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00)

098. 외전2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세리는 답지 않게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평소의 힘없는 걸음걸이와 달리 손바닥에 작은 씨앗을 가득 쥔 세리의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손에 쥔 씨앗들은 며칠 전 숲에서 데려온 흰 새의 먹이였다. 한달음에 기숙사에 도착한 세리가 창가에 놓은 낡은 새장을 열었다. 지루하게 기다렸을 새를 꺼내 직접 손에 있는 씨앗을 먹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새를 넣어 주었다. 이제는 주인이 세리라고 인식한 듯, 흰색의 빛나는 깃털을 가진 새는 그녀를 곧잘 따랐다.

한눈에 봐도 이렇게 멋진 새인데,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얼마나 슬플까. 세리는 우울한 눈으로 새장 안을 바라봤다. 그녀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새는 그저 나뭇가지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직 아카데미 안의 누군가가 반려동물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이 어여쁜 새와 함께 할 시간은 남아있었다. 

“나 오후 수업 얼른 다녀올게. 심심해도 도망치면 안 돼.”

오후에는 기숙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대강당에서 수업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얼른 가 봐야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자꾸 새장에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세리는 진분홍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새에게 몇 번이나 작별인사를 건넸다. 

달칵.

나지막한 문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방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창가에 있던 새장에는 빛나는 흰 깃털을 가진 새 대신에 서늘한 바람만이 머물고 있었다. 

***

세리가 당연한 듯 제일 앞쪽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같은 반의 여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왔다. 분명히 세리가 의자를 빼 놓는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은 세리를 밀치고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앞자리 아니면 다른데 앉지도 못하게 하더니. 자신이 앉으려는 자리를 뺏은 여학생들에게 당황한 듯한 얼굴의 세리가 말을 걸었다.

“저기….”

“왜? 여기가 너 혼자만 앉는 자리야?”

“지금 우리가 여기 앉는다고 화내는 거니?”

“어머, 정말? 역시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세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쏘아붙인 여학생들은 고개를 돌려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듯 세리를 무시했다. 그럼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세리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앞줄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원래대로라면 교수님의 눈에 안 띄는 뒷좌석부터 찰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세리는 뒤쪽 끝 빈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깨끗하게 풀렸다. 

“여기 이쪽은 우리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졸업한 학생이자, 사브만의 왕자님이신 덴타 크리타잔 님이시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너희들의 학업을 봐주시러 오셨으니 모두 예의 있게 행동하도록.”

나이 많은 교수의 소개가 끝나자, 강당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리 역시 멍한 눈으로 교단을 쳐다보았다. 덴타 크리타잔. 사브만에서 봤던 그 덴타 왕자님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의 그는 더 이상 그때의 예쁘장한 소년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몇 번이나 눈길을 줄만한 훤칠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때보다 짧아졌지만 여전히 은백색으로 빛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과, 더 진해진 붉은 눈동자.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세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덴타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허나 그는 세리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인사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여러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당을 울리는 낮고 힘 있는 목소리. 그의 매력적인 얼굴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에 여학생들은 대부분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덴타 님이 이제 이런 멋진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 구나. 세리는 그의 말을 듣고 코끝이 찡해져 왔다. 정신없이 떠나올 때 들었던 목소리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세리는 자신의 눈에 덴타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담았다. 

“덴타 님 자세히 봤어?”

“당연하지! 그러려고 앞에 앉았잖아. 와, 너무 멋있으셔! 머리도 좋고, 잘생기시고, 거기다 사브만의 왕자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기만 하니? 덴타님은 우리 아카데미에 다신 없을 전설이라고!”

“맞아. 다신 없을 존재야.”

오후에 있던 강당 수업을 마친 여학생들의 주제는 당연히 덴타였다. 학생들을 뒤따라가던 세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덴타 님이 다시없을 인물이긴 하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는 세리를 알아챈 여학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세리는 덴타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서 그녀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살필 수 없었다. 

