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⑴
자녀가 똑똑하다면, 리프예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래전부터 인재 교육에 힘쓴 리프예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교육기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만큼 각종 인재들이 모였다. 또한 인재들 사이에는 수많은 괴짜들이 존재했다. 지금 가볍게 걸어가는 키세스가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고고학 전공자로서 고대 표의 문자를 줄줄 외는 괴짜이자 막 준학자 과정을 밟고 있는 인재였다.
막 칼타니아스의 고대 신어를 읊조리던 키세스는 어느 방문 앞에서 문을 쾅 열었다. 방 안은 먼지와 함께 새하얀 종이로 가득했다. 키세스는 성큼 걸어갔다.
“아벨!”
그가 종이가 잔뜩 쌓인 한 곳에 멈춰 섰다.
“일어나. 얼른!”
키세스가 종이를 들춰내자 놀랍게도 사람이 있었다.
“으…… 누구…… 키세스?”
서류를 이불 삼아 늘어져 있던 남자가 느리게 눈을 떴다. 졸음기 가득한 남자의 눈동자는 짙은 암녹색이었다.
“나 밤샜다니까…….”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너 이번에 임시 교사를 맡았다고. 안식년을 맞이한 리차드 2급 학자 나리 대신 하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아벨이 눈을 크게 끔뻑였다. 곧이어 그는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아아.”
“기억났지? 어서 가.”
그러나 아벨의 눈동자는 여전히 잠에 잠겨 있었다. 그런 아벨을 억지로 일으킨 키세스는 아벨을 덮은 서류 뭉치를 대충 치워 두고는 들고 온 것을 그에게 건넸다.
“이거 너희 반 명부.”
아벨이 맡게 될 반의 이름표였다. 아벨이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채 끝까지 보기도 전에 툭 내려놓았다. 그런 아벨을 보며 쯧 혀를 차는 키세스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네가 맡은 반에 네 모국 사람이 있더라. 칼타니아스.”
“칼타니아스?”
아벨이 반문했다. 키세스가 끄덕였다.
“그래. 거기. 거기서 왔어.”
“그 폐쇄적인 곳에서 견학을 요청했다고? 그래서 누가 왔는데?”
“이야, 너 진짜 소문이 느리구나? 웬 황녀가 학생으로 찾아왔다고 하잖아. 며칠 네 반에 머물다 갈걸?”
아벨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타인에게서 듣는 제 나라의 이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깔았다.
‘황녀?’
황녀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그에게는 아니 땐 장작에 불이 붙는 일이었다. 잠시 뒷머리를 긁적인 아벨이 명부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명부를 넘겼다. 그가 찾던 이름은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아실리 로제.’
잊지 말라고 친절하게 초상화도 함께였다.
“기간은 일주일 정도. 목적은 견학이라더라.”
아벨은 뺨을 긁적였다.
아실리 로제, 그 이름은 낯설었지만 모습은 기억했다. 아올레시아와 그의 친누이인 2황녀 에리스. 이 둘은 절친한 친우였다.
‘이거 참. 그 갓난애가 이렇게 컸구나.’
신기한 느낌이었다. 어린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보았다. 제 누나와 누나의 친우의 품에 안겨 채 눈도 뜨지 못했던 갓난아기였던 그녀의 모습을 말이다. 분명 제 여동생이었다.
‘친혈육은 아니지만 말이지…….’
그는 눈썹을 긁적였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 그가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온 거지?’
아카데미에 왕족이나 황족의 방문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폭넓은 견해를 익히기 위해서 찾아오기도 했고, 실제로 입학하는 자들도 수두룩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오는 일은 드물었다. 입학 시즌도 아니지 않은가.
“있잖아.”
또한 칼타니아스는 여느 나라와 달랐다. 그곳은 매우 폐쇄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칼타니아스에서 오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나라일 뿐 아니라 위로 올라가며, 또 성별이 여성일 경우엔 더욱이 금지했으니까.
“그 황녀도 묘한 힘을 가지고 있으려나?”
키세스는 흘끔 아벨을 훔쳐보았다.
“너처럼.”
키세스는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제국에서 오는 이들 족족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그것을 신력이라 부르곤 했다.
“모르지.”
아벨이 어수룩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가능성은 있으려나.’
일어난 아벨은 보통 성인의 배 이상으로 컸다. 이를 두고 아벨은 늘 자신이 모시는 신 때문이라 말했다. 그 신은 바람의 신이다, 이건 신이 내린 신관의 특징이다 등등 처음에 설명했지만, 타국인인 키세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리프예국에서 나고 자란 이였다. 리프예국에는 국교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힘들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휘이이잉.
