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짐승의 가면 ⑴ (15/47)

9. 짐승의 가면 ⑴

내 생각이 짧았다. 반성한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더는 백마 탄 왕자님을 바라지 않듯이. 무엇보다 내 죽음 이상으로 놀랄 일이 생기겠어?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범죄자란다.

헤르난이 누구인가. 싱그러운 잎사귀가 살랑대는 숲이나 눈부신 호수에 어울릴 법한 사람이었다.

<대장.>

그렇게 깜깜하고 낡은 다 스러져 가는 가게에서 잔뜩 흐트러진 차림새로 나오던 남자를 잊을 수가 없다.

<물량은 이게 다인가?>

내 상상력이 빈곤했던 것일까.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온실이나 꽃밭이 아닌 기묘하고 퇴폐적인 향기 속에서 단추를 잔뜩 풀어 헤친 헤르난이라니.

단정한 귀족의 표본 같았던 아주 완벽하고 훌륭했던 예장은 어디 가고, 평민들이 입을 법한 상의에 가죽으로 된 바지를 입고 있던 그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알던 모습은 아니었다.

“……대단하네.”

“뭐라고?”

“아니에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메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서쪽 지구야. 가축 시장이 있는 곳이지.”

오늘 함께하는 파트너는 메타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 행선지 또한 내가 원하던 곳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함께하는 순찰대원에 따라서 구역이 계속 변한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도 갈 수 있겠지.

나는 제국에서 ‘가장 큰 광장’에 가고 싶다.

그곳에는 아주 은밀한 샛길이 하나 있는데, 그건 첨탑으로 가는 길이다. 울퉁불퉁한 계단을 올라가면 첨탑 옥상에 도착한다. 야경이 끝내주게 멋있다나. 가 본 적은 없지만 루스벨라가 그렇게 표현했으니 그러리라. 로맨스 속에서 첫 만남 삼기 딱 좋은 장소겠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루스벨라’에게 크나큰 감탄과 경외를 느낀다.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수를 써서 이 제국의 비정상적인 사람만 골라낸 다음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 걸까.

루스벨라의 성격은 나랑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자면 대학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자애일 법한 성격이었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아가씨라고 할까. 불합리한 일에는 죽어도 할 말 다하는 당찬 캔디 같은 아가씨였다.

거기다 바르고 고운 말 학원에 VIP 코스라도 밟았던 건지 한마디가 사랑스럽고 얼굴이 쩔어 주게 예쁘니 더 효과적이었다. 나는 그런 루스벨라와 카스토르가 처음 만나는 곳에 가야 한다.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와 카스토르의 로맨스는 뭐랄까. 전형적인 내 뺨을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로맨스다.

“클리셰 같지만 원래 클래식한 게 잘 먹히는 법이지.”

“뭐?”

“아니에요.”

물론 이 소설이 그냥 클리셰라기에는 엄청 하드한 면이 있지만, 그거야 희대의 폭군이 상대라서 그런 것이고. 솔직히 수없이 생명을 위협받고도 그를 불쌍하게 여긴 루스벨라의 멘탈을 존경하는 바이다.

폭군이 사랑을 거부하기 위해 루스벨라를 괴롭혔을 때는 참 세상 살기 힘들겠다 동정했었으니까.

“듣고 있어, 피피오?”

“네.”

“흠흠. 그래. 사실 놈들이 사람을 대거 납치해서 숨길 만한 곳은 몇 없어.”

“네.”

“오래전부터 순찰대가 주시하는 곳이 있었는데 어제 피피오 덕분에 좋은 단서를 찾았거든.”

눈앞에 열주로 둘러싸인 커다란 광장이 펼쳐진다.

상인과 가축. 흥정하는 사람들까지 얼기설기 엮인 시장,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우고 그 위에 천을 얹은 지붕도 보인다.

“와, 이러다 놓쳐 버릴지도 모르겠네. 미리 미아보호소 위치를 알아둬야겠는데?”

“미―아? 지금 미아라고 했어요?”

다들 깜빡 잊곤 하는데 나는 성년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엄밀히 말해서 이곳의 성인이다. 성년이란 말이다.

“사람 더럽게 많네. 피피오, 나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챙겨 주지 그래요. 나 작아서 저 사이에서 금방 사라질 걸요.”

“어라, 본인 입으로 할 얘기는 아니지 않아?”

“뭘. 사실인걸.”

메타가 키득키득 웃었다.

제국에서 가장 큰 가축 시장이라더니 소음과 악취가 어마어마하다.

“근거지를 찾는다면서. 내가 함께해도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메타가 씨익 웃었다.

“네가 있는데 위험한 일을 하겠어? 우린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움직여. 도움을 구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거니까.”

천막은 내리쬐는 태양을 적절하게 가렸다. 그늘진 이곳은 복잡한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길이 얽혀 있었다. 몇 걸음 걸다가 메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실례할게. 피피오.”

메타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내게 양해를 구하곤 내 손목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이럴 때 보면 이곳 남자들 은근히 매너가 좋단 말이지. 절대 동의 없이 내게 손대지 않는다. 거칠게 손목을 잡아끄는 드라마 속 가벼운 폭력에 익숙한 현대인으로서는 꽤 놀랍다.

“내 신은 거짓과 양치기와 목동, 도둑과 사기꾼의 수호자. 한 번 목표로 한 것을 놓치지 않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소릭스의 탐색 능력과 짝을 이루는 내 능력은 뭘까?”

난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막 생각난 것을 말했다.

“추적?”

“빙고.”

그의 갈색 눈동자로 작은 빛무리가 스치더니, 금빛으로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렇게 표시를 해 두면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피피오를 바로 찾을 수 있지.”

메타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기운이 내 팔목을 휘휘 감았다. 신기하네.손을 들어 만져 봤지만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소릭스와 달리 거리에 구애를 받지 않아.”

“그래요?”

“응.”

팔목에 뭉친 기운은 꼭 붉은 실 같기도 했는데 길게 이어진 끝은 메타의 가슴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신 아쉬운 건 말이지. 이 능력에 제한이 좀 있거든.”

“제한이요?”

“응. 추적에 능하지만 발현 조건이 꽤 까다롭다고.”

메타가 눈을 찡긋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기 마련이니까. 대신 안심해. 어제와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웃었는데, 나도 어제와 같은 일은 당연히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스벨라를 찾고 싶을 뿐이지 위험한 건 나도 별로라고.

“그래서 여기에서 뭘 찾는 거예요?”

“일단은 ‘발할라’라는 가게를 찾고 있어.”

“여기 있는 게 확실해요?”

“아마도. 아가씨가 알려 준 곳에서 유통망으로 보이는 장부를 찾았거든.”

일단 잠시 쉬자고 말해 볼까?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윽!”

관자놀이를 대바늘로 푹 쑤신 것 같은 고통이 관통했다. 아득한 고통에 참지 못하고 쪼그려 앉았다. 시끄러운 가축 울음소리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모든 것들이 멀어진다.

“으욱……!”

“피피오!”

“괜찮아, 요. 그냥, 현기증…….”

