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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9)화 (99/134)

99화

“아하하.”

“….”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 했던 반응에 당황하는 그와는 다르게 여자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표정이 담담했다.

‘역시 알고 있었어.’

정보가 어디에서 새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저주와 치료제에 관해 다 알고 있었음을 로건은 직감할 수 있었다.

치료제가 저주를 다 흡수해서 문양이 사라진 후에 어떻게 되는지, 자신이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저리 여유로울 수 없을 테지.

‘그럼 왜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지? 이미 받아들여서? 아니 그것보다도 왜 도망가지 않은 거지.’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몇 개월의 생이라 하더라도, 죽임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여자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병사들을 불러왔고, 이제는 나일에게 가자 말 한다.

“그렇게 아는 걸 다 말하든 말든 상관없이 죽인다고 선전포고를 하면, 누가 말하겠어. 어차피 죽을 건데.”

“….”

“포로 심문 경험이 별로 없나 봐, 공작님은. 당근은 한 조각도 안 주네.”

“….”

“어차피 별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당신이 보내주지 않으면 이 방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가. 그러니까 죽기 전에 얘기라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손 좀 치워주는 게 어때?”

여자의 말처럼 로건은 그녀를 이 방에서 살려서 내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치료제의 시녀라고만 생각했던 이 여자가 진짜 치료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곳에서 죽이는 게 맞았다.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휘몰아쳤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손에 힘을 풀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치료제라는 거.”

“말이 갑자기 짧아졌네.”

“이러나 저러나 죽을 건데 말도 높여 줘야해?”

나일이 치료제에게 애정을 품지 말길 바랐건만 하필이면 이 여자라니.

“…좋아. 멋대로 해.”

“치료제에 대해 아는 걸 말해.”

“이미 잘 알고 있는 눈빛인데.”

“시한폭탄이라는 건 알고 있어. 터, 하… 터지면서 많은 이들을 휩쓸리게 할 거라는 것도. 아는데, 아는데… 살 방법은 없는지 묻는 거야.”

살 방법 같은 건 없어.

그렇게 잘 알았으면 도망갔어야지.

“없어.”

“아, 그래?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네.”

“정말 없으니까.”

단호한 대답에 여자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차피 모르던 무언가를 더 알게 된다 한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여자에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말이 없어진 여자의 표정이 끝내 눈에 밟혔다.

“이미 느끼고 있지 않아?”

“뭘.”

“사람이랑 닿을 때, 전에 없던 이상한 느낌 있을 거 아냐.”

“…?”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는 녹색 눈망울을 로건은 긍정이라고 생각했다.

“황자의 저주를 다 빨아들여서 문양이 사라진 치료제는 그때부터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

문양이 있을 때 흡수할 수 있는 건 황자의 저주에 국한됐지만, 문양이 사라지고 나면 치료제는 몸에 닿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을 흡수하기 시작해.

마치 살아있는 저주처럼, 주변에 닿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앗아가지. 몸 안에 넘치는 저주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연명하지 못하니까.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폭발하는 건 막지 못 하지만.”

“아… 하하, 파면 팔수록 끔찍한 얘기뿐이네.”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아래로 향하던 여자의 시선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여자가 힘겹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울렸다.

말을 뱉고 나서 로건은 후회했다.

죽을 대상을 눈앞에 두고 희롱하는 변태처럼 왜 질질 끌고 있는지.

“이제 네 차례야, 설명해. 어디서 들었는지.”

“황족 전용 서고.”

“그럴 리가, 그곳엔 기밀 자료가 없어.”

“그렇게 확신하려면 자료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할 거야. 난 그곳에서 알았어.”

“다른 누군가를 통해 안 사실이 아니라 너 혼자 서고에서 알아낸 거다?”

“….”

“그러니까 너 말고 다른 누구를 제거할 필요도 없고?”

“….”

여자는 감정을 숨기려 애쓰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목을 졸랐을 때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기만 했는데 죽인다고 위협해봤자 사실을 털어놓진 않겠지.

정보가 새 나간 지점을 메우는 일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죽이기 전 고문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 알면서도 나일에게 가려 했다는 것.

그게 자꾸만 덜컥덜컥 거슬렸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변하지는 않는다.

“넌 어차피 죽어가고 있어. 미안하다. 내 손에 조금 더 빨리 죽어라.”

로건이 오른손에 냉기를 끌어 모았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투명한 얼음 칼날로 단번에 숨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후회 안 할 것 같아?”

지금까지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여자의 입에서 처음 나온 회유의 말이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끝내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가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후회는 없어.”

미안하지만 후회는 없어.

고통 없이 단숨에 보내줄게.

로건이 예리하게 굳은 칼날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여자의 말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일이 죽어도?”

“….”

