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황폐한 땅,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
이게 뭘까.
나는 얼른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게 뭐지? 황제가 가도록 명한 곳이 루스벨라가 있는 곳이었고, 그와 동시에 루스벨라를 보았다는 편지라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주인님?”
레베카가 놀라 어깨를 잡았다. 난 그녀에게 가까스로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꽤 먼 곳이라 놀라서…….”
정신 차리자.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
이곳에 정말 루스벨라가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원작은 존재하고. 그리고 원작은 이미 시작되었다. 곧 카스토르가 황제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말이며 동시에 주인공들이 이 나라로 오는 것을 뜻한다.
“레베카. 아카데미의 개학날이 어떻게 되지? 지금은 방학이야?”
“네. 아마, 개학은 주인님께서 도착하는 시기와 일치할 걸로 예상됩니다.”
주인공들이 아직까지 아카데미에 재학하고 있다면, 졸업을 앞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체쟌 왕자가 그들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했다. 원작 속 그들은 윌터 왕의 반대에 부딪쳤고,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아마도 지금은 그 시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루스벨라를 만날 수 있겠지.
만나는 게 나쁘진 않다. 무엇보다 아모르를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서는 루스벨라를 만나야 했다. 루스벨라가 실제로 있었던 거라면 잘 된 일 아닌가. 다만 놀란 것일 뿐. 그렇게 난 놀란 심장을 달래려 했다.
“레베카. 준비해 줘.”
쉬이 가라앉지 않는 떨림을 가라앉히고 레베카에게 떠날 채비를 명했다.
그날 밤.
갑작스레 준비할 것들을 끝내놓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 도달한 곳은 어둠 속에 묻힌 커다란 궁이었다. 그의 궁전은 여전히 초록 식물들로 휘감겨 있었다. 아니, 달빛 아래 전보다 더욱 많은 넝쿨을 볼 수 있다. 그것들 전부 궁을 요람처럼 휘감고 있었다. 아마도 잠든 주인을 지키는 것이리라. 주인이 편안한 잠을 이어 갈 수 있게.
한걸음에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궁 안까지 뻗은 줄기들은 한곳을 중심으로 뻗어 있었다. 중심은 다름 아닌 아모르의 침실이었다. 벽과 천장에 촘촘한 넝쿨들은 꼭 정원수로 만들어진 거대한 미로를 생각나게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구나.”
문을 꽁꽁 묶어 놓은 줄기들이 존재한다는 건 아모르가 깨어나지 못했다는 말도 되리라. 현재 아모르의 방은 허락된 소수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아모르가 쓰러지던 날 함께 있던 자들과 치료 신관 하나. 이 정도 인원이 전부였다.
아모르의 침실 앞에서 손잡이에 손을 대자, 꽁꽁 묶여 있던 식물들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지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고마워.”
끼이익.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싱그러운 풀내음이 느껴진다. 조금 더 들어가자 달빛 아래 침대에 곤히 잠든 그가 보였다.
“……오라버니.”
우스운 건 오랫동안 4황자 궁에서 일한 누구도 이 방에 출입할 수 없다는 거다. 이건 아모르, 그가 이곳에 있던 누구도 믿지 않았음을 반증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외로운 이 궁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천천히 다가간 나는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저 왔어요.”
시선이 천천히 떨어진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것 같다. 그만큼 아모르는 눈감은 채 고요하게 잠들어있었다.
“오늘 잘 보냈어요?”
대답 없는 그에게 말을 걸어본다. 한참 그를 쳐다보던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겹겹이 진 시트 주름을 의미 없이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틀 뒤 난 이곳을 떠나요.”
그 말을 하며 다시 잠든 그를 바라본다.
“물론 도망가는 건 아니고. 당신의 약을 구하러 가요.”
『루스벨라의 빛』 속 그처럼 아모르의 생명은 차차 빛을 잃고 바스러지고 있었다. 원작의 내용처럼.
“나는 당신이 내가 아는 미래에서처럼 죽지 않길 바라요.”
치료 신관이 이르길 아모르가 깨어나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신력의 지속적 고갈에 부상이 겹쳐 병마저 악화된 것이라고. 이대로 지속된다면 명을 재촉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오래전 그와 약속했다. 나는 그에게 약을 가져다주기로.
그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이젠 내가 오래된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약속이 없었어도 기꺼이 길을 나섰을 것 같다. 어느덧 누구보다 소중해진 당신을 위해서.
“당신은-.”
잠든 그를 오라버니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게 혈육이 아닌 책 속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오라버니가 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이 세계의 인물.