그러나 지금처럼 그의 힘을 목격한 순간이면 키세스는 이해하고 만다. 방 한가운데 선 아벨의 눈동자에서 신비한 금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바람에 머리가 흔들거리도록 두었다.
‘세상에 신비라는 건 존재하는구나.’
바람이 불어 마치 서류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차곡차곡 움직이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보는 키세스 옆에서 아벨이 아무렇지 않게 목을 움직이며 문을 바라볼 때였다. 자그만 소년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벨 클라우드 학자님 계시나요?”
청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은 푸른 눈을 깜빡이며 아벨을 불렀다.
“여기 계셨네요.”
그에 아벨은 미간을 푹 찡그렸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오늘부터 저희 반 수업이시라지요?”
곧 아벨이 입을 삐죽이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폰투스’.”
그가 성큼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참 성실하기도 하지.”
“비꼬지 마세요. 학자님은 단순해서 전부 티 난답니다.”
소년은 신기하게도 은발이 가닥가닥 섞인 청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어서 가요. 학자님.”
몸이 스치는 순간 아벨이 소년이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속삭였다.
“거. 저한테 존댓말 좀 쓰지 마십쇼. 눈과 바다의 대신관 나리.”
작게 징그럽다며 투덜거리는 아벨을 바라보며 소년은 그저 웃고 있었다. 아벨이 지나온 자리 뒤로 잔향처럼 남은 바람이 커튼을 흩트려 놓았다.
* * *
제국의 날씨는 1년 내내 봄에서 가을 온도를 유지했으며, 더위와 추위는 아주 잠깐씩 다녀가곤 했다. 당연히 복식도 하늘하늘하고 속이 비치거나 얇은 천을 주로 사용한다.
“아실리, 넌 그곳에 학생 신분으로 가게 될 거야.”
“응. 대충 들었어.”
반면 리프예국은 춥다. 이곳은 1년 내내 서늘한 날씨를 유지했다. 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요컨대 기본적으로 초가을에서 늦가을 즈음 서늘하고 쌀쌀한 날씨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계절이 존재하나 여기서 조금 따뜻하거나 더 추워진다거나 이런 모양이다.
“엣취, 오늘부터 데인 너도 학교, 아니 아카데미로 간다고?”
이곳에 도착한 지 이틀째.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나를 덮친 추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이 꽤 따뜻한 편이라 들었는데도 나는 연신 재채기를 해야 했다.
“응. 난 다른 학년을 맡을 거야.”
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지도를 보여 주었다.
“여기 이 건물부터 여기까지.”
“찾으면 된다고?”
“맞아. 네가 2학년, 내가 3학년을 비롯한 고학년.”
“눈과 바다의 신관을 찾기 위해서 말이지?”
“응.”
나는 데인을 바라봤다.
“미안해. 황제 폐하께서 내게 맡긴 일인데.”
데인은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에 달콤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는 내게 말했다.
“전혀.”
네 일인걸. 하고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냥 황제라고 말해. 존칭이 아깝잖아.”
“……뭐?”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줘. 나는 황제를 좋아하지 않아.”
그는 내게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움찔, 나도 모르게 다가온 그를 피해 물러난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했다.
“머리카락.”
그가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너를 수정에 제물로 넣으려 했던 쓰레기잖아?”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고 끄덕였다.
“……그렇지. 어어…… 그런데 데인.”
“응.”
그가 나른하게 대꾸했다. 왜일까 여전히 다정한 얼굴인데…….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데인이 조금 바뀐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음. 있잖……. 아, 아무것도 아니야.”
출발한 마차에서부터 데인과 나 사이에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응. 아실리.”
그 분위기는 리프예국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과민 반응입니다.”
레이 경은 딱 잘라 말했다.
“데인 황자님은 전과 같으십니다.”
“아니야.”
“맞습니다.”
나는 조금 불만스럽게 레이 경을 바라봤다. 조금 전, 이 꿉꿉하고 기묘한 데인과의 기류를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도중 레이 경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런 답이 나온 것이다.
“정말입니다. 황자님은 전과 다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내 역설에도 그는 단호했다. 이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은 데인 편인거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불경스럽게도 그의 눈에 한심함이 스치는 걸 나는 똑똑히 봤다. 뭐 이런 호위님이 다 있나.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그러자 레이 경은 깊은 남색 눈동자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이렇게 말했다.
“변한 것은 황녀님의 시선이지 않을까요.”
“내 시선?”
그가 끄덕였다.
“황녀님께서 황자님을 바라보는 시선, 관점……. 그리고 황자님을 생각하시는 마음 말입니다.”
