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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건국제 Ⅰ (14/47)

8. 건국제 Ⅰ

카스토르는 생애 단 세 번 여인과 엮인다.

첫 번째는 불쌍하게 죽어 간 레베카 에일린 폰 아벤타, 내 아름다운 시녀님이다.

두 번째는 사막에서 보낸 공주 네페르티 하토르 아하시야. 사막의 왕국, 라 페타가 친교의 의미로 보낸 공주이자 카스토르의 약혼자다. 그리고 약혼 뒤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여자였다.

마지막은 주인공 루스벨라다.

‘……건국제에 몹시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막연한 느낌이 아니었다.

곧 제국에 사막의 공주가 등장한다. 약혼했지만 사망하는 불쌍한 공주 말이다. 슬슬 원작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서라도 그의 앞날에 행복 따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래전 적었던 줄거리 양피지를 꼼꼼하게 훑으며, 고민에 잠겼다.

『루스벨라의 빛』 속 카스토르의 약혼녀 아하시야는 그저 어떤 사건으로 죽었다고만 서술된다. 이후 루스벨라가 카스토르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는 장치로 쓰였다.

‘약혼녀의 등장과 루스벨라 등장 시간차는 약 1년.’

지금쯤 아카데미에서 한창 연애를 하고 있을 루스벨라가 이곳으로 올 날이 머지않았다.

‘올해만 넘기면 이곳에 찾아오겠지.’

하지만, 사실 루스벨라가 이곳에 오는 건 1년 뒤가 아니다. 서로의 신분을 모른 채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있었다.

『루스벨라의 빛』 속 카스토르는 이미 건국제에서 루스벨라를 만난 적 있는데, 평소 외전까지 꼼꼼히 봤던 쓸데없는 기억력이 여기서 발휘될 줄은 몰랐다.

“……건국제가 중요하단 말이지?”

루스벨라와 카스토르사이에는 선행된 만남이 있다.

“그 건국제가 이번 해…….”

탁탁, 책상을 두드린다. 파고들 지점을 찾았다. 나는 나비다. 나비의 날갯짓은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언젠가 바다 건너편 거대한 태풍을 야기한다.

날이 밝아 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레베카.”

“……안 주무셨습니까?”

“일찍 일어났어. 무슨 일이야?”

레베카의 얼굴이 어둡다.

“……아. 한동안 본가에 다녀오려 합니다.”

레베카의 어머니, 공작 부인이 몸살에 걸려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걱정을 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건국제는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걸.”

그녀를 안심시키려 이렇게 말하자 레베카는 더욱 굳었다. 씩씩한 목소리로 외칠수록 딱딱해지는 얼굴에 조금 어처구니없어졌다.

‘그렇게 못 미더운가?’

레베카가 시키는 것은 뭐든 열심히 했는데 말이다. 춤 실력도 나날이 늘어 어느 정도 봐줄 만한 편이었다.

‘레베카의 합격선이 지나치게 높아서 그렇지.’

솔직히 누가 내 춤 따위를 그리 열심히 볼까. 물론 귀족들이야 열심히 보겠지. 근데, 난 춤 좀 못 춘다고 까여도 상관없다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한동안 이 인사와 딱딱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긴 했다.

* * *

“오라버니, 연애편지는 뭐라고 거절하면 좋을까?”

“연애편지?”

각계각층 젊은 청년들이 나를 애타게 찾고 있다. 속이 빤한 편지들이긴 하지만…… 답장은 써야 했다.

“아, 정확히는 저와 파트로누스를 좀 해 주십사 하는 청탁?”

“버려.”

“이거 참…….”

춤의 의미 때문인지 귀족들, 특히나 한번 눈에 띄어 보려는 작자들의 연서가 줄을 잇는다. 나쁜 일은 아니긴 한데, 기쁘지도 않다.

“그러게, 얼른 파트로누스를 정하면 될 거 아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레베카가 얼마나 깐깐한데.”

난 얼굴을 묻었다.

“대충 정하려고 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신분이 모자랍니다’, ‘능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한단 말이야. 으…… 나 이러다 춤 혼자 출지도 몰라.”

“흥, 엄살은.”