“알았으니까 좀 쉬었다 가자. 저기!”

커다란 손이 허리를 아래에서 단단히 받쳐 준다. 그러나 괜찮냐 묻는 소리가 아주 멀어서. 나는 팔순 먹은 노파처럼 허리를 구부렸다.

메타가 나를 번쩍 들었다. 이내 그가 시장 구석 투박한 대리석 중에 하나에 나를 앉혔다. 이것은 의자인 듯 곳곳에 놓여 있었다.

“기다려! 시원한 걸 사 올게!”

메타는 마실 것이라도 좀 사 오겠다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어제의 소릭스가 떠올랐지만 단 5분이면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그의 능력을 믿기로 한다.

“으윽…….”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젠장. 머리가 아프다. 또다.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달래 보지만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스트레스인가?’

이게 스트레스일 리 없다. 겨우 스트레스 따위로 고통받았을 나약한 정신이었으면 40번 죽는 동안 한 번쯤 미쳐 죽었겠지. 결정적으로 왤까. 분명 고통에 익숙한 몸일 텐데 이 고통만큼은 면역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생각해 본들 답이 나오겠냐만. 중요한 건 더는 앉아서 카스토르가 찾아오지 않기만 바라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 이건 정말 중요했다. 나는 손을 겹쳐 꽈악 움켜잡고 눈을 떴다.

희망을 쥔 나는 굴복하던 그때와 다르다.

“고통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차피 오늘 가축 시장으로 온 이상 루스벨라가 나타날 장소로 가기엔 글렀다. 그러므로 메타가 하는 일에 최대한 도움을 주자. 그가 말하길 이곳에 단서가 있다고 했으니 운이 좋다면 뭐든 찾아내지 않을까?

“몸은 좀 괜찮아?”

“네. 단순한 현기증이었나 봐요.”

그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조금만 참아. 가게를 찾았어. 저쪽이야.”

길은 혼잡했다. 몇 번 넘어질 뻔했지만, 오히려 사람이 너무 많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넘어질 공간조차도 없었다. 막 안심한 순간 누가 어깨를 확 밀치고 지나갔다.

윽, 진짜! 휘청거리다가 치고 지나간 사람을 노려봤다.

“거. 비리비리하긴. 주의하쇼!”

그리고 난 얼어붙었다. 코끝에 엉겨 붙는 이 끈적한 향기.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강력한 충격에 그대로 멈춰 섰다. 얼른 눈으로 돌아서는 사람을 훑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격의 남자.

난 빠르게 메타를 잡아당겼다.

“메타! 저 남자!”

쥐처럼 야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 분명 그곳에서 봤던 남자다. 소리 죽여 외쳤다.

“나를 끌고 간 남자와 흥정했던 사람이에요!”

잠깐 있었는데도 짙게 배여 향수를 뿌린 것처럼 아찔한 향기. 이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방금 나를 치고 간 남자. 어제 그 남자예요!”

“……확실해?”

“네. 맞을 거예요. 내 직감을 믿어요.”

메타는 점차 멀어지는 남자를 보다가 끙 소리를 내며 앓았다.

“이것 참. 피피오 미안하지만 잠깐 나와 함께해도 괜찮아?”

다급하면서도 곤란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다.

“당장 아가씰 소릭스에게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놓치겠죠.”

그들은 분명 헤르난을 향해 대장이라고 불렀다. 어째서일까? 왜 그렇게 불렀지?

헤르난은 늘 난제였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남자를 쫓아가면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답을 알 수 있다. 헤르난이 숨기고 애타게 바라보는 것의 정체를. 저 남자를 잡으면 실마리를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가요!”

결정의 시간은 짧았고 우리는 은밀하게 남자를 쫓았다. 사람이 많아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몇 번 남자를 놓칠 뻔한 위기에 처했고, 그럴 때마다 메타가 솜씨 좋게 남자를 찾아냈다.

“잘 들어. 피피오. 남자에게 ‘추적 능력’을 쓰려면, 내가 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한 번이라도 말을 걸어야 해.”

“그게 조건이군요. 내가 가서 붙잡을까요?”

“아니. 그건 안 돼. 아가씨의 얼굴이 알려지면 위험해진다고.”

남자의 움직임을 쫓아서 우리는 한적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좁긴 했지만 사람도 있고 밝은 골목이었다. 널찍해지는 사거리 골목 중간에서 남자가 방향을 꺾었다.

“어디로 간 거지?”

“저기에요!”

그러나 남자가 사라진 곳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둑하면서 인적이 드문 샛길이었다. 메타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긴 아가씨와 갈 수 없겠어.”

아무래도 내 안위가 걱정되는지 그가 나를 봤다.

“여기서 기다려 줘.”

당연한 결정이었다.

“금방 데리러 올게. 무서우면 큰길에 있어도 좋고.”

“알았어요.”

궁금했지만 나와 메타, 두 사람의 위험을 감수하고 보고플 만큼 절실하지는 않았으니까.

“여긴 사람이 꽤 다니는 길이에요.”

솔직히 내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타야말로 몸조심해요.”

“……만약, 해가 질 무렵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혼자 소릭스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이란 게 있으니.”

“네. 잘 물어서 잘 찾아갈게요.”

찝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메타가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남자를 쫓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벽에 기대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겨우 버텼네.”

어찌어찌 메타와 함께 걸었지만 사실 체력이 이미 바닥이 났던 터였다.

“정말. 돌아가면 운동이라도 할까…….”

문득 고개를 들어 골목을 바라보았다. 잠깐이지만 소름이 돋았다. 어제의 기억 때문이었다. 메타에게는 사람이 꽤 다닌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내가 있는 골목도 고요한 편이었다. 그러나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하듯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하하하! 거기 서!”

“꺄악!”

낡은 옷가지를 걸친 아이들이 와르르 옆으로 뛰어간다.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한 아이가 여러 명을 쫓는 모양새였다.

“잡아라!”

마지막 아이가 거칠게 부딪쳤다.

“윽!”

실수로 놓친 가방이 와르르 물건들을 토해 냈다.

“앗! 죄송해요! 너 거기 서!”

이런. 애들의 놀이터였나.

“……놀라라.”

일기장이며 떨어진 것들을 주워 넣고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미처 줍지 못했는지 작은 병이 툭 떨어졌다.

“어라? 이건 아모르의…….”

며칠 전 아모르가 건넸던 병이었다. 위험해지면 쓰라는 말에 챙기긴 했는데 어제는 겨를이 없어서 쓰지 못했던 거였다.

병을 들어 올리자 유리가 빛을 반사하며 존재를 뽐냈다. 안에 든 액체는 음울한 녹색. 꼭 녹조를 갈아 만든 것 같은 색이다. 마시라고 준 건데, 좋지 못한 비주얼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건 왤까. 먹고 싶진 않은데…….

“이건 어디 쓰이는 약일까?”

그는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디든 쓸 만할 거다. 막 일어났을 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막 골목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본 순간 그대로 꽝꽝 얼어붙고 말았다.

헤르난.

헤르난이었다.

