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00)

공녀님 만져주세요

001.

Chapter 1.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여름날, 바론 왕국의 시녀 한 명이 성의 뒤쪽 공터에 빨래를 널면서 슬쩍 얘기를 시작했다. 

“저기, 소문 들었어?”

“응? 무슨 소문?”

“이번 전쟁에서 진 초크센에서 보낸 공녀 알지?”

“아, 들었어! 남쪽에 있는 초크센 국 맞지? 그 공녀가 어쨌는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동료가 나타나자, 시녀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동료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 여자가 만지기만 하면…… 아픈 곳이 씻은 듯이 낫는대!”

“뭐어?”

자신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하는 말에 깜짝 놀란 동료는 주위 사람들이 다 돌아볼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행동에 귓속말을 했던 당사자가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이미 이목이 집중된 후였다.

“거기. 일 안 하고 뭐하는 거지?”

설상가상 그녀들의 수상한 행동은 때마침 빨래터를 지나가던 왕자의 최측근, 바임의 눈에 딱 걸려 버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눈에 굳어 버린 그녀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지금 일은 안 하고 농땡이 피우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바임의 까칠한 목소리에 시녀들은 어쩔 수 없이 하던 얘기를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신기한 소문이 있다 하여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신기한 소문이라……? 어떤 소문인가?”

실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그녀들은 의외로 궁금함을 내비치는 바임의 말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슨 소문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질문이 나왔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시녀가 눈을 꾹 감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초크센국에서 온 공녀가 만지기만 하면 모든 환자들이 다 낫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다 낫는다고? 만지기만 하면?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지?”

“저도 시장에 나갔다가 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바임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는 그녀들의 예상과 달리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한 바임은 별말 없이 뒤 쪽 공터를 벗어났다. 

시녀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간 바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코너를 돌아 성의 꼭대기 층에 다다랐을 때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는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어젖혔다. 

“왕자님!”

“아, 바임.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들어오는 건가?”

에리한은 평소와 같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공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는 바임을 본 그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도 왕자의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은 눈부시게 빛났다. 에리한의 금빛 머리칼을 멍하니 쳐다보던 바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갔다.

“왕자님, 찾은 것 같습니다.”

“음? 무엇을 찾아?”

“왜, 전에 숲에서 왕자님을 구해 준 여인 있지 않습니까?”

바임이 평소와 달리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말에 에리한은 서류로 향했던 눈을 들었다. 바임을 쳐다보는 왕자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 찾았단 말인가?”

“아직…… 100% 확실하지는 않지만, 시녀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다 낫는다는 소문의 여자가 있다고…….”

“뭐? 아니, 어떻게 이곳에서 그런 소문이……?”

에리한의 혼잣말을 듣던 바임이 살짝 곤란한 듯한 얼굴로 얘기를 마저 이어갔다.

“그게…… 그 여인이 이번 초크센 왕국에서 잡혀 온 공녀라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 소문이 퍼진 것 같습니다.”

“……이런…….”

바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왕자의 수려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급하게 자리를 뜨는 그의 주군을 따라 바임 또한 집무실을 벗어났다.

***

“소리오닌 님! 여기, 이 아이 좀 봐주세요!”

소리오닌이 막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텃밭에서 풀 몇 뿌리를 뽑았을 때였다. 세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고 헐레벌떡 뛰어온 여인이 그녀를 향해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 여인의 말에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은 소리오닌은 우선 아이를 받아들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안기면서도 자신의 팔꿈치를 잡으며 훌쩍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제는 지쳐서 눈가만 벌게진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소리오닌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 아플 텐데. 괜찮아?”

“흐…… 으응……. 응,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 말한 아이를 다시 아이의 엄마에게 넘겼다.

아이를 잡아 달라 말한 소리오닌이 순간 아이의 팔을 잡고 살짝 비틀었다. 

“으앙!”

“어…… 어어, 한스! 괜찮아?”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아이가 다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아들을 본 엄마도 놀란 눈으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아이 엄마의 의심스러운 눈빛에도 평온한 얼굴을 한 그녀는 아직 눈물이 퐁퐁 솟고 있는 아이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름이…… 한스라고 했지? 이제 팔 한 번 움직여 볼까?”

그녀의 말에 울면서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천천히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어? 엄마, 저 이제 안 아파요!”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소리를 지르던 아까와는 달리, 아무리 구부려도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팔을 보며 아이가 순식간에 눈물을 그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던 여인도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소리오닌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세상에, 정말 소문이 진짜였어!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아이에게 조심하라고 해주세요.”

아이 엄마의 계속되는 감사 인사에 당황한 그녀가 얼른 모자의 등을 떠밀어 마당에서 내보냈다.

자꾸 미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아이 엄마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낸 소리오닌이 아까 뽑아 뒀던 풀뿌리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속국에서 왔다지만, 도저히 공녀의 거처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집이었다.

부엌이 딸린 거실과 그 맞은편에 있는 한 칸짜리 방 하나. 다섯 발걸음이면 끝나는 이 공간이 그녀에게 허락 된 유일한 곳이었다. 

그녀는 풀을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넣어 놓은 뒤 식탁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나.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물리치료사였던 김희은이었는데…….

***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퇴근길이었다. 다만 핸드폰을 보느라 옆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했을 뿐. 

눈이 부셔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이 까맣게 변했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귀를 따갑게 울리는 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뭐…… 뭐야, 대체…….”

분명히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이 커다랗고 빽빽한 나무들은 다 뭐란 말인가! 게다가 병원 침대가 아니고 풀밭에 누워 있다니?

희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게 때렸다. 

“아프잖아?”

정말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통증도 리얼하게 느껴지는 꿈인 건지. 도저히 이 상황을 파악 못하고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쥐고 있을 때였다.

“윽!”

어디선가 한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넓은 공간에 자신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희은은 발끝이 뭔가에 걸려 비틀거리며 넘어져 버렸다. 

응? 이게 뭐야, 이 치렁거리는 드레스는?! 걸어 다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처럼 화려하기만 한 드레스를 내려다 본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갔다. 

잠깐, 나 지금 설마……?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을 내뱉은 희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소리가 났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예상대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남자가 커다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하얀 얼굴로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과 높게 쭉 뻗어 있는 코, 진한 붉은 빛의 입술까지…….

평소 자신과 같은 동그란 얼굴만 보던 희은에게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 외의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희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봐! 자신과 눈이 딱 마주친 그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져 가는 걸 본 희은은 미안한 마음에 얼른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 빤히 쳐다봐서 죄송합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본 게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근데, 여기에는 저희 둘뿐인가요?”

“저도…… 하로곤의 습격을 받고 피하는 중에 일행과 떨어진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로곤? 습격?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의 답에 고개를 갸웃한 희은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남자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저…… 혹시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무래도 직업이 물리치료사이다 보니 평소에도 어딘가 아픈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런 오지랖을 부려야 직성이 풀리곤 했었다.

희은의 걱정스러운 말에 아까와 달리 그녀를 향한 경계가 살짝 느슨해진 남자가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까 말에서 떨어질 때 다친 것 같은데…….”

그의 대답을 들은 희은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한 팔로 들어 올린 채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옆으로 오는 그녀를 보고 슬쩍 몸을 뒤로 물리던 남자가 순간 어깨를 잘못 건드렸는지 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 희은은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 아니. 무슨……?”

당황하여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하는 남자의 허벅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으로 꽉 누른 희은이 순간 남자의 어깨 관절을 비틀어 뚝, 소리가 나게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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