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내가 못 가겠어
산소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태호의 유언장에 첫 번째로 적혀 있는 내용이 그것이었다.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었던 걸까.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앉아 있노라면 세상의 시간이 잠시 멈춘 것만 같았다. 근심, 걱정 따위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앓아 봐야 돌아오는 건 고통이지. 아프지 마라. 미련하지 마라. 그렇게 위로받고 떠나게 만들어 주었다.
“효은이…… 만났습니다.”
이도는 한 달에 한 번, 재영도 모르게 태호의 산소를 찾아갔다. 근처의 조그만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마른 오징어 한 마리를 사 들고 올라가 반은 태호의 몫으로 뿌리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마셨다. 그러기 위해선 차는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도착한 어촌의 작은 언덕은 이제 이도의 힐링 장소가 되어 버렸다.
“여전히…… 예쁘던데요.”
말간 눈동자와 목련 같은 새하얀 얼굴.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여인이 2년 만에 돌아왔다. 잔인하게 이혼 서류까지 보내 놓고, 잘 지냈냐는 인사도 없이 도망치더니, 당당한 커리어 우먼처럼 그의 손을 잡으며 악수에 응했다.
도무지 짐작 할 수 없는 여자였다. 이도는 그녀를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그런 그녀라도 얼굴을 보니 살 것만 같았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그녀는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2년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도가 태호의 무덤을 돌아보며 물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를 아프게 했습니다. 떠나보냈습니다. 붙잡지 못했습니다.’
태호를 만나러 올 때마다 이도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하기도 했다. ‘꼭 그때 가셔야만 했습니까?’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멍청한 물음을 뱉어 낼 때도 있었다. 소중한 게 딱 하나 생겼는데, 그 사람만 곁에 있으면 뭐든 다 견디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냥 아무것도 모르게 두실 수는 없었는지. 뻔뻔하게도 반성은 원망으로 변해 갔다.
“압니다. 못난 놈이라는 거…….”
소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른 이도는 풀밭에 누워 버렸다. 어느새 하늘이 높고 파란 가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효은이 그를 떠난 계절. 그 높고 푸름이 싫어 이도는 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자 모든 게 고요해졌다. 잠이 온다고 생각했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중일 거라고.
“누가…… 여기 오래요?”
효은의 목소리였다. 이도는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앞서 걸어 내려가는 효은의 발걸음에 화가 묻어 있었다. 그것조차 좋아 이도는 뒤따라 걸으며 웃었다. 이렇게 만날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 철저하게 계산하며 그녀를 기다린 것이겠지. 권이도가 어떤 놈인데. 그는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하며 효은이 무슨 말이든 더 걸어 주길 바랐다. 바람이 이루어지려는 것인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효은이 돌아섰다. 이도도 같이 멈춰 섰다.
“앞으로 오지 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그가 말을 건네려 하자 효은이 다시 돌아서 걸었다. 그러다 또 할 말이 생각난 듯 뒤를 돌아봤다. 눈빛은 여전히 칼날 같았다.
“오기만 해 봐요.”
또 돌아섰다. 이번엔 걷지도 않고 다시 뒤돌았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지. 할아버지 소주 못 마시거든요.”
그러곤 또 돌아섰다. 이도는 이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효은이 또다시 뒤로 돌았다.
“웃음이 나와요?”
“우연이…… 세 번이면, 필연이라던데.”
이도는 엉뚱하게 전혀 다른 말을 했다. 효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우연이에요? 첫 번째는, 그래요. 우연이라고 쳐도. 두 번째는 다 알고 찾아온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내가 올 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느새 두 사람은 거리를 좁힌 채 마주 서 있었다. 예전처럼 말을 섞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이도는 그 세 번 중 두 번이 그가 꾸민 짓이라 해도 알겠다며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내 상담 해 주는 건 생각해 봤어?”
미끼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었다.
“이혼 서류나 주고 얘기하시죠?”
효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럼, 밥부터 먹자.”
이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효은이 풀어내려 하자, 그가 더 꽉 붙잡으며 얄밉게 말했다.
“밥 먹으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이 밥 귀신. 또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려들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효은은 이도에게 손을 붙잡힌 채 산소 아래로 터벅터벅 내려갔다. 어느새 그들의 뒤편에서 노을이 그림처럼 흐르고 있었다.
* * *
뜨끈하게 끓인 국수 두 그릇을 앞에 놓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산소 근처에서 그나마 제대로 먹을 만한 걸 파는 곳은 허름한 국수집뿐이었다. 태호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도가 꼭 들르는 단골집이기도 했다.