플뢰온과 데인과 나처럼 페이지에 스치듯 등장한 사람이 아닌 주연으로 등장한 사람 말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구원은 그 사람이 줄 것이라 믿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당신은 줄곧 내게 원작 속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존재했으니까. 나는 조심스러웠다.
<이름을 불러줘. 아모르― 하고.>
그때는 그것이 당신이 행복해질 길을 막게 되는 것일까 봐 두려웠다.
나는 원작의 존재를 의심 없이 믿었다. 그래서 의혹의 여지 없이 당신이 루스벨라를 사랑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죽고 죽으며, 차츰 원작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카스토르가 내게 보내는 그 집착이 루스벨라에게 했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문은 증폭되었다. 정말 이곳은 책 속 세상이야? 그럼에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원작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것은 나를 지탱하는 마지막 끈이었기에 놓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이상하죠.”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밤이 되면……, 밤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당신과 내가 함께했던 긴긴밤. 밤은 우리의 유일한 안식이며 휴식이 되어 주었다. 실없이 대화를 주고받던 수많은 밤을 떠올린다.
“당신이 생각나곤 했어요.”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 유리로 된 길을 걷는 듯 뾰족하고 날카로웠던 당신과 죽을까 잔뜩 겁을 먹었던 나를.
<살아 주세요!>
다시 생각한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맨발로 뛰었던 날을. 당신을 대신해 독을 먹고 죽어 가던 시야에 사로잡힌, 망연자실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던 당신을. 그리고 되살아난 나를 떠올린다.
<우린 동료에요.>
아모르, 그는 내가 유일하게 살려 낸 사람이었다.
“나는 잃은 게 참 많아서…… 내게 무엇을 잃었느냐 물으면 말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을 살렸던 날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처음 본 날과 변함없이 성마르고 예민했지만, 그럼에도 끝내 나를 인정했다.
“너무 많으니까.”
난 씁쓸하게 웃었다.
<인정해. 너와 나는 동료야.>
기꺼이 나를 그만의 울타리에 들여 준 날을 기억한다.
<네가 죽었을 때의 감정 소요보다 네가 살아 있을 때 소모가 더 적을 것 같으니까.>
그러나 마침내 그가 나를 인정했을 때, 때는 늦어 버려 이미 수십 번 죽은 내가 아모르를 보고 있었다. 이런 황폐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라버니.”
그럼에도 그날로부터 내게 아낌없이 주는 당신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참 이상하다 여겼다. 왜 그리 내게 정을 쏟는 것일까? 의문을 갖기도 했다. 나를 연민하는 걸까 그렇게 고민도 했었다.
<끊임없이 나를 찾아와 그토록 귀찮게 굴었던 시간이 네게 그저 시간 낭비였다고 하진 않겠지? 필요가 됐든, 그 잘난 연민이 됐든, 설사 네 욕망에 나를 이용하려 하든.>
그러던 어느 날, 언제인가부터 당신은 조급하게 애틋한 시선으로 나를 담았다.
<넌 내가 필요하잖아.>
동료라며, 동료에게 주기엔 과분하도록 쏟아 주며, 당신의 몸마저 돌보지 않고 내게 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메마른 마음으로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아니, 나를 돌보기 급급해 차마 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이란 그저 무겁고 이해하지 못한 미지수 값과 같았다. 힘들던 날에 짐만 될 뿐이리라 생각했다.
“당신이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기뻤던 것은 오라버니가 내가 살린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수십 번의 하루에서 죽고 죽는 내 하녀들을 구하지 못했지만, 당신을 구해 냈다는 그 희망이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아니 그 희망이 사실은 내게 구원이었다.
악몽이 찾아오는 밤. 당신과 함께하는 밤이 나를 잠시나마 잊게 했다. 아모르. 나와 같지만 다른 고통을 함께한 당신이 베풀었던 그 밤들이 사실은 숨통을 트게 하고 긴 날숨을 뱉게 했다.
그래서일까. 매일을 죽어 가는 하루를 보내면서 끝내 의연한 당신을 바라보며 느꼈던 안쓰러움이 어느새 다른 감정이 된 것은.
“당신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과 같아서.”
무뎠기에 뒤엉킨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연민인지 동정인지, 그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인 것인지. 그래서 당신이 나를 바라보며 느낀 것도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처절한 삶을 살았기에 본능과도 같이 이끌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저 지나가는 연민일지 모른다고. 아직도 모르겠다. 수많은 이가 말하는 사랑의 형태는 각기 모양도 색깔도 달랐다.
그럼에도 나는 이젠 알 것 같다.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당신을 알았어요.”
