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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화 (1/123)

1화

제1장. 원치 않은 혼인

말이 결혼이지, 사실 팔려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올해 스무 살인 류하 공주는 면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서 봐도 역시나 예쁜 얼굴이었다.

예쁘면 뭐 하나. 어차피 제국으로 끌려가는 내내, 수의 같은 너울을 덮어쓰고 있을 텐데.

황제의 여인이 될 이가 함부로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 하여, 그녀는 그렇게 시야마저 차단당했다.

“공주마마,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문밖에서 궁인의 무정한 부름이 들렸다.

류하는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긴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한때 자신과 어머니의 감옥이었던 별궁 밖으로.

뜰에는 몇 안 되는 궁인들과 호위들이 류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 나라 강대국에 후궁으로 바쳐지는 그녀를 앞으로 모실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아비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천덕꾸러기 공주와 함께 고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으니.

류하는 조금 미안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어 가실 때, 임금이 자신을 냉대하고 왕후와 후궁들이 자신을 멸시할 때 도와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너희도 힘없는 자들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이해해.’

그러나 이해했다고 해서 품어 줄 마음까지는 없었다. 류하는 죄책감과 미련을 지워내고 가마에 올랐다.

아버지, 아니 임금은 끝까지 배웅 나오지 않았다.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류하가 탄 가마는 왕궁을 가로질러 궐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이 너머엔 호위와시중을 위해 제국에서 마중 온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저 이방의 공주가 도망이라도 칠까 하여 감시하는 목적이겠지만.

궐문이 열렸고, 류하는 가마 문을 열었다.

“마마, 지금 나오시면 아니 됩니다.”

궁인의 다급한 만류를 류하는 깔끔히 무시했다.

“대국에서 날 모시러 귀한 분들이 왔는데,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자신이 여기서 나올 필요도, 나올 이유도 없음을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다만, 살면서 종종 그래 왔듯,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싫었을 뿐.

류하는 발을 땅에 사뿐히 디뎠고, 곧 낯선 이들 앞에 섰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이는 선두에 선 남자였다.

‘북방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다더니.’

남쪽 월국의 공주인 류하는 너울 뒤에서 그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실이었나 보네.’

비록 갑옷과 외투로 겹겹이 가리긴 했지만, 그 거추장스러운 의복 아래 탄탄한 근육이 숨어 있음을 절실하게 일깨우는 체격이었다.

‘감시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나 보군.’

류하는 사내가 허리춤에 찬 검을 보고 차갑게 생각했다.

“그대가 휘국의 온 대장군입니까?”

류하는 다른 누구보다 조금 앞장서 자신을 당당히 응시하는 태도를 보고 사내의 정체를 직감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무리 내가 후궁으로 팔려 가는 약소국 공주라 하지만, 일국의 왕녀를 일개 호위 무사가 저리 빤히 쳐다본다?

그것도 황제의 여인이 될 자를?

미치지 않고서야, 또는 본인의 지위가 굉장히 높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의 형수가 될 자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휘국의 대장군, 온. 황제의 이복동생이요, 또한 가장 믿음직한 충신.

현재 제국에서는 뛰어난 무사이자 전략가로 이름을 날리며, 선대 황제의 적통이었다.

“가마 안에 다시 드십시오. 갈 길이 멉니다.”

그게 류하의 시동생 될 자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첫인사가 뭐 저따위야.’

류하는 미간을 좁혔다.

“마마께서 준비되시면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너랑 한가하게 통성명이나 할 시간은 없으니 어서 닥치고 가마에 다시 타라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국의 장군은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예법입니까?”

배알이 꼬인 류하가 딱딱하게 되물었다.

자신을 뒤따른 월국의 궁인들이 기겁하는 게 느껴졌지만, 류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물었지요. 그대가 휘국의 온 대장군이냐고. 그에 대해 대답하지도 않고 어서 가마에나 들 것을 재촉하면, 내가 수상쩍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반쯤 돌아섰던 사내가 다시 류하를 돌아보았다.

류하는 외면하지 않고 똑똑히 맞바라보았다.

“그대가 제국의 장군을 사칭한 무뢰한이 아닌 이상, 대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온 대장군이라면 그렇다고 답하는 데에 거리낄 것 없겠지요.”

이제는 월국의 궁인들뿐 아니라 휘국의 군졸들까지 저 공주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류하도 사실,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거의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으아, 월류하 이 바보야, 무모함에도 다 때와 장소가 있다고!’

예전에 월국 왕궁에서는 그녀가 개겨 봤자 그녀와 그녀의 어미에게 실질적으로 큰 해를 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비록 추한 소문을 달고 태어난 천덕꾸러기인 했지만, 어쨌든 일국의 왕녀였고 공식적으로는 왕의 딸이었으니.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류하는 이미 제국에 팔아넘겨졌고, 눈앞에는 무장한 제국의 군졸들이 있었다. 방자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제가 실례했군요.”

사내, 휘국의 온 대장군이 문득 말했다.

“저는 휘국의 황제 폐하를 섬기는 온 대장군이 맞습니다. 미리 스스로 소개하지 않았던 점을 용서하십시오.”

류하는 용서하겠다고 대답하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려 했다. 그때.

