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장. 데이트 왔어요?
“상담을…… 해 보겠다고요?”
윤선의 질문에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높으신 분이니 이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제가, 내담자를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요.”
효은의 결정은 의외였다. 최 박사의 추측은 역시나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맞춰지고 있었다. 효은이 한다고 하면 그녀가 말릴 이유는 없었지만 걱정스러운 건 여전했다. 더군다나 첫 내담자였다. 그게 효은이 앞으로 걸어갈 상담사의 길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누구보다 최 박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상담 일지는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요. 막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묻고.”
“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아, 그럼 양쪽 같이 진행하기로 했어요?”
윤선이 당연한 듯 물었다.
“네?”
“와이프 쪽도 참여하는 게 좋을 텐데.”
“아…….”
효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곧바로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와이프가 자신이라는 소리만큼 쇼킹하고 황당한 게 없으리라. 이도의 억지로 결정한 일이지만 정말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요. 문제가 그 상무 쪽일 수도 있으니까. 잘 풀어 나가 봐요.”
“아, 네네. 잘 진행해 보겠습니다.”
얼른 마무리 대답을 하고 효은은 최 박사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바쁘게 일하길 원했지만, 그 남자로 인해 그렇게 되길 원한 건 아니었는데. 효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두 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오늘 칼퇴근 예상. 저녁 먹자.]
승재는 그녀를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망설이느라 곧장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다음 문자를 누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담 오늘부터 할 수 있을까?]
효은은 머리를 감싸 쥐며 책상 위로 고개를 숙였다.
* * *
“여기.”
승재가 효은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굳이 센터 앞까지 데리러 온다는 걸 말릴 순 없었다. 어느새 기수의 차는 승재의 것이 되어 버린 걸까. 아니면 사정을 말하고 장기간 빌리기라도 한 건가. 그게 효은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라면 그녀는 죄책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파스타 괜찮지?”
효은이 차에 오르자 승재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체크하며 물었다.
“어. 아무거나.”
그날의 고백 이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어색하기만 했다. 승재와 시선이 마주치면 효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피해 버렸고,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분위기를 예전으로 돌리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곧 누구 하나가 터져 버려서 솔직해지기 직전의 긴장감이 식당으로 가는 내내 둘 사이를 감돌았다.
이럴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승재는 자신의 고백을 후회하지 않았다. 더 이상 효은이 아픈 것이 싫었고, 그녀를 웃게 해 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 자신뿐이었으면 하고 욕심을 내 보려 했다. 효은이 떠났던 2년이란 시간이 그에게도 감출 수 없는 용기를 주었다.
“여기…… 너무 비싼 곳 아니야?”
레스토랑은 말단 공무원이 부담 없이 한 끼 식사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언젠가 이도와 가 본 적 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뷰가 아주 좋았던 그곳과 비슷했다.
“내 버킷 리스트. 너랑 이런 곳에서 꼭 밥 한번 먹고 싶었거든.”
승재의 말에 효은은 더 이상 부담스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친구였던 시간이 존재했다. 차분히 감정을 구분할 대화는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회조차 승재에게 주지 않는다면 효은 역시 후회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녀의 현재 감정을 녀석에게 털어놓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승재야.”
“밥 먹고. 먹고 해도 되잖아.”
승재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녀석의 눈빛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해 줄 남자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먹고, 얘기해. 그래도 안 늦어.”
효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오늘은 불가능합니다. 상담 일정 잡아 연락드리겠습니다.]
딱딱하게 날아온 문자에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만 같았다. 이도는 자신의 뜻대로 만남이 성사되리라 예상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은 서운함으로 가득 차 버렸다. 태호의 산소에서 만난 날,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순순히 따르는 효은을 보며 조금은 가능성을 내어 준 것이라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령 없는 연애 고자가 이혼 서류를 내민 와이프의 마음을 돌리기가 쉬울 리 없었다. 이도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앞에 앉은 재영을 한 번 바라보다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안 만나 준답니까?”
그의 모든 걸 읽고 있었던 사람처럼 재영이 불쑥 말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
“저 어디 가면 유능한 비서 소리 듣습니다.”
“자기 보스 뒷조사하는 게 유능한 건가?”
“기어코 후배 멱살 잡아서 잘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니까.”
재영의 도발에 이도는 그저 웃고 말았다. 술에 취해 효은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정신 차리라 소리치던 재영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쯤 인정하기 싫었던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도 같았다.
“최 박사, 추천한 것도 선배가 한 일이야?”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또 혼나겠군.”