시간은 한없이 쌓인 당신으로 덮인 흰 설원이었다.
당신은 끊임없이 내리는 눈이었다. 내리고 내려 나를 덮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돌아보니 당신으로 덮여 있었다. 당신의 시작이 설사 연민이고 동정이면 어떻단 말인가. 당신이 오래도록 살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이 마음만은 진심인데.
“누군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물었을 때, 나는 참 이상하게도 당신과 축제날 거리를 걷는 상상을 했어요.”
내가 아는 원작과 다른 당신의 모습도 루스벨라가 나타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이제야 원작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당신이 그렇게 변하면 슬퍼질 것 같다.
“있잖아요, 기적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손등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보여 주세요.”
차라리 눈물이 말라 흘러내리지 않던 날이 좋았다 생각한다. 깨닫자마자 슬픔을 일으키는 이런 감정 대신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밀려오는 감정은 내가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황폐한 땅을 촉촉이 적신다.
“당신이 거짓말처럼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면.”
눈물이 아모르 옆으로 툭 떨어진다. 투둑 떨어지는 눈물은 베갯잇을 적셨다.
“이 순간 가장 큰 기적일 텐데.”
그러나 나는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임을 안다. 치료 신관은 병과 부상이 깊어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할 거라 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바람보다는 체념에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미련 없이 그것을 털어냈다. 그대로 일어나 그를 오래도록 내려다봤다.
“다녀올게요.”
아마도 내일은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이기에 그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잊지 않도록 꼼꼼히 바라보고는 돌아서려 했다.
휘리릭.
그때 손목으로 작은 넝쿨이 휘감겼다. 넝쿨? 이질적인 느낌에 손목을 바라보면 휘감은 넝쿨에서부터 작은 꽃이 피어났다. 뿐만 아니라 발밑에서 넝쿨들이 자라나 나를 밀어냈다. 마치 가면 안 된다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딜 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도 없이 가려 했나?”
눈꼬리에 걸렸던 눈물이 툭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불렀다.
“오라버니?”
그가 날 바라보며 작게 미소했다. 그는 무척이나 창백한 얼굴에 채 낫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눈 밑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워 기대어 있던 아모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손을 뻗었다.
“기적은 존재하나 보구나.”
그가 손가락으로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마주했다.
“안 그래?”
몸이 번쩍 들리는가 싶더니 난 어느새 그의 무릎 위에 자리해 있었다. 뺨으로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것이 느껴진다. 바로 앞에 그를 바라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얼떨떨하게 올려다보았다.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죠?”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올려두자 아모르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모르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나를 잡아당겼다.
“한번 확인해 봐.”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속삭였다. 동시에 입술이 나를 덮쳤다. 아모르의 키스는 늘 새가 쪼는 것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가곤 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눈 감아.”
그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놓더니 열린 입술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깃털처럼 나붓하게 다가온 그의 혀가 느릿하게 내 혀를 눌렀다가 떼어 냈다. 타액이 섞이며 신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그의 손이 등과 뒷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얇은 옷 사이로 조금 서늘하다 싶은 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읏.”
그가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는지 놀라 살짝 손을 떼어 냈다가 다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입맞춤은 능숙하기보다는 처음인 듯 서툰 느낌이었지만, 사춘기 소년의 것처럼 싱그럽고 풋풋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내 몸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나를 푹신한 베개 쪽에 기대게 했다. 천천히 몸이 뒤로 기우는가 싶더니 다리 사이로 단단한 것이 쑥 들어왔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실리.”
눈 밑이 잔뜩 붉어진 아모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긴 키스에도 여전히 갈급한 사람처럼 나를 불렀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웠다.
“하아…… 아실리…….”
충족되지 못한 목소리가 다시 아실리,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응답하듯 눈을 깜빡였다. 그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술을 덮쳤다.
“……으응, 응…….”
입술이 정신없이 엉켜들었다. 그는 내 입안 곳곳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하나하나 건드리고 핥아 내렸다. 마치 짐승이 제 어린 것을 핥아 내리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했다.
“왜, 네가 앞에 있는데.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조급한 사람처럼 급히 내게 들어왔지만, 결코 거칠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만 한참 앞서 어쩌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코가 부딪치며 혀가 엉키고 뱀처럼 얽혔다 풀어지며, 신음을 집어삼켰다.
느릿하게 눈을 뜬다. 신비할 정도로 맑은 녹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사하는 속눈썹이 그대로 보였다. 입술이 살짝 떨어지며 눈을 뜬 그가 약간의 틈을 둔 채 천천히 속삭였다.
“사랑해.”
