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윽!”
그의 입에서 아까보다 더 큰 비명이 나왔다.
그녀의 행동에 화를 내려던 그가 눈앞에서 씨익, 웃고 있는 희은의 얼굴을 보고는 쯧,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관절을 심하게 돌리지만 않으면 어깨 안 아프실 거예요.”
오늘도 환자 한 명을 고쳤다는 뿌듯함에 저절로 웃음이 난 희은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그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 괜한 오기가 생긴 희은이 그의 어깨를 잡고 들어올렸다.
예상과 다르게 큰 움직임에도 어깨의 통증이 훨씬 덜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어떻게 한 겁니까?”
“이게 다 제 능력입니다!”
자신의 두 손으로 반짝이는 모션을 취한 희은이 키득거렸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에 심심할 때 학회에 나가 배워 둔 정형도수 덕분이지만! 기술을 행하는 건 자신이니, 내 능력인 거지, 뭐,
“호오. 손에 무언가가 흐르는 건가?”
“네?”
희은은 자신의 농담을 세상 진지한 얼굴로 받아치는 눈앞의 남자 때문에 괜히 민망해졌다. 농담이 안 통하네…….
이러다 그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그녀의 손에 뭔가가 흐르는 게 아니라 치료의 일종이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에리한 님, 에리한 님!”
누군가를 찾는 커다란 목소리가 숲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기다란 몸을 단숨에 일으켰다.
“아, 잠시 일행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길을 잃은 거면 왕국까지 같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그래주실래요? 감사합니다!”
희은은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남자의 말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여기가 어딘지, 지신이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선 이 숲이라도 벗어나 사람 사는 곳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희은이 이번에는 자신이 아까 남자가 기대어 있던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묘한 능력을 가진 그녀가 얌전히 앉아서 자신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 확인한 에리한이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신이 어깨를 맞춰준 뒤 가뿐한 몸놀림을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본 희은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떠올랐다.
음, 근데 이제 어쩐다? 아무래도 자신은 대한민국이 아닌 곳으로 차원 이동? 뭐 이런 걸 한 것 같은데…….
평소 판타지 소설 좀 많이 읽어둘 걸. 아니면 역시 엄청 리얼한 꿈이려나?
불편하기만 한 자신의 옷차림과 가느다랗고 하얀 손목을 내려다 본 희은이 푸욱, 한숨을 내뱉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네! 이게 아주 나를 물 먹이려고 작정했지?”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가 희은의 팔을 강하게 낚아챘다. 그러더니 그녀를 향해 커다랗게 고함을 내뱉기 시작했다.
“끌려가는 주제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미쳤어? 얼른 이리로 오라고!”
“네……?”
우악스러운 손길에 인상을 찌푸렸던 희은이 놀란 얼굴로 대꾸하자, 그녀의 얼굴을 보고 코웃음을 친 여자가 더 센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너 자꾸 이러면 진짜 맞는 수가 있다. 입 다물고 따라와!”
웬만한 장정에 맞먹는 여자의 힘에 질질 끌려간 희은은 나무로 된 철장 같은 곳에 떠밀려 들어갔다. 아무 준비도 없이 나동그라진 희은이 마차 바닥에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뭔가 적응할 시간이라도 줘야지!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멍이 들 게 뻔할 만큼 묵직하게 울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던 그녀의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네?”
커다란 눈망울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한 어린 여자아이가 희은의 손을 꼭 잡고 울먹였다.
“소리오닌 님, 아까 이렇게 사느니 죽겠다고 뛰쳐나가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소리오닌 님, 이제 그냥 조용히 가요. 네?”
“아, 음…….”
희은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찌푸린 얼굴을 핀 여자아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바론으로 가면 제대로 대접은 못 받겠지만요.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디에요? 이렇게 하루아침에 저희 나라가 속국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지만……. 아마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겠죠? 하지만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니까, 우리 힘내요, 소리오닌 님!”
여자아이의 말을 유심히 듣던 희은의 머릿속이 재빨리 돌아갔다.
