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1)
“전혀 모르겠네요!”
원작에 나왔던가, 그런 사람.
내가 읽은 부분에 나온 건 오로지 씬, 씬, 씬. 설정과 씬뿐이었지만, 그런 사람에 대한 설정은 본 적이 없다.
“…그렇습니까.”
안도하는 걸 보니 정말로 샤페릴이랑 가까운 사이였나 보네. 그래도 스토리 전개랑 필요 없으니까 안 나온 거 아니겠어?
꼭 필요한 건 보통 초반에 다 넣어 두잖아.
“아무튼, 그렇군요. 이게 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제가 너무 인기 있었던 탓이군요.”
나름대로 농담을 한 건데, 엔프리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한 거 아닌데.
“농담이에요, 대공님.”
“…아, 그렇군요.”
하여간 그런 걸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물론 샤페릴이 인기 있었던 건 사실이겠지만.
근데 카우라고 하니까 진짜 말랑말랑한 그 우유맛 캔디 먹고 싶네.
“대공님, 저 사탕 먹고 싶어요.”
“사탕…?”
“네.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지만…. 조금 시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응? 사탕 그거 설탕 녹여서 만드는 거 아니야? 멀리까지 가서 사야 하거나 오랫동안 만들어야 하는 건가?
“제가 단 걸 즐기지 않아서…. 그런 종류의 다과는 아마 저택에 없을 겁니다. 이 근처에서는 그런 걸 파는 이도 없을 거고….”
“템버가 만들 수는 없어요?”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으음,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가? 예전에 옥춘 만드는 거 본 적 있는데, 설탕 녹여서 식힌 다음에 쭉쭉 당겨 주고 탁탁 잘라 주니까 끝나는 것 같던데.
달인이 해서 쉬워 보인 건가?
“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습니까? 요즘 더워서 그런지 입맛이 없으신 것 같다고 템버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응? 아니에요. 항상 맛있게 먹고 있는데요?”
으음, 사실 콩국수나 냉면이 좀 먹고 싶긴 하다. 콩국수 정도는 내가 만들 수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 여겨질 테고….
냉면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
“…혹시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할까요?”
“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습니다. 숲 바람이 꽤 시원하니 입맛이 돌지 않으실까 싶은데.”
아니, 이 남자 왜 이래?
아무리 날 신용해 주게 되었다고는 해도 밖에까지 내보내는 건 아니잖아. 그러다가 나 도망가면 어쩌려고?
애초에 누가 또 습격하면 어쩌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까.”
얼굴에 너무 표정이 드러났나 보다. 결의에 차서 그렇게 말하는 엔프리제를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요.”
“…네?”
애초에 말이야, 나는 따지자면 집순이에 가까운 성격이다.
철없는 어렸을 때도 동생만 데리고 나가는 데 별 반발이 없었던 건, 단순히 내가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SNS 같은 곳에 올라오는 ‘어디어디에 감금되어 있으면 xxx만 원. 하시겠습니까?’ 따위의 글에 무조건 가능이지! 를 외친 것 역시 내가 집순이기 때문이다. 이 몸에 처음 빙의 되었을 때 환호한 것도 집순이기 때문이었단 말이다!
왜 나가야 하지? 솔직히 내 방에서 나오는 것도 귀찮다. 그냥 내 방에서만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
“나가고 싶지 않아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끄응.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네.
이걸 어떻게 피해야 하지.
애초에 호수라니. 그런데 갈 바엔 차라리 침대에 깔린 그 서늘한 이불속에 들어가 있는 게 백 배쯤 더 시원하지.
“…….”
내가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니 엔프리제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원래 샤페릴은 밖에 나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너무 저택에만 계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다소의 운동은….”
“괜찮아요.”
샤페릴은 여주인걸.
여주는 운동하지 않아도 괜찮다. 건강에 문제없다고!
패시브로 시한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샌드위치를 가지고 산책 가도록 할까요?”
샌드위치, 그거 뭐.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
“호숫가에 가서 다양한 속 재료로 나만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나만의 샌드위치…요?”
“네. 빵은 세 종류를 가지고 가도록 할까요? 바게트와 크루아상, 그리고 아, 치아바타는 어떠십니까.”
“치아바타는 뭐예요?”
다른 두 개는 먹어 본 적 있는데 치아바타는 먹어 본 적이 없는 듯한….
“직접 드셔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아무래도 진심인 듯하다.
집순이인 나를 겨우 빵으로 끌어내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다.
턱을 괸 채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더니 엔프리제가 다시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왜 저럴까. 날 못 가둬 놔서 안달이던 남자가 이젠 날 못 내보내서 난리네.
“잼과 피넛버터, 그리고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가져가도록 하죠. 햄도 여러 종류 가져가고.”
…그렇게 만들어 먹으면 맛있긴 하겠다.
“치즈와 버터도 넣으면 맛있습니다. 와인도 가져가도록 할까요?”
“와인요?”
“네. 이번에 좋은 화이트와인을 발견해서 구해 왔습니다.”
