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0)
똑,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으, 으으….”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그런 소리가.
그런 남자에게 철창 밖의 누군가가 불쑥 물이 든 통을 내밀었다. 더러운 나무통에 차 있는 물.
평소의 남자였다면 분명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남자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게 물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내민 이가 누군지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달려들 듯 앞으로 내달리자, 얄미운 손이 쏙 빠져나가고 야속한 창살만이 남자를 나가지 못하게 잡아 가두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차가운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재수 없는 목소리.
존경받기에 합당한 주인님의 반려를 앗아간 더러운 악당.
“조심하셔야죠. 성치도 않은 몸이신데.”
“이… 더… 더러…!”
말라붙은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혀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
오히려 흘러나온 피가 마른 혀를 적셔 주었다.
“더러운… 놈!”
겨우 돌아가게 된 혀로 내뱉은 건 힐난의 소리였다. 하지만 예상했다는 듯 상대는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더러운 놈이 내민 물에 덤벼든 놈이 큰소리를 치는구나.”
“네… 네놈…인 줄 알았…으면, 죽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달려들 정도로 다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세를 부리다니. 심지어 알고 있지 않았나. 여기에 오는 건 나뿐이라는걸. 그러면서도 그런 허세를 부릴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정신력이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남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용케도 입을 다물고 있군. 허세만 있는 게 아니라 충심도 꽤 두터워. 하지만 알고 있나? 네 신분을 밝히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아. 어차피 네 목을 잘라 거리에 걸어 두면 울며 달려드는 이가 네 가족일 것을.”
이자, 황실의 피 도둑놈 엔프리제 드 블레임은 그러고도 남았다.
소문에 따르면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시종의 목을 자르는 것은 취미요 시녀의 몸을 유린하는 것이 특기라고 했다. 그의 저택에서는 죽은 이와 겁탈당한 이의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남자니 지금 말하는 짓 정도는 충분히 하고 남으리라.
“너, 너…!”
“감히 대공에게 너라고 부르다니, 네 주인은 아무래도 교육을 잘 시키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벌을 받아야 하기 충분한데 감히 대공의 것까지 탐하다니.”
대공은 섬뜩한 미소를 띠우더니 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하면서 맑은 소리를 흘리며 뽑히는 검은 딱 보기에도 손질이 잘 되어 보였다.
얼마나 흉포하길래 검을 늘 저리 잘 손질한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려고.
“더… 더러운… 놈! 누가, 네 것…이냐! 내 주…인을, 모독, 커헉!”
붙어 버린 혀를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했던 피는, 안타깝게도 갈급한 목을 축이기엔 부족했다. 탄력을 잃은 성대로 큰 소리를 내지르려니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목이 찢어진 것인지 피를 토하는 남자를 보면서도 대공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뭐, 네 뒤에 있는 게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네가 입을 열지 않아도 정보를 얻을 곳은 있거든. 그런데도 네게 그 이름을 들으려 하는 건 왜라고 생각하느냐.”
“네, 네놈 같은… 천하의 악한에게… 굽힐 거라 생각하…느냐!”
울컥, 하고 치민 피를 뱉어 낸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대공이 돌연 웃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평범한 청년과도 같은 모습으로.
“사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주인의 이름을 뱉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대공은, 손에 든 검을 철창 너머로 내 뻗어 남자의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 성가신 움직임에 남자가 뒤로 물러나려 바닥을 손으로 짚는 순간.
“으아아… 아아악!”
갈라진 목을 뚫고 거친 절규가 흘러나왔다.
바싹 말라 버린 손을 바닥에 고정시킨 검은, 남자의 몸부림에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마치 흡혈이라도 하는 양 그 새하얀 검신을 붉게 물들이며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감히 내게서 그녀를 앗으려 했던 너를… 그때의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는 것. 그리고.”
대공의 머릿속에 샤페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에 들떠 거친 숨을 내뱉던 가련한 모습.
끔찍한 악몽을 꿨다며 자신을 붙잡던 그 가느다란 손까지.
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없었을 일이었다. 그게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그녀에게.
죽음의 위협과도 같은 압박을 느끼게 한 이 남자를.
“감히 그녀에게 무례를 범한 점. 그걸 사죄하기엔 이 가벼운 머리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겠느냐.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할 정도의 고통 정도나 돼야 어느 정도 상쇄될 것 아니냐.”
대공은 미쳤다.
베르디는 그 광기에 찬 눈동자를 보며 처음으로 대공이 두려워졌다.
“애초에 샤페릴에게 이미 들었다. 그녀에게 네 이름을 밝혔다지. 베르디라고 했던가.”
남자, 베르디의 숨이 일순 멈췄다.
