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아, 아니 저 여자가!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바임의 이마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어디서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왕자님의 맨몸을 쳐다보는 거야!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구 주무르고 있잖아?!
바임은 소리오닌의 기가 막힌 행동에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그녀를 불경죄로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부들거리는 손으로 창틀만 꽉 잡은 채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바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걸 전혀 모르는 소리오닌은 최대한 성의를 다해서 에리한의 근육을 만져주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근육이 단단해서 조금만 조심하면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 같았다.
“흐음, 그래도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다행히 근육에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아. 네. 운동은 매일 합니다.”
똑 부러질 거 같은 손목으로 생각보다 힘 있게 누르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에리한이 대답했다.
음, 역시. 이 정도면 꾸준히 하는 운동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몸이지. 어,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이름도 모르네?
“그렇구나.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네?”
“저는 소리오닌이라고 합니다. 두 번이나 만났는데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요.”
“아, 저는 에리한입니다.”
에리한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아차 싶었다. 왕자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혼자 왔는데, 멍청하게 스스로 왕자라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만나서 반가워요. 에리한 님.”
“……그게 끝입니까?”
“네……?”
하지만 예상 외로 소리오닌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난 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들켰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놀라지 않는 듯한 반응에 오히려 에리한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 이름이 멋있네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에리한은 아예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이 나라의 왕자인데. 내가 그렇게 인지도가 없었나……?
분명히 소리오닌이 자신이 왕자인 줄 몰랐으면 했는데, 막상 자신을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의 그녀를 보자 실망해 버렸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걸 느낀 소리오닌이 대체 뭐라고 더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름이 멋있는 줄도 모르겠는데.
겨우 쥐어짜내서 칭찬해 줬더니만 그는 아직도 뭔가가 맘에 안 드는지 뚱한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다.
“흠……. 그럼 에리한 님은 여기서 사는 건가요? 아니면 숲 근처에서 사는데 저를 찾아 오신건가요?”
이름에 대한 대화를 벗어나고자 소리오닌이 급하게 질문을 바꿔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정말 자신이 왕자인 걸 모르는구나, 깨달은 에리한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와아! 그럼 병사? 그런 건가요?”
그의 대답에 소리오닌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더니 매일 운동하는 걸 보니 병사인 거냐고 물었다.
에리한은 이제 정말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하는 걸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병사는 아니고…….”
운동을 많이 하는 거 보니까 분명히 검을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
이 세계의 직업을 들어봤자 자신은 잘 모를 게 분명해 별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한 소리오닌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이제 옷 입으셔도 돼요. 그리고 가끔 오실 수 있으면 와서 치료 좀 받고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감사 인사를 한 에리한이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절제된 동작으로 우아하게 옷을 입는 에리한을 지켜보던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우와, 옷 갈아입는 것뿐인데도 완전 광고 모델 같네. 자주 왔으면 좋겠다. 눈호강 좀 하게…….
속으로는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소리오닌은 집을 나서고 있는 에리한을 향해 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마시고요.”
“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레이디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걸 본 적 없는 에리한이 마지막까지 독특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마당을 벗어났다.
에리한의 방문에 짧게나마 가득 찼던 집이 다시 휑해졌다.
식탁에 놓인 두 개의 컵을 내려다보던 소리오닌이 천천히 의자에 앉아 노을이 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
“왕자님, 그 여자는 너무 무례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상종도 하지 마세요. 초크센에서 잡혀 온 주제에 감히 왕자님의 몸을 더듬다니……!”
바임은 소리오닌의 집을 나선 에리한의 뒤를 졸졸 쫓으며 그녀의 뒷담화를 하고 있었다.
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에리한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바임을 돌아봤다.
“바임.”
“네?”
“내가 그렇게 인지도가 없나?”
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바론의 왕자인 그가 인지도가 없으면 대체 누가 인지도가 있다는 건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은 말에 바임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의 침묵을 오해한 에리한이 말했다.
“흠, 그동안 내가 너무 우물 안의 개구리였군.”