그가 흰머리를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쓰고 있던 모자를 깊게 잡아당겼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옆을 스쳐 갔다.

이곳에서 그를 만난 건 우연일까?

<일단 ‘발할라’라는 가게를 찾고 있어.>

고개를 들자 뒷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홀린 듯이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았다. 걸음걸음이 떨렸고 본능이 이성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내가 쫓아가서 뭘 어쩔 셈인데?

헤르난. 카스토르의 하나뿐인 수호자. 최측근. 황태자를 위한 행정 기구의 수장. 그리고 연일 이어지는 실종 사건의 관계자. 납치범의 소굴에서 나타났다. 카스토르와 관련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입술을 꾹 깨물고 손가방을 꽉 껴안았다. 직감이지만 뭔가 있다. 샛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긴장으로 목뒤가 축축했다. 손끝에 스치는 일기장의 감촉. 어쩌면 카스토르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게는 하나의 보험이 있다.

‘죽으면 돼.’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였다. 어제 스치듯 보았지만 헤르난의 낯이, 무심한 표정이 낯설어서. 그건 내가 죽던 날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과 비슷해서 두려웠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헤르난이 어떤 얼굴이냐가 아닌, 왜 이곳에 있느냐니까.

그가 모퉁이를 돌았다. 그를 쫓아 나도 휙 돌았다.

“……누구냐.”

그리고 검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를 쫓는 이유가 뭐지?”

얼굴 바로 앞에 놓인 검 끝, 내 모자는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같이 흔들렸다.

“들키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데.”

어떡하지?

“……말이 없군. 벙어리인가?”

붕, 눈앞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에 나도 모르게 히끅, 하는 숨소리를 내 버렸다.

“어설픈 동작을 보아하니 훈련받은 신관은 아니겠고.”

말을 할 순 없다. 말을 하면 들킨다. 내가 여기 있는 사실을 알려선 좋지 않다. 그런데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다.

등 뒤가 축축해졌다. 사람들이 왜 헤르난을 두고 뛰어난 신관이라고 했는지 알았다. 바늘처럼 콕콕 쑤시는 살벌한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대답해. 가시나무의 왕관 쪽 신관인가?”

가시나무? 뭘 말하는 거지? 손에는 아직 아모르에게 받았던 병이 있었다. 믿을 건 이것밖에 없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직접 듣는 수밖에.”

이걸 마시기 위해선 약간의 틈이 필요했다. 바닥만 보면서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바닥에 구르던 돌멩이를 지그시 누르다가 발로 차 버렸다. 단 한순간이지만 굴러가는 눈동자. 충분했다.

휙. 타닥. 타다닥.

나는 뒤로 돌아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뛰었다. 이미 한차례 뛴지라 체력이 바닥나 현저하게 느린 속도였다.

흘끔 돌아본 곳에 천천히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나는 얼른 아모르가 준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삼켰다.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순간 앞이 핑 돌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욱! 웩!”

“이봐!”

잠깐, 이게 뭐야.

아모르가 먹였을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욱신욱신 땀이 얼굴을 적신다. 고통 속에서 얼굴에 강한 열감이 느껴졌다. 뼈가 쑤시고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생리통처럼 허리며 온몸이 아프다.

그와 동시에 그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끌려가면서도 독하게 모자를 부여잡았다.

“너 방금 뭘 먹은 거야? 자살인가?”

그러게. 나야말로 묻고 싶다. 설마 독약은 아니겠지? 얼굴이 뜨겁다.

“하, 가끔 자살을 해서라도 나를 죽이고자 하는 미친 작자들이 있지.”

억지로 올라가는 시야. 안타깝게도 목으로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다.

“그쪽인가?”

카스토르와 느낌이 다르나 그럼에도 위협적인 공기였다. 오금이 저린 시선이 굶주린 육식 동물처럼 나를 덮쳤다.

“정신 차려.”

정신은 덤덤했음에도, 몸이 파르르 떨고 만다. 아마도 이건 저절로 느끼는 생존 본능이었다.

“미안하지만, 공기 중으로 퍼지는 독 또한 내게 통하지 않아. 그리고 이런 행태를 보일 거라면…….”

“…….”

“깔끔하게 죽여 주지.”

내가 이런 사람을 알던가? 아. 알았던 것 같기도. 이제는 잊고 싶었던 기억 속에서 그는 꼭 저런 서늘한 목소리를 냈었다.

<……카스토르. 네 뜻대로.>

지금 보는 모습은 하베르미아의 달 그대로. 한파가 찾아온 겨울 같다.

“얼굴이라도 보여.”

검이 쇄도했다. 아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반으로 쪼개진 천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하나로 묶인 머리가 한들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가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환한 빛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여자?”

그는 몹시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헤르난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는 놀라움을 잠재우면서 다시 의아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까?”

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미안합니다.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군요.”

그가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날 일으켜 세우다가도 한참 무심한 낯으로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스럽게 가늘어졌다가 감겨지는 눈이 낯설었다.

“착…… 각?”

“예.”

얼굴에 분칠을 한 것도 아니고, 가발을 쓰거나 가면을 쓴 것도 아니다.

“제가 찾던 사람이 아니군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나를 모른다.

“저기.”

“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뭐야. 뭐지?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나 몰라요?”

수작 거는 여자의 대사 같지만 이거 말고는 생각이 안 났다. 그가 나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가벼운 미소를 담았다.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인데. 나를 본 적 있습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기엔 너무 태연하다. 오히려 선을 긋는 것같이 벽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 이건 꼭, 소릭스나 펜네를 대하던 낯과 비슷하다.

바로 사무적인 친절함.

“아니요. 처음 봤어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 이렇게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처음엔 어리벙벙한 심정에 몰랐는데, 그는 내 허리를 안다시피 잡고 있었다.

“저기, 무겁지 않으세요?”

“그쪽은 그리 크지 않은 편입니다.”

“아니, 무게가…….”

“부축하는 데 무게는 상관없습니다.”

그가 날 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신관이니 그쪽이 성인 남성보다 무겁더라도 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변신한 것 같다. 많이. 일단 시야가 높다. 그리고 뼈마디가 미친 듯이 쑤신다. 키가 자랐나? 아닌 게 아니라 길었던 소매가 위쪽으로 짧아져 있다.

그리고 나는 이마 위에서 한들거리는 것을 보고 말았다.

“……저기요. 제 머리색이 무슨 색이죠?”

헤르난은 별 해괴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을 했지만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검은색입니다만.”

시장을 훌쩍 벗어나 그는 작은 광장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작은 분수대가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분수대 수면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어…… 어어?”

눈을 깜빡이면서 입을 쩍 벌린다. 하나로 동여맨 검은색 머리. 특별한 특징 없이 평범한 눈에 조금 노랗다 싶은 피부색.

“……말도 안 돼.”

수면 안에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모르, 내게 뭘 준 거야?

헤르난을 올려다봤다. 친절하게도 나를 데려다주었지만 그 뒤로 대화는 없었다. 그와 무어라 대화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모르가 준 약이 내 외모에 변화를 일으킨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약을 내게 건넸지?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나? 애초에 아모르가 말한 위험이 대체 뭐지?

