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귀가
“오늘도 표정이 차구만.”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말을 걸었다. 단정하지만 좀 우울한 미모의 청년은 남자를 향해 흘끗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눈이었다. 감정 따위는 가져보지도 못한 듯한 살인 기계의 검은 눈이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자 남자는 섬뜩함을 느꼈다.
청년, 라파엘 에반스는 유명했다. 물론 그 실력으로도 유명했지만 살인 기계로서 더 유명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고 알려진 살인 청부업자는 어느 귀한 집 아이로 태어나 길드에 버려졌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길드가 있는데 하필이면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검은 물’에 버려져서는 철저하게 살수로 교육받았다. 열네 살에 첫 살인을 하게 되었는데 덜덜 떠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단숨에 상대의 목을 꺾었다는 일화가 유명했다. 6년간의 ‘보은 기간’을 거쳐 남자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남자와 함께 살수 교육을 받았던 아이는 약 서른 명. 그중 처음 임무에 나가는 열네 살 전에 일곱 명이 죽었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열네 명이 죽었다. 즉 보은 기간이 끝나고 길드에서 해방돼 자유 계약이 가능한 몸이 되었을 때는 서른 명 중 스물한 명이 죽어 있었다. 그는 아홉 명 중 한 명이었다. 아홉 명 중 두 명은 애꾸눈이 되었고, 한 명은 외팔이가 되었다. 여섯 명 중 네 명은 큰 부상 끝에 되살아난 경우였다. 남은 두 명 중 한 명은 반복되는 살인 끝에 피에 환장한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라파엘 에반스였다.
라파엘 에반스는 확실히 특이했다. 검 수집광이긴 했지만 피에 미치진 않았으며, 임무 도중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고문을 당한 적도 수차례였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자신을 고문한 놈들에게 복수를 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바닥에서 라파엘 에반스를 무시하는 놈이 있냐면 그건 아니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의뢰인이 상대를 고통스럽게 죽여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그렇게 했다. 의뢰에 의해 자백을 받아내야 할 때도 그는 해냈다. 그는 장인이었다. 고문과 살인의 거장이었다. 라파엘은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가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서워했다. 그는 냉혹한 살인 기계였다. 손에 걸리면, 실수 따윈 없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올해 스물세 살이 되었다. 이 바닥에서는 아직 신입이라 할 수 있는데도 이미 라파엘은 유명 인사였다, 어떤 의뢰도 실패하지 않는 살인 기계. 심장이 두근두근 울리는 게 아니라 째깍째깍 울릴 것 같은 음울한 미청년은 이번에도 고난도의 의뢰를 끝내고 차가운 얼굴로 길드에 귀환했다.
“돈은?”
“결제 중. 조금만 기다려.”
라파엘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낡은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살인 기계와 함께 있는 것이 섬뜩하다고 느끼면서도 베테랑 중개인답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라파엘에게 “성문을 통과하는 데 고생하진 않았어?”라고 안부 인사를 건넸다. 라파엘이 “별로”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남자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라파엘은 흘끗 바라보았다. 길드 ‘검은 물’의 살인 청부 거래 중개자인 남자는 유들유들했다. 살인 청부업자들을 하도 많이 만나는 통에 자신같이 괴물이라 불리는 남자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는 강심장이었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유독 자신을 두려워했다. 그가 티를 낸 것은 아니지만 라파엘에게는 분명히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싫어한다. 두려워하든 불쾌해하든 어쨌거나 자신을 싫어한다. 피에 미쳤다는 놈들보다,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도는 놈들보다, 자신을 더 싫어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신기해서 라파엘은 “뭐가”라고 물었다.
“포르타미스 때문에 지금 성문 쪽이 음산하잖아?”
“포르타미스? 동대륙의 자살한 여신 말이야?”
라파엘이 묻자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고인돌 시대의 인간을 보는 것처럼 아연한 태도로 “포르타미스를 몰라?”라고 되물었다.
“동대륙의 자살한 여신이잖아. 학문신 티오안의 쌍둥이.”
“모르는구나……. 요즘 포르타미스, 라고 하면 그 자살 여신이 아니고 자살한 왕후 이야기라구.”
라파엘 에반스와 족히 10년은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보통 사람 같은 대화잖아, 라고 생각하며 중개인은 등을 보인 채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사실 왕후가 고생을 좀 하긴 했겠지. 왕은 세상이 다 아는 남색가잖아. 왕세자빈 시절에야 호랑이 마나님 같은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침도 했다는 소문인데, 어쨌거나 이제 왕은 왕세자가 아니라 왕이니까 태후도 차마 건드릴 수 없고, 지금은 누구랑 사귄다더라……? 뭐 여하간.”
중개인은 “왕후가 자살했고, 쇼어가는 분위기가 완전 개판인가 보던데. 사실 마리 트리지아 왕후가 어지간히 인기가 좋았어야 말이지. 왕을 제외하면 최고……”라고 말을 하다 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라파엘이 처음으로 그의 팔뚝을 잡아 강제로 돌린 것이다. 키가 작은 라파엘이 아래서부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누가 죽어?”
살기가 예사롭지 않아 중개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라파엘 에반스는 살인 기계이긴 해도 중개인에게 손찌검하는 놈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변모가 당장은 당황스러울 뿐이다.
“와, 왕후가.”
“마리 라 쇼어가 죽었단 말이야?”
“지, 지금은 마리 트리지아 이그나치오지만, 아―, 하긴. 왕후에서 왕비로 격하되었고 곧 폐비가 될 것 같으니까, 그래, 마리 라 쇼어가 맞긴, 으악. 아파!”
“마리 라 쇼어가 죽어? 폐비가 된다고?”
“모, 몰랐어? 자살했잖아, 자살. 열두 개의 죄 중 가장 위에 있는 거라고. 살인보다, 강간보다 위란 말이야, 자살은!”
정말 이 자식이 날 죽일 셈인가!
중개인은 라파엘의 검은 눈을 마주했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게 정말 죽일지도 모르겠다. 맙소사, 살인 기계긴 해도 애는 나름대로 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갑자기 중개인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혹시 죽어서 혼백이 된 건가 싶어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 문을 닫는 소리가 탁하게 울렸다.
어, 어라.
중개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라파엘이 지금 문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돈을 받지도 않고 무작정 나가버리다니 라파엘 에반스답지 않았다. 혹시 왕후의 팬이었나? 현재의 왕인 이그나치오 23세의 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리 트리지아 왕후도 열성적인 팬을 여럿 두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저 살인 기계였단 말이야?
뭔가 이상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중개인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파엘 에반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살인 기계가 드디어 고장 났나.
그는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속옷에 조금 지린 것 같았다.
당신밖에 없어.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날 구할 수 없단 말이야.
어떤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 아니, 그녀는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깝다. 운명의 붉은 천을 연상케 하는 새빨간 로브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그녀는 맨발로 달려와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을 움켜쥐는 순간에도 라파엘은 왠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타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분신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그녀에게 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라파엘은 그 감각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보드라웠고, 라파엘은 자신이 잃은 무언가를 그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수는 없어서, 라파엘은 그녀를 안아다 그녀가 타고 온 마차에 내려주었다. 거절의 뜻을 안 그녀가 울먹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미안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녀가 우는 순간 라파엘은 미안하다 말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그를 찾아온 순간, 그는 그녀가 뭘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마치 영혼이 속삭여 말하는 듯했다. 시선에서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안 돼,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날 구해줘야 해. 그렇잖아.
