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00)

088.

“네? 정말요?”

“네. 다행히 몇몇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이걸로 노미텐 알몬느의 반역죄는 면제가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일 외에도 그가 도망쳤던 점이나…… 그런 것들은…….”

머뭇거리며 말을 마친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아마 처형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옥에서 나오려면 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죠. 그건…… 오라버니가 잘못한 일이니까. 그런데 반역에 대한 누명은 확실히 벗을 수 있는 건가요? 그게 제일 중요하죠!”

“네. 누명은 벗을 수 있을 겁니다. 진범이 잡힌다면 완벽하게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지금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에리한이 어느새 소리오닌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오라버니의 생사가 제일 중요할 테니까. 천천히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에리한 님?”

“네.”

“그, 진범이라는 사람이요. 역시 자하만 백작인가요?”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무슨……?”

“아, 아니!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정말 백작이 맞나 싶어서요. 그럼 정말로 에리한 님의 결혼 때문에 저를 모함한 거잖아요.”

“…….”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침묵에 다시 한번 백작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에리한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또,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중이죠?”

“…….”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굴 좀 펴요. 오랜만에 저 보러 왔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하고 있을 거예요?”

소리오닌의 귀여운 투정에 피식, 웃은 에리한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소리오닌 역시 그를 마주 안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서로의 애정을 다시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울타리 너머에서 소리오닌을 부르는 소리가 들여왔다.

“소리오닌 님!”

지긋한 나이의 여자 목소리에 소리오닌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재빠른 행동에 에리한의 얼굴에 궁금한 표정이 떠올랐다.

“누가 찾아오기로 했습니까?”

“아뇨, 환자에요! 요 근래 자주 오시는 분이에요.”

“아아, 그렇군요.”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한을 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얼른 인사를 하고 보내려 했다. 전에는 환자가 있어도 딱히 상관 없어하더니…….

오늘따라 조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의문이 들었지만, 남자도 아니고 나이 지긋한 여성을 상대로 의심해 뭐할까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또 오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휙휙 손을 흔드는 소리오닌을 보고 에리한은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자신보다 저 아줌마가 우선인가 싶은 마음에 울타리를 지날 때 그 환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평범한 사람인데.”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 때문에 자신을 쫓아내는 거 같아 기분이 살짝 꼬였지만, 그래도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예뻤다. 결국 다시 표정이 풀린 에리한은 말을 타고 성으로 향했다.

***

“저 총각은 누구에요? 훤칠하니 잘 생겼네!”

“아아, 환자에요.”

“그래요? 저렇게 멀쩡한데 어디가 아프대?”

어느새 소리오닌과 꽤 친해져 편하게 말을 하는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반응에 어설프게 웃어 보인 소리오닌이 여자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요즘 좀 어떠세요? 붓기랑 많이 나은 거 같은데.”

“아휴, 엄청 좋아졌지! 이게 다 여기서 치료받은 덕분인 거 같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사람 좋은 푸근한 웃음을 짓는 여자를 본 소리오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실 수 있어요?”

“응? 부탁? 무슨 부탁?”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는 여자의 얼굴에, 더 긴장감이 높아진 소리오닌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자하만 백작가에 찾을 게 있어서요. 거기에 가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자하만 백작가?”

“네, 네!”

소리오닌의 부탁에 여자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런데 여기서 못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저기 병사들한테 잡힌다며!”

“그, 그렇기는 한데. 저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음? 병사들한테 안 붙잡힐 수 있어?”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하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여자는 슬쩍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방법이 뭔데? 그리고 백작가에서 찾아야할 건 또 뭐고?”

“저기, 그게…….”

말해도 되는지 머뭇거리는 소리오닌을 보던 여자는 그녀의 어깨를 팡! 소리가 나게 쳤다. 그녀의 갑작스런 동작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거,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 거야? 아니면 내가 못 미더운가?”

“네? 아, 아니에요! 못 미더운 게 아니라!”

손사래를 치며 부정한 소리오닌이 결국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에리한이나 반역죄 같은 큰 이야기는 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여자는 분노에 차서 씩씩 거렸다.

“아니, 자하만 백작이 오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이런 씹어 먹을!”

“하, 하하……”

점점 거칠어지는 여자의 말에 그녀를 진정시킨 소리오닌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그래서 말인데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걱정 말어!”

여자는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고 약속했다. 그녀의 약속에 환하게 웃음지은 소리오닌이 여자에게 여러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그래, 알았어! 내가 내일 올 때 알아가지고 올게!”