술….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같은 때 먹어 보긴 했지만, 솔직히 맛은 없었다. 특히 소주는 뭔가 알콜 램프를 들이마시는 기분까지 들어서, 좀.
맥주는 그 특유의 냄새가 별로였고.
하지만 와인은 솔직히 좀 마셔 보고 싶었다. 소설에서 보면 늘 풍부한 향이 어쩌고, 과일의 맛이 어쩌고 하길래 궁금하기도 했고….
비싼 술은 또 더 맛있을지도 모르잖아.
“음,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한번 가 보죠, 뭐.”
결코 와인 하나만 보고 가는 건 아니다. 열심히 설득하려는 엔프리제의 정성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럼.
“그럼 오늘 오후에 나가도록 하죠. 저는 잠시 준비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엔프리제가 책상 서랍에서 눈에 익은 종이를 꺼냈다. 윽, 저건.
자모음표잖아.
“열심히 공부하고 계세요.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절 불러 주십시오.”
엷게 웃는 엔프리제는, 이제 완전히 미소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저랬더라.
그건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는 알고 있다.
나는 저 미소에 거스를 수 없다는 거.
“알겠어요. 대신 맛있게 준비해 주셔야 돼요?”
“물론입니다.”
그는 씩 웃고는 내게 자모음표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 * *
“워낙 든 게 많아서…. 너무 흔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템버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너무나 감사한 말씀이고, 저 역시 그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서요. 그보다 아가씨, 신발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음…, 괜찮은 것 같아요.”
“숲길에 가면 또 다를지 모르니 가급적 조심하세요. 전하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음, 이런 건 또 색다르네.
보통 때의 템버는 어딘지 여유롭고 온화한 인상이었는데 갑자기 걱정 많은 잔소리꾼이 되었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잔소리의 화살이 엔프리제에게로 향했다.
“전하께서도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아가씨는 전하처럼 튼튼하지 않으세요. 신발이 조금 안 맞는 정도로도 물집이 생길지도 모르고.”
“…템버. 나도 신발이 안 맞으면 물집 정도는 생겨.”
“전하와는 다르죠. 전하야 남자라서 물집이 생기든 흉터가 생기든 별 상관 없지만, 아가씨는 혹시라도 그게 흉이라도 지면 큰일이란 말이에요.”
“하, 알았어.”
“대충 듣지 마시구요. 말을 타고 이동하시는 거죠? 바구니는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매어 두도록 하세요. 혹시 몰라 병을 꽉 잠그긴 했지만, 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알았어.”
“혹시 음식이 남으면 다시 잘 담아서 보온 통에 잘 담아 오시구요.”
“알았다니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셰리를 통해서 미리 말해 주세요.”
“…….”
계속 이어지는 주의 사항에 결국 엔프리제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템버의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모자지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셨죠?”
“아까부터 알았다고 했잖아.”
살짝 짜증 섞인 엔프리제의 대답에 템버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당부의 말을 시작할 듯한 기세에 엔프리제가 꼬리를 내렸다.
“…짜증 내서 미안해. 충분히 이해했어.”
엔프리제가… 생각보다 그렇게 삐뚤어지지 않은 건 역시 템버의 덕이 클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느낌이었지.
“평소대로 막무가내로 하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오늘은 아가씨도 지켜 드려야 하니까요.”
“…알고 있어.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괜찮아. 샤페릴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데리고 올 테니까.”
…아, 저기.
두 분 혹시 제가 여기 있는 거 잊고 계신 가요? 템버는 잊었을 리가 없는데. 지금 나 흘끗 곁눈질하는 거 봤는데.
근데 왜 내가 여기 없는 것처럼 대화를 할까? 듣는 샤페릴 좀 쑥스럽네…?
“후후, 이제 든든해지셨네요.”
“템버. 그대는 언제까지 날 어린아이 취급할 생각이야? 벌써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독신에 주위에는 사람 하나 없으니 걱정이 안 되겠어요? 10대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신 게….”
으음, 심심하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서 난 신경도 쓰지 않는 게 어쩐지 뻘쭘하다. 그렇다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잠깐 어디 갔다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 개미다.
그러고 보니 개미를 본 게 얼마 만이지? 물론 내 일상 속에도 존재했겠지만, 매일매일의 일과에 쫓겨서 그다지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땐 입 모양 같은 게 좀 무서웠는데 지금 보니까 의외로 귀엽네.
와, 더듬이가 저렇게 길었나? 몸 색이 엔프리제 머리카락 색이랑 닮았다. 어렸을 땐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많이 놀았었는데.
쪼그리고 앉아 한참 개미를 보고 있는데, 문득 주변이 조용하다는 게 느껴졌다. 퍼뜩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자.
“…….”
엔프리제는 입가를 감싸고, 템버는 주먹 쥔 손으로 살짝 입가를 가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기, 그렇게 하셔도 눈은 안 가려지는데요. 차라리 그냥 웃어 주세요.
나 그냥 방에 들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