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천신과 지신의 천년전쟁은 천계의 전쟁신 쿠치아노의 주도하에 천신들의 승리로 끝났다. 지신들은 일제히 저승신의 감옥에 갇혔으며, 천신들이 고대하던 ‘대지의 신’의 타이틀은 천계의 주신 율레즈가 총애해 마지않는 풍요와 맹세의 여신 포르타미스가 차지했다. 율레즈는 오랜만의 변화에 즐거워하면서 전리품인 대지를 가지고 놀 계획을 세웠다. 일단 하나였던 대지를 넷으로 나누었고, 각각의 대륙을 자신이 총애하는 자식들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동대륙은 대지의 여신 포르타미스가, 서대륙은 포르타미스의 쌍둥이이자 학문과 발전의 신 티오안이, 남대륙은 사랑과 열정의 여신 루스엔느가 맡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북대륙은 어둠과 죽음의 신 키탄이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율레즈가 북대륙을 키탄에게 맡기기 직전, 그의 신궁으로 찾아온 쿠치아노가 그 자리를 간청했다. 율레즈는 천지대전에서 한 발 물러서 있던 키탄보다 적극적으로 앞장서 그의 승리를 도운 쿠치아노를 더 총애하였고, 그에게 북대륙을 맡기지 않은 것은 그의 피로를 걱정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꺼이 쿠치아노에게 북대륙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운명의 붉은 천을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후 천 년간, 인간들은 신의 통치하에 평화롭고 조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그나치오라는 이름의 미청년이 북대륙에 태어나기 전까지는 신도 인간도 아주 평온하고 상당히 지루한 삶을 이어갔다.
『때로 삶은 단 한순간에 결론이 난다』고, 여신 포르타미스가 말한 순간이 찾아왔다. 북대륙의 작은 영주였던 이그나치오가 동대륙으로 농업 유학을 와서 포르타미스의 신전에 들렀을 때였다. 향을 피우고 간식 제례를 지내는 이그나치오를 포르타미스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제2세대 신들 중 가장 위에 있었던 포르타미스가 나락으로 빠지는 순간이었다. 포르타미스는 이그나치오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그나치오는 포르타미스를 사랑하지 않았고 번번이 거절하여 상심케 하였다. 훤칠하고 아름다운 이그나치오는 여러 아가씨와 분방한 연애를 즐기면서도 포르타미스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인 ‘신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여신 포르타미스가 자살했다. 주신 율레즈는 몹시 노여워하며 포르타미스의 시체를 거두는 자를 신적에서 지우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황량한 신전에 널브러진 여동생의 시체를 보다 못한 서대륙의 티오안은 아버지 율레즈가 통치권의 상징으로 건네준 붉은 천으로 포르타미스의 시체를 감싸서 붉은 노을의 용암 지대로 달려간다. 천지대전에서 명예롭게 영면한 신들의 무덤에 여동생을 녹이고, 그 대가로 그는 신적에서 지워진다. 그러자 남대륙의 루스엔느는 형제들의 비참한 몰락을 보고 이그나치오의 대대손손에 저주를 퍼붓는다. 『죄의 대가는 피와 함께 영원히 내려지리라. 누군가는 눈이 멀고, 누군가는 목소리를 잃으리라.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피의 한 방울이라도 가진 자는 모두 저주를 받으리라!』 그리고 그 길고 강력한 저주의 대가로 루스엔느도 허공에 녹아 사라지고, 땅에는 결국 전쟁신 쿠치아노만이 남았다.
포르타미스가 자살할 때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도, 티오안이 포르타미스를 녹이는 순간 만났던 것도, 루스엔느의 저주에 증인이 된 것도 전부 쿠치아노였다. 율레즈는 쿠치아노에게 세 명의 자식들이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물었지만 쿠치아노는 아무런 유언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쿠치아노는 포르타미스의 ‘대지신’ 자리를 받아 전쟁과 광기와 대지의 신이 되었고, 다른 신들도 공석을 겸임하게 되었다. 율레즈는 인간계를 지긋지긋해하며 다시는 대지를 돌아보지 않았고, 다른 천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쿠치아노 또한 방임주의자로서 대지를 자유롭게 놔두었다. 그러자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배워나갔고 그것들은 전쟁 등의 행위로 이어졌다.
동대륙의 포르타미스를 자살하게 했고 남대륙의 루스엔느에게서 영원한 저주를 받은 미청년 이그나치오는 북대륙을 평정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한다. 그는 국호를 ‘헤수스’라 정하였으니, 이가 곧 이그나치오 1세이다. 북대륙은 신에게 버림받지 않은 유일한 대륙으로서 강력한 신력을 바탕으로 네 개의 대륙을 전부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것을 두고 보던 전쟁신 쿠치아노는 율레즈의 신전으로 은밀히 향했다. 쿠치아노가 천지대전의 승전의 대가로 뭔가를 바랐다고 전해지나, 뭘 바랐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북대륙에서 손은 뗐으나, 소멸하지는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북대륙에서 손을 떼어 북대륙의 신력은 점차 약해졌으나, 그가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북대륙의 신력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력이 약해짐에 따라 점차 다른 대륙들이 북대륙에서 벗어나게 되어 동, 서, 남, 북 대륙은 각각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동, 서, 남 대륙과는 달리 북대륙은 ‘헤수스’라는 단일 국가 체제로 네 대륙 중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된다.
‡『쉽게 읽는 대륙 신화』 중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운 소녀가 또 있을까.
왕세자비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미모와 분위기에 압도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 흑요석 같은 눈동자, 눈이 내린 피부에 눈 위에 핏방울을 떨어뜨린 듯이 곱고 붉은 입술, 하늘하늘한 몸과 상냥한 목소리까지. 그녀는 왕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소녀가 분명했다. 왕세자비 자격시험을 위해 무릎을 꿇고 앉은 여덟 명의 소녀 중 그녀는 단연 돋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그녀를 응원했을 것이다.
물 위에 나뭇잎을 띄운 흰 사기그릇이 왕세자비 후보들 앞에 놓였다. 나뭇잎을 허공에 띄워보라는 왕후의 명령에 왕세자비 후보들이 신력을 집중했다. 누군가의 나뭇잎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누군가의 나뭇잎은 아주 조금 허공에 올랐다가 힘없이 떨어졌으며, 누군가의 나뭇잎은 아예 미동조차 없었다. 왕세자비는 자신의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뭇잎이 아닌 사기그릇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남신 쿠치아노의 신력을 빌리면서도 이토록 강력한 신력을 보인 일이 있던가.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허공에 뜬 사기 그릇 위로 나뭇잎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제어하는 솜씨에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왕세자비 책봉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그때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기뻐했고, 그 아름다운 모습은 많은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아마도 모두가 그녀의 결혼이 신속히 진행되길 바랐을 것이다. 유부녀가 되어야만 그녀를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여섯의 왕세자비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왕후가 되었다. 그녀를 유혹하는 남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으나 그녀는 어떤 유혹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열여섯 살 때처럼 천진한 아름다움이 아닌 처절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슬프고 아픈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외모는, 열여섯 살의 그녀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유혹했고, 몇몇 남자들은 그녀만을 바라보며 애를 태웠다. 그러나 끝까지 남자들을 거절하던 그녀는 어느 날, 왕후궁 안에 있는 화궁의 탑에서 몸을 던진다. 전무후무한 왕후의 자살사건이었다. 이 일을 사람들은 자살한 여신의 이름을 따서 ‘포르타미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종장 클라크 시비어의 기록: 비운의 왕후 마리 트리지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