“진정되셨습니까?”

“네? 아, 네에…….”

난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렇게 말해야겠지?

“별말씀을.”

헤르난이 내가 있는 벤치 옆 그늘 쪽으로 다가왔다.

“어째서 나를 쫓아왔습니까?”

네가 헤르난이라서요.

대체 왜 네가 납치범의 소굴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왜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당신을 대장이라 불렀는지 모르겠어서 쫓았다.

“으음…….”

사실 연일 이어지는 실종 사건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치부하고, 신경 쓰지 않은 채 넘겨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넘겨서는 일기장을 보지 않고 쉼포시온을 맞이했던 그때처럼 중요한 것을 놓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나는 후회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싶었다. 비슷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말해야 하나요?”

“네.”

“왜죠?”

헤르난이 픽 웃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의 처우가 달라질 것 같으니까요.”

그는 간편한 셔츠에 가죽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칼은 조금 느른하고 방탕해 보였다.

꼭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며 떠났던 부잣집 막내아들이 세파를 겪고 찌들어 지금이 된 것 같달까. ‘이 세상은 쓰레기야.’ 하고 외치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다.

“미안합니다. 사실 거짓말했어요.”

“예?”

“사람 착각한 거 아니고 뒤쫓은 거 맞아요.”

그가 잠시 침묵했다.

“왜죠?”

수 초간의 적막 뒤로 물었다.

“거울도 안 보세요?”

난 의문과 경계로 가득한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했다.

“그쪽이 너무 잘생겨서요.”

그는 도리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로군요.”

그가 다시 물었다.

“다시 묻죠. 왜 나를 쫓았습니까? 내겐 중요한 질문입니다.”

“잘생겨서라니까요? 당신을 쫓아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나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그러다 귀찮은 듯 소매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눈이 빠지도록 놀라운 변신에 혀를 찰 지경이다. 이빨로 단추를 풀어헤치는 헤르난이 정녕 내가 아는 인물이 맞는 건가.

“이봐요.”

금욕적이고 경견하기까지 하던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내가 누군지 알고 쫓습니까?”

“몰라요. 알고 싶으니까 쫓았죠. 이름이 뭐에요?”

그가 픽 미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난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떠들어 주길 바랐지만 그가 먼저 내 질문을 차단했다.

“당신. 피부색으로 보아 중앙 대륙에서 오신 분이시군요. 이쪽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죠?”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당신에게 노예의 인장이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당신이 있었던 골목길은 성인 여성이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길입니다. 수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증거겠죠.”

“…….”

“이주민은 보통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노예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당신은 아직 괜찮아 보이지만.”

헤르난이 생각보다 더 똑똑하다. 아니 당연한가. 매일 내게 간이며 쓸개며 전부 빼다 바칠 것처럼 굴어서 잠시 잊었다.

“그쪽의 말대로예요.”

제국은 이민에 냉정했다. 그들의 안온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하여 넘어온 이들은 전부 외성 쪽에서 힘든 노역을 하곤 했다.

“저는 외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말단 하녀랍니다. 아직은 무사하지만 어떻게 될진 모르겠네요. 제국 물가는 너무 비싸요.”

헤르난이 꾸며 준 상황은 내게 득이 됐다. 난 잽싸게 휴가를 맞이해 놀러 나온 이주민인 척했다.

“어째서 혼자 다니죠?”

그의 질문에 목소리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수도 구경하려고요! 건국제잖아요?”

건국제가 처음이란 말은 거짓이 아니니까. 발랄하게 대꾸하면서도 머리는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이 내게 도움이 될 상황인가?

“장도 보고 싶고. 신관들의 공연도 보고 싶고 또…… 「프리모 살바티오」도 보고 싶고요.”

「프리모 살바티오」에서 그가 움찔했다.

“…….”

그가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쪽이 『루스벨라의 빛』 속 헤르난 같은 느낌이었다.

책 속 카스토르의 비호 세력으로서 카스토르의 사랑을 돕는 조력자. 그렇다면, 카스토르를 위해서 꽤 더러운 일들도 할 법했다. 납치라거나, 감금까지도 말이다.

물론 수도의 여자들을 납치해서 어디다 쓰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요. 자꾸 물어도 내 대답은 같아요. 당신이 잘생겼고, 한눈에 반했는데. 이걸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요?”

“그렇습니까? 첫눈에 반했다라. 납득이 갈 이유로군요.”

그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눈으로 가벼이 웃었다.

“좋습니다.”

이 순간 그는 처음 봤던 모습도, 행정청에서 무수히 보았던 모습도 전부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괜찮다면 제가 수도를 안내해 드릴까요?”

“네?”

그는 악당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제대로 된 길을 몰라서 그런 ‘한미한 골목’에 있으셨던 것이 아니었나요?”

“아…….”

큰일이다. 이거 대답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얼굴에 홀딱 빠져서 쫓아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잖아. 그렇지만 리스크가 너무 큰데? 헤르난과 수도 구경이라니?

“어떠신가요?”

그가 미지근한 미소를 지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조금 전 놀라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던 기세를 다시 뿜어냈다.

“제 대가 없는 친절을 거절하신다면 조금 슬플 것 같군요.”

이 기세로 보아 그는 날 죽이거나 죽을 정도로 곤란한 일을 만들 수도 있다. 미친, 하다 하다 헤르난에게 죽을까 봐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저야 좋지만……,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뭐죠? 조금 전까지 제게 검을 겨누셨잖아요.”

“그거야 아가씨를 암살자로 착각했으니까요. 오해를 부를 행동이었습니다.”

“당신, 암살자가 쫓을 만큼 위험한 사람이에요?”

“글쎄요.”

그는 선선히 웃었다.

“어딜 가고 싶으신가요?”

정말 안내하겠다고? 나를?

머리를 팽팽 굴리며 계산해 봤지만, 솔직히 거절할 만한 구색이 없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다.

“그럼 절 수도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데려다주세요.”

나는 수도 지리를 몰라.

“좋습니다.”

정말, 삶은 아무도 모르는 것인가 보다. 루스벨라와 카스토르가 처음 만나는 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헤르난과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 * *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나는 찡그리며 사람들의 흐름을 견뎌 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당연하겠지만 그와 함께하는 길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헤르난은 앞장설 뿐 소릭스처럼 배려가 없었는데 오히려 이쪽이 좋았다.

“저기. 저곳에서 황녀님이 춤을 추신다지요?”

나를 스치고 간 행렬의 여자가 한 말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는 큰길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흘끔, 헤르난을 보자 그도 멀어지는 연인 쪽을 향해 있다. 그리고 곧 그는 몸을 다시 돌려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헤치며 한참 걸었을까. 점점 숨쉬기 편해졌다고 느낄 무렵에 주변을 보았다. 숨쉬기 편해진 건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아주 거대한 광장에 서 있었다.

“보이십니까.”

“네.”

찬찬히 고개를 돌리고, 광장을 눈에 가득 담았다.

“이곳이 포룸 아우구세스입니다.”