플뢰온이 우습다는 듯 내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정히 없으면 데인놈이랑 하든지. 아니면 나나.”

“……오라버니는 나 들 힘 없잖아.”

“뭐야?!”

그의 손가락을 잡아 치워 냈다. 확실히 요즘 들어 힘 조절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자잘하게 더 귀찮아졌다.

“아 정말, 그만해. 방해된다고.”

플뢰온은 온갖 수단을 써서 편지를 쓰는 나를 방해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봤다.

“대체 방해하는 이유가 뭐야?”

“너 말이야. 춤 연습이니 뭐니, 준비에는 그리 열심히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냐?”

“중요한…… 거? 게 뭔데?”

“파트로누스 말이다. 편지만 볼 게 아니라 명단을 보란 말이다. 실한 놈들은 전부 일찍 채 간다고. 몰라? 너 지금 다 거절하고 있잖아! 어느 쭉정이가 네 파트로누스가 될지 모를 이 순간에!”

“아아. 그게 문제였어? 정 안되면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누군데, 설마, 공작……!”

“그라니우스.”

“미쳤어?!”

반응이 예상 이상으로 폭발적이다.

본인 파트로누스도 아니고 내 파트로누스를 가지고 하도 호들갑을 떨어 농담 좀 한 건데.

“그라니우스가 뭐 어때서 그래. 나 수염 좋아해. 멋있지.”

나는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그를 놀려 먹기 시작했다. 플뢰온이 방해하는 통에 거절 편지를 한 통도 못 썼으니 이 정도 심술이야.

“미쳤어. 이 계집애가 돌아 버린 게 분명해! 야, 데인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조영관이라니 말이 돼?”

책을 읽던 데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작자 나이가 몇인데! 아니지. 그놈이 문젠가? 그 늙은 작자가…… 내 병아리를? 망할, 이럴 게 아니다. 당장 불카누스의 신관을 소집하겠어!”

“형, 진정해. 신관은 불러서 뭐 하게?”

“전면전이다!”

이 방에서 플뢰온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뭐 어쩌려고. 콜로세움에 가게?”

“그래!”

신전끼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난투전이란 게 있긴 한데, 이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전면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쉭쉭, 산짐승을 쫓듯이 손을 휘젓는다.

“한 번만 더 방해하면 크라바트에 잉크를 쏟아 버릴 거야.”

청결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플뢰온이 히익 소리를 냈다. 데인은 고개를 숙이며 책상을 두드렸다. 레이 경은 고개만 돌렸는데, 어깨가 잘게 떨렸다. 겨우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다행히 저 결벽증 오라비에게 유효한 협박이었는지 그는 이를 부득 갈면서도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저건 덩치만 큰 고양이야 아주.’

솔직히 거절 편지를 쓰는 게 뭐가 문제인지 난 잘 모르겠다. 플뢰온은 일일이 답장을 작성하다니 없어 보이는 행동이란다.

‘플뢰온처럼 돈이라도 많을 때 거만하게 뻗댈 수 있는 거고.’

아직 나는 뒷배도 없는 황녀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한다. 결국, 플뢰온의 방해가 없음에도 난 깃펜을 내려놓고 말았다.

“형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지켜보던 데인이 쿡쿡 웃고는,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말은 신경 써 봐야 손해야.”

눈만 들어 그를 쳐다보자 휙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 미남의 미소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나는 꼼꼼하게 그를 눈에 담았다.

간만에 셋이서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데인도 플뢰온도, 심지어 데인을 따라다녔던 레이 경도 바빠 좀처럼 모일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전부 바쁜 거 아니었어? 아. 플뢰온 빼고.”

데인은 살며시 웃으며 가볍게 쥔 주먹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 안 바빠.”

“거짓말. 이 서류 다 네 거잖아.”

응접실에 가득 쌓인 두루마리는 모두 데인의 것이었다. 데인이 일하는 곳은 제2 행정청으로, 행정기관 중 가장 바쁜 곳이다.

그에 반해 플뢰온이 있는 제6 행정청 솔레쿠라토르 궁은 재무관이 있는 곳으로 이곳은 제2 행정청의 산하 기관에 가까워 비교적 업무가 간단하다고 들었다.

