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처음부터 그녀의 예비 시동생 온은 전신으로 찬바람을 뿜어내는 인물이었고, 류하는 그를 먼저 도발하여 사달을 내고야 말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너울을 확 걷으면서 다가오는 게 어디 있어?’
덜컹거리는 가마 안에서 류하는 조용히 씩씩거렸다.
처음부터 그가 자신의 질문을 무시한 것도, 이에 자신이 대들자 곧장 그런 식으로 보복한 것도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걔는 자기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그래도 형의 후궁이 될 사람인데…….’
류하는 다른 이와 혼인할 여자라 하여 얼굴도 못 보게 꽁꽁 가려 놓는 풍습을 옹호하는 건 아니었다.
여인이 물건도 아니고, 그렇게 소유욕을 주장할 건 뭐람.
하나 그런 생각과 별개로, 어쨌든 법도는 법도였다.
황제의 여인을 함부로 훔쳐봐선 안 된다. 그건 절대적인 법이었다.
‘이런 놈을 대체 어떻게 꾀어?’
어떻게 하면 저 사내의 환심을 사서 나를 연민하게 만들고, 도망치는 걸 돕겠다고 결심하게 할까?
평생 별궁에 갇혀 지내며 궁녀들의 시중만 받았던 류하가 알 수 있을 리가.
그때, 그녀가 몹시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사내를 꾀는 방법은 다양해, 류하야. 다양하면서도 생각보다 단순하단다.>
어머니의 유독 발랄했던 말투를 떠올리자 류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단, 그 사내의 호기심을 사는 방법이 있단다. 조금 건방지게 굴어 봐. 특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내라면 이 방법이 잘 먹힐 거야. 세상에! 날 이렇게 대한 여인은 그대가 처음이오! 하면서 좋아할걸?>
저 얼음 같은 사내를 대상으로 건방지게 굴어 보라고? 자칫하면 내 목이 먼저 날아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내의 동정심을 사는 방법이 있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거지. 다정다감한 성품의 사내거나 책임감이 강한 사내라면, 그 앞에서 가련한 척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다정다감은, 무슨. 저 대장군이란 사내는 바늘로 푹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간편하고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가장 큰 방법이 있어.>
으윽. 어머니가 가르쳐 준 세 번째 방법까지 떠올리자, 류하는 질색하며 부르르 떨었다.
<옷을 벗고 달려들어.>
아아, 어머니. 안 돼요. 그러다가 저 진짜 죽어요.
<몸으로 꾀어. 얼굴로도 꾀어. 가장 동물적인 방법이라 이것저것 따지거나 계산할 필요 없고, 간단하단다.>
뭐, 저도 제 얼굴과 몸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닌데요. 하지만 제 꿈은 살아서 도망치는 거지, 아예 이승을 탈출하는 게 아니거든요.
<부작용은 말이야, 사내가 필요 이상으로 짐승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점이지.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하지만 저 돌덩이 같은 사내한테서는 금수의 모습을 볼 틈도 없을 것 같았다.
‘아, 어떡하지.’
그때, 가마가 멈췄다. 누군가 가마 문을 열려는 듯 달그락거렸고, 류하는 서둘러 다시 너울을 썼다.
“공주마마. 문을 열겠습니다.”
윽, 그 사내다. 류하는 애써 표정을 다듬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류하가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혔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가마에서 나오시지요.”
‘이 자식아,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류하는 속으로만 으르렁댔고, 겉으로는 얌전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류하가 가마 밖으로 나왔다. 준비된 마차는 제국의 후궁 될 이를 태우기에는 조금 초라해 보였다.
“타십시오.”
온이 정중하게 권했고, 류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래, 이게 내 위치지. 고국에서는 저주받은 공주, 제국에서는 약소국에서 팔려 온 신부. 그저 하찮았다.
“고맙습니다.”
류하는 냉담하게 말한 뒤,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마차는 가마보다 높았다. 치렁치렁한 예복 때문에 조용히 애먹는 류하를 보며, 온이 손을 내밀었다.
“잡고 타십시오.”
류하는 장갑을 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순순히 맞잡았다. 가죽의 감촉에 맨살이 닿았다.
류하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문이 닫혔다. 이동이 재개됐다.
긴긴 여정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제물로 바쳐진 약소국의 공주라. 참 가엽다고 온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듣자 하니 월국의 임금은 딸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딸은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궁에 감춰 두고 천덕꾸러기 후궁의 소생을 대신 시집보낸다고 했다.
인간적으로 안쓰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안쓰럽다 해서 제가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마음과 별개로, 온은 오늘 처음 마주한 공주의 태도가 퍽 당황스러웠다.
제물로 팔려 가게 됐으면 분수에 맞게 조용히 숨죽일 것이지. 그래야만 스스로 삶을 지킬 수 있을 터.
<그대가 휘국의 온 대장군입니까?>
그런데, 예정에도 없이 가마에서 내려 갑자기 한다는 말이, 도대체.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온은 조금 황당해서 쳐다봤다.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아니면 너무 겁먹어 정신을 놔 버린 건지.
<그대의 형수가 될 자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 웃기지도 않았다.
공식적으로 자신은 공주의 시동생이 될 테고 공주는 자신의 형수가 될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울에 가까웠다.
약소국의 공주는 한 남자의 동등한 반려가 아닌, 한낱 포로처럼 끌려가는 중이니.
그 와중에 형수 운운하며 당돌하게 인사하는 공주가 꽤 새로워서, 온은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본분을 상기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가마 안에 다시 드십시오. 갈 길이 멉니다.>
그래, 분명 엉망인 첫인사였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첫인사 같은 걸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는걸.