신전들이 늘어선 거리 끝에 오래전 초대 황제가 세웠다는 개선문이 보였다. 개선문의 반대편으로 거대한 콜로세움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와아아아―

꽤 멀법한 거리에 있는데도 희미한 관중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걸어가던 몇몇 사람들도 콜로세움 쪽을 바라본다.

“저를 놓치지 마세요. 길을 잃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알았어요.”

수도에서 가장 밀집된 구역이라더니 넓디넓은 광장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300년 전 태양 황제가 세웠다던 평화의 첨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 곳곳에서 큰 목소리로 활발하게 토론을 벌이는 남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토가의 색으로 보아 학자나 철학자쯤 되어 보이는 남자들은 젊고 늙고를 떠나 설전에 열심이었다. 꼭 역사책 속에서 볼 법한 그리스의 토론 광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네.

“저긴 뭔가요?”

호기심을 느껴 무심히 던지면 그는 그런 내게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지면서도 설명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성스러운 재판장 바실리카 율리아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집회가 열리는 곳이지요.”

그는 세심하게도 이곳이 언제 설치되었는지, 재판장을 완공했던 불카누스의 대장장이 이야기 등을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놓았다. 그의 꿍꿍이가 궁금하면서도 거대한 광장의 위용에 마음을 쏙 빼앗겼다.

“꽃이 내리네요.”

꽃이 팔랑팔랑 떨어지고 있었다.

“축제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는 비가 내립니다. 꽃으로 된 비지요.”

사실 밟히고 터진 잎이나 웅덩이에 젖어서 지저분한 잔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말 끝나기 무섭게 거리의 잔해들이 공중으로 떠올라서 깜짝 놀랐다.

“공기와 깃털의 신관들입니다.”

이곳을 청소하는 신관이라는 말에 다시 공중에 뜬 잔해들을 바라봤다. 정말 제국 곳곳에 신력이 스며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내에 굉장히 성실하시네요. 왜죠?”

“왜 성실하냐는 말은 이상하군요. 약속이니까요.”

“당신은 약속을 잘 지키는 분인가 봐요?”

막 생각난 건데 나와 그는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나야 헤르난인 걸 알지만은. 그는 궁금하지도 않나보다.

“말의 무게라는 게 있으니까요.”

헤르난이 가볍게 대꾸했다.

“말의 무게?”

“네. 신관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맹세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제국의 언약에는 유독 말에 관련된 금기들이 많다. 헤르난이 멈춰 섰다.

“식사하셨습니까?”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묻지 않았군요.”

“그랬죠.”

“식사하기 전에 여쭤 보죠. 저는 헤르난입니다.”

이렇게 쉽게 이름을 밝혀도 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들어도 상관없는 걸까.

이름이라……. 나는 대충 생각난 이름을 대꾸했다.

“‘안’이에요.”

“안? 외자입니까.”

“네. 편히 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지요. 안.”

지금만 해도 족히 수십 쌍의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참으로 태연한 모습이다. 물론 전부 여성이고 더러 남성도 있다. 그는 아는 건지, 알고도 그냥 넘기는 건지 참 애매했다. 옆에 있던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니 모르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도 구경하느라 바빠 신경 쓰지 않아서 아주 다행이었지만.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광장 옆으로 난 작은 샛길이었다.

‘또 샛길이라니.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네.’

그를 쭉 따라가던 중에 묘한 느낌이 드는 길을 발견했다.

“계단?”

“아. 평화의 첨탑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첨탑이 멀지 않다. 탑을 눈에 담았다. 드디어 발견한 것 같다. 루스벨라가 걷게 될 길을 말이다.

대충 옆의 가게나 간판 따위를 기억해 둔다. 이제 메타가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소식이 없네. 한창 바쁜가.

“이곳에서 먹죠.”

그가 데려온 곳은 자그만 식당이었다.

“어서 오세요. 앗! 오랜만에 오셨네요?”

점원이 헤르난과 아는 사이인지 2층 테라스 자리로 안내했다. 주문을 마치고 가게를 쭉 둘러보자 가족 단위의 손님도 있지만 대개가 연인들이었다.

잠깐만 여기 데이트하러 오는 곳 아냐?

“어머, 여보. 저길 봐! 너무 예쁘다!”

한 여자의 감탄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왜 이런 구석 식당이 만석인지 알 수 있었다.

“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황금빛 건물에 입을 쩍 벌린다.

“멋지지 않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헤르난이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대 황제의 기념관입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읊조렸다.

“여기 자주 오셨나 봐요.”

“그랬죠. 예전에.”

푹신한 카우치, 아기자기한 테이블보. 꼭 그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다.

“저도 오랜만에 오는 곳입니다.”

참 밝은 한낮에 바람에 나부끼는 새하얀 머리칼. 마찬가지로 하얀 눈썹.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 사이로 보이는 청명한 눈동자. 궁전에서 보던 그와 이곳에서 만난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참 잘생겼네요.”

솔직히 한 번은 말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은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모르는 사람이 된 지금은 뭐 어떤가.

“그래서 나를 쫓아왔습니까?”

“네.”

“그것뿐?”

난 턱을 괸 채 웃었다.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그가 살짝 찌푸렸다.

어쩌다 식사까지 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내말을 믿기 시작한 것 같다. 비록 내가 그의 얼빠로 찍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오늘 지나면 다시 안 볼 테니까.

“그럼요. 당연한 거야.”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왜 예쁘게 웃지? 나는 지금 공주가 아니다. 정숙한 숙녀가 아니다. 어느 것도 아닌 새 껍데기를 쓰고 있다. 굳이 교양 있게 보일 필요 없잖아. 시야 너머로 아름다운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햇살. 소란스러운 소음. 고소한 먹거리의 냄새. 창문으로 보이는 거대한 광장.

밖이다.

찌르르. 놀랍도록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지금 나는 누구도 아니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돼.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거라고. 자유롭다. 참을 수 없이 유쾌해졌다.

“당신은 미남이고.”

“…….”

“당신을 본 누구라도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미남을 놓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시간 속에 무뎌졌던 낯은 즐거운 기분에 맞춰 환한 미소조차도 제대로 짓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하늘 아래서 그렇게나 싫어했던 화창한 날씨마저 좋아질 것 같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무엇을요?”

“안내요.”

헤르난은 대꾸 대신에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신을 보면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듭니다.”

“수상해서요?”

“글쎄. 그것과는 다르군요.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나를 보면 기분이 팍 상한다 이 얘긴가? 이 얼굴이 어때서. 설마 외모로 차별하나?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육즙이 자르르 흐르는 요리는 썩 맛이 좋았다. 거기다 음료까지 꽤 달달하니 쉽게 마실 수 있었다. 아니, 기분이 좋아서인가. 지금이라면 돌도 씹을 수 있을 것 같다.

“참, 이건 제가 사 드릴게요.”

“사양하죠.”

헤르난이 단호하게 답했다.

“빈곤한 여성에게 얻어먹을 만큼 빈곤하진 않습니다.”

“꽤 실례되는 발언인데 잘생겼으니까 못 들은 척해 드릴게요.”