“그런데, 저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사내가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어느새, 사내가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전 장군을 사칭한 무뢰한이 아니지만, 지금 눈앞의 당신이 공주를 사칭한 궁녀가 아닐지 제가 어찌 압니까?”

사내는 잔잔한 저음으로 몰아붙이며 손을 뻗었다. 크고 강한 손이었다. 손이 공주의 너울을 걷었다. 이제 지켜보던 궁인들과 군졸들은 다른 의미로 거의 기함했다.

“당신도 대답해 주십시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밤하늘을 닮은 먹색 눈 두 쌍이 서로에게 하염없이 녹아들었다.

“당신은 월국의 류하 공주입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질문하자 숨결이 뺨을 스쳤다. 류하는 너무 깊이 호흡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답하십시오.”

얼핏 들으면 정중하기 그지없는 말투가 어느새 고압적이었다. 류하는 빤히 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내가 월국의 류하 공주입니다.”

사내가 여인의 너울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에 가림막이 생기자 류하는 드디어 제대로 호흡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걸음 뒤로 물러선 사내는 아까 류하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 의도적인 모방을 듣고 류하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마마의 시동생이 될 자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위험한 사람. 류하는 그 첫인상을 마음에 고이 품고 예바르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직후, 류하는 다시 저놈이 가마에 타라고 깍듯하게 위협하기 전에 스스로 가마에 들어갔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어?!’

문이 무사히 닫히고 가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류하는 갑갑한 너울을 벗어 던지고 어금니를 오독 씹었다.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저런 짓을 벌이냐…….’

표정의 아무런 변화 없이, 거의 지루하다는 듯이. 무심하고도 정중한 눈빛을 하고, 그는 감히 예비 형수의 너울을 찢듯이 벗기며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먼저 선을 넘긴 했지만, 저자도 보통은 아니구나.’

간격이 너무 좁아서 잘못 발을 디뎠다간 콧등이 서로 스칠 뻔했다.

상대의 날숨은 본인의 들숨이 되어 가깝게 섞였고, 동공과 홍채의 흐릿한 경계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토록 가까웠음에도 그 어떤 불쾌한 체취도 나지 않았다.

보통 무인들은 갑옷 때문에 땀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저 사내에게서 풍기는 향은 청량했다.

‘그나저나 저런 놈을 어떻게 꾀어.’

류하는 조용히 절망했다.

‘그래도 반드시 꾀어야 하는데…….’

월국의 천덕꾸러기 공주, 일명 ‘잡귀의 딸’이라 불리며 부왕에게조차 외면받는 류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하나의 꿈이 있었다.

자유가 되고 싶어. 벗어나자. 이 궁에서 도망치자. 아무도 나를 버림받은 공주라 비웃지 않을 곳으로.

그러던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게걸스럽게 팽창하는 이웃 나라 폭군의 후궁으로 시집가라는 부왕의 명이었다.

어명을 들은 류하는 처음에 절망했다.

왕궁에 갇혀 사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황궁으로 감옥을 옮기라고?

게다가, 황제의 후궁이라니.

황제는 이미 황후가 있었고, 후궁도 달리 여럿이었다. 소문만 들어도 정말 별로인 사내였다.

그놈이 본국의 팽창을 핑계로 월국을 비롯한 근방의 소국들을 야금야금 괴롭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5년 전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된 것도 영 께름칙했다.

하여, 류하는 좌절했다. 그런 황제 놈에게 시집가란 말이지.

결국,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건가.

‘아니야. 방법이 있어.’

그러던 중, 서서히 발상의 전환이 시작됐다.

‘오히려 이건 기회야. 어쨌든 궐 밖으로 나가는 거잖아.’

출발 날짜가 다가올 동안 류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여기서 제국까지는 길이 멀어.’

남쪽 월국의 수도를 떠나 북쪽 휘국의 황성까지 가야 한다.

후궁을 모시고 천천히 이동할 테니 이동 기간은 넉넉하게 잡아 달포를 넘기겠지.

‘한 달. 길면 한 달하고 보름. 시간은 충분해.’

그동안 어떻게든 틈을 노려, 도망쳐야 해.

‘그러려면 조력자를 만들어야 해.’

궐 밖으로 나온 뒤에도 여전히 방해물은 가득했다.

제국에서 보낸 호위병들을 따돌리기 위해 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내가 도망치는 걸 돕고 싶게 만들어야지.’

황제의 여인이 되어야 할 자가 감히 도주를 시도할 때, 그녀를 막아서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보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황제의 이복동생이 직접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지?’

황제의 부인 될 자를 모셔 오는 중한 일이라, 제국의 황족 겸 대장군이 직접 온다고 했다.

‘그 사람으로 할까?’

가장 힘이 있는 사람. 내게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움이 될 사람.

나의 유력한 무기요, 가장 강력한 방패.

‘그래. 그 사람을 확 꾀어 버리는 거야.’

류하는 절박했다.

왕궁에서 계속 갇혀 사는 것도 싫지만, 폭군으로 소문난 초면의 사내에게 팔려 가듯 시집가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비록 무력할지언정, 무기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류하는 예비 시동생을 꾀어 자신의 탈출을 도모하겠다는 다소 망측하고 무모한 계획을 품고 오늘 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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