그녀가 울었다. 넋을 잃고 울어대는 그녀의 앞에서 라파엘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소녀가 그에게 매달렸다. 무아지경으로 매달리는 그녀를 뿌리치며 라파엘은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를 안심시킬 말을, 괜찮다는 말을. 그러나 살인 기계의 굳은 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
그녀가 가장 원치 않을 말을 하면서 라파엘은 수도로 그녀의 목을 내리쳤다.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쓰러지자마자 동행한 유모가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라파엘은 마차 문을 닫았다.
‘무조건 직진으로 달려. 건물 같은 게 보여도 절대 멈추지 말고, 2번가 경찰청이 나올 때까지 무조건 달려. 알았어?’
마부에게 지시하자 마부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마차가 사라지기 전에 등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면 영혼의 분신 같은 여자의 청을 들어주고 싶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였다. 혼자로 살다 혼자가 되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세상에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여자였다. 단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느낌을 주었다. 신전에 들어가 왈칵 울어버렸다는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그 안도감을.
라파엘은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리고 결혼을 앞두어 예민해진 신부일 뿐이다. 결혼을 하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어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기를, 라파엘은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녀의 이름이 마리 라 쇼어였다.
“왕후의 팬인 줄은 몰랐는걸.”
가끔 거래하는 장물아비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지만 라파엘은 무시했다.
“이게 다야?”
라파엘의 말에 장물아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유명한 살인 기계의 몸매를 훑고 있었다. 사람들은 살인 기계 라파엘을 무서워한 나머지 그의 몸에도 얼굴에도 시선을 주지 않지만 장물아비는 살인 기계는 무서워도 그 몸만은 취향이라 늘 이렇게 눈으로 탐하곤 했다. 살인 기계, 아니, 자꾸 이렇게 말하면 정떨어지니까 ‘라파엘’의 몸은 그의 직업과는 참으로 멀었다. 일단 라파엘 에반스는 웬만한 여자만큼이나 키가 작았다. 그리고 아주 말랐는데 그냥 봐서는 근육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라파엘 에반스가 괴력의 남자라는 건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지만 라파엘은 그 괴력을 과시한 적이 없었고, 장물아비의 눈에는 그가 한 명의 아름답고 내성적인 미소년으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미소년은 작고 왜소해서 여장을 시켜도 어울릴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라파엘이 장물아비가 내민 물건들을 살폈다. 왕후가 죽고 나서 문 플레이스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왕후가 자살하자 왕후의 궁, 문 플레이스는 폐궁이 되었고 시녀들은 재빨리 왕후의 개인 물품들을 팔아 사욕을 챙겼다. 그중 라파엘의 시선이 닿은 것은 작은 깃털 펜이었다.
“이건…….”
“과연 라파엘이네. 바로 알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장물아비가 쓴웃음을 삼켰다. 라파엘이 능숙하게 펜대를 보통과는 반대로 돌리고 있었다. 몇 가지 장치를 능숙하게 움직이자 깃털 펜은 깃털이 달린 열쇠가 되었다. 귀족 사회에서 흔히 쓰는 수법인데, 대부분은 머리핀이나 담뱃대를 활용한다. 펜, 그것도 이토록 얇은 깃털 펜으로 위장하는 데는 보통 장인의 솜씨가 아니었을 것이다.
“뭘 숨기기 위해 이런 고급 비밀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까.”
장물아비가 라파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에 이 열쇠가 맞는 자물쇠가 있을까.”
“어디 있는지 알아?”
“문 플레이스겠지. 거기서 나왔거든.”
라파엘이 입을 다문 채 깃털 펜을 노려보자 장물아비가 물었다.
“왜 왕후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야? 관심을 보이던 팬들도 지금은 다 돌아서는 판에.”
혹시 왕후의 숨겨진 유산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장물아비는 물었다. 물론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왕은 왕후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왕후가 입궁할 당시 가지고 간 모든 재산은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외부에서 들어오거나 외부로 나간 게 있을 테지만 ‘유산’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것이 들어오거나 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눈앞의 깃털 펜만 해도 상아로 만들어진 고가품인 건 사실이나 굉장한 고가라고 말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왕후의 시체는 쇼어가에서 회수했나?”
장물아비는 아무 말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슬쩍 라파엘의 몸에 자신의 몸을 갖다 대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찌릿한 감각이 올라와 그는 야비하게 웃었다. 라파엘의 묻는 목소리는 건조할지언정 그 숨결은 향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댄?”
라파엘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붙인 채 황홀경에 빠지려던 장물아비, 댄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아, 쇼어가. 쇼어가에서도 회수 못 했지. 자살한 시체라고. 여신조차 용서받지 못한 가장 크고 무거운 죄. 그 죄가 전염될까 봐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시체를 회수하려 하겠어? 게다가 벌써 한 달이 넘었어. 시체는 썩고 있고, 회수해 올 사람은 더욱 찾지 못하고 있고, 아마 가면 갈수록 심해질 거야. 결국은 톱으로 잘게 잘라 삽으로 떠 옮기지 않을까 싶은데.”
자살한 시체를 옮기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왕후였던 시체에게 할 짓은 결코 아니었다. 라파엘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왕후의 물건이 들어오면 팔기 전에 나한테 한 번만 보여줘. 그럴 수 있지?”
라파엘이 묻자 댄이 “이거, 빚으로 달아둔다?”라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슬쩍슬쩍 라파엘의 몸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라파엘이 혹시나 화를 내며 자신의 목을 꺾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라파엘은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 조금씩 선을 넘으면서 이 단정하고 음울한 미청년이 혹시나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그에게, 라파엘이 물었다.
“왕궁에 들어가려면 뭐가 필요하지?”
“아마도, 소개서겠지.”
“소개서라. 누구의?”
댄이 은근슬쩍 허리를 감아도 라파엘은 그저 대답만 기다리는 듯했다.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볼까 말까. 이게 요즘 댄의 고민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살인 기계의 악명은 그의 손을 소심하게 만들었고, 그는 결국 라파엘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뭐, 왕궁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의 소개서지. 근위대나 귀족이나 왕족의 소개서.”
근위대나 귀족이나 왕족의 소개서.
라파엘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근위대나 귀족이나 왕족의…… 소개서. 그 순간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고, 라파엘은 깃털 펜을 소매에 넣었다.
당신밖에 없어.
마리의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라파엘이 나가려 하자 댄이 그를 붙잡았다.
“이건 곤란해, 라파엘. 그래도 돈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돈? 아……, 돈 받는 걸 깜빡했군.”
품을 뒤지다 길드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왔다는 걸 깨달은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라파엘은 잠시 고민했다. 깃털 펜을 여기에 두고 싶진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이 몸을 돌려 댄을 올려다보았다.
“달아놔.”
“장물에 외상 거래가 어디 있어. 라파엘, 몸으로라도 지불하든가. 아니면 내려놔.”