“…….”

잘게 자른 조개를 먹으며 우물거렸다.

“더 안 드세요?”

“글쎄. 그쪽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느낌이라.”

내가 그렇게 허겁지겁 먹었나? 헤르난이 팔짱을 풀며 등을 바로 세웠다.

“받으시죠.”

나는 그가 건네는 천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넙죽 받았다. 그가 뺨을 툭툭 친다. 그를 따라 뺨에 천을 가져가자, 갈색 소스 자국이 묻어났다. 이런, 레베카가 알았으면 기함을 했겠네.

“빨리 알려 주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밝게 웃으니 말하기 곤란해져서.”

하긴. 귀족인 그가 이런 말을 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의 곤란함을 이해하는 한편 이런 칠칠맞지 못함마저 기분 좋았다.

내가 정말 나로 있었던 시간이 언제였지?

자유롭다. 나는 늘 자유롭기를 바랐다. 전생에는 퇴사를 외치며 세계 여행을 상상했고, 환생한 뒤에는 언젠가 궁을 나서서 자유롭게 거니는 나를 꿈꿨었다.

여주인공을 찾는 여정에서 선물과도 같은 자유가 주어졌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안.”

헤르난이 날 불렀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뭐죠?”

“아. 수도를 구경할 생각을 했더니 좋아졌어요.”

이 평범한 음식마저도 내게는 플뢰온이 자랑하는 조리장의 요리보다 맛이 좋다.

“즐거운 일이 많잖아요.”

이 순간, 모든 게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 같은 그가 반가웠다.

“내가 아는 분이 꼭 당신처럼 웃어 줬으면 좋겠네요.”

“웃어 주지 않나 봐요?”

그가 느릿하게 웃었다.

“네. 그분은 항상 한 표정이라.”

“그럼 웃어 주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요?”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어떨까.”

어떻게 고개를 젓는 것마저 한 폭의 화보가 되는 걸까. 순수하게 감탄했다.

“당신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이요?”

“네.”

그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훑었다. 혹시 또 뭐가 묻었나 싶어 내 뺨을 감쌌다. 아, 반창고. 얼굴이 변하면서도 여전히 뺨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이걸로 의심하진 않겠지?

상처도 없어졌을까? 확인해 보고 싶은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가게를 나온 후 그와 나는 함께 거리를 걸었다. 광장 동쪽에는 커다란 분수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어린아이들이 뛰어놀았다. 한참 사이가 좋은 연인들은 분수대 앞에 서서 흠뻑 빠진 눈으로 달콤한 귀엣말을 속삭였다.

“제국에서 가장 큰 분수대입니다.”

분수는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신의 현신을 본떠 만든 크리스털 분수는 햇빛에 온갖 아름다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기요. 헤르난. 좀 오그라드는 소릴 해도 될까요?”

“오그라들다?”

헤르난은 뜻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가볍게 끄덕였다.

“얼마든지.”

나는 막 달려가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면서 진정으로 활짝 웃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무척이나 웅장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왜 나는 이제껏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살았을까 하고.

예전부터 나는 낯간지러운 감상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던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부터 무척이나 담담한 성격이라 회사 다니던 시절에도 몇 번이나 듣곤 했다. 무신경하다고.

친구는 내가 진득한 연애 한 번 못 해 본 이유가 이 정 없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다. 나는 나름 주변 사람을 많이 아끼는데 살갑지 않다고 해서 속마음이 왜곡되어야 하나.

솔직하지 못해 조금은 감춰 두고 참았을 뿐인데.

아빠가 죽고 나서 솔직해 본 적이 드물었다. 이런 종류의 말을 굳이 먼저 나서서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황궁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뺨이 달아올랐다. 우습다. 모처럼 감상적이 돼서는. 뺨을 감싼 손이 뜨거운 걸 보니 혹시나 새빨갛게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끙, 그렇게 보지 말고 못 들은 걸로 해요.”

어쩌면 이건 전부 나를 온도 없이 바라보는 시선 앞이라서 가능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는 사심 없이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열기를 품은 것은 순간이었다.

“안.”

선선히 웃는 헤르난. 미소가 걸린 뒤로 담담한 목소리로 이었다.

“낯선 남자 앞에서 잘도 그리 웃는군요.”

시선이 집요했다. 팔랑팔랑. 그의 손이 광장 중앙에서 날아온 꽃잎을 잡았다.

“사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웃으면 안 됩니다.”

벚꽃을 닮은 연분홍색 꽃이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짐승이 발톱을 내밀지도 모르니까요.”

팡!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환호성. 차가운 감각에 고개를 들면 분수가 힘차게 물을 뿜어내며 무지개를 그려냈다. 꼭 샤워기, 아니 스프링클러 같다.

“아.”

참으로 오랜만에 보게 된 무지개가 참 예뻤다. 형형색색 꽃이 만발한 풍경보다도 소박한 이쪽이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나는 노래가 흠뻑 귀를 적시는 풍경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무지개가 예뻐요.”

가슴에 무지개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무지개를 눈에 가득 담았다. 흠뻑 젖을 뻔했지만, 한 번쯤 푹 젖었어도 재밌었을 것이다.

“……그만 가지요.”

즐겁다. 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고 볼거리도 구경하는 사람과 노점들도 많아졌다. 진짜 꽃과 종이꽃이 한데 섞여 가득 떨어진다.

높은 하늘 아래서 꽃을 파는 사람도 있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리고 불카누스의 방랑 신관이라는 한 노점 주인이 직접 불을 일으켜 즉석에서 장신구를 가공해 만들어 팔고 있었다. 노점 주인이 구경 중이던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하하하. 아가씨, 애인이 참 잘생겼네?”

아저씨의 시선. 시선을 쭉 따라가면 헤르난이 있었다. 보라색 보석을 참 유심히 바라보는 그가 신기했다.

“저랑 이 남자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더니 커다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연인이야? 아니면 부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아닌데요.”

그러자 주인은 털이 숭숭 난 얼굴에다 함지막한 미소를 덧그리며 껄껄 웃더니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그가 고개를 까딱인다.

“내가 줄곧 아가씨와 저 남자를 지켜봤는데 말이야.”

아저씨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전까지 아가씨를 아주 찐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까? 보아하니 아직인가 보지? 응?”

“아직……, 이라뇨?”

“에이, 이거 말이야. 이거!”

주인이 네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하나 사라고?”

그러면서 반지의 디자인을 추천해 주었다.

무슨. 난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헤르난을 잡아 당겼다. 어리둥절한 얼굴이면서도 헤르난은 내게 순순히 끌려왔다.

우린 한적한 곳에 멈춰 섰다. 헤르난이 내 손 위로 웬 장신구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노점에서 그가 구경하던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봤다.

“이걸 왜 저 주세요?”

“가지고 싶으셨던 것 아니었나요?”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도대체 이걸 언제 계산한 거냐고 묻자 끌려오면서 돈을 두고 왔다는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안 받습니까?”

손바닥 위에 놓인 팔찌를 보며 생경함에 사로잡혔다. 이거 꼭 그거 같잖아.

