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00)

008.

“흠. 아드님은 오늘도 안 계시는 건가?”

주인 없이 텅 비어 있는 집무실을 본 왕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시녀들을 보며 물었다. 

요즘 왕자가 자꾸 밖으로 나간다는 소문이 나서 자세히 얘기 좀 하려 왔더니 어제 오늘 모두 허탕이다. 

그렇다고 그가 집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못 한 건 밤을 새서라도 완벽히 해 놓긴 하는데. 도대체 이 시간에는 어딜 가는 거냐는 말이다.

“그, 그게 저희에게도 절대 말씀을 안 해 주셔서……. 죄송합니다!”

담당 시녀는 왕비의 싸늘한 눈초리에 고개가 땅에 닿을 만큼 몇 번이나 숙여서 죄송하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주군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아들의 성격으로는 정말 한마디도 안 하고 나갔을 가능성이 커 왕비는 별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휴우…….”

왕비가 다시 본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시녀들은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될 만큼 작아져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은 시녀 중 한 명이 이마를 한 번 닦은 뒤 얘기했다. 언제 봐도 무서운 눈빛이야.

“아니, 대체 왕자님은 어디를 가시는 거야?”

“뭐야, 너 소문 못 들었어?”

“응?”

집무실의 문을 닫으며 투덜거리는 동료를 본 여자는 그녀의 옆으로 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왕자님, 여자 생겼다는데……?”

“뭐?”

여자의 얘기에 잠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던 시녀는 잠시 뒤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핫, 말도 안 돼! 에리한 왕자님이? 바론의 온갖 미녀들과도 이제까지 소문 한 번 없으셨던 거 몰라? 오죽하면 바임 님이랑 그런 사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었잖아. 기억 안 나?”

“아냐, 이번에는 진짜라니까? 외부에서 공주님이나 왕비님 선물로 들어 온 것들도 챙겨서 가시잖아!”

“……진짜?”

“지이이인짜!”

살아오면서 들었던 말 중 제일 믿기지 않는 얘기에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린 시녀는 평소 궁에서 봐 왔던 에리한의 모습을 떠올렸다. 

딱히 나르시시즘은 아니지만 자신보다 잘난 사람 없다는 듯한 태도로 누가 옆에서 뭘 하든 관심도 없던 사람인데.

그런 왕자님한테 여자가 생겼다고? 과연 얼마나 예쁜 여자이기에……?

“그럼 한 달 뒤에 열리는 무도회에 같이 오시려나? 원래는 그 무도회에서 왕자비를 뽑는다고 했었잖아. 자하만 가문에서 그 무도회만 기다리면서 아주 이를 갈고 있지 않았어? 둘째 딸 왕자비로 만든다고.”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근데 자하만 가문에서 왕자님이 다른 여자랑 엮이는 걸 보고만 있을 거 같지는 않지?”

“응, 응!”

어느새 궁을 둘러싼 온갖 가십 거리로 수다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녀들이었다.

그녀들 뒤에 그 자하만 가문의 수장인 백작이 서 있는 줄도 모르고.

***

요즘 왕자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는 소문의 여자, 소리오닌은 집 앞 텃밭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금발의 미남 또한 한참 잡초 뽑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에리한 님,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소리오닌은 그의 하얀 얼굴이 혹시나 햇빛에 타 버리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됐다.

거기다 어째서 잡초와 채소를 구분 못하는 건지 닥치는 대로 뽑는 것도 맘에 안 들고……. 내가 두 번 일해야 하잖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한은 난생처음 하는 텃밭 가꾸기에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의외로 내가 농부 체질인가?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힐끗 쳐다보면서 그녀보다 한 뿌리라도 더 많이 뽑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뮤우.”

소리오닌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에리한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울타리 너머에서 야옹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다른 친구랑 노느라 안 왔는지 꽤 오랜만에 보는 야옹이였다.

“야옹아!”

“뮤뮤!”

이제는 울타리 위에 올라와 있는 야옹이를 부르며 소리오닌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처음 듣는 이름을 부르며 웃는 그녀를 본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눈길을 따라 울타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리오닌에게 ‘야옹이’라고 불리는 동물을 보았다.

뭐야……. 사르그……? 어째서 이런 마을까지 내려온 거지? 거기다 붉은 눈의 사르그라면 왕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녀석인데…….

평소 깊은 숲이나, 협곡 같은 야생에서만 살아가는 사르그는 생김새가 예쁘고 반짝거려서 귀족이나 왕족이 특히 선호하는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격이 괴팍하고 친화적이지 못해서 웬만하면 사람 사는 동네에서는 흔한 노란 눈의 사르그조차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인데. 