그리고 답을 할 새도 없이 다시 그의 입술이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이어진 긴 입맞춤 뒤로 숨을 몰아 내쉬면 그가 나를 품에 가두고는 꽉 끌어안았다.
“내일이면 사라지면 좋을 꿈이라도 좋아.”
“사라지지 않아요.”
마른 듯했지만 단단한 품에서 눈을 감는다. 오래 앓아 쉬고 탁해진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파고들었다.
“꿈은 내가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가 나를 놓으며, 우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확인하듯 몇 번이고 이어진 입맞춤에도 아모르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눈이었다. 그는 숨을 채 쉬지 못해 눈물이 잔뜩 고인 눈을 쓸어 주었다.
아모르는 손에 깍지를 낀 채로 조급한 시선으로 나를 몇 번이고 바라봤다. 보아도 보아도 모자란 것처럼. 뺨을 쓸어내리고 머리카락을 쥐었다가 떼어 내고 상체를 숙였다. 다시 새가 부리를 쪼듯 작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촉.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마침내 너구나, 확신한 것처럼 웃었다.
“아실리.”
눈을 크게 깜빡인다.
“줄곧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미소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의 어떤 미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해사한 미소였다.
“뭔데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 있자, 툭툭 머리칼이 떨어지더니 어깨로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한 품에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새삼 그와 나 사이에 체격 차이가 꽤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그의 품 안에 갇힌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와…….”
아모르가 숨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나와 혼인해 주겠어?”
그에게서 터져 나온 건 그를 만나고 처음 들어보는 무겁고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벌렸다.
“잠깐, 오라버니.”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고백은 좋다. 입맞춤도 전부 좋다. 하지만 이건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직 나는 오래전 현대인의 사고를 버리지 못했나 보다. 아니, 이건 제국에서 나고 자란 이라도 경악할 진도가 분명한데?
“오라버니와 내가 남매라는 건 알고 말하는 거죠?”
“진짜가 아닌 것도 알지.”
“아니…… 그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내가 놀라 횡설수설하는 사이 아모르는 제 모습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서는 퍽 재미있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안 형님께는 말해 뒀어. 아니 거래했지.”
“2황자 오라버니요?”
“그래. 너와 내가 혼인하면, 그분을 지지하겠다 말해 뒀지. 난 어쨌거나 겉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모르의 말대로 그는 현재 중병을 앓는 황자로서 그 점을 내세워 1황자와 2황자 중 어느 쪽을 지지하겠다 성명하지 않은 채였다.
“너와 내가 혼인하면 대외적으로도 너를 최우선으로 할 명분이 생기니까.”
“남매라는 건요?”
손을 들어 올린 아모르가 내 뺨을 감싸 안으며 미소했다.
“제국에선 오래전부터 근친혼이 성행했어. 정치적으로나 신관의 핏줄을 잇겠다는 이유로 말이지.”
아니, 그건 나도 대충은 안다. 그리고 그 경우가 제국에서도 꽤 특별한 경우였다는 것도 말이다. 아모르는 나와 혼인하며 내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너도 2황자를 황제로 지지하겠다 하지 않았나? 거기에 나를 얹을 뿐이야. 형님께는 식물의 마지막 신관인 나와 주신의 후계자인 너 둘 다 놓칠 수 없을 테지.”
“어째서 그런 조건을 내세운 거예요?”
아모르가 그답지 않게 부드러이 미소하며 깍지를 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익숙하지 않은지 살짝 귀를 물들였다. 붉어진 뺨을 바라보는 내 얼굴은 필시 묘했을 것이다. 확신한다.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 줄이야.
“형님이 도움만 받고서 너를 버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거구나. 그러니까 정치적인 도구로 말이죠?”
이미 아하시야와 데인을 내세워 시행한 적 있는 일이었다. 위장 혼인이라. 그런데 아하시야와 데인의 경우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무산으로 만들 명분과 이유가 있었지. 그런데 나와 아모르는 그렇지 않을 텐데?
“그런데, 그거 한번 공표하면 그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모르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슬쩍 눈을 피했다.
“오라버니, 설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한 거였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나를 보며 아모르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일단 승낙부터 받으려 한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드러난 붉어진 귀를 본 뒤였다. 까칠함이 무장 해제된 그는 무척이나 새롭고 생경한 느낌이었지만, 싫진 않았다. 나도 모르게 풋 웃어 버렸다.
“그 뒤는 나중에 생각해 보려 했다는 거죠? 오라버니답지 않네요.”
“네 앞에서 어찌 나다울 수 있겠나.”
그가 눈썹을 씰룩이며 나를 바라봤다.
“널 보면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데.”