“저기, 짐작 가는 게 있는데, 말해도 되나요?”

“네.”

“저한테 반하셨어요?”

“아니요?”

한없이 진지한 낯으로 물었는데, 헤르난은 푸흣, 하고 웃었다.

“그럼 왜 이걸 저 주세요?”

꼭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그저 비슷해서.”

진짜 작가는 주인공과 서브 남을 잘못 만든 것 같다. 왜 이 남자를 주인공 삼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서브 남으로라도 내세웠다면 전쟁은 이 남자 얼굴 때문에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아무에게나 사 주지 마세요. 오해를 산다고요.”

“오해?”

“반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요. 성인이 돼서 그런 것도 몰라요?”

그러자 그는 퍽 순진한 강아지 같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몰랐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입술을 툭툭 두드리던 그는 곧 알았다는 듯 나직하게 웃었다.

“오해를 사고 싶은 상대에게 주면 되는 거군요?”

“……그러면서 왜 다시 주는 건데요?”

“좋은 걸 배운 값이라 치죠. 싫다면 점심값이라 생각해도 좋고.”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죠?”

“아마도.”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런가요?”

“이 원한도 오래오래 기억해 주죠. 당신 때문에 오해를 받았으니까.”

미남이 소리 내어 웃었다. 걸음을 멈추고서 이쪽을 보던 사람들이 날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장면 아니니까 위로와 응원의 눈빛 보내지 말아 주세요. 고백 아니란 말이야.

“저기요. 헤르난. 왜 웃으세요?”

“네?”

“지금 웃고 있잖아요.”

“……제가 웃었습니까?”

“그럼 울었을까요?”

그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헤르난은 한참이나 제 입을 만졌다.

이후 광장에서 조금 벗어나자 노점 거리가 이어졌다. 노점과 가게마다 황금색 깃발과 작은 뱀 장식이 눈에 띄었다. 전부 주신 유피테르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누군가는 기념품으로 팔고 있기도 했다.

헤르난이 다가오는 수레에서 슬쩍 고기 꼬치를 집어 들더니 값을 치르곤 내게 하나 건넸다.

“맛있어요!”

“이 시기에만 먹을 수 있죠.”

이런 길거리 음식을 먹는 공작님은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데. 어울린다면 또 어울린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새 구역이 넘어가 온갖 희귀한 동물이 가득한 거리가 눈앞에 보였다. 눈앞에 가축 시장에서 봤던 오골계를 끌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오골계치고는 색이 꽤 화려한 새였는데 무척이나 맛이 좋다고 한다. 먹기에는 좀 아까운 새인데.

새가 많다 보니 깃털이 광장에서 봤던 꽃잎처럼 나풀나풀 흔들거렸다. 별생각 없이 날아가는 깃털을 향해 손을 내밀어 봤지만 휙 날아가 버렸다. 대신 깃털을 잡은 것은 헤르난이었다.

그는 그걸 내게 내밀었는데, 왜 이런 걸 가지고 싶어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 미지근한 낯에 살짝 웃어 주었다. 궁 밖에서 본 헤르난은 궁 안에서 그보다 솔직한 느낌이다.

“있잖아요. 왜 내가 가진 것으론 예쁜 것들을 살 수 없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무지개를 보고서 하는 말인가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꼽자면 수도 없이 나오겠죠. 이를테면 자유라거나.”

“그런가요.”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는 거주의 자유라던데.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것에 대해 신이 해명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왜 나는 한정된 하늘만 바라보며 살았나? 세상엔 이토록 평화로운 공간도 있었는데.

함께 나눠 먹은 것을 버리고서 그가 마지막으로 볼 곳이 있다며 한곳으로 데려갔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공연장처럼 한 겹 쌓아올린 대리석 바닥이다.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공연할 무대구나. 제국의 가장 신성한 행사이자 백성 모두가 기대한다는 「프리모 살바티오」. 웅장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에 침을 꼴깍 삼켰다.

“황녀님께서 저곳에서 춤을 추시겠죠?”

“그날 광장은 사람으로 가득할 거요. 미리 자리를 맡아 두는 게 좋겠소.”

사람들의 말소리는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내용뿐이었다.

“정말 많네요. 사람들…….”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모두.”

대리석 타일 옆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병사 몇이 하품을 하거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동안 ‘성녀’가 대신 췄던 춤이 매우 불만스러웠을 겁니다.”

“성녀? 제국에 성녀가 있었나요?”

“아. 당신은 이주민이라 모르겠군요. 황녀님 부재를 대신한 대리 황녀입니다. 진짜 황녀가 아닌 임시직이지요.”

“임시직…….”

“네. 오랫동안 춤을 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성녀가 대신해 췄던 춤은 만족도가 굉장히 낮았습니다.”

“진짜가 아니라서?”

“그렇죠. 그래서 한 달 뒤 모두가 바라왔던 ‘진짜’ 황녀님의 춤을 보게 된다고 기대하는 것이고.”

가까이서 보겠냐는 헤르난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주눅 들고 싶지 않다. 멀리서 봐도 충분한 위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인지 헤르난은 내 거절에 묘하게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저곳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역사상 황녀들의 파트로누스는 미래의 부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툭 내리깔았다가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다시 말해 황녀는 파트로누스와 혼인하곤 하죠.”

“그런가요?”

“지금의 황녀님도.”

잘생긴 낯에 어쩐지 미묘한 짜증이랄까 엷은 분노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황녀님도?”

“역사는 반복된다. 이 미명하에…… 혼인하실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툭 대꾸했다.

“이번에 춤을 추신다는 황녀님 말인가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게 굳었어요?”

“제가요?”

“아. 아닌가요?”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 그는 조금 전 제 얼굴이 어떠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낯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흐음, 황녀님의 파트로누스라……. 어떤 분이 될지 궁금하네요.”

궁금하긴 뭐가 궁금해. 아직 정하지 못한 상황인데. 레베카가 대체 언제 정할 거냐며 무시무시한 독촉장을 보내고 있다.

<황자님은 안 됩니다. 절대.>

레베카는 오라버니랑 함께하는 건 뜯어말렸다. 같이 갈 남자가 없는 형편없는 사교 능력을 보이는 거란다. ……레이 경은 왜 싫다고 거부해서.

“저기 보이십니까?”

나는 눈을 굴려 툭 공연장 위로 내려놓았다. 헤르난이 설명을 이었다.

“신성한 무대는 초대 황제가 있던 무렵부터 있던 주신의 「신물」로 신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또한 신력을 무한히 증폭시키는 공간이지요.”

노래의 신관이 올라가면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답고 호소력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꿈의 신관이 오르면 영원히 깨지 못하는 강력한 환상을 보이며, 강의 신관이 올라가면 강을 범람시킬 정도의 많은 양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요컨대 평범한 신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오래전 후계자의 신력을 과시하는 데 쓰였다더니. 대단하긴 했다.

문제는 내가 신력 없는 황족이라는 것이지만.

“저기에 평범한 사람이 올라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저 평범한 무대가 되겠지요. 신력으로 움직이는 거니까요.”