황자가 바쁘다는 건 그만큼 힘이 없음을 뜻했다. 생각해 보라. 누가 번듯한 황자에게 잡무를 시키겠나. 사실 플뢰온처럼 여유로운 게 정상이었다.

‘분명 저 성격에 평민 출신 관리들을 윽박질렀겠지만.’

역시 세상은 데인처럼 성격 좋고 다정한 사람은 손해 보는 곳이다.

나는 두루마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 고대어잖아?’

행정 문서 중 기밀문서는 고대어로 쓴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두루마리가 손을 빠져나간다. 두루마리가 사라진 사이로 데인이 고개를 내밀어 날 향해 미소 지었다.

“왜, 도와줄게.”

데인이 고개를 저으며, 뺏으려던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가 손가락을 얽은 채 잔잔하게 속삭인다.

“그럼 이럴까? 공평하게 나도 보지 않고. 너도 보지 말고.”

“거짓말, 이거 오늘까지 해야 한다고 적혀 있어. 내가 이 정도도 모를 줄 알아?”

데인이 고개를 저으며 두루마리를 뒤로 숨겼다.

“너보다 중요한 건 없는걸.”

그의 미모에 심장이 덜컹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자 그의 입술이 농홍한 호선을 그렸다. 그는 곧 푸스스, 웃으며 깍지 낀 손을 풀고는 내 눈을 감겼다.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드러난 얼굴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예쁘다.

“알았어. 알았으니 그렇게 보지 마. 손 안 댈 거니까.”

백기를 들었다. 어찌 된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이 아슬아슬한 느낌이 깊이를 더해 가니, 하녀들이고 뭇 영애들이고 애타게 마음 졸이는 것도 이해한다.

“그냥 보는 건데?”

“네가 날 그렇게 보고 있으면,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이야.”

대체 어느 복 받은 사람이 내 오빠를 데려갈까. 실제로 데인은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연서를 받고 있었다. 하긴 다정하지, 사려 깊지, 일도 잘해, 잘생겼어……. 만약 데인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을게!’ 하고 말한다면 나야말로 ‘평생 수증기도 닿지 않게 해 줄게!’ 외칠 거다.

그는 오늘도 제국식 전통 옷차림이었는데, 속살을 드러낸 얇은 튜닉은 꼭 신화 속 청년 신같이 경건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그를 훑다가 한곳에 멈췄다. 못 보던 장신구였다.

“목걸이네?”

“아. 응. 넌 처음 보겠구나.”

데인이 제 목걸이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건 내 외가에서 선물한 거야. 성년이 되면 수레바퀴 모양을 딴 장신구를 선물하거든.”

“아, 수레바퀴야?”

“응.”

잠깐이지만, 예쁜 눈동자가 검붉은 빛으로 침잠한 듯했다. 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가문의 이름을 따 「롬의 수레바퀴」라고 불러.”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바퀴를 만져보았다. 금으로 만든 바퀴는 무척이나 정교했고, 안쪽에 작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오래전 유랑민족이었으니까. 이 수레바퀴는 운명을 뜻해. 정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지.”

왜일까. 설명하는 내내 그에게서 약간의 거북함과 미욱한 음울을 감지했다.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플뢰온이 끼어들었다.

“야, 그래서 넌 누구와 함께 갈 거냐고. 인제 그만 얘기해 줘도 되지 않냐? 말 좀 해 봐.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데인 쪽을 보자, 조금 전 보였던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두 오라비를 번갈아 보면서 대꾸했다.

“글쎄 고민 중이야.”

“그놈의 고민은!”

“그럼 오빠가 나랑 갈래?”

“미쳤어?”

“거 봐. 본인도 싫으면서 나더러 강요한다니까.”

격렬한 춤을 함께했다간 제국 최초로 파트로누스를 들어 올리다 꼴사납게 넘어지는 춤을 선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헉헉대다 쓰러지는 플뢰온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저것 좀 봐. 거절하고 싶은 건 난데. 너무하지 않아?”

“그러게. 네가 어때서.”

데인이 장난기 가득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데인이 나랑 갈래?”

데인이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올리며 슬쩍 입을 맞췄다.

“라 체 쉐라르.”

