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외전1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가득 비추자, 소리오닌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흐릿한 초점을 맞췄다. 그녀가 깨어난 기척을 느꼈는지 에리한 역시 눈을 떴다.
“잘 잤어요?”
소리오닌이 웃으며 에리한에게 물었다. 에리한은 대답 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소리오닌의 뺨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잠시 뒤 그들의 딸이자, 바론의 공주인 로엘이 방문을 활짝 열었다. 공주의 뒤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세리가 서 있었다.
“로엘, 그렇게 뛰면 넘어진다고 몇 번을 말했니?”
“내일부터는 안 뛸게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급한 일이었어요. 그치, 세리?”
밝은 금발에 싱그러운 초록색 눈을 가진 로엘이 세리를 바라봤다. 아직 6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해 비상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다. 두 사람은 로엘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로엘. 급한 일이라는 게 어떤 건가?”
“아바마마, 지금 제 손에 있는 이게 정말 급하고 중요합니다!”
“음? 편지?”
“네! 바로 이 편지에 세리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허락이 담겨 있어요!”
로엘이 세리의 다리를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마치 자신이 입학 허락을 받은 듯, 아이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몇 주 전 세리에게 정식으로 아카데미에서 약학을 배워 보지 않겠냐고 권했던 소리오닌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세리의 신분으로는 아카데미에 절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입학 신청서와 함께 바론 국왕인 에리한의 추천서를 함께 보냈던 것이었다.
“어머, 정말? 그래서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 뛰어왔구나!”
“그렇답니다! 어마마마,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로엘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옆에서 돌봐 주었던 세리였다. 그래서인지 로엘은 세리의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세리가 아카데미에 합격했다니, 로엘이 신나서 뛰어올 만했다.
“세리, 너무 축하해!”
“전하, 왕비님. 모두 두 분 덕분이에요. 제가 다른 곳도 아니고 빌레 아카데미에 갈 수 있다니,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요.”
“아니야. 아카데미에서도 너의 실력을 알아봐 주었을 거다. 그 결과가 나왔을 뿐이야.”
“그래. 거기는 가고 싶어도 아무나 못 가는 곳인걸. 세리, 너도 잘 알잖아. 국제적으로 굉장한 수재들만 모이는 곳인데, 분명 너의 가능성을 본 거야.”
소리오닌과 에리한의 진심이 가득 담긴 축하 인사에 세리의 코끝이 찡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배워 올게요!”
“당연하지! 거기다 약재부라니, 한참 공부해야할 걸?”
세리의 다짐에 소리오닌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세리가 합격서를 꼭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세리를 소리오닌이 얼른 잡아 이끌었다.
“자, 얼른 입학 준비를 하자! 로엘. 도와줄 수 있지?”
“물론이죠! 세리를 위해서라면 제 노엘이도 줄 수 있어요!”
노엘은 로엘이 동생처럼 아끼는 인형이었다. 아이다운 귀여운 발상에 소리오닌과 세리는 함께 웃어 버렸다.
***
그때까지만 해도 행복했었다. 소리오닌과 함께 웃을 적만 해도 이런 일은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휴우.”
세리는 구정물에 젖어서 엉망이 되어 버린 양말을 들어올렸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2년하고도 6개월. 손톱만큼도 바뀌지 않은 학생들의 괴롭힘에 점점 힘이 빠졌다.
처음에는 사실 괴롭힘 당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주위를 살펴볼 신경도 없었다. 하지만 입학한 지 몇 주가 지나자 자신을 향한 적의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주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매 시간마다 오물로 가득한 책상과 저도 모르게 찢어져 버린 책들을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불평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바론의 국왕의 추천을 받아 입학한 학생이라고 해도, 그녀의 신분으로는 다른 학생들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정말 어떤 벌레 한 마리 때문에 이번 학기 너무 힘들지 않니?”
“내 말이. 정말 독해. 죽지도 않지 뭐야.”
“그런데 끈질기게 살아남아 뭐하니. 추하기만 하지.”