진지한 얼굴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가만 듣고 있으니 오늘 아모르가 하는 말 족족 파급력이라거나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슬슬 뒤로 물러났다.
지금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 쓰러진 그를 보며 뭔가 주체할 수 없이 많은 것을 털어놓은 것도 같고. 아니, 쓰러진 사람을 상대로 나 뭐라고 토해 낸 걸까.
“어딜 가지?”
“……바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슬금슬금 물러나는 발목이 탁 붙잡혔다. 그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이 밤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지금 막 생겼어요.”
어느새 활짝 열린 테라스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이 크게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도 아모르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달이 밝네요.”
어느 소설의 구절을 떠올린다. 달 밝은 날에 달을 가리키며 ‘달이 참 예쁘네요.’ 하던 말이 사실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지. 참으로 오랜만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아닌 척 돌려주었으니까.
“아아.”
천천히 돌아보면 아모르는 달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네. 눈을 뗄 수가 없어.”
아모르가 나를 보며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아모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모르는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내려 주세요. 내 발로 걸을게. 응?”
“안 들려.”
공주님 안기라. 레이 경에게 수없이 안겨 본지라 낯선 자세는 아니었지만, 환자에게 생각 없이 안겨 있을 정도로 무심하진 않았다. 내려 달라 외치는 목소리를 외면한 아모르는 천천히 테라스로 향했다.
“정말…….”
바닥을 바라보던 나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신기하게도 그가 걷는 걸음마다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와. 오라버니. 꽃이 피어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리자, 머리 위로 훈풍이 느껴졌다. 잔잔한 떨림을 보아 그가 웃고 있는 듯했다.
한 걸음에 분홍색, 다시 한 걸음에 이름 모를 붉은 꽃이 봉오리를 톡 터드린다. 꽃뿐 아니라 넝쿨이 잎새를 돋우고 작은 나무가 자라며, 어떤 것은 넝쿨을 지지대 삼아 천장까지 자라기도 했다.
그를 쫓는 식물의 행적은 녹색을 바탕으로 한 형형색색 색채가 마음껏 피어난 그림 같았다.
“춥진 않은가?”
마침내 테라스에 도착한 그가 나를 난간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난간이 낮아 그의 얼굴과 내 얼굴이 거의 같은 높이에 있었다. 아마도 내가 허리를 숙이면 금방 닿을 거리였다.
“춥지 않아요.”
날은 선선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올려 뺨을 쓸어내렸다. 바람에 잔뜩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 소리만이 존재하는 테라스에서 그와 나는 말없이 마주했다.
“식물의 신관은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식물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아모르가 말문을 틔웠다.
“처음 내게 식물에 대해 알려 준 것은 어머니야.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엔 형님이 가져다준 책으로 공부했지.”
“형님이라면…… 카스토르?”
아모르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조금 멀리 보는 시선으로 내 어깨 너머를 보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식물의 신관은 존재하는 모든 식물을 한 손에 다룰 수 있는 자.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다룰 수 있게 되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라스에는 식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녹색, 온통 녹색으로 들이찬 곳에서 싱그럽고 상쾌한 풀내음이 느껴졌다. 맨발로 테라스를 딛고 있는 그는 마치 인간이라기엔 무척 아름다운 모습으로 돋아난 식물들을 둘러보았다.
“아실리.”
그가 눈을 살짝 휘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창백했지만, 달빛 아래 하얀 도자기로 빚어진 듯 요요한 모습이었다.
“아실리, 세상에 없는 꽃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막 줄기를 건드려 보던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세상에 없는 꽃? 멸종해서요?”
“그래.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것.”
그 순간이었다. 섬광처럼 지나간 바람 아래 테라스에 피어난 모든 식물이 단 하나의 꽃을 틔워 냈다. 그것은 봉숭아 열매가 터지듯 톡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만개했다. 세상이 푸르며 옅은 보랏빛의 꽃으로 가득했다. 화사하고 화려하게 피어난 꽃 앞에서 아모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꽃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곧 바람이 불며 꽃잎이 비처럼 흩날렸다.
“그래서 의미가 기적이라고 하지.”
팔랑팔랑. 내려오는 꽃 사이에서 아모르가 미소하고 있었다.
“네가 내게 나타난 것처럼.”
테라스가 아니라 아늑한 숲속 같았다. 설탕처럼 달콤한 이 순간 둘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격리된 세상 속에 오롯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처럼 휘날리는 꽃을 멍하니 바라볼 때, 아모르가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너를 만난 모든 순간이 기적이니, 너는 존재 자체로 내게 기적이구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귀를 지나 목으로 내려간다. 그가 부드럽게 내 목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나와 영원히 함께 살자.”