그녀가 야옹이라 부르는 붉은 눈의 사르그는 에리한조차도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키우던 걸 봤던 게 전부였다.

에리한은 직접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멍하니 둘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야옹아,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다른 친구들이랑 노느라 나 잊어버렸어?”

“먀무.”

“흠. 그래, 미안하다는 거지? 알았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사르그를 올려놓은 그녀는 마치 예전부터 키워왔던 애완동물을 데리고 노는 것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야옹이라 불린 사르그도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면서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하……. 저 여자는 대체 언제까지 나를 놀래켤 작정이지?

“아, 에리한 님! 여기 우리 야옹이 좀 보실래요?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안 데려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예쁘지 않아요? 엄청 똑똑하기도 한데…….”

“네?”

무슨 소리인가, 인기가 없어서 안 데려간 게 아니고 온 숲을 뒤져도 찾지 못하니까 못 데려간 것이다!

소리오닌은 정말 야옹이의 주인이 없어서 안타까운 듯 환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녀의 어떻게 오해를 바로 잡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야옹이라 불리는 사르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

“뮤?”

에리한은 어렸을 때 봤던 할아버지의 사르그보다 훨씬 더 새빨간 눈을 가진 야옹이의 모습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본 야옹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찬 둘의 만남에 소리오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뭘 그렇게 낯을 가리고 그런대? 내외하는 남녀 사이도 아니고.

한참 아무 말도 없는 에리한을 보던 소리오닌이 답답한 마음에 야옹이를 번쩍 안아들어 그의 품으로 넘겨줬다.

부드러운 소리오닌의 품에서 딱딱한 근육으로 가득 차 있는 에리한의 품으로 넘어가자 야옹이는 맘에 안 든다는 듯 잔뜩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에리한 역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귀한 사르그를 턱하니 받아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야옹이의 엉덩이만 어정쩡하게 받쳐 들고 있었다. 

“둘 다 성격도 좋으면서 왜 이렇게 서로 부끄러워해요? 좀 친해져 봐요!”

“먀…….”

“흠…….”

오른손으로는 야옹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왼손으로는 에리한의 어깨를 톡톡 쳐 준 소리오닌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에리한과 야옹이는 알 수 있었다. 얘는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성격 좋은 녀석이 아니라는 걸…….

허나,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 앞에서 둘 다 본 성격을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라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했다.

소리오닌은 시간이 지나도 친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둘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온 야옹이에게는 따뜻한 우유와 전에 받았던 고기를 삶아서 줬다. 그 뒤에 자신을 식탁에 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리한의 앞에 앉았다. 

“저……. 야옹이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야옹이요? 그냥 어느 날 저 창문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저도 진짜 집은 어디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가까운데 살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왜 그러세요? 설마, 에리한 님도 이제 야옹이한테 관심이 생긴 건가요?”

야옹이 얘기를 물어보자 눈이 반짝해져서 말하는 소리오닌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마도 사르그 스스로 그녀를 찾아 온 거 같은데, 이런 게 가능한 일인 건가……?

그녀가 준 고기를 찹찹,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고 있는 야옹이를 본 에리한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야옹이는…… 소리오닌 님과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소리오닌 님.”

“네?”

“혹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야옹이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주제가 자신에 대한 걸로 넘어오자 소리오닌은 고개를 갸웃하며 에리한을 쳐다봤다.

“아시다시피 저는 바론에 붙잡혀 온 몸이라, 제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갈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여기서 지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는지, 그의 물음에 그녀는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혹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해도요?”

“저 근데 나가서 잘 살 자신이 없는데……. 제가 바론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혹시 저 여기서 쫓겨나는 건가요?”

전에 왕궁에서 일한다고 했으니까 포로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나 보다!

평생 이 작은 집에서 살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무일푼으로 거리에 내쫓기는 건가? 안 되는데? 

자신의 말에 소리오닌이 급격히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이 집에서 첫 만남 이후로 그녀가 이렇게 동요하는 건 처음 보는 거라 나름 신선했지만 제대로 대답을 안 하면 왠지 크게 오해할 것 같았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음. 윗분 중에 알고 있는 분이 있는데, 소리오닌 님 얘기를 했더니 무도회에 한 번 초대하고 싶다고 하셔서…….”

“무도회요?”

와우, 무도회라니. 한국에서 클럽 한 번 가본 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이 세계에 떨어져서야 스텝을 밟으러 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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