“웃긴다, 쟤. 지도 꼴에 여자라고.”

“그러게? 밝히기는. 역시 천하네.”

“기분 나빠. 너 같은 거는 덴타님 발끝에도 못 닿거든?”

어느새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세리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렸다. 세리는 그제야 덴타를 봤다는 사실에 들떠 빨리 기숙사로 향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안 그래도 마지막 방학을 앞두고 더욱 더 괴롭힘이 심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세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얼른 이 괴롭힘이 끝나길 바랐다. 

“실례가 안 된다면 도하잔 교수님의 방이 어딘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악의가 가득한 목소리를 뚫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를 괴롭히던 여학생들도, 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세리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직 강당에 있는 줄 알았던 덴타의 등장에 여학생들의 얼굴에는 다시 붉은 기운이 퍼졌다. 덴타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게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변화에 화들짝 놀란 여학생들이 앞 다투어 그를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세리를 괴롭히던 여학생 무리들이 이번에는 덴타를 에워싸고 자리를 옮겼다. 세리는 순식간에 사라진 무리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끝내 덴타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 역시 그가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번쯤은 예전처럼 그 예쁜 눈동자를 온전히 마주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

세리는 오후 청소까지 모두 끝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새장에는 여전히 흰 새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 달음에 새장으로 다가간 세리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혼자만의 수다를 시작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새장 속의 새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별 거 아닌 반응에도 세리의 목소리는 더 커져갔다. 

“글쎄, 덴타 님을 만났지 뭐야? 아, 덴타 님이 누군지 모르겠구나? 덴타 님이 누구냐면 사브만에 있었을 적에 나한테 글도 알려 주시고, 맛있는 식사도 항상 챙겨 주셨던 분이야. 그리고 내 목숨까지도 구해주셨지.”

세리는 눈을 감고 사브만에서 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서관에 갔던 일. 함께 식사를 하며 즐거웠던 일. 마지막에는 원치 않게 눈물바람으로 헤어졌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어린 덴타와 있었던 추억을 떠올려 보면 늘 좋은 일들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 왜냐면 그분은 정말 저기, 하늘 위에 있는 사람 같아서. 감히 상상이나 했겠어?”

세리의 수다가 계속 되는 동안에도 새장 속의 새는 가끔 날개를 퍼덕일 뿐이었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너무 좋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지셨어. 그리고 이제는 그 멋진 목소리로 말씀도 잘하시고 말이지.”

세리는 새장의 문을 열고 흰 새를 꺼냈다. 세리의 손등에 앉은 흰 새는 자세를 바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예쁜 눈동자를 본 세리는 조심스럽게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지 마. 언젠가는 멋진 울음소리가 나올 거야. 그때까지 내가 잘 돌봐줄게.”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흰 새는 자신의 머리를 세리의 손등에 비볐다. 그 포근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세리는 다시 소리 내서 웃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덴타와의 추억을 얘기하던 세리는 새를 책상에 올려놓고 과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펜이 움직이는 대로 쫓아다니는 새의 귀여운 모습에 결국 세리는 다시 새를 잡고 한참 떠들 수밖에 없었다. 

딴 짓을 하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깔끔하게 과제를 마친 세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로 들어갔다. 그동안은 새를 새장에 넣어 놓은 뒤에 잠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혼자 자기에는 쓸쓸했다. 

“내가 너를 짓누르지는 않겠지? 평소 잠버릇이 심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머리맡에서 자는 게 좋겠다.”

세리는 옆에 두었던 새를 다시 조심스럽게 베개 위로 올렸다. 흰 새는 그녀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날개를 접고 앉았다. 세리가 다시 한번 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리는 방안. 작은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달빛만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세리의 머리맡에 있던 새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새를 대신해서 커다란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빛을 받아 더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색의 남자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세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세리의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어느새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안녕, 나의 세리.”

몇 년이나 기다려 온, 설렘이 가득한 인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