“내가 데인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경은 알아?”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퉁명스러운 어조에 나 또한 뱁새눈을 하고서 그를 바라봤다.
“경. 친절할 거면 일관되게 친절하게 대해 줄래?”
“전 황녀님께 차였는데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이런 직구는 아니지 않나. 뭐 이런 양반이 다 있냐는 눈으로 본다.
“우리 확실히 하자. 경이 고백을 안 한 거야.”
“결과를 알았으니까요.”
레이 경은 무심히 직구를 던져 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의 남색 고수머리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미간을 찌푸렸다.
“했으면 달라졌습니까?”
그저 해 본 말인 것 같았다. 떠보려 하거나 기대한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날 불편하게 했다. 아니, 레이 경. 쓸데없이 핵심을 파고들었잖아. 레이 경이 물었어도 처음부터 말을 하면 안 됐었다.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으니까.
“그런데, 경.”
“네.”
레이 경이 걸음을 멈춤에 따라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이젠 아실리 님이라고 안 불러?”
“싫으십니까?”
“아니? 이상해서. 데인은 데인 황자님, 플뢰온은 플뢰온 황자님이라고 잘 부르잖아.”
“그랬죠.”
그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편하게 계속 나도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때?”
“싫습니다.”
레이 경은 한 걸음 뒤에서 고요하고 편안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레이 경의 표정이 묘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살짝 비껴갔다.
“들으면 후회하실 텐데.”
등골로 차가운 것이 쏴아아 내려가는 기분. 여기서 침묵을 지킨다면 분명 어색해질 것 같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아. 경. 내가 호기심에 독약도 먹을 사람이었어.”
들고 있던 일기장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살짝 미소한 레이 경은 그런 나를 보며 또한 가벼이 말했다.
“이제는 이름으로 불러 드리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곤란?”
그가 천천히 눈을 깔았다. 웃는 듯 아닌 듯 흐린 표정이 덤덤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그가 여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제가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생각날 것 같아서요.”
나는 그가 내뱉고 나서야 결코 가볍지 않은 말임을 알았지만. 돌이키기엔 지나 버린 뒤였다. 마치 결혼 전 친구가 부른 자리에 눈치 없는 친구가 얘 너 전 애인은 어쩌고? 물어본 느낌이었다.
“……아마시아를 말하는 거야?”
아마시아, 제국에서만 쓰이는 중간 이름.
이것은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이름이다. 아직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아실리 로제의 ‘로제’처럼. 레이 경은 천천히 끄덕였다.
“경은……. 날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어?”
“네.”
그는 바람을 그대로 감내하는 비석처럼 웃었다. 정말로 우직한 비석처럼 말이다. 내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내려 할 때였다.
“황녀님!”
누군가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으아아아.”
아니, 정정한다. 잡으려 했다. 그보다 레이 경이 먼저 나를 잡으며 떼어 놓았지만. 덕분에 막 나타난 남자는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넘어지려던 것을 겨우겨우 손을 휘저어 다시 균형을 잡았다. 막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레이 경의 품에서 고개만 돌린다.
“체쟌 왕자님?”
“네!”
체자르니안 왕자가 있었다.
“기다렸어요! 오늘부터 제가 안내해 드리기로 했잖아요?”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풀밭 위 강아지처럼 잔뜩 상기된 낯이었다.
“기억하시죠? 네?”
눈을 깜빡인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 되는 단단한 턱 위로 붉어진 뺨이 보였다.
“그럼요.”
윌터의 체자르니안 왕자, 그는 이곳 아카데미에 작년 입학한 학부생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를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왕자는 날 기다렸다며 직접 숙소로 안내하기까지 했다. 그의 친절에 데인과 레이 경은 매우 불편해했지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네!”
눈앞에서 은발이 거칠게 곡선을 그렸다. 체쟌 왕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탓이었다.
“왕자님께서 이곳의 학생인 줄은 몰랐네요.”
물론 나도 여기 와서 알게 된 거다. 책 『루스벨라의 빛』 속에는 이런 언급이 없었으니 말이다.
“마중 감사해요. 왕자님.”
귀빈 숙사에서 나오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아마도 왕자는 쭉 이 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얼어붙은 그의 뺨이 신경 쓰였다.
“벼, 별말씀을요. 그럼 가시겠어요?”
나는 살짝 끄덕여 보였다.
“도착했군요.”
뒤에서 레이 경이 중얼거렸다. 레이 경의 말처럼 어느새 건물이 코앞이었다. 나는 웅장한 건물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옛날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4층 건물이 앞에 있었다.
리프예국 왕립 아카데미.