“아, 아닙니다! 왕자님이 인지도가 없다뇨.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론뿐만 아니라 초크센, 사브만, 하논을 통틀어 제일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분이십니다!”
펄쩍 뛰며 부정하는 바임을 본 에리한은 다시 의문에 빠졌다.
근데 왜 그녀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걸까? 공녀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말투도, 행동도, 하다못해 음식 취향조차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도 여전히 재미있는 사람인 건 확실하지만.
“근데 왕자님. 그 여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응?”
뜬금없는 바임의 물음에 무슨 뜻이냐는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봤다.
“아니, 초크센에서 온 볼모이지 않습니까. 왕자님이 관리해야 할 일들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그동안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
거짓말. 그냥 까먹고 있었으면서. 눈 하나 깜빡 안하고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주군을 본 바임은 속으로 삐죽거렸다.
“그러면 이제 왕성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아니. 당분간은 지켜보려고.”
꽤나 마음에 들어 해서 당장 불러들일 줄 알았는데. 에리한은 예상 외로 지금 이 상황에 변화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답을 들은 바임이 의문을 담은 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에리한은 딱히 이유까지 설명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냥…… 거기서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소리오닌도 나쁘지 않아서랄까. 설명하기도 귀찮을 만큼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
똑똑.
누군가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리오닌이 얼른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어느새 일주일에 몇 번을 오게 된 에리한이 서 있었다.
오늘은 운동을 하다 온 건지 좀 더 편한 옷을 입은 그는 여전히 밝은 금발이 잘 어울리는 멋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그는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야옹이와, 아플 때만 오는 마을 주민들에 비해 꽤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단골 환자였다.
이제는 환자라고 하기에는 뭐할 만큼 크게 아프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가 그를 기다리는 이유가 사실 하나 더 있었다.
“여기.”
“와아! 진짜 예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녀의 집을 찾을 때마다 뭔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달한 쿠키. 그 다음에는 예쁜 화병. 하나둘씩 그녀에게 치료비라며 주던 물건들은 이제 소리오닌의 집 구석구석까지 채우고 있었다.
에리한이 그녀에게 예쁜 찻잔세트를 건넸다. 흰 바탕에 붉은 장미가 군데군데 그려져 있고 금빛 테두리가 찻잔을 둘러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 찻잔 세트는 바론에서 제일 가는 장인이 몇 달에 거쳐 만든 찻잔이었다.
여전히 감색 원피스에 머리를 내려 묶은 수수한 모습의 그녀는 자신이 준 찻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기뻐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져다주는 물건을 부담스러워 거절하던 소리오닌이었지만 별 거 아니라는 그의 설득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그래, 여기에도 천원샵 같은 곳이 있겠지.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비싼 걸 사오는 건 아닐 거야.
그가 주는 치료비를 자신이 편할 대로 합리화시킨 소리오닌은 이제는 은근히 뭘 가져올까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가져온 컵에 차를 우리기로 했다. 소리오닌이 찬장에서 전에 에리한이 줬던 찻잎을 꺼냈다. 처음 그에게 대접했던 말린 꽃에 비하면 몇 배는 맛있는 찻잎이었다.
“여기 차. 그리고 찻잔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티타임도 더 즐거워질 거 같아요!”
“별 거 아닌데…… 좋아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예의바른 그의 말에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보던 소리오닌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또 다치셨어요? 아니, 올 때마다 하나씩 상처가 늘어서 오시네요?”
“아, 이건…….”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은 에리한이 빨갛게 부어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자신을 안쓰럽게 보는 것이 분명한 그녀의 눈빛에 그는 자꾸 올라가려는 입술을 꼭 깨물고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저 눈빛이 좋았다. 상처를 달고 오는 자신을 볼 때, 마치 비오는 날 길가에 버려진 동물을 보는 듯해서. 그녀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게 꽤나 즐거운 요즘.
에리한은 일부러 눈에 띄는 곳만 다쳐서 그녀의 집으로 오고는 했다.
그런 그의 시커먼 속을 모르는 소리오닌은 에리한이 올 때마다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주었다. 에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길에 점점 더 중독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