효은의 날카로운 눈을 떠올리며 이도는 포기하듯 웃었다.
“사랑이 그런 거야. 구질구질하고. 악착같고. 나라고 재은이 엄마 집 앞에서 울면서 무릎 꿇은 적 없을 줄 알아?”
“굳이 선배의 흑역사를 듣고 싶진 않아.”
“그래도 들어. 또 멍청하게 놓치지 말고. 그 여자를 위해서 보내 준다, 놔준다, 그런 웃기는 핑계 대지 말라 그래.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남아 있다 싶으면 죽도록 매달리는 거야. 너 없으면 내가 못 산다고. 나 좀 살려 달라고. 그게 사랑이야.”
사랑이 이토록 한 인간을 뒤흔들 줄 알았기에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기어코 그는 사랑이란 걸 앓고야 말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는 효은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모님도 마냥 그러고 있을 것 같아? 네 눈에 예쁘면 다른 사람 눈엔 더 예뻐. 놓치기 전에 얼른 서두르라고, 인마.”
재영은 이제 작정하고 이도를 채근했다. 이도는 저절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효은과 함께 다정하게 아이를 보살피던 친구. 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효은의 곁을 지키는 남자.
불안감을 느낀 건 어쩌면 그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운명은 늘 그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효은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기다렸듯 그 녀석도 효은에 대한 마음을 키웠을까. 이도는 생각의 끝을 맺을 수 없어 피로한 눈을 감아 버렸다.
* * *
“요즘 뜨는 곳이라고 해서 예약했는데, 마음에 드세요?”
박 팀장은 에스코스하듯 민아를 레스토랑 안으로 이끌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며칠 전, 어머니 선영이 그녀와의 식사 자리에 태수를 불러들였을 때,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영원히 이용만 당하다가 가차 없이 버려질 운명인 줄만 알았는데, 선영은 아직도 그녀를 쓸모 있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이도의 비밀을 손에 쥐고도 선영은 회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도가 효은의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주식은 선영이 함부로 폭탄을 터뜨리고 선흥을 정복하기엔 위협적인 숫자였다. 그리고 비밀이 새어 나가면 권 회장의 모든 재산이 이도에게로 넘어갈 거란 협박 아닌 협박을 받은 상태였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건 제자리였다. 이도도, 선영도, 회장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각자의 위치에서 결전의 날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좀 더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선영이었다. 그녀는 이제 가면을 벗듯 여동생 영란보다 더 악독하게 이도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다. 효은의 부재는 그녀에게 기회였다. 그리움에 허덕이는 이도보다 더 회장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그 목표를 위해 민아를 이용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민아가 이제껏 그 비밀을 쥐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인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선 캐묻지 않았다. 한 번 더 민아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처럼 이도의 측근인 박태수를 딸의 옆에 붙였다. 결혼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가면서.
“한강이 잘 보이네요.”
“그렇죠? 그게 이곳 포인트랍니다.”
민아는 한강이 잘 보이는 곳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다 걸음을 멈췄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 밝고 행복한 모습으로 수시로 그녀의 목을 졸랐던 한 여인이 전혀 달라진 것 없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쩌죠?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각났어요.”
민아는 효은이 저를 알아보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구인지 안다고 한들,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다. 조연으로서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이도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고, 더 이상 방해꾼으로 전락하고 싶진 않았다.
“아, 회사로 들어가실 거면 제가…….”
“죄송해요. 택시 타고 먼저 갈게요. 그럼.”
민아가 돌아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태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판단이 되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레스토랑 관리자가 그의 쪽으로 다가와 예약을 확인하자 취소하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이곳을 예약한다고 지불한 돈이 한 달 치 생활비와 맞먹었다. 갑자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주의 외손녀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가장 강력한 회장 후보였다. 결혼 전제로 한 맞선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팀장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당사자인 민아는 그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게 재벌들의 결혼이라면 그도 맞춰야 하나. 현대판 남자 신데렐라가 되려면 이런 것쯤은 감수해야 하나.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결론은 그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가져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분에 넘치는 혼밥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그의 반짝이는 레이더에 걸려 왔다. 기억력 하나는 최고라 자부하는 그는 곧장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교통사고를 당한 권 상무를 대신해 급하게 심리 센터의 최 박사를 만나러 갔을 때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던 비서. 어쩐지 자꾸만 눈길이 가던 여자였다.
“이런 우연이. 데이트 왔어요?”
태수의 시선이 승재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