제일 앞에 앉은 세리에게 들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러나 세리는 그녀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숙여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이런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다만 잘 견디던 그녀를 한두 번씩 무너지게 하는 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지금까지 세리는 다른 사람과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이상이 하는 조별 과제도 항상 혼자였고 그게 당연했다. 기숙사에서 배정 받은 방 역시 건물의 제일 꼭대기 구석진 방에 혼자였다. 교수들도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긴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학생들을 교수라는 이유로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날부터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견디는 이유는 소리오닌 때문이었다. 소리오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제 6개월만 버티면 됐다. 그렇게 되면 다시 바론으로 돌아가 소리오닌과 로엘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오전 수업 시간 내내 교수 몰래 세리에게 작은 돌이나 나무 조각을 던져대던 학생들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점심시간이라 해도 세리는 맘 편히 밥도 먹지 못했다. 괴롭힘이 반복되자 자연스럽게 점심을 거르게 된 세리는 오후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아, 세리?”
“네, 교수님.”
“오늘 오후에 야외실습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지금 준비하러 가는 길이에요.”
“그래. 저번처럼 엉뚱한 데 가 있지 말고.”
교수가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세리를 쳐다보았다. 객관적인 성적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그 외의 생활에서는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보다 더 챙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래저래 답답했다.
세리는 교수의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더 길게 있어봤자 학생들에게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 교수님께 얼른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
“음…?”
분명 오늘 야외 실습은 건물 뒤쪽에 있는 숲에서 한다고 했는데. 세리는 어제 오후 칠판에 적혀 있던 실습 장소를 다시 떠올렸다. 그 뒤로 변경되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한껏 커다래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세리의 얼굴에 순간 낭패감이 가득해졌다.
그제야 숲에 오는 동안 단 한 명의 학생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학생들이 강의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세리에게만 전해 주지 않은 듯했다.
“이 멍청이.”
교수님이 직접 잘 찾아오라고 당부했는데. 자신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힘들었다. 하필이면 뒤쪽 숲에서 혼자 있게 되다니.
잠시 침울해하던 세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얼른 숲에서 나가야 한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사라져서 순식간에 깜깜해질 게 분명했다. 다행히 숲의 입구에서 멀리 들어오지는 않았기에 조금만 걸으면 다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라는 생각이 더해지자 더욱 스산해지는 느낌에 세리가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응?”
세리는 순간 묵직해진 한쪽 어깨를 쳐다봤다. 그녀의 어깨에는 은은하게 하얀 빛으로 빛나는 새가 내려 앉아 있었다.
새? 뒤쪽 숲에 몇 번 와봤지만 처음 보는 새였다. 숲 속에 사는 짐승들은 모두 숲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눈에 띄는 새들은 이 시간에 숲 입구 쪽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어… 안녕?”
세리는 혹여나 새가 다시 날아갈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말을 꺼냈다. 그 새는 세리의 말을 알아듣는지 작은 머리를 살짝 움직였다. 자신의 말에 반응한다는 게 신기해서 세리는 말을 이어갔다.
“혹시 어디 아파? 못 날아?”
세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는 가뿐하게 날갯짓을 했다. 흰 날개를 한두 번 움직였을 뿐인데 새는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
세리는 훌쩍 떠나버린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새가 앉았던 어깨가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괜히 못 나는 거냐고 물어봤나 봐. 세리가 시야에서 사라진 새를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톡, 그때 세리의 어깨 위로 새가 다시 내려앉았다.
“와, 와아!”
세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돌아온 새를 보며 세리가 조심스럽게 반대쪽 손을 가져다 댔다. 용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새는 작은 부리로 그녀의 손을 살짝 건드리고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만나서 반가워. 정말이야. 아이, 착하다.”
세리는 숲속을 나가야한다는 것도 깜빡할 만큼 새에 빠져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도망가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을 하는 등, 사랑스러운 모습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누가 잃어버렸을까.”
아무리 봐도 야생에서 사는 새는 아닌 것 같았다. 희고 고운 깃털 색과 분홍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말을 알아듣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까지. 분명히 고위 귀족이 기르던 새인 게 분명했다.
세리는 우선 자신이 데려가서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두면 다른 못되고 무서운 새들한테 당할지도 몰랐다.
“나랑 같이 갈래?”
세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가 다시 날아올라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세리는 그 아름다운 깃털이 빛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녀를 앞질러 날아가던 새가 다시 세리에게 돌아왔다.
“그래, 가자. 더 어두워지면 우리 둘 다 위험하겠어.”
다시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를 쓰다듬으며 세리는 걸음을 빨리했다. 아카데미에 온 뒤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세리는 어느새 예전의 수다쟁이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