교육 시설 겸 각종 학문의 학회 본거지이다. 전 대륙의 학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별칭은 지식의 요람. 이곳에서 배우지 못할 학문이 없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내겐 이런 의미보다도 더욱 그게 와닿는 것이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루스벨라가 있다.
“황녀님, 이쪽! 이쪽이에요!”
나는 천천히 체쟌 왕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7일이었다. 황제는 내게 눈과 바다의 신관과 혼돈의 신관 사이에 있을 반란 모의 증거를 찾아오라 지시했다. 요컨대, 7일 안에 이 넓은 건물 안에서 루스벨라를 찾아야 했고, 눈과 바다의 신관과 혼돈의 신관의 꼬리를 잡아내야 했다.
7일이라…….
문득 처음 죽음을 선고받았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일기장은 내게 7일의 시간을 주었다. 이런 걸 보면 난 참 7일이란 숫자와 악연이 깊은지도 모르겠다. 피식, 입술 사이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황제는 왜 이 시기에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걸까.
“네?”
“아뇨.”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체쟌 왕자를 향해 생긋 웃었다.
“……와.”
“이곳이 강의실이에요.”
잠시 뒤, 체쟌 왕자를 따라 커다란 강의실로 들어간 나는 작게 감탄을 토해 냈다.
“멋지네요.”
태어난 뒤 줄곧 거대한 신전과 신전처럼 생긴 궁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전혀 다른 양식의 책상이 낯설기만 했다.
“그렇죠?”
청량한 고목 내음이 어렴풋이 코로 흘러 들어왔다. 칼타니아스에서는 가구의 주재료로 돌을 이용했다면 리프예국은 나무를 사용했다.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이 때문에 레이 경과는 일찍이 입구에서 헤어진 지 오래였다.
왕자가 말하길 이곳의 학년 말 시험은 아주 어려워 갈수록 숫자가 줄어든단다. 그래서 넓은 강의실에는 의외로 사람이 드물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급할 수 없다고.
“여기 앉으세요!”
손수 의자를 빼서 탁탁 두드리는 왕자가 나를 휙 올려다봤다.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나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에게 꼬리가 있다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나를 보는 눈의 반짝임이 공을 쫓아가는 강아지같이 반짝반짝했다.
“왕자님께서는 참 친절하시네요.”
“네? 물론이죠!”
“여성에게 이렇게 친절하신 모습이 보기 좋아요.”
“물론……. 네네?”
“고마워요.”
그가 펑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은 낯을 손바닥 사이에 숨겼다. 나는 슬쩍 미소를 삼키며 강의실을 둘러봤다. 칠판이라거나 분필 그리고 곳곳이 유럽의 고풍스런 가구들을 연상하게 했다.
예스러운 가구에서 눈을 떼어 내며 학생 쪽을 둘러볼 때였다. 나는 줄곧 나를 바라보던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보통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으면 피할 만도 한데 소년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얌전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그런데 왤까. 마치 그가 줄곧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담당 학자인가 봐요.”
왕자가 소곤소곤 속삭인다. 그의 말처럼 남자가 교단 쪽으로 가는 걸로 보아 선생 내지는 교수인 모양이었다. 못 본 사이 강의실에 사람이 꽤 들어차 있었다. 대개가 체쟌 왕자 또래의 소년 소녀였다.
탁.
남자가 성의 없이 명부를 내려놓는 것과 함께 곧이어 소년의 시선도 떨어졌다.
“이 반을 임시로 맡게 된 조교 아벨 클라우드입니다. 호칭은 성심껏 부르도록 하세요.”
교단에 선 남자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무척이나 커다란 체구였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것보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가까울 만큼. 아마도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큰 것 같다.
“학생들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면서 함께 학문을 함께하는 동료이며 선후배기도 합니다. 이곳은 신분도 재산도 중요하지 않으며 실력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곳입니다. 가끔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잊는 이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이견도 항의도 받지 않습니다. 부디 이 점 명심하길 바랍니다.”
남자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다가 한곳에서 멈췄다.
“특별 대우를 바란다면 조용히 돌아가도 좋습니다.”
짧게 쳐진 녹청색 머리칼 아래,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자리했다. 왜일까, 녹음이 생각나는 눈동자를 본 순간 아모르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모르의 푸릇한 색에 비해 남자의 눈은 이끼처럼 어두운 녹색을 띠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편애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내용은 경고에 가까웠지만 왜인지 어조는 매우 장난스러웠다.
“내 눈에 띈다면 적어도 편안한 생활을 누리겠지만, 그 반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특히, 다른 목적을 띤 채 이곳에 오는 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줄곧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씩 웃었다. 그의 시원한 미소가 품은 건 묵직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활기였다.
