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그녀의 미소를 본 에리한은 따라 웃으며 다시 소리오닌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다시 시작된 입맞춤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저, 에리한 님. 근데 이제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높이 떠 있는 달을 보며 소리오닌이 걱정스레 물었다. 에리한도 창밖을 보고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소리오닌은 얼른 일어나 에리한을 배웅하려 했다.
그녀와 문 앞까지 나온 에리한이 다시 뒤를 돌았다.
“소리오닌 님.”
“네?”
하지만 소리오닌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당신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당장이라도 말해 버리고 싶었다.
소리오닌은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못하는 에리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불렀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한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두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집을 둘러보던 에리한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되겠지.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에리한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소리오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발걸음을 옮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카락, 뺨, 입술을 만지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련이 남아서 끙끙 거리고 있는 에리한. 너무 빤히 보이는 생각과 행동에 어느새 소리오닌의 긴장감이 풀렸다. 이 귀여운 남자를 어쩌면 좋아.
“에리한 님.”
“네?”
“안 가세요?”
딱 떨어지는 그녀의 말에 에리한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갈 겁니다.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에리한은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소리오닌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리오닌 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한참 뜸들인 뒤에야 나오는 그의 진심에 소리오닌이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저도요.”
“네? 무슨…… 뜻인지……? 방금 저보고 안 가냐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간다고 하면 잡아 두려고요.”
소리오닌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에리한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혼자 있기 무서웠어요.”
훅 끼치는 그녀의 향기에 에리한의 심장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 제가 이곳에 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소리오닌의 솔직한 말에 에리한이 그녀를 이끌고 침대로 걸어갔다. 서로의 온기와 향기만이 가득한 밤이었다.
***
에리한은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옆에 잠들어 있는 소리오닌이 보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밝게 빛나는 햇살 아래에서 보는 소리오닌의 얼굴은 하얗고, 두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에리한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따라 그렸다.
음? 어제는 어두워서 발견하지 못했는데 소리오닌의 뺨 한쪽에 상처가 나 있었다. 크게 눈에 띄는 상처는 아니었지만 꽤 길게 이어진 상처 자국에 에리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으음.”
소리오닌이 이제 깨어나는 듯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에리한이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리오닌이 곧 에리한을 보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에리한 님은요? 좁아서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불편함은 전혀 못 느꼈습니다.”
에리한 역시 소리오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 서로를 보고 있던 때, 에리한은 문득 그녀의 뺨에 난 상처가 궁금해졌다.
“소리오닌 님. 뺨에 못 보던 상처가 생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젠 완전히 밝아진 집 안에서 상처는 더욱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에리한은 안타까운 듯 혀를 짧게 찼다.
“사브만의 숲에서 나올 때 잠깐 일이 있었어요.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큰 상처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또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에리한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 여기저기 둘러봤다.
그는 다른 곳이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시선이 괜히 부끄러워진 소리오닌이 시트를 끌어올렸다.
“어, 없어요! 뺨도 제가 잘 못 피해서 상처 난 거예요.”
소리오닌은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걸 깨달은 에리한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에리한 님이야말로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셨잖아요.”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얼굴을 보고 속상한 듯 말했다.
“솔직히…… 제가 당신 없이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에리한의 솔직한 대답에 그녀는 그의 까칠한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에리한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짧은 아침시간, 에리한은 소리오닌과 함께 식사를 한 뒤에 집을 나섰다.
“소리오닌 님, 시간 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조심히 가세요.”
호위도 없이 혼자 성을 나와 하룻밤을 지새웠으니, 지금쯤 그를 찾느라 난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배웅하는 소리오닌을 바라봤다.
“바론으로 돌아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받을 일이 아니에요. 제가 에리한 님 옆으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에리한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대답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고 난 뒤, 이마에 뺨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웃음이 터진 소리오닌이 팔을 올려 에리한을 마주 안았다.
이제 이곳에서 다시는 헤어지는 일 없이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그들을 갈라놓을 것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Chapter 4.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집에서 나와 성으로 돌아왔다.
그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에리한이 문을 열자마자 에리한의 뒤를 바짝 쫓았다.
“와, 왕자님! 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전하와 얘기하시다 말고 나가셔서 안 돌아오시다뇨! 거기다 외박이라니,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아, 그랬군.”
시종장의 우는 소리에도 에리한은 별로 미안한 기색 없이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뒤에서 옷시중을 들던 시종장은 다시 한번 잔소리를 이어갔다.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 나가시면 안 됩니다. 크마엔에서 돌아오신 게 어제인데, 그 날로 사라지시는 건 너무하신 일입니다!”
“알았어. 별 일 없었으면 됐지 않은가?”
“별 일이 없기는요! 왕비님께서 아침부터 오셨다 가셨습니다!”
시종장이 소리쳤다. 자신의 어머니가 왔다갔다는 말에 순간 에리한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종장을 돌아봤다.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거지?”
“그것까지는 말씀 안하셨습니다. 다만 왕자님이 안 계시다고 하니 기분이 안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내가 없어졌다고 말했나?”
에리한의 질문에 시종장이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아침 일찍부터 검술 연습을 가셨다고 했습니다.”
“음, 잘했네. 나도 드릴 말씀이 있으니, 지금 어마마마께 가 보도록 하지.”
자신의 어머니라면 절대 검술 연습장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시종장의 임기응변이 맘에 든 에리한은 피식, 웃음을 내뱉은 뒤 벨트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자신의 궁을 나섰다.
왕비의 궁에 들어가자마자 시녀장이 에리한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급한 일이었나?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린 듯한 왕비의 행동에 에리한의 얼굴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다.
“제게 볼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래. 그 쪽에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지요.”
오늘도 왕비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언제나 완벽한 화장과 머리를 하고 아들을 맞이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대조되는 소리오닌의 수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헤어졌는데 또 만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아마도 꽤나 중증인 것 같았다.
마리딘은 자신을 보면서 슬쩍 표정이 풀린 에리한을 보며 그가 자신에게 숙이고 들어왔다는 걸 확신했다. 역시 자신을 거역할 리 없는 것이다.
에리한을 마주 보고 웃어준 왕비가 온화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이제 왕자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크마엔에서 바로 어제 돌아와서 피곤하긴 하겠지만, 당장 준비해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뇨?”
“위나 자하만양과의 결혼 말입니다. 우선 예복부터 맞추도록 하지요.”
왕비의 말에 에리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늘 위에 있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마마마.”
“네, 말씀해 보세요.”
“저는 위나 자하만 양과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전에도 분명히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왕비 역시 지독하게 고집을 부리는 아들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소리오닌은 이미 사브만의 왕자와 혼인을 할 예정이라고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크마엔에 가 있는 동안 생각이 제대로 돌아온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그 초크센의 공녀를 붙잡고 있었습니까?”
점점 커지려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왕비가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에리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원하셨던 소리오닌 님과 사브만 왕자와의 결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어마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브만 왕자와 결혼이 무산되었다니? 그걸 왕자가 어찌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