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아들의 모습에 왕비는 오히려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크마엔에 있었던 왕자가 어찌 사브만의 소식을 알고 있는 건지. 자신도 그 여자에 대해서 들은 게 없건만. 아들의 괜한 허세라 생각한 왕비는 코웃음을 쳤다.
“에리한. 그 공녀를 포기하는 게 싫겠지만, 왕자의 결혼은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왕자의 결혼은 바론의 왕실을 위한 계약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가십니까?”
“저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위나 자하만 양과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는대로 소리오닌 님과 결혼을 하겠습니다.”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엄청난 소리에 왕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어코 그 여자애와 결혼을 하겠다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자신의 어머니를 보던 에리한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소리오닌 님은 사브만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아뇨, 제가 직접 만나고 왔습니다.”
단호한 에리한의 말에 왕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잡초 같았다. 요즘 그녀와 아들의 대화에서 그 여자애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소림이 돋았다.
“지금. 소리오닌이 바론에 돌아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떼어놔야 하는 건지. 왕비의 머리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오닌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왕비의 모습에 에리한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왕비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지니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나보다. 에리한이 한참 자신의 어머니를 보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 왕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마마마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 다 보입니다.”
“?!”
“이번에는 또 어떻게 그녀를 없애야 하는지 고민 중이시겠죠?”
피식피식,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비웃는 듯한 아들의 태도에 왕비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째서 사브만에서 돌아올 수…….”
“글쎄요. 그건 어마마마께서 궁금해 하실 일이 아니죠. 소리오닌 님이 이곳에 있다는 것과 제가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신 상체를 들어올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에리한이 한쪽 다리를 꼬았다. 그 오만한 자세에 왕비는 이제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길수가 없었다.
“에리한.”
“네, 어마마마. 저는 제 생각을 말씀드렸으니, 위나 자하만 양에게는 어마마마께서 잘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뇨.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습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한이 왕비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소리오닌 님께 어떤 위해를 가하실 생각이라면 저와 평생 안 보실 생각이라는 걸로 알겠습니다.”
“……”
“그럼 조속한 마무리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소리오닌 님을 데려오고 싶거든요.”
슬쩍 웃음을 보인 에리한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응접실을 나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온전히 혼자 남겨진 왕비는 새빨간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망할 계집애! 여기가 어디라도 기어들어와?”
혼잣말을 읊조린 왕비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벽으로 힘껏 던졌다.
쨍그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찻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와,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시녀장이 한 눈에 봐도 안 좋아 보이는 상태의 왕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의 옆에서 떨고 있는 시녀장을 노려본 왕비가 소리쳤다.
“자하만, 자하만 백작을 불러 와! 당장!”
“네, 네! 알겠습니다. 왕비님 위험하니 침실에 계시면 모셔오겠습니다.”
왕비는 자신을 부축하는 시녀장의 안내로 침실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이 더더욱 견고해질 때가. 이제 와서 망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없앨 거다. 이제 자신은 아들인 에리한과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정상에 올라야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마리딘 왕비는 침대 옆에 있는 화장대에 앉았다. 아까 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지워진 입술색을 다시 칠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여자는 어느 하나도 모자라지 않는, 바론의 가장 위에 서 있는 마리딘이었다.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
위나 자하만은 에리한이 크마엔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곧 현실이 될 결혼을 떠올렸다. 얼마 전 결혼식 때 자신이 입을 드레스의 원단을 보고 난 뒤에는 몸매 가꾸기에 돌입했다.
태양의 붉은 빛을 가득 담은 듯 빛나던 원단. 그걸로 풍성한 드레스를 만든다면, 바론뿐만 아니라 이 대륙의 모든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하루에 한 끼도 잘 먹지 못해 신경은 점점 곤두섰지만, 그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일주일에 한 끼만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버님! 오늘도 왕비님께 가시나요?”
위나 자하만은 집을 나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물었다. 원래도 자주 왕비궁을 찾았지만, 며칠 전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왕비에게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의아했다.
“아, 위나! 일찍 일어났구나!”
“네, 눈이 저절로 떠졌답니다.”
“그러냐?”
“네, 이제 결혼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사실은 너무 설레서 밤에도 잠이 잘 안 와요.”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인 위나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온화한 표정으로 보던 백작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곧 있으면 너는 왕자비가 되는 거다. 우리 가문의 영광이야.”
“이게 다 아버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백작의 팔에 매달린 위나가 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자신의 딸과 마주 웃던 자하만 백작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나는 일이 있어서 오후 늦게 올 테니 쉬고 있어라. 너무 굶으면 몸 상하니 적당히 먹도록 해.”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아버님이야말로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요즘 계속 성으로 가시잖아요. 저는 아버님이 더 걱정이에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위나가 가녀린 손으로 백작의 어깨를 주물렀다.
에리한, 그 망할 왕자놈은 이렇게 착한 딸을 왜 싫다고 하는지. 자하만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며칠 전, 왕비가 불러서 갔던 궁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소리오닌이 바론으로 돌아왔고 에리한이 그 여자와 결혼한다며 위나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돌리겠다 한 것이다.
왕비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왕자를 말려 달라고 했지만, 이미 선전포고를 한 상황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러니 어떻게든 소리오닌을 없애야 한다고. 우연으로라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던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하거나.
왕비의 은밀한 명령에 백작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두근거렸다.
이러다 여차하면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 거란 생각에 왕비에게 말을 아꼈다. 그 덕분에 소리오닌을 없앨 계획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이번 바쁜 일만 끝나면 너의 결혼 준비를 함께 해야겠구나.”
“네, 아버님! 꼭 같이 해요!”
백작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기쁜 표정을 한 자신의 딸을 뒤로하고 왕비의 성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
자하만 백작이 나간 저택에서 위나는 아침 대신 차 한잔을 마셨다. 요즘 통 식사를 하지 않아 기운이 없어진 그녀는 오전 내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거울만 보고 있었다.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나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혹시 에리한 님이? 이 시간에는 딱히 자신을 찾아 올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크마엔에서 돌아온 에리한이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찾아왔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찾아왔느냐?”
“네, 하이린 영애와 그 외 숙녀 분들입니다.”
“뭐?!”
그것들이 여기를 왜 와? 에리한이 아닌 것도 기분 나쁜데, 평소 눈엣가시였던 하이린과 그 일당들이라니. 결혼하고 나서 자근자근 밟아줄 터인데 그걸 못 참고 왔다는 말이야?
어이없는 웃음을 짧게 내뱉은 위나는 일어나려던 동작을 멈추고 다시 소파 위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래. 준비할 게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녀가 물러가고 천천히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건드리던 위나는 옷장으로 걸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드레스 중 제일 화려한 것을 꺼냈다.
드레스를 갈아입은 뒤 새빨간 입술까지 칠하니, 자신이 봐도 왕자비로 손색이 없어보였다. 입술 끝을 끌어올려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위나는 1층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어 주는 시녀를 지나쳐 응접실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앉아 있었다. 모두들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 위나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오신다는 말도 없이 저희 집에 이렇게 많이 모이셨나요?”
위나 자하만이 제일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의 뼈 있는 말을 들은 여자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안부를 건넸다.
“위나 양, 괜찮으신가요? 원래 미리 약속을 해야 하지만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러게요. 무례인 걸 알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맞아요. 저희는 위나 양이 걱정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