“전달할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낸 아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탁탁 명부를 정당히 챙겨 한손에 든 아벨이 고개만 돌렸다.
“참.”
막 기억났다는 목소리였다.
“이곳은 대도서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야간 출입이 통제됩니다. 오밤중에 돌아다니다가 추방당한 모 왕국 왕자님도 계셨다고 하니 알아 두면 좋겠네요.”
아벨은 명부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간드러지는 말씨와 다르게 투박한 어조였다.
“특히나 도둑이 기승을 부리거든요. 그래서 침입자는 엄히 다스립니다. 그 외엔 뭐 자유로우니 자율적으로 뭐든 해도 좋습니다.”
수업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보통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수업이 있다고 하지만, 오늘은 없다고 한다.
나는 그 뒤 체쟌 왕자의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살핀 뒤 그대로 돌아왔다.
* * *
그날 밤.
막 씻고 응접실로 나가자 데인이 탁자에 기댄 채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옆에 놓인 봉투를 보아 편지인 것은 분명한데 데인은 내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저렇게 골몰하다니.
“데인?”
부름에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잘못 본 것인가 했다. 조금 전 그는 이상할 정도로 심각한 낯이었으니까.
“그건 뭐야?”
“아아. 제국에서 온 서신. 형이 보낸 거야.”
플뢰온이? 별일이었다. 플뢰온은 편지를 즐기지 않는 성미였으니까.
“그런데 왜 그리 심각하게 읽어?”
“응. 그랬나?”
거기다 봉투를 보아 하니 데인에게 보낸 것 같았다. 데인은 내 것이 따로 있노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이어 플뢰온의 편지를 읽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순전히 잔소리네.”
요약하자면 밥이나 잘 챙겨 먹으란 소리 같은데 참 길게도 써 놨다 싶었다. 그의 결벽적인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낸 단정한 필체를 다시 보고는 내려놓았다.
“학교는 어땠어?”
“그냥 그랬어. 수업을 안 했어서……. 맞아. 나 담당 학자에게 찍힌 것 같아.”
“그래? 담당 학자가 누구인데? 어느 과목?”
“과목은 모르겠어. 이름은…… 아벨? 아벨 클라우드였나.”
“뭐?”
나는 데인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데인은 왜인지 웃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벨? 정말 아벨 클라우드였어?”
“응?”
“남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 그리고 신장이 거대하고?”
천천히 끄덕이자 데인이 표정을 굳혔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궁금해하는 내 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음, 아실리. 그 사람은 칼타니아스의 3황자야.”
“뭐?”
“내겐 형님이자 네겐 오라버니.”
이게 무슨 말이야.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내가 딱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데인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도 놀란 모양이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얼굴이 퍽 진지했다.
“추방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추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사실은 죄를 짓고 추격으로부터 도망간 것이라고 하더라.”
“죄?”
“응. 황실의 위협으로부터 말이야. 그리고 사라졌지.”
데인이 손을 뻗어 내 뺨으로 손을 가져왔다. 그는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은 마지막 바람의 신관이었어. 본래는 2황녀도 함께 바람의 신관이었지만 황제에게 모든 힘을 빼앗기고 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최후의 신관이지.”
그러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 데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오래전 실종된 사람이 왜 여기 있지?”
3황자라.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은 기묘했지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평생 볼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책 속에서도 크게 다뤄지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런가? 하지만 여기서 그를 보게 됐다.
우연일까.
돌아보면 내 주변의 일들은 항상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다음 날, 레이 경은 대사관에 데인의 답신을 전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떠나기 전 데인과 짐짓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뭘까. 급한 일이면 나에게도 닿겠거니 생각하며 눈을 떼어 냈다.
조금 뒤 레이 경이 떠나고 데인이 다가와 손끝을 가볍게 붙잡았다. 무언의 허락을 묻는 시선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끼웠다.
“너를 만난 정원도 가을이었어. 낙엽이 지는 가을.”
계절은 가을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날이 좋은 시기가 지금이라 한다. 등굣길을 데인과 함께하며 그를 흘끗 보았다. 이상하게도 내가 볼 때, 보는 족족 시선이 마주쳤다. 줄곧 내내 나만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있지, 데인.”
“응?”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꺼내지 못했다. 네가 만났다는 날은 언제를 말하는 거야? 우리가 만난 날은 봄이었잖아. 너는 어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묻지 못한 것이 숨과 함께 넘어간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여전히 닿지 않은 채였다.
“그만 봐. 닳아.”