댄이 싱글싱글 웃었고, 라파엘은 그런 그를 가만히 두고 보았다. 몸으로 지불하라는 걸 사람을 죽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돈이 걸려 있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깃털 펜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라니, 댄이 어지간히 간이 부은 모양이다. 자신이 상당히 훌륭한 손님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라파엘은 짜증이 났다.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조금은 손봐줄까.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멀리서 기척을 죽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몸으로 지불하면…… 라파엘.”
댄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그러나 그가 어쭙잖게 내미는 성적인 어필을 알아채지 못한 채 라파엘은 문밖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여섯…… 열. 열하나. 열 명에서 열한 명 정도인 듯하다. 그보다 세 명 정도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꽤 많은 사람이고, 이런 환한 낮에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건 당당한 자들의 급습이었다. 어둠에 몸을 숨겨야 하는 자들은 이렇게 몰려다니지도 않고 낮에 습격하는 일도 없다.
라파엘은 다시 댄을 올려다보았다. 댄 로우. 검은 물의 장물아비였다. 검은 물에서 습득한 장물들을 팔아넘기는 남자를 라파엘은 벌써 4년이나 봐왔다. 그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그가 죽는 걸 관망하고 떠나버리면 검은 물에서 꽤 시끄러울 것 같았다.
“좋아, 몸으로 지불하지.”
순간 댄은 멍청한 얼굴로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뭐? 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남자였고, 댄의 귀는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라파엘은 제대로 말한 것이 확실할 것이다.
그는 라파엘의 몸을 한 번 훑었다. 노골적으로 훑으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라파엘 에반스는 살인 기계지만 아름다웠다. 댄이 좋아하는 소년들보다 더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댄의 목젖이 꿀꺽꿀꺽 움직이고 바지춤이 부풀었지만 라파엘은 의식하지 못했다.
라파엘 하고 댄이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라파엘이 그 팔을 잡아 댄을 어깨 위로 매달고 쏜살같이 2층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라, 라파엘?!”
“닥쳐, 댄.”
너, 너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댄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파엘은 2층으로 달려가 댄의 침실 문을 열고 있었다. 댄을 침대에 내던지자 댄이 “난 박히는 건 별로……”라고 수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파엘이 그런 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창문을 올렸다.
“댄, 경찰이 급습할 거야. 이리 와.”
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뭐? 안 돼, 장부가 밑에 있어!”
“장부는 검은 물에서 처리할 거야. 하지만 네가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해. 이리 와, 댄. 몸으로 지불해줄 테니까.”
그제야 댄은 라파엘의 ‘몸으로 지불’이 뭔지를 깨닫고 얼굴을 구겼다. 라파엘이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려주는 게 아니라, 그를 들고 뛰겠다는 뜻이었다. 라파엘의 작고 왜소한 어깨에 몸이 반밖에 걸리지 못한 채 허공에서 흔들거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라파엘을 안고 흔드는 게 아니라.
씨팔. 댄은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 옆 벽을 더듬었다. 벽돌을 꺼내고 장부를 꺼낸 댄이 베개 커버를 빼내서는 보자기 대신 장부를 묶었다. 라파엘의 말마따나 가게 안의 장부는 별거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장부들은 걸리면 위험했다.
“어서 와.”
라파엘이 재촉했고 댄은 속으로 제기랄을 외치며 그가 안고 싶었던 작은 남자의 목에 엉거주춤 팔을 둘렀다. 라파엘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급습은 분명 전원이 달려 들어올 것이다. 그 순간을 노려서 도망쳐야 했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라파엘은 달렸다.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그의 몸은 순식간에 댄의 가게에서 멀어졌다. 댄은 라파엘의 어깨에 배가 눌린 채 흔들거리는 통에 토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우욱, 우욱. 그가 그런 소리를 참는 동안에도 라파엘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댄 로우를 검은 물의 본부에 내려주었을 때 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대단했다. 거구라면 거구라고 할 수 있는 댄을 어깨에 매달고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펄쩍펄쩍 뛰더니만 마지막엔 남의 마차 위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다시 땅으로 뛰어내리고 또다시 막 달려 말을 빌려서는 미친 듯이 달려 검은 물의 본부까지 도착했다. 미행은 고사하고 추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라파엘은 빠르고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구출된 경위를 떠올린 댄은 더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우욱. 댄이 그런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라파엘은 검은 물 본부까지 온 김에 중개인에게 올라가 돈을 받아냈다.
“라, 라파엘. 돌아왔네?”
“돈.”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네 돈 안 줄까 봐. 여기 있어.”
중개인이 봉투를 내밀자 받아 든 라파엘이 돈을 확인했다. 정확한 액수를 확인하고 등을 돌리던 라파엘이 중개인을 돌아보았다.
“휴.”
라파엘의 부름에 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라파엘은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의 라파엘은 언제나와 똑같은 라파엘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중개인 휴는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라파엘 에반스를 멈추려면 비슷한 급의 인간을 불러와야 할 텐데 그런 인간들은 바빠서 길드 내에 항시 상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러오기 전에 라파엘 에반스는 먼지라도 털어내듯이 간단하게 휴 자신의 목을 꺾어버릴 것이다.
“나 당분간 휴업해. 그러니까 날 지명하는 건 받지 마.”
“……뭐?”
휴 웨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돈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검 수집광이었다. 검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돈을 버는 라파엘이 갑작스럽게 말하는 휴업에 휴는 당황했다. 그가 알기로 라파엘은 모아둔 돈도 없었다. 라파엘의 수중에 있는 것은 수많은 검뿐이었다.
“언제까지?”
라파엘의 돌변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업무 내용이다. 휴의 신중한 질문에 라파엘은 드물게도 단번에 대답을 주지 않고 잠시 시간을 끌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뭐야, 라파엘. 어디 가기라도 하는 거야?”
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라파엘 에반스는 친구고 가족이고 일절 없었다. 여자도 없었고, 그렇다고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인을 하고 그 돈으로 검을 산다. 여러 종류의 검과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외로운 남자였다. 아니, 남이 보기엔 외로워도 그 본인은 외로움이라는 단어조차 모를 것 같은 살인 기계였다. 그런 라파엘이 갑자기 휴업이라느니, 돌아온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지독히 낯설었다. 뭔가가 변해가는 기분에 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라파엘이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신음에서 긍정의 뜻을 읽은 휴가 “어디를 가는데?”라고 다시 물었다.
“잠깐, 좀.”
“언제 돌아오는데?”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글쎄.”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싸구려 셔츠의 깃이 시야를 스치고, 싸구려 재킷과 바지로 감싼 몸이 보였다.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해서 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어이, 라파엘 에반스.”
라파엘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왜”라고 가볍게 물었다.
“또 보자?”
“물론이지.”
휴 웨스터는 라파엘을 배웅했다. 라파엘 에반스는 살인 기계라 불렸다. 사람들은 어떤 미치광이 시계 장인이 움직이는 시계를 만들다 라파엘 에반스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고 수군거렸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휴는 알았지만 대부분은 라파엘을 인간으로 인정하느니 차라리 기계로 인정하는 편이 마음 편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말이 되냐고 쏘아붙이던 휴도 이제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버려두었었다.