부드러운 속삭임이 나붓이 내려앉았다.
“난 널 보면 오래도록 살고 싶어져.”
그러고는 그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네가 말한 거리를 걸어보고 싶구나. 너와 함께.”
나는 그의 말이 조금 전 청혼의 연장선임을 알았다. 어떤 말도 못한 채 그를 마주하면 그는 천천히 미소하며 입술을 눌러 붙였다.
“대답은 돌아와서 듣지.”
그의 뒤로 꽃잎이 휘날리는 그림 같은 풍경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 * *
이튿날, 테레나 궁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그야 궁의 주인이 난생처음으로 먼 길을 떠나는 날이니 그런 거겠지만. 정작 당사자는 한가하기만 했다. 준비야 하녀들이며 레베카가 전부 해 주니 나는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얼씨구.”
턱을 괸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본 플뢰온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는 영준한 낯을 찌푸린 그대로 내게 다가와 머리를 거칠게 흩어 놓았다.
“한가하기 그지없구나.”
나이를 먹어도 버릇은 어찌 못하는 걸까. 왜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더니. 저기 정성껏 머릴 빗어 준 레나가 울상을 짓는 게 보인다. 난 산발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툭 던졌다.
“어쩔 수 없는걸.”
내가 뭘 하려 해도 화들짝 놀라며 앉아 계시라 하는데. 그리고 최근 소릭스가 내 부관 노릇을 하게 되며 직접 움직일 일이 더욱 줄었다. 유능한 부하들이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고, 톡톡히 누리고 있달까. 소릭스에 레베카라니. 나는 무슨 복을 타고난 걸까? 어쩌면 개고생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보상받는 걸까.
“오라버니야말로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네가 먼 길 간다는데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플뢰온은 곧이어 나를 툭 건드렸다.
“들었지? 데인 그놈이 함께 간다는 거.”
“아. 응.”
리프예국 기준으로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나는 미성년으로 보는지라, 나이가 이미 성인임에도 보호자를 동반해야 입국이 가능했다. 그에 따라 내 보호자로 동행하게 된 사람이 데인이었다.
“그쪽 법이 좀 우습긴 한데. 차라리 잘 됐지, 뭐.”
억울한 게 없진 않다. 이미 성년이 지난 지 오래고 황제의 고집으로 성년식만 치르지 못한 건데 말이다.
“데인이야 워낙 똑똑하니까. 덕분에 일이 예정보다 훨씬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래.”
플뢰온은 그가 먼저 말을 건네 놓고는 왜인지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찝찝함을 떨쳐 내지 못한 표정이었다. 데인이 함께한다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다른 것으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뭐가 고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에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뭐야. 플뢰온. 나한테는 매일 비밀 좀 만들지 마라느니 해 놓고 입 싹 닫을 건 아니지? 참고로 한 입으로 두말하면 머리 벗겨진다.”
“뭐?”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보던 플뢰온이 곧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고민이길래 이렇게 신음을 흘리는 걸까. 저리 찌푸리면 주름만 늘 텐데 말이다. 물론 잘생겼으니 늙어도 그 미모가 어디 가겠냐마는……. 그는 잠시 짐을 옮기는 시종들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숙였다.
“불카누스의 대신관이 이곳으로 오고 있어.”
턱을 괸 모습은 언제나처럼 완벽하리만치 우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반문했다.
“불카누스? 네 조부님 아냐?”
불카누스는 플뢰온의 외가이기도 했다. 불카누스의 경우 타 신전과 다르게 여자도 신관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신전이었다. 그의 모친이 한때 대신관 후보였던 신관이었다고 들은 적 있다. 그리고 현 대신관은 6황비님의 부친, 즉 그의 조부였다.
“내 어머니의 동향이 이상해.”
“이상하다니?”
“불카누스는 공식적으로 황궁에 출입이 금지된 신전이야. 오래전 내 어머니를 순순히 황제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튼 그런데 대신관, 내 조부가 이제 와서 황궁으로 찾아온다는 게 이상하단 거다. 거기다 최근에 어머니가 2황자랑 자주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루스벨라의 빛』 속 카스토르는 서브 주인공이자 광기로 똘똘 뭉친 폭군이었다. 그런 카스토르가 황제가 되기 직전 2황자의 반란이 있었다. 아마도 카스토르의 제위를 막으려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율리안이 한창 반란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설마 하니 불카누스도 그곳에 가담하려 하는 걸까. 그때 어떤 신전들이 모여서 참여했는지까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진 플뢰온의 말에 나는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거기다 8황비나 7황비랑도 가까이 지내셨으니. 하……. 나도 잘 모르겠다.”
