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여자가 황급히 소리오닌의 집으로 뛰어갔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소리오닌은 그녀를 따라 집을 나섰다.
마을을 지나면서 눈이 마주친 병사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휴우, 그래도 다행히 별 의심은 안 받았네요.”
“그러게. 자, 여기 있어. 이걸로 갈아입어!”
“네!”
여자는 미리 준비해 놓은 고용인 복장을 소리오닌에게 넘겼다. 옷을 갈아입고 어제 저녁 잘라 놓은 앞머리를 눈이 안 보이게 내리자, 한 눈에 소리오닌이라고 믿기에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손목에 붕대까지 감으니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어때요? 괜찮아요?”
“응! 절대 안 들킬 것 같아! 가자, 시간이 없어!”
여자를 따라 자하만 백작가의 정문으로 들어간 소리오닌은 전혀 의심 없이 저택 안까지 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큰 저택을 둘러보며 숨길만한 장소를 생각할 때였다.
“거기.”
“네?”
여자와 소리오닌의 어깨가 굳었다. 바로 뒤에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너희는 할 일이 없는 건가?”
“저…….”
“그럼 2층으로 가서 백작님 서재 좀 정리해라. 오늘 외출에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끝내야 해. 자!”
서재의 열쇠를 넘기고 남자가 사라졌다. 얼떨결에 백작의 서재 열쇠를 건네받은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좋아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다니! 서로 마주 보고 웃은 뒤 2층을 향해 올라갔다.
“평소에는 꼭 문을 잠가놓고 다니신단 말이지. 열쇠도 저 집사장 아니면 백작님밖에 없는데. 운이 좋아도 너무 좋네!”
여자가 서재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은 안에서 문을 잠근 뒤 본격적으로 서재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꽤 많은 책들과 잡동사니로 인해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책장 뒤쪽이거나, 서랍 안에 또 서랍이 있거나…… 그동안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생각해 낸 소리오닌이 책장부터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없네요……. 그럼 제일 평범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찾아볼까요?”
“그래, 맞아! 백작님이 은근 고지식해서. 서랍 안에 숨겨 놨을지도 몰라!”
여자는 소리오닌의 몫까지 서재 곳곳을 닦으면서 키득거렸다. 그녀의 말에 같이 웃은 소리오닌은 찬찬히 서랍 안쪽을 더듬었다.
첫번째, 두번째 서랍까지는 별 특이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데다가는 안 숨기려나? 슬슬 실망감이 차오를 때, 세 번째 서랍 밑판에 뭔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 찾았나 봐요!”
“뭐어?”
자신도 모르게 서로 큰 소리를 낸 두 사람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오닌은 조심히 세 번째 서랍을 분리해냈다. 서랍 안을 빼곡히 채운 종이들을 걷어내니, 서랍 끝 쪽으로 작은 홈이 보였다.
“이게 열쇠 구멍인가 봐요.”
“그러게……. 열 수 있을까?”
“글쎄요…….”
혹시 마법은 걸어놓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특별하게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자신은 마법을 느낄 수 있지는 않았지만……. 우선 열쇠구멍을 자세히 본 소리오닌은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머리핀을 빼냈다.
아직 한국처럼 문명이 발달한 건 아닐 테니,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몰라. 어렸을 적에 방문 정도는 종종 머리핀으로 열기도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열쇠구멍으로 머리핀을 집어넣었다.
“그, 그게 뭐야? 머리핀으로 열 수 있어?”
“예전에 몇 번 해봤어요. 마법 같은 것만 걸려 있지 않으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뭐어? 이런 일을 해봤다고?”
소리오닌의 대답에 깜짝 놀란 여자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분명히 초크센의 공녀라고 하지 않았나? 놀란 눈의 여자를 보고 어색하게 웃은 소리오닌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핀을 움직이는데 집중했다.
몇 번을 헛돌아가던 머리핀이 어느 지점에 걸리자 움직임이 멈췄다. 됐다! 속으로 함성을 지른 소리오닌이 거기서부터 다시 머리핀을 움직였다.
‘달칵’
뭔가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오닌과 여자는 그 작은 소리에 서로 부둥켜안고 신나했다. 매끈했던 서랍 표면에 작은 틈새가 올라와 있었다.
“이, 이걸 열면 그 안에 뭔가가 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꼭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쵸?”
“그럼! 어디 얼른 열어 봐!”