큰일이다. 무대를 멋들어지게 꾸밀 신력도 돈도 없는데 내가 황녀라니 망한 것 같다. 역대 최악의 춤 자리는 내가 예약한 꼴이군.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구경은 다 했으니 그만 가 볼래요.”

저 멀리 술의 신관들이 포도주 시음회를 여는 중이었다. 농익은 향기는 벌을 꾀는 꽃술처럼 사람들을 꾀고 있다.

“꺼져!”

구경해 볼까 싶어 가까이 간 순간 짝!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계집애 따위가 신성한 신전에 발을 들이느냐!”

“아, 아닙니다. 나리, 그저 전 축복을 바라고자…….”

“닥쳐! 썩 꺼지지 못해?! 여긴 우뢰의 신전이다! 천한 계집이 올 곳이 아니야!”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전혀 맞지 않는 살벌한 풍경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 바라봤다.

남자에게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여자는 신전 계단 밑에 엎어진 그대로 우는 것 같았다. 서럽게 흐느껴 우는 소리. 옆에서 바라보는 내게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 억울해요! 나도……. 나도 신력을 가졌는데! 왜 신관이 될 수 없는 건데! 왜!”

여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누군가는 움찔하거나 시선을 피했다. 혹은 안타깝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 든 남자이거나 여자였지만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어 여자는 경갑을 걸친 사내 둘에게 끌려갔다. 여자를 뒤로하고,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졌다. 나도 어느새 사람 사이에서 헤르난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거리 속 다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더욱 다양해진 노점과 가판대에는 구수한 향을 품은 빵이나 고기 파이를 올려놓았고, 처음 본 거리에서보다 더욱 신기한 종류의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거스러미가 수없이 생긴 기분. 소름이 뒤를 콕콕 찌르며 점차 등을 오르는 것처럼 성가시면서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런 느낌.

등 뒤가 저릿했다.

이런 황홀한 광경을 언제 또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많이 봐 두어야 하는데 집중할 수가 없다. 순찰대와 다니면 이렇게 마음껏 구경할 수 없을 텐데도.

“여자는 신관이 될 수 없나요?”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 헤르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시끄러운 거리 중간에서 내 목소리를 정확히 들었다는 듯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왜요?”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제국에는 남신도 있고 여신도 있다. 그들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왜 사람엔 차이를 둘까?

나는 눈으로 풍경을 헤맨다.

거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하는 신관은 남자였다. 내게 분수대의 물줄기를 솟구치게 해 멋진 쇼를 보여 주었던 신관은 남자였다. 거리에서 제국민을 상대로 술을 권하는 신관도, 거리를 청소하는 신관 또한 남자였으며, 조금 전 거대한 신전에서 여자를 쫓아낸 신관이 남자였다.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생각.

신관은 남자만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남녀 구분 없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300년 전 제국의 제2 부흥기를 이끌었다던 ‘태양 황제’로부터 기형적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한동안은 다시 유명무실해졌던 이 제도는 현재 황제가 다시 부활시켰다고도 말했다.

헤르난의 설명 뒤로 물었다.

“……황제 폐하와 신관은 뗄 수 없는 관계죠?”

“예. 그렇죠.”

황제의 힘이 강력할수록 신관은 강해진다. 신관이 강할수록 국력은 강해진다.

“신관은…… 언제 어디서나 황제 폐하의 존재를 느끼나요?”

신관에게 절대적인 동력이자 심장이 황제였다. 신력의 근원은 제국 궁성에 있는 수정에 있으며, 수정은 오직 황제와 후계자만 다룰 수 있다.

“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당연한 일이죠.”

신력은 최초의 황제와 주신이 나눈 계약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관이 되려면 ‘자격’이 필요해요. 황궁에서 이것을 받죠.>

따라서 모든 신관은 황제의 허락 하에 자신들이 믿는 신이 주는 힘을 완전히 빌릴 수 있다. 황제가 주신의 대리자이니까.

<신관은 본능적으로 황족을 해칠 수 없어요. 심장이 아프거든요.>

주신의 능력을 차지한 황제는 완전한 통제권을 가진다. 즉 신관 개개인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혼자서 모든 힘을 통제해도 나라 하나를 홀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고로 황제의 정치적 권한엔 한계가 있다.

몇 세대 전의 ‘태양 황제’가 신관을 남자로 한정한 데는 황제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여서 신관 개개인이 강해지는 바람에 펼친 정책이었다고 한다.

어째서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하고, 그것이 여성 탄압으로 이어졌는지는 일단 제쳐 두고서. 황제가 이리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이 강해질 것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었다.

신관들의 권한이 강해지면 황제를 정치에서 내몰아 내고 신력 건전지로만 쓰려는 시도가 늘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헤르난데즈가 말했다. 현 황제는 역대 최약이라 평가받는다고, 그래서 카스토르의 즉위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펜네의 말에 따르면, 약한 황제는 제국의 풍요를 보장하지 못하며 보호할 수 없다. ‘태양 황제’야 초대 황제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했던 황제여서 미친 척 신관을 남자로만 한정해도 힘이 워낙 강하니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 황제는 아니었다.

제국 역사상 최약체.

황제의 힘이 비교적 약한 경우에는 황실이 나서 힘이 미미한 자들을 억지로 각성시키는 방법을 썼다. 국력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비윤리적인 수를 써서라도 신관의 수를 무리해서 늘렸다는 얘기를 안다.

그러나 이건 자충수에 가까우므로, 긴 역사 동안 황제의 자리는 신력이 강한 자에게로 이어졌다. 카스토르가 그 엿 같은 성정에도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간단한 계산이네.’

제국에서 정식 신관은 자격을 갖춘 자. 즉, 신력 ‘운전면허증’을 가진 자들이다. 내 궁의 하녀처럼 신력은 있지만 자격증을 받지 못했거나 잠재력만 가진 자를 신관이라 부르지 않는다. 신관 후보라 부르지.

“헤르난. 신관이 많을수록 제국은 강해지겠죠?”

“어째서 묻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 그러합니다.”

요컨대 황제가 약할 경우 신관의 수를 늘려야 총량을 유지하거나 이전보다 증가한다. 황제의 힘이 아주 약하다면 신관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그래야 제국 전체의 전력을 유지하게 해 주니까.

그런데 제국은 ‘여성’ 신관 후보를 버려두고 있다.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앞으로 내가 살 나라니까.”

신학 시간에는 이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언제나 나 하나 살기 벅찼던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수학이나 물리와 비슷하다. 수식을 가르칠 수 있지만 실질적 응용은 스스로 문제를 마주하며 깨우쳐야 한다. 제국에 있으면서 늘 궁전 한쪽에 갇혀 있었기에 나는 몰랐다. 비로소 현실을 마주하면서 알았다.

현 황제 치세가 약 60년. 신력을 모든 동력으로 삼은 나라에서 최약체 황제가 이끌고 있다. 신관의 수가 하나라도 급한 상황에서 여자는 신관이 될 수 없다.

나만 이상하게 여기는 걸까?

제국민의 반을 제외시키고도 신력은 결함 없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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