주겠다.”
신은 그리 말하고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찰나에 집착하여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인간은 수없이 그런 실수를 반복해요.”
신은 날 보지 않은 채 미소했다.
“그대들이 우리의 피조물이니 닮은 것은 당연한가.”
곧은 저 옆얼굴은 어쩐지 줄곧 뜻을 알 수 없었던 얼굴이지만, 지금만은 알 것 같았다. 달을 보며, 그리워하고 있다.
“너는, 후회하지 않겠나?”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네. 난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래……. 그런가.”
그의 목소리가 차차 차분하고 낮아졌다. 어째서인지 강대하던 기운이 안개처럼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마지막 하늘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하는 신의 음성은 꼭 그 불행은 여기까지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나는 원하던 이의 곁에 가겠군.”
그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너도.”
고개를 돌리면 더는 신의 모습은 없었다.
참으로 인간다운 신들이었다. 집착에 못 이겨 스스로를 땅에 묻어 죽은 신도,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스스로 갈기갈기 찢은 신도, 환상에서 단편이나마 보았던 다른 신들 또한.
남아 있던 신의 잔재. 신력이 거대한 빛으로 산화했다. 거대한 빛기둥. 나를 휘감은 빛이 올라가 소리 없이 흩어진다. 하늘에서 빛이 비처럼 주룩주룩 내렸다.
‘신의 죽음이란 눈앞에서 별이 부서지고, 별빛이 흩어지는 것과 같구나.’
눈동자 색과 같은 보라색, 진한 자주색, 제비꽃과 같은 연보라색과 그윽한 분홍빛까지. 촛불처럼 일렁이던 빛이 꽃처럼 만개했다. 사라지는 빛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곧 덧없이 사그라지는 죽음이었다.
다시 새벽의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곳엔 나를 제외하면 겨우 보이는 건 손 위에 일기장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기장을 펼쳤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펼치는 순간,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어?”
너무나 희미했지만 분명 빛이었다. 눈을 크게 뜨며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꾸물꾸물 움직이는 잉크가 보였다.
더듬더듬 나타나다 마침내 완성된 문장.
정말……. 기억을 지울 거야?
이를 보고서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 지금 그걸 물어볼 때야?”
분명, 빼곡히 나를 괴롭혔고 정말 미웠던 것이었건만. 낮게 흘리는 음성에는 원망이 실리지 않았다.
“지우지 않을 거야.”
눈감은 채 중얼거렸다. 어차피 본능적으로 그놈의 기억만 지울 수는 없음을 알았다. 지울 수 있다고 하여도 더는 나는 어떤 기억도 잊을 생각이 없었다. 그마저도 나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놈 혼자 그렇게 믿으라지.”
나는 빛이 아련히 일렁이는 일기장을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그에겐 사무치도록 외롭고 힘든 고통이겠지. 쭉 그렇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내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스스로도 지금 힘이 빠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니.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일기장이 대답하듯 빛을 약하게 깜빡거렸다. 다시 펼치면 다시 더듬더듬 단어가 떠올랐다.
그 책에 마음을 주지 마세요.
언젠가 일기장 가장 첫 페이지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그리고 차츰 사라지더니, 새로운 문장이 쓰였다.
왜, 마음을 주었어?
그에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지워지지 않은 슬픔으로 눈물이 나고, 희미한 기쁨으로 벅차오른다.
“내 세계니까.”
언젠가 내 시작이었을 그때를 떠올리며, 마침내 끝이 다가온 이 순간.
“행복해질 거라 믿었어.”
방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