“네!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한 소리오닌은 여자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결정적인 증거…… 아마도 집에 놔둘 게 분명한데. 어디에 숨겼을까?”

하루라도 빨리 저택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 증거를 찾는다면 노미텐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사사건건 방해하는 백작까지 혼내줄 수 있을 테였다.

***

그리고 다음 날. 여자가 가져 온 정보를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실행할 날짜가 빨리 다가왔다.

“그러니까. 내일 자하만 백작은 아침부터 성에 가 있을 거고, 그 딸은 시내에서 하루 종일 쇼핑을 한다는 거죠?”

“응, 이건 확실해. 내일이야!”

“좋았어!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이 상체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여자가 얼른 소리오닌을 일으켜 세우고 얘기했다.

“아직 백작가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고맙다는 인사는 일이 다 끝나고 해도 괜찮아! 나도 끝까지 도울 테니, 힘내자고!”

“네!”

두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씨익, 웃음 지었다. 그날 저녁 소리오닌은 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이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이 집을 스스로 떠나보는 것이었다. 제발 괜찮은 증거물 하나라도 얻을 수 있기를…….

***

병사들은 오늘도 역시 별 일이 없는 집들을 둘러보며 하품을 했다. 초크센에서 온 귀족들을 볼모로 잡아놓고 감시를 하고 있다지만, 그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벌써 몇 달 째 조용한 집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훈련을 더 받는 게 낫겠어!”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지루한 일은 난생 처음이야! 이래봬도 꽤 좋은 성적으로 병사 시험 통과했다고!”

“나는 안 그런가?”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잘났다는 다툼으로 번져 투닥 거리고 있었다.

“저, 저기! 병사님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병사들을 불렀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 듯한 모습에 병사들이 움찔했다. 

“뭐, 뭔가? 우리는 바쁜 사람들일세. 용건만 간단히 하게.”

지금까지 할 일이 없어 투덜대던 걸 잊었는지 병사 한 명이 헛기침을 하며 여자를 노려봤다. 여자는 병사의 눈빛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바쁘신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자하만 백작님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입에서 자하만 백작의 이름이 나오자 병사들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자하만 백작이라 하면 바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권력을 쥐고 있는 분이 아니던가?

“자하만 백작님?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다름이 아니라, 백작님 댁에서 저와 같이 일하는 아이가 크게 다쳤는데…… 백작님과 아가씨, 집사장님 모두 출타 중이셔서 도저히 방법이 없어 여기에 찾아왔습니다!”

“뭐?”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병사들의 태도에 여자는 떨리는 손을 꼭 쥐어 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 소리오닌이라는 초크센의 공녀가 사람을 고쳐준다고 해서 좀 부탁하려고요!”

“소, 소리오닌?”

여자의 말에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소리오닌이라고 하면 또 누군가! 에리한 왕자님이 죽고 못 사는 여자 아닌가! 하지만 초크센의 공녀로 이 마을을 벗어나면 안 되는데……!

“네, 꼭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가 많이 다쳐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어요!”

울먹거리는 여자를 본 병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서로 모여서 의논을 했다.

“어, 어쩌지?”

“어쩌기는! 밖으로 내보낸 걸 걸렸다간 큰일이라고! 당연히 안 되지!”

“아냐, 자하만 백작님이 우리들이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파 죽어가는데 모른 척했다는 걸 알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야!”

“그래, 더군다나 소리오닌은 왕자님이 엄청 아끼시잖아. 특별히 도망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저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하는 걸 본 여자는 슬쩍 소리오닌의 집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문을 열고 상황을 보고 있는 소리오닌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들키지 않게 손을 흔든 여자는 더 큰 소리로 병사들에게 애원했다.

“병사님들,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러나 정말 큰일나요! 그러면 저 뿐만 아니라 병사님들도……!”

“자, 잠깐!”

여자의 말을 막은 병사들이 조용히 일렀다.

“정말 치료만 하고 다시 보낼 거지?”

“당연하죠! 저도 여기까지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온 거랍니다!”

“우리가 네 얼굴 다 외웠으니까 허튼수작 부리면 알지?!”

“허, 허튼 수작이라뇨! 저도 자하만 백작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억울한듯 펄쩍 뛰는 여자의 태도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병사들이 여자에게 허락의 말을 전했다.

“좋아. 그 대신 한 시간 이상은 안 돼. 그렇게 되면 온 경비대에 너의 얼굴을 알리겠다. 알았지?”

“네, 좋습니다! 그럼 저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소리오닌 님을 데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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