하지만 휴 웨스터는 라파엘 에반스가 꽤 마음에 들었다. 고문을 당한 몸을 하고도 복수도 하지 않는 라파엘. 웃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라파엘.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라파엘 에반스에겐 의외로 측은지심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개나 고양이에겐 관대한 남자였다. 휴는 라파엘이 고양이를 줍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사람도 픽픽 죽어나가는 뒷골목에서 개나 고양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뒷골목 꼬마들은 어른들에게서 방치되어 개나 고양이를 가지고 놀았다. 작은 동물을 괴롭히고 때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해도 어른들은 그것이 나쁘다는 걸 알려줄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힘든 세상이었다. 라파엘은 종종 동물을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라파엘 에반스가 ‘시계 장인’에게 실험동물로 동물을 갖다 넘기는 거라고 말했지만 휴는 그렇게 믿기 어려웠다. 돈이 아니면 복수도 안 할 정도로 게으른 남자가 그럴 주변머리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그 시계 장인이라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가상 인물이고.
한 달이나 두 달 뒤쯤 다시 보게 되겠지.
휴는 그렇게 생각하고 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라파엘 에반스를 만날 수 없었다.
§ § §
라파엘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밤이었고,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북대륙의 겨울은 혹독하다. 헤수스는 북대륙 외에도 각 대륙에 조금씩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대륙의 영토는 값비싼 휴양지였다. 대귀족이나 거상, 고위 신관들이 아니면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대부분은 이 척박한 북대륙에서 살고 있었다. 겨울에는 숨결조차 얼음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이 대륙. 라파엘이 살고 있는 곳은 남쪽에 위치한 수도 티에리였지만, 북쪽에서 살고 있는 천민들은 1년에도 수백 명씩 얼어 죽는다. 이그나치오 23세가 겨울에 사용하는 수용소를 만들어주지 않았던 몇 년 전에는 수백 단위가 아니라 수천 단위였다고 할 정도니까.
비가 주룩주룩 소리를 내며 내린다.
“아아, 사랑하는 제이. 내일도 또 와요!”
여자의 목소리에 라파엘은 술잔에 입술을 댄 채 흘끗 시선을 돌렸다. 창녀는 약속대로 정확하게 상대를 지칭해주었고, ‘제이’라고 불린 남자는 도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술집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군인의 전형적인 차림이었다. 오입질을 끝내고 돌아가는 경비대원, 하지만 외모가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며 그 몸 또한 훌륭했다. 그가 술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몇몇 용병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닿아 있었다. 그냥 보면 근육질 거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몸이 얼마나 단련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라파엘은 바에 지폐를 한 장 올려놓고 따라나섰다. 주점을 나가 코너를 도는 순간 라파엘의 발은 땅을 치고 뛰어 올랐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이미 그의 목에는 라파엘의 검 날이 닿아 있었다. 라파엘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제럴드 라 쇼어?”
근위대장이면서 경비대원의 옷을 빌려 입고 오입질을 해대시는 한심한 귀족 나리를 향해 라파엘이 확신조로 묻자, 상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럴드의 눈이 스윽 움직여 라파엘을 바라본다. 몸은 근육질일지언정 그 얼굴은 지독히도 아름답다. 마치 화단의 꽃을 보는 것 같은 담담한 기분으로 라파엘이 그에게 말했다.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이야기를 하자면 네놈부터 통성명이나 해보시지.”
제럴드가 불퉁히 말했다. 라파엘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요즘 자신답지 않게도 망설이는 일이 곧잘 생긴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라파엘.”
반응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라…… 파엘? 성이 뭔데?”
“에반스.”
그 말에 제럴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라파엘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 멍청한 얼굴은 군인의 꽃이라 불리는 근위대의 대장하고는 한참 먼 것이었다. 라파엘은 제럴드의 목에서 검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제럴드 라 쇼어의 시선이 너무나 노골적이라 차마 마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살기가 내리쳐졌고, 라파엘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머리 위를 막았다. 제럴드가 그의 머리 위로 검을 내려친 것이다. 라파엘이 양검을 교차해 엑스 자로 만들어 제럴드의 검을 막자 제럴드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진짜 라파엘 에반스인가.”
라파엘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제럴드가 자신의 정체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는 바가 없는 모양이다. 도리어 그가 보는 것은 ‘라파엘 에반스’인 모양이다. 살인 기계라고 불리는 라파엘 에반스를 만난 근위대장의 눈이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라파엘은 난감해졌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난처함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는 확실히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제럴드가 그의 정체를 모를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기에 다른 말은 준비하지 못했다. 세치 혀를 놀리는 것이 가장 힘든 살인 기계는 다른 말을 꺼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준비된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냥 입을 열었다.
“당신의 소개서가 필요해.”
“소개서?”
“입궁이 가능한 소개서.”
제럴드의 검이 한 번 더 허공을 갈랐다. 라파엘은 막는 대신 유연하게 몸을 돌려 검을 피하면서 제럴드의 등 뒤에 서서 그의 목과 옆구리를 각각 검 끝으로 겨눴다. 제럴드 라 쇼어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마리를 묻어주고 싶어. 가능하다면 소개서를 자의로 써주면 좋겠는데.”
안 되면 고문이라도 하겠다는 투였지만, 제럴드는 그 오만한 말에 화를 내기 전 그 앞에 한 말에 주목했다. 마리를 묻어주고 싶다. ‘마리’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흘러나와, 제럴드는 이 남자가 누군지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제럴드는 홱 뒤로 돌아섰다. 놀란 쪽은 라파엘이었다. 검 끝을 목과 옆구리에 대고 있었는데 남자가 돌아서는 바람에 벨 뻔한 것이다. 라파엘이 깜짝 놀라 검을 치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거구의 남자는 라파엘을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라피, 우리 라피가 맞구나!”
……라피?
라파엘의 애칭이 ‘라피’이긴 하지만 라파엘을 그렇게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은 남자에게 안긴 채 멍한 머리를 수습해보려 했다. 조금 전까지 라파엘 에반스가 어쩌고 하며 검을 휘두른 남자는 어디에 가고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 남자만 남아 있었다. 대형견 같은 모습에 라파엘은 그를 밀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세상에, 라피. 그래, 마리랑 닮았구나. 니들은 정말 닮았었으니까! 자식아, 형을 찾아오려면 얌전히 찾아오지. 이게 뭐냐. 왜 형을 찾아오는데 검까지 들이밀어, 어?”
라파엘은 당황했지만 남자는 속사포로 퍼부었다.
“정말 닮았네! 야, 내가 널 만나려고 너희 길드를 몇 번이나 찾았던 줄 알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 어우, 검은 물 길드 새끼들. 어찌나 흔적을 잘 지워대는지, 원. 겨우 장물아비 놈의 거처를 알아냈다 했더니 순식간에 빠져나가질 않나.”
“저기.”