이곳에 앉아서 먹는 음식만큼은 배고픔을 가시게 해 주었다. 먹어도 될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이냐고 따져 물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늘 외국 어딘가에서 홀로 자신과 싸워 내는 한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 어떤 것에도 맛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았다.
“먹어.”
이도는 효은 쪽으로 국수 그릇을 더 밀어 주었다. 효은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들다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썰던 이혼한 부부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결혼식을 준비하던 호텔에서 무료 식사권을 미리 써 버렸던 그때, 해 주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미련 같은 건 갖지 말자고 얄밉게 말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어떻게 됐는데?”
이도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물어 주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했어요. 다른 한쪽은 아무렇지 않게 결혼식에 가서 축가까지 불러 주고요.”
“설마, 나한테 축가 불러 달라는 소리는 아니지?”
이도가 반응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결혼식에 아저씨가 왜 와요? 오기만 해 봐요.”
오히려 발끈한 건 효은이었다. 귀여웠던 여자는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귀여웠다. 이도는 효은과 이렇게 나누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여전히 멍청하게.
“아무튼, 미련이 남았어도 결국 그건 미련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서로 새로운 인생을 축복해 주는 게 해피 엔딩인 거죠.”
그 뒤의 진짜 결말은 쏙 빼놓고 효은은 이도에게 충고했다. 어디다가 해피 엔딩을 갖다 붙이냐는 표정으로 그가 자신을 보자 효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요.”
그녀는 호호 불며 국수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도는 그 드라마가 어떻게 끝났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효은을 따라 국수에만 집중했다. 맛이 좋아 두 사람은 말도 없이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워 냈다.
“다 먹었어요.”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해 달라는 것처럼 효은의 눈빛에는 못다 한 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도는 시선을 피하며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내 부탁 들어주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밥 먹자면서요? 들어줬잖아요. 지금.”
“이번 한 번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 평생 같이 밥 먹어 달라는 거면 어떡하려고?”
이 아저씨가 정말. 효은은 이도를 노려봤다. 사기 칠 게 따로 있지, 또 바보같이 그를 믿은 게 잘못이었다. 효은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효은.”
“난 장난 아니에요.”
그제야 효은이 제대로 된 눈빛으로 이도를 바라봤다.
“나도 아니야.”
이도 역시 진지하게 그녀를 올려다봤다. 농담으로 감정을 숨기고 뒤로 미뤄 봤자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이제 진심으로 서로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보내 줬어. 벌받으라고 해서 받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기회란 걸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서로 원하는 걸 갖기 위해 계약처럼 한 결혼이야. 너도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하. 효은은 어이가 없어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들어나 보자 싶었다.
“상담해 달라는 거 진심이야.”
역시나.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최 박사는 이도의 의중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적당하게 거절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겠다고 했다. 효은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다른 사람 찾아요. 난 전문가 아니에요.”
“네가 해야 고칠 수 있는 병이야.”
이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만히 얽혀 들기만 했다. 뭐라고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이 아픈 걸 내가 왜 고쳐야 하냐고 따져 물어야 하나.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서로를 힘들게 하며 과거를 되새기는 짓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더 크게 그에게 상처를 줘 버려야 하나.
효은은 깊이 생각하기 싫었다. 원하는 걸 해 주고 원하는 걸 받자 싶었다. 못 할 것도 없었다. 상담은 이제 그녀가 끝도 없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공적으로 대하면 그뿐이었다.
“알았어요. 특별한 케이스니까 돈도 많이 받을 거예요. 진짜 내담자처럼 대할 거고요. 다른 걸 원하면 그만둘 거예요. 그리고 끝나면 꼭…… 이혼해 준다고 약속해 줘요.”
“…….”
그녀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이혼’이란 단어가 이도는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왜 바보처럼 2년을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는지 아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여전히 남편이긴 한 거야?”
서운함은 결국 비꼬인 말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가짜였잖아요. 무슨 의미를 찾아요?”
효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는 이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살 수 있었다. 악착같이 기회를 붙잡을 것이다.
말없이 일어난 그가 효은을 일으켰다. 그들의 투닥거림을 지켜보고 있던 주인장에게 밥값을 지불하고 또다시 효은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한 완력에 이끌려 나가며 그녀는 이도의 뒤통수만 노려봤다.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설명할 수가 없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막막함이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못 가겠어.”
이도가 또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