데인이 내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걸.”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너 그거 나 꼬신 거였어?”
한 번은 묻고 싶었다. 정말. 데인이 고개를 숙이며 풉 하고 웃었다. 살랑 실바람에 갈색 머리칼이 포근하게 나부꼈다. 그가 나른하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야 알았어?”
그가 눈을 휙 휘었다. 감정을 떠나 잘 만든 조각 같은 남자와 그의 입꼬리에 걸린 황홀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얼굴만큼은 데인이 제국 최고인 것 같다.
“네가 말했잖아.”
“뭐를?”
“멋있어져서 복수하라고. 그때는 당해 주겠다고.”
<으음, 저 아실리? 흉내가 아니라 진짜 황자인데.>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아주 오랜 일처럼 느껴지는 4년 전이었다.
<그럼 멋있어져서 복수해. 당해 줄게.>
나와 체구도 신장도 비슷했던 사람이 나보다 훌쩍 큰 청년의 얼굴을 하고서 나를 달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해. 그때 가면 내가 애원할지도 몰라. 너무 잘생겨져서.>
햇살을 담뿍 받은 땅의 색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만 여전할 뿐 더는 내가 아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난 약속을 지켰어. 아실리.”
그가 손을 흔들며 나를 보낼 때까지. 우리의 남매로서의 추억은 정말 추억으로 남았으며 이제는 두 남녀가 있을 뿐이란 걸 다시 자각했다.
“하…….”
데인을 보내고 나는 허전한 손을 바라보다 팔목을 바라봤다. 잎사귀로 엮은 듯 푸릇한 색의 팔찌가 달랑 흔들거린다. 너무 멀어서 닿지 않는 걸까. 아니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걸까. 눈을 감는다. 정신 차리자. 더 중요한 것이 있잖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신다고요?”
잠시 뒤 강의실 앞에서 체쟌 왕자가 쩔쩔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인다.
“네. 리프예국의 대도서관. 그곳에 가고 싶어요.”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체쟌 왕자의 당황한 표정을 마주해야 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온 지 겨우 3일 만에 수업에 불참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는 내가 견학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줄 알고 있을 테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시다시피 제겐 일주일밖에 없어요. 사흘이 지났으니 오늘까지 딱 4일 남았네요.”
하지만 상황이 급했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모든 퀘스트를 마치고 보상까지 얻어 가려면 이것저것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제가 좋아하는 걸 보고 싶어요. 도서관은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네. 그렇지만.”
“그리고 도서관은 일주일이란 시간으로도 살펴보기 힘들 정도로 넓다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체쟌 왕자는 눈을 깜빡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다시 조그만 강아지가 겹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치 화장실 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나를 바라봤다.
“전 꼭 도서관을 돌아보고 싶어요.”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찾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물론 거짓말이다. 난 책이 아닌 루스벨라를 찾아볼 생각이니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이곳은 이렇게 찾는다고 해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럼. 황녀님.”
왕자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생각했는지 빠르게 체념한 모양이었다. 대신 돌연 도서관은 넓다며, 갑자기 건물의 규모니 장서량에 대해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우물쭈물하던 왕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나중에라도 제가 안내해 드리면 안 될까요?”
“네?”
왜인지 왕자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황녀님 시간 되실 때라도. 네?”
이에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이건 뭘까. 체쟌 왕자가 마치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처럼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선의와 호의였다.
“왕자님께서 왜요?”
“그건……. 아, 아무튼 부탁드려요! 네?”
그는 책 속 조연이었다. 내 삶의 조연이 아니었기에 잠시 잊긴 했지만 꽤나 비중이 높은 인물이었다. 된다고 할 때까지 한참을 이리 쳐다볼 것 같았기에 나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이미 과거 제국 방문에서 그의 고집을 경험한 탓이다. 결국 왕자는 다음 산책까지 약속하고서 홀로 돌아갔다.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왜지? 이 왕자는 이상하게 내게 호감이 높다. 이건 내가 칼타니아스에서 그의 부탁을 전부 들어줬기 때문인가? 지금 본편대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본편과 다르게 가고 있는 걸까.
새삼스러운 고민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왕자가 내게 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지. 이것이 훗날 영향을 미칠까? 분명 루스벨라에게 푹 빠지는 조연인데 말이다. 피식 웃었다. 마성의 주인공을 어떻게 이겨. 내가 그 정도로 영향을 끼쳤을 리가 없는데.
체쟌 왕자와 헤어지고 나는 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쭉 걸었다. 일단 도서관으로 간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일단 그쪽부터 뒤져 봐야 할 테니까.