자신의 이름은 아마도 소리오닌. 바론이라는 나라의 속국이 되어서 끌려가는 중이고 무사히 그 나라에 도착하면…… 한평생 갇혀서 지내야 한다는 건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에 실려, 희은은 제발 이 상황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하던 에리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종인 바임을 만날 수 있었다.
하로곤의 갑작스런 등장에 서로 일행과 떨어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바임은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어깨를 좀 다치긴 했는데, 어떤 여인이 치료해 줬네.”
“그렇습니까? 근데 이런 깊은 숲에 여인이 들어 왔단 말입니까?”
평상시라면 자신들도 즐겨 찾지 않는 사냥터였다. 오늘은 날이 좋아 좀 더 깊이 들어왔더니, 역시나 하로곤의 습격을 받았다.
여인의 몸으로 무슨 용기가 나서 이 험한 숲을 돌아다닌 거지? 바임이 의아한 얼굴로 에리한을 돌아봤다.
그의 궁금증 가득한 눈빛에 에리한 역시 궁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생각나 서둘러 자신이 있었던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어?”
분명히 그 나무가 확실한데 기다리고 있겠다던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휑하니 비어 있는 나무를 쳐다보던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해졌다.
“왕자님. 그 여인은 어디로 간 건가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흠. 좀 기다려 볼까?”
주변을 둘러보던 에리한은 혹시 그녀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를 기다려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에리한을 바임이 만류했다.
“왕자님, 곧 해가 집니다! 그렇게 되면 또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얼른 일행을 찾아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에리한이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크르르르. 뒤에서 들리는 섬뜩한 울음소리.
다시 나타난 하로곤의 그림자에 그들은 우선 하로곤을 피해 숲 바깥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제길……!”
도중에 만난 일행과 겨우 하로곤을 쓰러뜨린 뒤 정신없이 다시 숲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비어 있는 나무 밑둥을 보고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에리한을 보던 바임이 물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이리 신경을 쓰십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생긴 것에 특별히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어. 하아……. 하지만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바임의 말에 답을 하는 에리한의 눈에는 미안함과 절망감이 가득했다. 자신의 어깨를 고쳐준 뒤 크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에리한의 절박한 얼굴을 처음 보는 바임의 눈에도 난감함이 스쳐지나갔다.
그 뒤로 에리한은 업무가 없을 때마다 그녀를 만났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숲 속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
예상대로 희은이 떨어진 세계는 16세기 유럽의 중세시대와 상당히 비슷했다.
처음 숲에 떨어졌을 때부터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더니만. 속으로 투덜거리던 희은은 순간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급하게 입을 막았다.
아까부터 심하게 위아래로 마차가 덜컹거리는데, 꼭 파도 위를 떠다니는 배에 탄 것 같았다.
“소리오닌 님, 괜찮으세요?”
마차에 탈 때부터 계속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준 여자아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봤네.
“저기…….”
“네? 역시 어디가 안 좋으신 거죠?! 이 일을 어떻게 한담!”
“아, 아니! 정말 미안한데요……. 이름이 어떻게…….”
희은이 미안한 눈빛이 가득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끌려오는 내내 옆에서 계속 있어준 아이였다.
혹시 이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고 화내는 건 아닐까? 하지만 걱정이 가득했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여자아이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소리오닌 님이 제 이름을 물어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영광입니다! 저는 세리라고 해요.”
“아, 네. 세리.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희은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웃으면서 불러주자, 그녀의 말을 들은 아이는 오히려 얼굴이 빨개지면서 울먹임이 더욱 심해졌다.
“저…… 저한테까지 존대를 쓰시다뇨! 아무리 우리 초크센이 속국이 되었다지만, 소리오닌 님은 여전히 제 주인이십니다. 평소처럼 하셔도 돼요!”
대체 평소에 애한테 어떻게 대했길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무릎으로 쓰러져 펑펑 우는 세리를 겨우 달래서 앉혔다.
자신이 들어와 있는 이 여자의 과거가 살짝 수상쩍어 졌지만 그녀는 세리가 또 울어 버릴까 봐 고개를 끄덕이며 무조건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마차 안에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세리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닥만 쳐다볼 뿐,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을 힐끔거리던 두 사람도 어느새 대화를 멈춘 채 하염없이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