여자의 재촉에 소리오닌의 떨리는 손이 서랍을 향했다. 부드럽게 열리는 판을 올리고 그 안에 놓여 있는 서류를 꺼내들었다.
“저, 떨려서 못 볼 것 같아서 그러는데…… 제가 말한 서류가 맞는지 한 번 확인해 주실래요?”
“그래? 알았어! 잠깐만!”
소리오닌에게 서류를 건네받은 여자가 몇 장을 뒤적거렸다. 자세한 내용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어떤 물건의 거래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 맞는 거 같아! 이거 물건의 거래서야. 제대로 찾았어!”
“와아!”
서로 얼싸안고 축하하던 두 사람은 얼른 서랍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서류 봉투 안이 비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손에 잡히는 몇 장의 종이도 넣어놓았다.
서둘러 서재 청소를 끝낸 두 사람은 열쇠를 돌려주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저택의 담벼락 아래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제 오라버니도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그래, 정말 잘 됐어. 도와준 보람이 있네! 바론에 와서 고생만 했을 텐데……. 이제 진짜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
“네! 저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근데 혹시 들키면 어떡하죠? 저야 이 저택에 없지만…….”
증거를 찾은 것도 좋고, 들키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좋았다. 그렇긴 해도 자신 때문에 여자가 크게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도 내일쯤이면 이 동네에 없어.”
“네?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여자의 대답에 소리오닌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응, 이제 고향에 내려가려고. 여긴 전에도 말했다시피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너무 힘들어. 오늘 저녁에 짐 쌀 거야.”
“서운해요……! 이제 못 보는 거네요?”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지. 그래도 마지막에 큰 도움이 되어서 너무 다행이야.”
푸근한 미소를 짓는 여자를 본 소리오닌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회의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느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가까웠다.
“아니, 그러면 제대로 된 증거나 물품도 없이 사람을 죽이자는 겁니까?”
“왜 증거가 없습니까? 자하만 백작께서 내놓은 것들은 증거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대부분 이런 종류의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이첸 왕과 에리한, 그리고 자하만 백작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 대신들이 지쳐갈 무렵 자하만 백작이 일어났다.
“전하.”
“음? 무슨 일이오?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가려는 것이오?”
“아닙니다. 저의 의견도 한마디 덧붙일까 싶어 일어났습니다.”
백작은 고개를 꾸벅 숙여 도이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분. 이렇게 감정 소모만 하고 있으실 겁니까?”
“가, 감정 소모라니. 어찌 그렇게 말하시오?”
“그럼 몇 시간동안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은 안건에 매달리는 일이 감정 소모가 아니면 무엇이 감정 소모인 것입니까?”
“흠흠.”
자하만 백작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서로에게 지기 싫어서 아침부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드디어 조용해진 회의장을 둘러 본 백작이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제가 가져온 증거를 믿으시는 분이 절반, 믿지 못하시는 분이 절반. 완벽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우기시는 분들도 많이 있지요.”
“아니, 그러면 그런 종이 몇 장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발끈한 대신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소리쳤다. 저 번에는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생각해 볼수록 백작의 증거는 허술했다.
“그럼, 가져오시지요.”
“뭐, 뭘 가져오라는 말입니까?”
“제 증거가 틀렸다는 증거. 말입니다.”
회의장이 다시 고요해졌다. 저마다 백작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대신들의 속보이는 행동에 진심으로 웃음을 흘린 백작이 미소 띤 낯을 보였다.
“제 증거가 그렇게 허술하다 생각이 들면 반박할 만한 증거를 가져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아무런 반론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자님의 결혼을 반대하는 제가 소리오닌 공녀에게 불리한 정보를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 아니! 누가 그랬다고. 말이 심한 것 아니시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혹여나 그렇게 어리석은 분들이 계실까봐.”
정곡을 찌르는 말에 모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한 번 더 반대편에 선 대신들의 무리를 바라 본 자하만이 이번에는 시선을 에리한과 왕에게 돌렸다.
“전하, 왕자님.”
에리한은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갔다.
“노미텐이 감옥에 갇힌 지 내일이면 2주입니다.”
역시.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지. 에리한은 허벅지 위에 올려 놓은 주먹을 꾹 쥐었다.
“원래 이런 반역죄는 잡히는 즉시 처형하는 것이 보통인데. 너무 오랜 시간 끌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