『루스벨라의 빛』 속 루스벨라는 매우 똑똑하고 영리한 여성이었다. 언변이 뛰어날 뿐 아니라 높은 학구열 때문에 도서관에서 보내는 장면이 자주 묘사되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공부만 한 건 아니었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남주란 도랑도 치고 섭남이란 가재도 잡고. 아무튼 도서관은 그녀가 자주 출몰하는 장소 중 하나일 것이다.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
문제는 이곳의 크기였다. 넓어도 정말 넓었다. 실제로 이곳은 거의 도시에 비견되곤 했다. 모든 학문을 위해 설립된 곳이었으니. 나는 끙 신음을 흘렸다. 여기서 어떻게 찾지? 전생의 대학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곳인데. 나는 손에 쥔 일기장을 바라봤다.
“……이럴 때 활약 좀 해 봐.”
몇 백, 몇 천 번을 봤을지 모를 낡은 문양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마지막이잖아.”
어라, 마지막? 왜 이런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마지막이라니. 아모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서인가? 스스로 한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순간 왼쪽 뺨이 따끔했다.
“빛?”
아릿한 고통에 뺨의 흉터를 쓸어내리던 그때였다. 일기장이 희미한 빛을 드러냈다.
“설마.”
황급히 아무 장이나 펼치자 일기장의 빈 페이지가 기다렸다는 듯 잉크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파도 같은 일렁임은 서서히 필체로 자리 잡았다.
[……달려.]
내가 서 있는 곳은 갈림길이었다.
“어디로? 어느 쪽으로 가라는 말이야?”
그러자 글을 쓰는 것처럼 필체가 서걱서걱 쓰인다.
[왼쪽. 얼른.]
고개를 든 나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때마침 나타나긴 했지만 왜일까 일기장의 빛은 평소와 다르게 현저히 약했다. 나는 달리며 언젠가 펜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황녀님. 리프예국에서 힘이 약해져도 놀라지 마세요.>
칼타니아스를 벗어난 신관은 본래의 힘에 반밖에 내지 못한다고 한다.
<칼타니아스의 신력은 이 땅에 깃든 주신의 힘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땅에서 멀어지면 힘 또한 약해지지요.>
이는 일기장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카스토르도 아올레시아도 공통적으로 말하길 이것은 신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으니까.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내가 사라지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조금 더 뛰었을까. 나는 어느 한적한 공터에 도착했다.
[멈춰.]
일기장의 지시에 따라 멈췄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도서관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주변은 고즈넉한 정원이었다. 건물은 곳곳이 창문이 열려 있었고, 흰 커튼이 펄럭이는 곳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필 때, 날카로운 소리가 파고들었다.
“이봐요, 거기! 거기 아가씨!”
누군가 외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위를 바라봤다. 누군가 난간에서 옆 창문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 웬 여자가 걷는 중이었다.
“……젠장.”
누군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니 난간 위에 위태롭게 놓인 화분이 보였다. 심지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뭐야. 주인공을 내 손으로 구하라는 건가? 아니면 본편의 내용이기에 지켜봐야 하는 걸까. 위급한 순간에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봐요, 거기!”
그러나 다급한 음성과 함께 아슬아슬한 위치의 화분을 한 번 더 바라본 나는 달렸다. 멀리서 봐도 휘둥그레 눈이 뜨일 법한 미인, 저건 분명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다.
바로 밑으로 보이는 금발을 향해 나는 달렸다. 당연하겠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빨리, 더 빨리 달릴 다리가 필요해. 간절히 빌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간신히 여자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었다.
“피해요!”
한발 늦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고, 쨍그랑! 사기그릇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아. 하아.”
뺨에서 아린 감각이 느껴졌다. 타이밍 좋게 나는 이미 여자를 붙잡고 바닥에 앉아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괜찮아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 네에. 이게 대체.”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언제였더라. 레베카를 구할 때였던 것 같다. 놀라지도 않는 나를 보면 이제 위기와 한 몸이 된 것 같다. 여자 대신 저 화분에 맞았다면 이번 생은 이대로 끝이었겠지. 왜인지 뺨이 간지럽다. 손을 들어 올려 뺨을 닦으려 하는데 누군가 그보다 먼저 손을 탁, 잡는 타인의 손이 있었다.
“만지면 안 돼요.”
나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네?”
마침내 우리 눈이 마주했다.
“사기 조각이 들어갔을지도 몰라요.”
나는 크게 눈을 깜빡였다.
흰 도자기를 깎아 만든 것과 같이 유려한 곡선을 지닌 이마와 상아빛 뺨, 장미를 머금은 것처럼 새빨간 입술.