플뢰온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이름에 눈을 깜빡였다. 6황비님과 아올레시아가 가까이 지냈다고?
“내 모친이랑 6황비님 사이에 친분이 있었어?”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내 어머니가 2황자와 뭔가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어째서?”
“5황자. 내 형님 때문에.”
플뢰온이 씁쓸하게 미소했다. 비죽이 올라간 눈매를 축 가라앉히며 그가 눈 쪽을 꾹꾹 눌렀다.
“어머니는 형님을 미워해. 아니 황제를 쏙 빼닮은 게 형님의 탓은 아니지. 아무튼 형님을 보고 싶지 않아 하신다. 그래서 2황자와도 뭔가를 할 리가 없어. 2황자는 5황자의 보호자나 마찬가지니까.”
플뢰온이 입을 꾹 다물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사이 문 쪽에서 레베카가 다가오고 있었다. 플뢰온도 그녀를 본 것 같았다.
“별일이야 있겠냐.”
그가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헝클어 놓는 것이 아닌 퍽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플뢰온을 보면 그가 어른스러운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인 그놈이랑 싸우지 말고.”
왜일까. 실없는 소리로 말을 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언제 싸운 적 있던가.”
“그놈, 혼자 사라지지 않나 잘 봐.”
“왜?”
“그놈의 목을 사촌이 노리고 있으니까.”
“……뭐?”
목이 턱 막혔다. 동시에 건국제 날 보았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데인의 사촌이라 하면 데로스였다. 내 앞에서 대신관이 살해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던 사람. 놀란 눈으로 플뢰온을 응시하면, 그는 특유의 서늘하고 성마른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알아 두는 게 좋아서.”
“……왜?”
“그놈이 널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너도 알아야지. 제 가문도, 민족도, 하다못해 자기 자신마저 버린 그 놈을.”
플뢰온이 내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그의 얼굴로 자리했다.
“오라버니는 뭘 아는데?”
“글쎄. 그놈이 제 목숨마저 하찮게 여길 정도로 널 끔찍하게 아낀 거?”
플뢰온은 알고 있었던 걸까? 데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플뢰온은 의문에 대한 대답 대신 우아한 말씨로 나긋하게 뱉었다.
“나도 그놈을 잘 몰라. 하지만 오래 봤기에 아는 것도 있지. 그리고 그놈의 사랑이 생각보다 질기고 오래됐고, 집요했던 것도.”
“…….”
“물론 네 결정이 무엇이 됐든 난 관여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너는 알아야지. 그놈이 너를 지독하게 사랑했다는 것을.”
“플뢰온.”
그는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너희 둘이 어떻게 되던 내 망할 동생들이란 것은 변함없어. 알아만 달라는 거야.”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날 향했다.
“네 말대로 우린 더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 * *
레베카가 마차에 모든 짐을 실었다고 전했다. 나는 카우치에서 일어나 마차로 향했다. 겉은 하녀들과 레베카를 대동한 채로 우아하게 걷고 있을지 몰라도 실은 플뢰온이 했던 얘기의 여파로 반쯤 생각에 잠겨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긴 복도를 걷고 있을 즈음인가 누군가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나?”
고개를 돌리자 한나였다. 한나는 새하얗게 질려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는데, 마치 종말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뭐지?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자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카스토르.”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큰 키에 몹시도 매혹적인 미소를 건 그는 오늘도 검은색 일색인 차림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꼭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그가 마침내 내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안녕. 아실리.”
그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귀를 적시는 황홀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어 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그러고는 눈을 예쁘게 접어 미소하며 곧바로 물었다.
“어쩐 일이신가요?”
카스토르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미소했다. 오늘도 찬연한 금색 눈동자에 빛이 스쳤다. 아니, 햇빛을 반사하여 더욱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끼는 여동생이 먼 곳으로 떠나는데 어찌 한번 보러 오지 않을 수 있겠니.”
카스토르가 손을 뻗어 내 머리끝을 쥐었다가 놓았다. 나는 그것을 감흥 없이 볼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옆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 흘끗 옆을 보았다. 막 발끈하며 나서려는 플뢰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베카. 오라버니를 모시고 먼저 마차에 가.”
레베카의 검은 눈동자가 빙글 굴러 나를 향했다. 그녀의 서늘한 눈동자는 많은 것을 판단한 듯했다. 웃고 있지만 굳게 굳은 내 얼굴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플뢰온에게 다가갔다.
“너희들도 레베카를 따라가.”