“아― 아버지는 너한테 관심이 없다면서 맨날 너 찾았냐고 묻질 않나, 어머니는 널 못 찾을 바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질 않나, 형은 너 같은 게 군인이라니 이 나라에 미래가 있긴 있는 거냐고 하질 않나. 진짜 내가 그동안 동네북이 되어서 이리 쿵 저리 쿵 얼마나 처맞은 줄 아냐. 야, 그렇다고 오해 마라. 나도 진짜 네가 보고 싶었다. 너도 알다시피 쌍둥이라는 게 재수 없다는 소릴 듣잖아. 그래도 우리 집은 왕비 배출 가문으로 유명하니까 여자애를 거두라고 하도 할머니가 잔소리를 해대서 어쩔 수 없이 널 버릴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우리 어머니 너 버리고 정말 많이 우셨다. 할머니가 당신 손으로 직접 죽인다고 하셔서 어머니가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어떻게 널 죽여. 그래서.”
라파엘 에반스는 생각했다. 태생의 비밀을 듣는 곳을 꼭 호화로운 응접실로 국한시킨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술주정뱅이가 토악질을 해댄 뒷골목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그러나 이 귀족 나리는 이미 반쯤 맛이 가서 즐거운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저기.”
“작년에 할머니가 드디어 돌아가셨거든.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할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도, 마리도, 너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사실 겉껍데기만 사람이고 알맹이는 괴물이라고 해도 난 믿었을 거야. 정말 나중엔 이 여잔 왜 노망도 안 나나 했다니까. 아― 다행이야. 정말이지, 그 여잔 인간이 아니었다고. 물론 내가 죽인 건 아니야. 계단에서 떨어졌거든. 꼬장꼬장한 성격이라 맨날 아침마다 저택을 둘러본다면서 트집 잡아서는 메이드들을 줘 패는 게 취미인 심심하고 고약한 노인네였어. 여하간 돌아가시고 나서 널 찾으려고 했는데 죽어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아, 진짜 지옥의 1년이었다.”
“저기.”
“마리도.”
약을 잘못 먹은 새처럼 지저귀던 제럴드 라 쇼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리도, 널 보고 싶어했지. 만날 때마다 어두운 얼굴로도 널 그리워했어. 만난 적이 있다면서.”
“딱 한 번.”
“그래, 마리가 제일 널 보고 싶어했어. 널 찾아달라고 내게 울며 매달릴 정도로.”
제럴드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자살한 여동생. 방치된 시체.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그는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라파엘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여동생을 데려와 묻어주었겠지만, 그건 라파엘의 가치관이다. 지킬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라파엘이 아니라 명문 중의 명문인 쇼어가의 일원이자 근위대장인 제럴드 라 쇼어는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라파엘은 제럴드를 이해하거나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제럴드의 이 호들갑스러운 환대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리를 데려와 흙에 묻어주는 것이었다. 마리의 몸이 땅에 녹아들고, 그 땅에서 여러 식물들이 자라고, 그 식물들을 먹으며 동물이 뛰노는―자살한 마리를 다시 세계에 편입시켜주기 위해서 땅에 묻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자면 이 호들갑스러운 남자의 소개서가 필요했다.
“소개서.”
라파엘의 말에 제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인 기계는 어쩔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파엘이 대수롭지 않게 그런 추측을 떠올렸을 때 제럴드가 말했다.
“새침데기로 자랐구나, 라피.”
새침데기…….
라파엘은 평생 처음 듣는 단어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라피, 일단은 어머니부터 만나봐야지. 형이랑, 아버지랑, 유모랑…….”
“소개서, 먼저.”
라파엘이 제럴드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라피.”
“소개서.”
라파엘이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굴자 제럴드는 픽 웃었다. 어릴 때 버린 이 동생을 찾기 위해 그는 1년간 고군분투했었다. 살인 기계니 인간이 아니니 하는 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자취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길드 검은 물과 접촉해보려 했지만 근위대장 신분으로 길드에 접촉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쪽은 검거가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상대가 믿어주지 않는데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만나줄 정도의 의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 에반스를 찾는다는 소문은 공공연히 돌았다. 그는 1년간 자칭 ‘라파엘 에반스’를 셋이나 찾아냈지만 그들은 전부 그의 동생이 아니었고, 이제 슬슬 그는 포기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라파엘이 나타날 줄이야.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은 마리와 닮아 있었다. 마리의 아름다운 금발도,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도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묘하게 마리를 생각나게 했다. 키가 작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키가 정말 작았다. 마리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을 탐내고 도용하는 찌질이가 너무나 많아서 그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검을 맞대보자 상대가 라파엘 에반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확인차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명성 그대로 라파엘은 유연하게 그의 검을 피해내곤 도리어 그를 압박해왔다.
제럴드는 그동안 동생을 찾으면서 만약 만난다면 어떻게 될지를 몇 번이고 상상했었다. 동생은 아마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울거나, 혹은 그를 무시할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끈질긴 게 너의 유일한 장점이니 가서 매달려서라도 데려와!’라고 사납게 대꾸해왔다. 그 말에는 울컥했지만 제럴드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에선 언제나 그가 찾아냈지, 동생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라피.”
라파엘 에반스의 검은 눈엔 마력이 실려 있어, 그 눈을 바라보는 자는 그대로 죽어버린다.
살인 기계라 일컫는 동생의 악명은 헛소문을 양산하고 있었다. 헛소문의 크기도, 양도 너무나 엄청나 제럴드는 놀라거나 혐오감을 느끼기에 앞서 슬펐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했던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자 슬프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라피, 미안해.”
제럴드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 아련한 시선을 보고 있자니 라파엘은 더는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게 분명하다. 아련히 젖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근육질 미남을 보고 라파엘은 골이 다 지끈거렸다. 차라리 적이면 고문으로 원하는 말만 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이건 뭐―.
“지켜주지 못해서,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스러운 내 동생, 그토록 귀엽고 해맑았던 너를…….”
“소개서, 언제 받으러 가면 돼? 가능한 한 빨리 필요해. 내일, 괜찮아?”
라파엘은 제럴드의 말을 끊고 말았다.
제럴드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고생이 많았구나, 라피! 그러면서 끌어안은 팔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세 살 이후로 처음 만났는데 뭐 이렇게 애절할 게 있다고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라파엘은 제럴드에게 변변한 위로 한 마디 해줄 수 없었다. 제럴드가 이러는 게 이상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라파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파엘 자신도 제럴드처럼 조금 이상해져 있구나 하고 생각한 건, 제럴드에게 변변한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내일 쇼어가 본저로 와. 어딘지 알아?”
제럴드가 다급히 물었다. 라파엘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알아.”
“언제 올 거야?”
근육질 미남의 반짝이는 눈망울은 몹시 부담스러웠다. 라파엘은 제럴드를 조금 밀어내며 작게 대답했다.
“밤에.”
낮에 쇼어가 같은 명문 귀족의 저택에 들어가는 건 좀 부담스러운 라파엘의 대답에, 제럴드가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제럴드의 손을 피했고, 제럴드는 허공에서 헛손질을 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낮에 와. 낮에 와서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하고…….”
대답은 없었다. 라파엘이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제럴드는 그 등에 대고 낮에 와, 라고 한 번 더 소리쳤다.
“저녁에 오는 것보단 낮에 오는 게 너에게 더 나을 거라니깐, 새침한 라피!”
라파엘의 등이 휘청거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휴업했다며?”