모든 것이 책에 쓰인 것과 일치한다.
“제게 약이 있어요. 전 약학부라…….”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찬란한 미녀가 지금 내 앞에 존재한다.
“잠시만요.”
나는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맙소사.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조금 전 본 게 정말 사실일까? 눈을 크게 깜빡여 본다. 주먹을 쥐어 손톱을 손바닥에 깊이 박아 보고서야 지금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태양의 가장 찬란한 조각을 녹인 것처럼 금을 녹인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책 속 구절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한 이 세계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걸 어째……. 약이 이것밖에 없네. 끄응. 할 수 없나.”
「그 머리색과 같은 당신의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 나는 사랑에 빠졌소.」
마침내 나는 찾았구나.
나를 바라보는 이 눈동자. 머리색과 같은 찬란한 금빛 눈동자, 이것은 정말로…….
“약 발라 드려도 될까요?”
“네? 네.”
루스벨라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운 분. 저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서요.”
“네…….”
찾았다 루스벨라.
“정말로 고마워요.”
나는 약을 바르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막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 내던 루스벨라의 순진한 눈이 나를 향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어쩌죠…….”
나타나 줘서.
“아파요.”
존재해 줘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녀에겐 사슴 같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아주 어린 사슴 캐릭터가 찰떡같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파요? 조금만 참으면 안 될까요…….”
“저 많이 아픈데…….”
또한 순진하며 물정을 몰라 그 좋은 머리로도 깜빡 속아 넘어가는 성격 또한 일치하는 것 같다.
“아, 아니다. 저한테 더 좋은 약이 있는데 그걸로 발라 드려도 될까요?”
“더 좋은 약이요?”
“네. 방에 다녀와야 하지만…….”
“음 그것보다는요.”
나는 루스벨라의 손목을 쥔 채 엄지로 슬쩍 쓸어내렸다. 그리고 눈을 휘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약학부라고 하셨죠? 그럼 약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요.”
물론 나는 이게 겸손이란 걸 알고 있다. 책 속 루스벨라는 매우 영리한 여성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이였기도 했고 그래서 남주가 죽어 갈 때 직접 약을 구해 오기도 했다. 책 속에서 무엇이든 치료하는 약이던 ‘넥타르’. 그 약의 재료와 제조법은 오직 루스벨라만이 알고 있다.
“있잖아요. 저는 방금 그쪽을 구했어요. 그렇죠? 저것을 맞았으면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몰라요. 달리 말해 그쪽의 목숨을 구한 거예요.”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낮게 속삭였다. 사색이 된 루스벨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네. 마, 맞아요.”
“이런, 떨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하잖아요. 다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단 걸 말씀드리고 싶었던 거니까.”
그녀를 단호하고 다정하게 타일렀다. 거짓은 아니다. 저 화분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죽었을 테니까. 물론 주인공이니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는 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안단 말인가? 그 상처로 죽어 버렸을지.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는 걸 안다. 이건 겪어 본 자만이 갖는 무게였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루스벨라가 꿀꺽 침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해 준 것만큼만.”
나는 생긋 미소했다. 루스벨라, 네가 내게 줄 것은 어렵지 않아.
“그쪽도 내게 그 정도를 주면 돼요.”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마음에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사실 나는 원하는 약이 있는데 찾을 길이 없어 막막했거든요.”
마침내 이 세계의 주인공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 이 손으로 주인공의 손을 잡았다.
“어렵지 않죠?”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달콤한 꿀처럼 반짝이는 네 눈동자가 당황으로 흐려지더라도 뜻을 꺾지 않을 거야. 계산적인 것 같지만 내 사람을 지키는 게 더 급하니까. 아모르의 약을 내게 줘. 나긋한 어조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게 그녀를 압박했다.
“난 아실리 로제예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칼타니아스에서 온 황녀랍니다.”
안녕. 난 엑스트라고, 네게서 삥을 뜯을 거란다.
“아.”
루스벨라가 눈을 깜빡이더니 곧 가장 화려한 봄처럼 웃었다. 그녀 옆에서만 꽃이 날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흩날리는 풀잎과 꽃잎 사이, 머리카락을 걷어 낸 그녀의 낯은 경계나 악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화사한 웃음이었다.
“저는 약학부 졸업반 루스벨라 샤이 제엘로에요.”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에 대한 긍정이었다. 바라 마지않았던 일이었다. 현명하면서 심지 굳고 심성이 고운 사람. 그녀는 모든 것에 선량했다.
“뭐든 도와드릴게요.”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 순간이 카스토르를 만나기 전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눈을 깜빡인다.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파르르 작게 떠는 일기장의 진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