고대어로 해석하자면 ‘당신의 하룻밤을 내게’라는 뜻이다. 파트로누스를 요청받은 남자 혹은 여자가 긍정할 때 하는 대답이었다.

“언제까지 준비할까?”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면 곤란해.”

그러자 데인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슬쩍 손을 빼냈다.

“그리고 데인은 안 돼. 분명 꾸며 놓으면 나보다 더 예쁠 거야.”

“내 눈엔 네가 더 예뻐.”

“그 말은 고맙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이 다정함의 반만이라도 저 큰 오라비에게 옮길 수 없을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내 큰 오라비 연애는 시도조차 글러 먹은 듯하니 조금 걱정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사람이 있고 수만 가지 취향 중에 플뢰온을 좋아할 만한 선량한 아가씨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아가씬 무슨 죄야.’

너무 불쌍하다.

“아무튼 데인 넌 아무 데서나 그렇게 웃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러고 있는걸.”

“거짓말. 내가 쉼포시온에서 다 봤어.”

“쉼포시온?”

“응.”

난 담연한 낯으로 끄덕였다. 족히 열은 되어 보이는 여성들 사이에서 장미처럼 고운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술탄의 하렘이 따로 없었지. 하긴 이런 식으로 웃고 속삭이는데 그 누가 넘어가지 않고 배기겠어.

데인은 잠깐 눈을 크게 뜨며 깜빡였다. 곧이어 야살스레 휜 눈이 가까워졌다.

“내가 이렇게 웃고.”

그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속삭이는 건 너뿐인걸.”

그러고는 천천히 떨어졌다. 망막에 잔상이 오래오래 남았다.

“형도 나도 파트로누스가 없어. 레이도 없대.”

그리고 뒤를 보면서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레이 경? 인기가 없나 보네.”

“그렇지? 알고 지내는 여자도 없대.”

“저런. 오빠가 소개해 주는 건 어떨까. 아니면 혹시 레이 경이 그, 고자…….”

“다 들립니다.”

말없이 등을 기대고 있던 기사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데인과 나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밤이 되며 데인과 플뢰온이 돌아간 궁에 나 홀로 남았다. 창문 앞에 기대어 앉은 나는 찻잔을 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 같다.

“……몇 분 남지 않았네.”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일기장을 펼쳤다.

“드디어 복구된 건가?”

카스토르를 만난 뒤 일기장은 고장 나 버린 것처럼 잠시 미래 예지를 멈춰 버렸다. 고장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카스토르가 손을 댔던 자리가 까맣게 그을렸으니까.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일기장은 차차 복구되었다. 어째서 일기장 따위에 자가 복구 능력이 있는 거냐고 의문을 가져도 이 무심한 일기장은 답이 없다.

12시를 넘기자 일기장이 희미한 빛을 흩뿌리고, 빈 페이지에 새로운 미래가 적혔다.

‘어디 한번 볼까.’

파라락, 언제나 그렇듯 넘겼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쯤 있고 말겠거니 했던 장이 넘어가고 또 넘어가 이윽고 30장을 넘어섰을 때, 나는 입을 벌렸다.

“……어째서? 너무……. 많잖아!”

장수가, 지나치게 많다!

책장을 빠르게 넘겨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어차피 마지막 날에 죽는 것은 똑같겠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지.’

나는 침을 삼켰다. 곧이어 일기장이 침대로 떨어졌다. 조금씩 새던 헛웃음이 마지막에 이르러선 경악이 되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에 와서 일기장을 보며 놀랄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오산이었다. 이때까지의 법칙을 무시하고, 두 달이란 장기적인 미래가 생겨났다.

[825년 베누스의 달 17일

(중략)

사막의 공주님과 첫째 오라버니가 약혼식을 올렸다.

그날 밤, 오라버니의 궁으로 가지 않고 날 찾아온 예비 황태자비님이 내게 말했다.

“나,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흡. 미안해요. 그분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원망하려거든 제 애달픈 사랑을 원망해 주세요. 마마님이 몹시도 애처롭게 우셔서 나는 순간 한나를 부르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그게 실수였음을 알았을 때, 이미 날카로운 쇠붙이가 내게 돌진해 오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나는 마마의 손에 들린 비수에 찔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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