라파엘은 벌써 세 명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단골인 잡화상의 얼굴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물건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런데 네가 왜 휴업을 해? 무기상 로젠이 그러더라, 너 당분간 검 들어와도 너 보여주지 말고 그냥 팔라고 했다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잡화상 존이 진지하게 물었다. 살인 기계고 나발이고 간에 손님에게는 늘 싹싹한 존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모포를 확인하면서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그냥 왠지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라파엘이 모포를 뒤집어 보고 확인하는 동안 로젠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이 살인 기계는 장사꾼들 사이에선 인기가 좋았다. 떼를 쓰지도 않고 외상도 거의 달지 않았다. 게다가 돈도 많았다. 사실 장사꾼은 상대가 살인 기계든 성인이든, 돈 잘 쓰고 매너 좋으면 그것으로 땡이었다. 무기상 로젠이 우울한 얼굴로 ‘봉이 하나 떠나갔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존은 은근슬쩍 신상품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존.”
그 얍삽한 수를 눈치챈 것처럼 라파엘이 타이밍 좋게 존을 불렀다.
“어?!”
“이 모포…… 좋은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라파엘의 말에 존이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봤자 방습 모포지. 어차피 시체 넣는 건 다 똑같아.”
“그래도.”
“진짜, 빨간색으로 염색 하나 한 게 전부야. 아무리 내 장사꾼이라지만 오랜 손님인 너한테 그런 물건은 권하기 싫다, 야.”
존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고귀한 소녀였다. 맨발로 달려왔을 정도로 다급했던 그의 분신, 체온을 아직 가지고 있었던 그 따뜻한 숨결. 계속 썩어가고 있다는 그녀의 시체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은 단숨에 버러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시체이고 어떤 모포로 싸이든 알지 못하리라. 라파엘은 세상 누구보다도 이것이 쓸데없는 감상이며 사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한 시체가 완전히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시체를 가장 많이 보아온 인간 중 한 명이었다. 그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자살을 선택한 순간까지 삶과 치열하게 다투었을 영혼의 분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의 죽음을 알고 쓸쓸해하는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붉은색을 줘.”
“빨간색이라 비싼 게 다라니깐. 이 나라는 워낙 빨간색을 좋아하잖아.”
운명의 붉은 천. 율레즈가 대지를 다스리는 네 자식에게 건네었으며, 티오안이 포르타미스의 시체를 감쌌던 그 ‘붉은 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붉은 천으로 감싸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열망 때문에 빨간색은 언제나 다른 것들보다 비쌌다. 더욱이 사랑하던 이를 보내야 하는 마지막에 감싸는 이 빨간색 방습 모포의 가격은 다른 색에 비해 세 배나 비쌌는데도 라파엘은 결국 그 모포를 사 들고 잡화점을 나왔다.
붉은 노을이 돌길에 쏟아지고 있다. 라파엘은 잡화점의 나무문 앞에 서서 멍하니 그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기 전 예감이 들 때가 있다. 지금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순조롭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기분.
당신밖에 없어.
그러나 등을 돌릴 수는 없다. 아직도 그 울음 섞인 간청이 귀를 울리는데,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 뒤돌아설 수는 없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리를 걸으며 라파엘은 하늘을 흘낏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분명 미행자의 것이다. 어디쯤에서 떨어뜨리는 게 좋을까. 평소 같으면 뒷골목으로 끌어들여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렸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의뢰 수행 중이 아니었고 라파엘은 괜한 수고를 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마차를 세운 라파엘이 좌석에 올라타 마부에게 지폐를 한 장 내밀었다.
“바쁩니까?”
마부가 돌아보지도 않고 씩 웃었다.
“안 바쁩니다. 바쁘긴요.”
“일단 달리죠.”
라파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차가 출발했다. 뒤창을 바라보자 미행자가 허탈한 얼굴로 마차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는 제법 있는데 얼굴이 어리다. 아마도 용돈벌이라도 할까 싶어 모르는 사람이 내민 돈을 덥석 받고 라파엘의 뒤에 붙었던 모양이다. 빈민가에는 저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 불쌍한 청춘들이 종종 있었다. 야비한 자들의 비열한 돈을 받은 대가로 하나뿐인 목숨을 잃는 가여운 불나방들 중에서 운이 좋았던 불나방에게서 시선을 떼며 라파엘은 손에 닿은 모포를 만지작거렸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인데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을 위한 물건이라니 아이러니했다.
“손님, 어디로 가실 겝니까?”
마부가 손바닥만 한 창 너머에서 물었다.
라파엘은 쇼어가 본저가 있는 곳을 떠올렸다. 그곳은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명문가답게도 쇼어가의 저택은 그 한중간에 있었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거리를 바라보며 라파엘은 그 거리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도박장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라파엘 에반스라는 건 몰라도 떳떳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아는 마부는 은근한 바가지를 씌운 금액을 불렀다. 아마 라파엘 에반스라는 걸 알았더라면 입 닥치고 그가 원하는 데까지 바래다준 다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으니 살려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라파엘은 약간의 바가지가 있는 금액을 두말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손님, 달립니다요!”
마차가 덜컹덜컹 돌길 위를 달린다. 한참을 달려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촌이 보이자 라파엘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마부 창에 살며시 끼워 넣고 문을 열었다. 덜커덩거리는 마차 위에서 주변을 살핀 라파엘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는 순간 타이밍을 맞춰 뛰어내려, 땅에서 가볍게 두어 바퀴 구른 라파엘이 일어섰을 때, 마차는 이미 문짝을 덜렁거리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손을 탁탁 턴 라파엘이 모포를 들고 다리 아래에 있는 하수도 문을 힘으로 열었다. 철창문이 몇 번 흔들리다 과격한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부서졌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라파엘은 품에서 작은 휴대용 랜턴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귀족들이 모여 사는 부촌은 하수도 시설이 기가 막히게 잘되어 있었다. 빈민가처럼 온갖 곳에 온갖 오물이 굴러다니지 않았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귀족들의 하수도 시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깔끔했다. 얼마나 깔끔했냐 하면.
“쇼어가……. 이쪽이군.”
하수도 시설마다 표지판을 붙여줄 정도였다. 라파엘을 비롯한 밤의 손님들은 이 편리하고 깨끗한 지하도를 통해 귀족들의 저택에 잠입했다. 이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도대체 귀족들이 왜 이 하수도 시설을 정비하지 않는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있으니 잘 사용하는 수밖에.
쇼어가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라파엘은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에는 별게 다 떠다녔다. 빗이나 양철통 같은 물건들부터 여자의 브로치로 보이는 보석, 쥐와 인간의 시체까지 다양하게 흘러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라파엘은 물소리가 심상치 않자 재빨리 도움닫기를 해서 천장의 파이프에 매달렸다.
갑자기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이 밀어닥쳤다. 둑이 범람이라도 한 것마냥 엄청난 물이 들이닥쳤지만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천장의 파이프를 거꾸로 타고 조금씩 움직였다. 아까는 길이었던 곳들이 전부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도 라파엘은 별 걱정 없는 얼굴로 파이프와 파이프 사이를 오가며 사다리에 도착했다.