<마마께서 준비되시면 출발하겠습니다.>
당신은 황제에게 팔려 가는 입장이고, 나는 그 황제에게 당신을 끌고 가는 처지야. 하하 호호 살가울 이유가 어디 있겠어.
<대국의 장군은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예법입니까?>
그런데 저 여인은, 저렇게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내가 물었지요. 그대가 휘국의 온 대장군이냐고. 그에 대해 대답하지도 않고 어서 가마에나 들 것을 재촉하면, 내가 수상쩍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수상쩍다니? 온은 그렇게 되묻는 상대방이야말로 수상쩍어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여인은 놀라운 말을 했다.
<그대가 제국의 장군을 사칭한 무뢰한이 아닌 이상, 대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온 대장군이라면 그렇다고 답하는 데에 거리낄 것 없겠지요.>
세상에, 내가 고작 대답 한 번 생략했다고 저런 식으로 나오는 거야? 아니, 뭐, 질문을 무시한 건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러나 누누이 말하자면, 우리는 이럴 사이가 아니잖아.
<제가 실례했군요.>
실례할 사이도 뭣도 아니요, 그저 인질과 감시자의 관계에 가까운데. 저 여인은 온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저는 휘국의 황제 폐하를 섬기는 온 대장군이 맞습니다. 미리 스스로 소개하지 않았던 점을 용서하십시오.>
그냥, 조금 심술이 났다. 겁주고도 싶었고. 미리 똑똑히 가르쳐 놔야 나중에 황궁에 가서 저딴 식으로 입을 놀려 스스로 명을 재촉하지 않을 테니.
<그런데, 저도 한 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는 일부러 성큼 다가갔다. 손을 뻗었고, 무례하게도 너울을 걷었다. 그 결과, 내심 몹시 놀랐다.
<전 장군을 사칭한 무뢰한이 아니지만, 지금 눈앞의 당신이 공주를 사칭한 궁녀가 아닐지 제가 어찌 압니까?>
너울 너머 드러난 얼굴이, 너무 예뻐서.
<당신도 대답해 주십시오.>
가히 절색이라 할 만큼 아름다워서.
<당신은 월국의 류하 공주입니까?>
공주가 이런 미인이었다면 진즉 소문났을 텐데. 천덕꾸러기 후궁의 딸로 내내 별궁에만 살았다는 말이 맞았나 보다.
<대답하십시오.>
간격이 너무 좁았다. 그러나 일부러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은 와중에 은근슬쩍 내빼는 것도 우스워서, 온은 꿋꿋이 지척에서 공주를 바라보았다.
<네. 내가 월국의 류하 공주입니다.>
공주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온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온은 비꼬았다.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게 조금 짜증이 나서 약간의 치사한 심통을 부렸다.
<마마의 시동생이 될 자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제 대체 형수가 몇 명이냐. 스물두 살 온은 조금 피곤해졌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주는 새침하게 말하고선 가마 안으로 사라졌다. 온은 돌아섰고, 공주를 잊으려 노력했다.
그게 어느덧 반나절 전이었고, 이제는 이동을 멈추고 숙박할 때였다.
“가장 가까운 관아를 찾아 잠자리와 음식을 요청해라.”
“네, 대장군님.”
현재 온은 황제의 대리인으로 월국 땅을 통행하는 중이었다. 월국의 아무 관청에나 들러 신원을 밝히고 편의를 요구한다면 원하는 대로 전부 제공받을 수 있었다.
“대장군님, 고을의 수장이 관저의 손님방을 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알겠다. 안내해라.”
그사이 류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빠끔히 내다보며 나름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저잣거리에 나온 건 처음이야.’
묘한 흥분이 류하를 감쌌다. 항상 별궁의 좁은 세상에 갇혀 어머니의 이야기와 책을 통해서만 바깥을 접했었는데.
‘하필 이런 상황이라 좀 껄끄럽긴 하지만.’
난생처음 해 보는 외출이 얼굴도 모르는 폭군의 신부로 끌려가는 일과 겹칠 줄이야. 류하는 조금 부루퉁해져서 창문에서 멀어졌다.
‘밖에 나가고 싶어.’
비록 원하던 대로 궐을 나가긴 했지만, 직후 가마에 탔다가 마차로 갈아타서 짐짝처럼 덜컹덜컹 실려 가기만 했으니 갑갑하기만 했다.
‘나도 차라리 말을 타고 싶은데.’
류하는 다시 창밖을 빠끔히 바라보았다. 정면에 대장군이 보였다. 눈빛에 부러움이 담겼다.
‘하긴, 나한테 말을 줘 봤자 나는 타지도 못하겠지.’
월국은 귀족이나 왕족 여인에게도 기마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반면, 북쪽의 휘국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승마를 걸음마와 함께 익힌다고 들었다.
‘황궁에 가면 나도 배울 수 있으려나?’
류하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 곧 진저리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내가 황궁에 가긴 왜 가.’
그 전에 나는 반드시 탈출할 거야. 일단 군졸들한테서 벗어나고 나면,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살아갈 방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 사내와 친해져야 할 텐데.
‘막막하다, 막막해.’
류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조각 같은 옆모습을 봐.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온의 옆얼굴을 음침하게 노려보았다.
준수해서 조각 같다는 게 아니라, 정말 돌로 빚은 것 같아서 조각 같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냉랭할 수가 있지?
‘뭐, 준수한 편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