겁에 질린 한나를 대신해 레나에게 눈짓했다. 레나는 잽싸게 한나를 부축해 레베카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복도에는 나와 카스토르 둘만이 남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떼어 냈다.
“호위도 없이 방문이시라니요.”
생각 외로 나긋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호위는 네가 데려갔잖니?”
카스토르는 찡그림 하나 없이 대꾸했다. 나는 퍽 순진한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무어라 꺼낼 때까지 모른 척 잡아뗄 셈이었다.
“제가 데려갔다니.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일지라도.
“뭐. 그렇게 모른 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카스토르는 퍽 부드러운 손으로 내 머리끝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훑어 내렸다. 나는 꼼짝 않고 그의 눈만을 노려보았다. 그도 날카로워진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피식 웃었다.
“돌려주겠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 난 코웃음을 쳤다.
“아.”
고개를 숙여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에게 헤르난이 아직 필요했구나. 그래서 이미 다 알고 온 것이겠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스토르를 올려다본다.
“당신의 짐승을 말하는 모양이네요. 하지만 보통은 이지를 잃은 자를 두고 수행원이라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는 내 머리끝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카스토르의 손이 미약하게 굳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제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그는 제 것이지요.”
오전의 햇살 아래 그의 눈동자가 요요한 빛을 흩뿌리며 나를 향했다. 동시에 카스토르의 미소가 차츰 더욱 깊어졌다.
“네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구나.”
카스토르는 내가 잡고 있는 손을 떼어 내더니 천천히 제 손에 전부 거머쥐었다. 흘끗 내려다보면 내 손은 그의 손에 꼭 삼켜진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제 「동반자」였던 사람이니.”
알고 있다. 헤르난을 오래 잡아 두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카스토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를 잡아 두는 것은 내게 아무 이득도 없다는 것을.
“돌려받은 것이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달라진다. 헤르난은 카스토르의 손이며 발인 사람이었다. 그를 붙잡아 둔 시간만큼 카스토르가 계획한 일은 미뤄지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루스벨라를 만나러 간 시간만큼은 벌 수 있겠지.
“이지를 잃은 짐승의 신관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일주일 이상을 버텨 낸다지요.”
내가 다녀오는 시간은 단 일주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을 대비함이다. 미래의 폭군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기에.
“그는 제 보호 아래 있을 거랍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실 허세에 가까운 짓일지도 모른다. 그가 마음먹으면 눈 깜짝 할 사이에 내 궁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그가 그러지 못함을 알고 있다.
“오라버니, 당신은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는 황제의 눈을 피해 헤르난을 움직여 아모르를 다치게 했다. 아모르가 아직 황제에게 필요한 사람인 이상 황제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될 일이리라.
<황제는 카스토르에게 제 힘을 쏟아 단 하나 자신의 명을 듣게 했지.>
적어도 카스토르는 그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현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억지로 찾으려 하신다면 그 소식은 누구보다 먼저 황제 폐하께 가게 될 것이에요.”
말을 맺는 순간 카스토르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띠었다. 나조차 흠칫하며 뒤로 물러날 때였다.
“하, 하하하하.”
그는 나를 놓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웃는 거지? 허리를 꺾어 웃던 그는 곧이어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재미있구나.”
가까이서 보게 된 광기로 일렁이는 눈은 넘실거리는 금빛 바다처럼 보이기도 했고, 휘몰아치는 태풍 같기도 했다.
“넌 항상 날 황홀하게 해.”
나긋하게 눈을 접으며 속삭였다. 귀 바로 옆에서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찔했으며, 매혹적이었다.
“뭐. 좋아. 네 뜻대로 따라 주지. 나도 네가 없는 궁에서 무언갈 하고 싶지 않구나.”
카스토르의 손가락이 뺨을 스쳐 내 입술을 훑었다. 그는 입술을 훑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가져가 제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홍채 안에서 넘쳐흐를 정도로 일렁거리고 있는 금빛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의도한 것이 아닌 몸이 기억하는 떨림이었다.
“약속하지.”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잡고는 손가락을 얽었다. 동시에 오싹할 정도의 소름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다.
“적어도 네가 없는 시기 동안.”
그가 나른하게 미소했다. 그러고는 내게서 눈을 떼어 내지 않으며 작게 내뱉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란다.”
아무것도. 그를 따라 조용히 중얼거려 본다. 왜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약조하는데도 불안한 것은 아마도 내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의 손을 억지로 놓고 마차로 달려가듯 걸어갔다. 돌아선 나를 그는 잡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으나, 눈을 감았다. 이 시기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일기장은 잠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