사다리에는 ‘쇼어가’라는 팻말이 자랑스럽게 부착되어 있었다. 라파엘은 조금 망설이다 그 팻말을 뜯어 반으로 동강내 물 위로 던져버렸다. 암살자 대환영, 이라는 말과 다름없는 표식을 굳이 붙여놓고 싶지 않았다.
하수도 뚜껑을 열고 나오자 숲이 펼쳐져 있었다. 외정원인지 내정원인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취했다.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다. 멀리 보이는 저 푸른 지붕이 아마 본관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라파엘은 여기가 내정원인지 외정원인지 역시 가늠할 수 없었다. 주변의 숲이 너무나 거대했다. 다른 저택에서라면 당연히 이곳은 외정원이겠지만 왠지 내정원일 것 같았다. 건국 이래 승승장구해온 가문답게도 엄청난 위용이다.
대충 걸어가는 데만 해도 꽤나 시간이 걸리겠는걸.
방향을 확인한 라파엘은 땅으로 뛰어내렸다.
“라피!”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인간은 세상에 딱 한 명뿐이었고 그나마도 어제 발견했다. 그런데 그 인간과 목소리가 다르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정말 그 인간과 전혀 다른 남자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제럴드 라 쇼어의 검은 머리칼도, 보라색 눈동자도, 근육질 몸도 없었다. 섬세한 미남이었다. 근육질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제럴드 라 쇼어에 비하면 근육질이라기보다는 늘씬하다 할 수 있는 축이었다. 단순히 제럴드 라 쇼어의 몸이 너무 좋은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침입자에게 누구냐고 묻지는 못할망정 다짜고짜 라피, 라니.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말에서 내려 핫핫핫 소리를 내며 다가온 남자가 라파엘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제리의 말대로 진짜 새치름하구나!”
“……에드워드 라 쇼어?”
에드워드 라 쇼어라 해도 그다지 반갑지 않지만, 에드워드 라 쇼어가 아니면 곤란하다. ‘라피’라는 애칭을 들을 때마다 등에 소름이 돋는데 이렇게 부르는 자가 쇼어 가문의 인물 외에 또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 형이다! 자식, 핏줄이라고 바로 알아보는구나! 그럼, 우린 혈육이니까!”
에드워드가 라파엘을 부둥켜안았다. 그 품에 얌전히 안긴 채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에드워드를 알아본 건 핏줄의 힘이 맞긴 맞았다. 단지 자신의 혈육을 알아본 게 아니라 제럴드의 혈육을 알아본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낮에 오라니까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저기.”
“어서 가서 식사하자. 어머니께서 몹시 기대하고 계신단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 아, 참! 네가 유명한 살인 청부업자라며? 그래서 이렇게 신출귀몰하구나. 자식, 아주 잘 컸구나.”
뺨을 비비려 하며 에드워드가 일방적으로 라파엘을 끌고 갔다. 여성을 태우듯이 라파엘을 앞에 태운 에드워드가 말 위에 올라타서는 말을 몰았다. 라파엘의 의사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안겨 말을 탄 채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쇼어가는 그가 상대하기엔 좀 벅찬 사람들만 모아둔 것같이 느껴졌다. 소개장을 받으려면 제럴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얌전히 굴고 있지만,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푸른 지붕과 흰 대리석 벽이 호사스러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하인과 하녀들이 주욱 양쪽으로 늘어섰다. 그들이 하나같이 라파엘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사, 마사!”
에드워드가 내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 라파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듯한 손을 스쳐, 라파엘이 훌쩍 뛰어내렸다. 고양이가 뛰어내리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마사!”
“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마사라는 하녀가 달려 나왔다. 에드워드 라 쇼어는 마치 비밀을 숨기는 소년처럼 즐겁게 기다렸고, 그녀가 오자마자 라파엘을 가리켰다. 마사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라피 도련님…….”
반가움도 감격도 남 일에 불과한 라파엘로서는 피곤하다고 여길 뿐이었지만, 상대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주에 찬 악다구니라면 익숙하지만 이렇게 반겨주는 사람들은 처음 봐서 라파엘은 가슴이 간질거렸다. 좋은 것도 같고 싫은 것도 같은 감정이 그의 가슴을 틀어막은 것처럼 답답했다.
환대는 계속되었다. 공작부인에 공작까지 만났을 때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돌처럼 서 있었지만 몹시 지쳐 있었다.
귀족이라는 건 우아하고 차분하고 기품이 흐르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호들갑스럽고 타인의 말은 듣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소개서만 달라는 라파엘의 말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하자, 차를 마시자,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다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라파엘같이 서툰 남자는 도저히 그들의 분위기를 엎고 분연히 일어나는 게 불가능했다.
괴롭고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라파엘이 드디어 용건을 말했을 때, 공작부인은 곱고 보드라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내며 감탄했다.
“심성이 곱기도 하지.”
‘심성이 고운’ 살인 청부업자.
라파엘은 말문이 막혀 조용히 쿠키를 집어 먹었다. 그가 먹었던 어떤 쿠키보다 달콤하고,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것이었다. 이 맛있는 쿠키를 먹어보았으니 이 집에 와본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일어섰다.
“말씀드린 대로 소개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리를 묻을 곳도요.”
편치 않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라파엘이 시선으로 제럴드를 재촉했지만, 일어선 건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었다. 공작 본인이 일어서서는 “소개서라니! 네가 왜 소개서가 필요하단 말이냐! 내가 마차로 데려다주마”라며 위풍당당하게 말했고, 공작부인도 같이 일어서서 “그럼! 넌 우리 집 애니까 당연히 우리 문장이 새겨진 마차로 다녀야지. 왜 타인처럼 소개서를 받아서 가니?”라고 소리쳤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 우리 집 애라느니 마차로 데려다준다느니 하는지 모를 일이다.
공작부부의 말에 에드워드 라 쇼어가 “저도 라피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요, 아버지, 어머니. 마리를 데리고 오려면 우리 집 마차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라고 침통히 말했다. 저런 말을 하는데 왜 저렇게까지 침통한지 알 수 없지만, 라파엘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어떤 마차로도 가능했지만 라파엘은 쇼어가의 마차를 타고서 마리를 데리러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럼 저랑 같이 가면 되죠.”
제럴드가 말했다.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테이블을 뒤집어엎기는커녕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라파엘에게 그가 싱긋 웃음을 보냈다. 살인 청부업자라고 해서 어떤 미친놈일까 싶었는데 동생은 귀엽고 애잔했다. 그게 자신의 눈에만 그렇다는 걸 추호도 알지 못하는 제럴드가 선뜻 자신을 가리키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소개장만 부탁드립니다.”
라파엘이 정중히 말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제럴드는 낙심하는 대신 웃었다. 자신이 라파엘처럼 버려졌더라면 아마 죽은 여동생 따위 묻어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찾으러 오면 신경 쓰지 말라고 고함을 쳐주고 총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파엘은 달랐다. 마리가 그러했듯 같은 배에서 같은 천성을 공유했을 라파엘도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인 게 분명하다. 그래서 거부하거나 욕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 있어주는 것이다. 착하게도, 사랑스럽게도.