설마 아가씨가 이 남자에게 모든 걸 말했다고? 자신이 죽게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분에게 폐가 갈 것을 아시면서?
왜?
“네 이름은 리베테 백작가의 사용인 명단엔 없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가문의 사용인일까.”
“나는… 나는 그 어디에도…!”
“네가 그랬다지. 샤페릴이 내 저택에 있다는 걸 알려 준 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게 네 주인이겠지. 그렇지?”
“더러운 입으로…! 아가씨의, 이름을…!”
힘겹게 내뱉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걸까. 아니면 들을 생각도 없는 것일까.
대공은 여전히 광기 가득한 웃는 얼굴로 베르디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묘하게 친근하게 구는 말투. 샤페릴이 너를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태도. 그 모든 걸 합쳐 보면 네 주인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제레닉 드 카운, 카운 백작가의 영식이겠지.”
베르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자의 잔학한 성정을 알고 계실 아가씨께서 왜 모든 것을 말하셨단 말인가. 설마.
이자에게 넘어가 제레닉 도련님이 죽기를 바라고 계신 건가…?
그럴 리가!
아가씨는 그분의 청혼까지도 거절하고 제레닉 도련님을 기다리신 분이었다. 그런데 이따위 피 도둑놈에게 넘어가셨을 리가 없다.
없지만.
-저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 말하던 아가씨의 눈동자는 고요해 보였다.
언제나 예의 바른 아가씨지만, 그녀와 제레닉 도련님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베르디에게만큼은 편안하게 말을 하셨다. 마치 리베테 가문의 사용인들을 대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숲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저택 안에서 만난 아가씨는 베르디에게 예를 갖추어 말을 했다. 그 말투가 이미 말해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가씨가 이 더럽고 잔학한 놈의 손아귀에 떨어졌음을.
“아가씨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더러운…!”
“글쎄. 그게 이 지하에서 고문당하다 죽어 갈 네놈과 무슨 상관일까.”
대공은, 무서운 힘으로 바닥에 박혀 꿈쩍도 않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손을 감싼 채 자신을 노려보는 베르디에게 다시 검을 들이 댔다.
“아는 게 있으면 털어놓아라. 그러면 최소한 편하게 죽게는 해 줄 테니. 만약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면.”
옛 연인의 아이를 황제의 아이라 우기던 뻔뻔한 황후의 눈동자와 똑같은 금색의 눈동자가, 황후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빛났다. 황후의 눈동자가 헛되고 공허한 금구슬 같은 느낌이었다면, 대공의 눈동자는 마치 맹수 같았다.
베르디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다.
금색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유려하게 휘었다.
“자, 선택하게 해 주마. 네놈의 목을 걸어 가장 먼저 달려온 이와 네놈의 주인. 둘 중 누구를 너와 같은 꼴로 만들어 줄까.”
* * *
질긴 놈.
놈은 끝끝내 제 주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기반이 없는 대공인 엔프리제가 함부로 다른 귀족가의 영식을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설령 그게 몰락하여 귀족 작위마저 위태로운 이름뿐인 백작가라 하더라도.
“대공님?”
“…네?”
생각에 빠져 있던 엔프리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 틈에 이리 가까이 온 것일까. 바로 눈앞에서 샤페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순순히 이야기했나요? 누가 시킨 일인지.”
아아, 그렇지. 그래서 떠올린 기억이었다. 엔프리제는, 최대한 샤페릴이 무서워하지 않을 만한 단어를 골라 문장을 구성했다.
“안타깝게도 가둬 두고 조사해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당신께서 알려 주신 정보로 어디의 인간인지는 알아냈습니다.”
“리베테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나요? 저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거짓말을 할까? 아니면 솔직히 말할까.
엔프리제는, 이제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샤페릴은 자신조차 잃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만약, 그녀가 기억을 되찾고 엔프리제를 혐오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일 것이다. 지은 죄에 합당한, 세상 모든 것과 자신만의 천국을 잃게 되는 벌.
그야말로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카운 백작가를 기억하십니까?”
“카우?”
“카운 백작가입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건지 샤페릴이 가볍게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쫑긋거렸다. 늘 귀엽게만 느껴졌던 그 모습이, 오늘은 두려웠다.
그 어떤 강대한 적보다도.
아버지보다도.
“으음…,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 사람이 어떻게 절 아는 건데요?”
“당신께서 제레닉 드 카운, 그 베르디라는 남자의 주인과 가까운 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약혼자라는 단어는, 고의로 누락했다. 그 정도의 누락은… 신도 용서해 주지 않으실까.
아주 작은 이기심 정도는.
“으음.”
샤페릴이 더 강하게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입술을 오물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
기억난 건가.
엔프리제의 뺨을 타고 주륵,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