제럴드의 생각과 사실은 조금 달랐다. 라파엘은 제럴드처럼 열정적인 성품이 아니었고, 귀족들의 사생아―사실 정확히 사생아라 칭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편의상 버려진 아이―라는 게 특별하지도 않은 만큼 라파엘은 비교를 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특별한 원한도 없었다. 라파엘은 사실 자신이 버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라파엘에겐 언제나 생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그는 이미 살수로서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야 했고, 일정 나이가 되자 독립시켜주었다. 그 자신이 뭔가를 결정할 수 없었고, 결정할 수 있게 된 지금도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어 과거를 현재로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부모나 형제에게 노여움을 터뜨릴 수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는 일에 관련된 사람과 일을 맡기는 사람, 그리고 일로 처리해야 하는 사람. 이렇게 세 종류뿐이었다. 그에게 더 이상의 분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가 마리 트리지아였다. 그녀는 라파엘에게 말했다. 자신은 그의 분신이라고. 그녀가 말하는 대로 그녀가 그의 분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타인과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창백하게 언 맨발에 붉은 로브와 수심에 가득 찬 미소녀. 누군가를 죽이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는 할까 의심스러운, 귀하고 아름다운 여자.
그때는 거절했다. 그는 누군가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의지도,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안아 올려 마차에 태워 돌려보냈다. 그 결과는 그녀의 죽음이었다.
아니, 그녀의 죽음은 그와 상관있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7년 전 이야기였다. 그는 딱 한 번 그녀를 만났었고,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으며 한동안은 잊고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어서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녀를 만난 날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벌레가 우는 여름밤,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들, 그리고 구해달라고 울던 그녀. 그녀의 죽음에 그의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를 지금이라도 구해주고 싶었다. 방치된 시체에게 안온한 죽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나와 같이 가는 게 싫어?”
제럴드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지만 사실 같이 가는 게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같이 갈 생각이 없었다는 편이 옳겠지만.
“왜? 난 근위대장이야. 나와 같이 가면 가장 빨리 갈 수 있을 거라고.”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제럴드가 강조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근위대장과 잠시라도 가까이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업은 청부 살인이었고, 군인이나 경찰과는 오래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친형제니 친부모니 해도 라파엘에게는 어디까지나 상대는 근위대장에 불과했다. 쇼어 공작은 외무대신이었고, 공작부인은 사교계의 여왕이었으며, 에드워드 라 쇼어 소공작은 재무 비서관이었다. 아득히 높은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훌륭한 인물들이었고,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그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들의 곁이 원래는 그의 자리였다 하더라도, 어차피 운명은 달라졌고, 그는 이미 그들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냥 마리나 묻어주고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재빨리 털어내고 싶다는 게 라파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듣던 대로네.”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자, 공작부인이 뺨에 손을 대고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새침하구나, 라피.”
“그러게. 남자애가 너무 낯을 가리는 거 아니냐?”
공작이 한술 더 뜨는 것을 보던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라고 말하려는 순간 제럴드가 라파엘의 손목을 붙들려 했다. 그 순간 라파엘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제럴드의 팔을 쳐냈다.
싸한 침묵이 응접실 안을 감돌았다. 라파엘은 자신이 말할 차례라는 압박을 느꼈지만 역시나 할 말이 없었고, 그는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제럴드와 에드워드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았고, 공작 부부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도 보았지만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개서.”
소개서를 내민 건 제럴드가 아니라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종이를 내미는 순간 “에드워드!” 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라파엘의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에드워드를 향했다. 에드워드가 내민 소개서를 받으러 오는 걸음걸이는 절도 있었다. 에드워드의 옆에 서 있던 제럴드는 라파엘의 걸음걸이를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어리고 새침하고 약해 보이기만 하는 동생인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긋하면서도 사나운 동물처럼 절도 있고 유연했다.
“오늘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꼭 정문으로 들어오도록 해. 떳떳하게.”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그의 손에 소개서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는 아까부터 라파엘이 끌고 다니던 모포에 시선을 주었다. 붉은 방습 모포. 주로 시체를 싸는 데 사용되는 그 모포가 라파엘의 팔에 걸려 있었다. 단순히 붉은색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포보다 몇 배나 비싼 그 모포를 사 온 동생에게, 에드워드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드워드의 시선을 따라 라파엘의 모포에 시선을 둔 제럴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라피.”
라파엘의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이 제럴드를 바라본다.
근육질의 남자는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의뢰를 제외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얼마 만일까. 라파엘의 인생에서 의뢰를 제외한 ‘사건’이 일어난 건 7년 만이었다. 7년 전의 사건을 일으킨 건 작은 소녀였고, 살아 있다면 물론 이 자리에 그녀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왕궁에 있느라 이 자리에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일의 중심에는 그녀도 있었겠지.
“역시 내일 나와 같이 가자. 오랜만에 만난 형이라 껄끄러우면 데이트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소개서는 내가 작성한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제럴드가 애원하듯 말했다. 라파엘은 제럴드의 애원을 더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소개서를 받았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인사 한 마디 없이 돌아서는 등을 상대로 쇼어가의 네 명은 손을 흔들었다.
“새침한 라피, 또 보자고! 다음엔 정문으로 들어오는 거다, 정문으로!”
“남자애가! 라피, 좀 대범해지렴!”
“라피, 내일 아버지한테도 들러도 된다. 아버지 집무실은 아니?”
“라피, 내일 봐. 내가 찾으러 갈게!”
라피, 라피.
고작 어제 듣기 시작한 이름이 순식간에 몰아친다. 라파엘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났다. 소개서는 받았다. 이제 궁에 가서 마리를 데려와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 나답지 않아. 라파엘은 저택의 내정원에서 외정원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이건 그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교외의 작은 집에서 그답게 살아가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검을 모으면서 죽은 듯이 그러나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의 생활이었다.
라피.
그 이름은 그의 것이 아닌데 단번에 익숙해져버렸다. 라파엘은 당황했다. 외투 주머니 안에서 잡힌 깃털 펜이 그의 손바닥을 쿡쿡 찔렀다. 그게 왠지 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라파엘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독한 고문을 당해도 남들보다 훨씬 대미지가 적었다. 통각이 남들보다 조금 둔하기도 했고, 그게 아니어도 육체의 고통에 익숙했다. 그러니 이따위 펜촉에 손바닥을 찔리는 정도로 아플 리가 없는데도 어딘가 아픈 것 같아, 라파엘은 발을 멈췄다가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저택에서 도망치고 있는 꼴로 달리고 있다는 걸 라파엘이 인식했을 때는 이미 외부 철문까지 온 다음이었다.
……(중략) 하여,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가 그 무서운 결정을 하기 전에 나를 한 번 만나주길 소망한다. 그대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면 나는 승자의 권리를 사용하겠다. 그리해서도 그대를 만날 수 없다면, 그대의 소중한 사람은 갈기갈기 찢기게 되리라.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나도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내 마음이 어떻든 그대는 그대 원하는 대로 하게 되리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저, 단 한 번만.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다오.
이것을 청이라 여기지 마라. 이것은 관대한 명령이다.
‡『포르타미스가 이그나치오 1세에게 보냈다고 알려진 서신』 중에서
※‘관대한 명령’의 기원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