“내가 죽으면 그도 죽을 텐데. 좀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눈앞에서 얼음 칼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허공에서 멈춰버린 칼날이 뿜어내는 냉기가 방안 온도를 낮추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시린 건  의문을 품은 로건 후페이의 푸른 두 눈이었다.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이 말의 뜻은 얌전히 있다가 왜 이래? 라는 걸까.

아마 그는 겁을 집어 먹은 내가 살아보겠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실행해야 하지 않겠냐구. 죽으면 되돌리지 못 하는데.”

“….”

증거를 내보이기 위해 팔을 뻗자, 로건은 나를 저지했다.

“허튼 짓 하지 마.”

“그럼 직접 하든가. 왼쪽 발목에 있어.”

잠시 나를 노려보던 그가 왼쪽 손으로 스타킹을 잡아 늘린 후 얼음 칼날로 북, 스타킹을 찢었다.

찢어진 스타킹이 잡아당김 한번에 쭉 아래로 말려 내려가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스타킹이 덮고 있던 왼쪽 발목에는 보란듯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짙은 까만색이던 문양이 닳고 닳은 것처럼 옅은 잿빛이 되어 있긴 했지만.

“XX.”

남자의 입에서 얕은 목소리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일어선 그가 거칠게 재킷을 벗어 침상 위로 던지는 바람에, 미약한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몹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몇 걸음 걸을 수도 없는 작은 방을 계속 배회하는 그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나일에게 가려고 했잖아, 너.”

“보다시피 그가 아직 저주에서 벗어난 게 아니니까.”

“문양이 사라지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지금 도망쳤으면 살 수 있었어. 마지막 기회를 네가 차버린 거야.”

“알아.”

“하….”

그가 조금은 나를 돕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도 당신만큼 나일을 위하는 사람이야, 이제 알겠지?

그러니까 방법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황궁으로 돌아가면 바로 나일을 완쾌시켜.”

“어째서? 나일… 어느 정도 건강해졌잖아. 시간의 여유가 있잖아. 그에게 털어놓고 방법을 찾아볼 수….”

슝, 하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얼음송곳이 얼굴 바로 옆에 꽂혔다.

“말했지. 방법은 없어. 아직 치료 전이라고?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넌 나일은 완쾌시킨다. 그리고 죽는 거야.”

“방금 내 몸에 문양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했잖아, 당신은 이제 날 멋대로 죽일 수 없어.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이 시킨 대로 할 거라 생각해, 라는 뒷말을 끝내 내뱉지 못 했다.

그에게 멱살을 잡힌 채 상체가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문양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난 너한텐 손 못 대. 하지만 너 이외의 모든 이에겐 손댈 수 있다는 걸 명심해.”

“정말 더럽게 나오네.”

“….”

*

“들어가겠습니다.”

로건이 방을 나가자마자 가벼운 노크와 함께 하얀 사제복을 입은 이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리에 자상을 입으셨다구요? 제가 봐도 될까요?”

보기만 해도 상처가 나을 것 같은 새하얀 의상을 입은 그녀가 상냥한 말투로 고개를 숙였다. 

“아….”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푹 꺼트리고 있던 내 표정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낯빛은 밝기만 했다.

좌절로 푹 꺼진 눈동자를 들어 올리자, 사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많이, 많이 아프셨죠? 금방 낫게 해드릴게요.”

내게서 느낀 당황스러움을 밝은 웃음으로 지워내는 사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보내주신 건가요?”

“네. 귀한 분이니 꼼꼼히 봐 달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거동이 불편하니, 치료한 후 황궁으로 갈 생각이겠지.

로건에게선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 했다.

나름 나일을 위한다는 공통분모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개뿔, 협박이나 해대고.

‘됐어, 어차피 기대도 없었어.’

나일에게 알리지 말라 협박했지만 내가 입이 없냐? 다 말할 거야. 다 말해서….

- 말했지. 방법은 없어. 아직 치료 전이라고?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넌 나일은 완쾌시킨다. 그리고 죽는 거야.

방을 나가기 전 로건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나일은 치료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맞아, 그래서 그에게 털어놓으려는 거잖아.

그런데.

‘로건의 말대로 정말 방법이 없으면?’

내 미래를 뻔히 아는데도 나일이 날 도울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 란셀롯 영애?”

“…네? 아, 네.”

치료를 시작해도 되겠냐는 눈빛을 계속 보내도 대답이 없으니 사제가 얼이 빠진 내 이름을 불렀다.

급하게 대답하고 치마를 걷어 올리자, 사제의 손에서 작지만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벌어졌던 부위가 다친 적도 없는 것처럼 아물었다.

여전히 반쯤 얼이 빠져선 상처를 확인하는 내게로 사제가 잘 개인 옷 한 벌을 내밀었다.

“여기가 병영인지라 귀족 아가씨가 쓸 법한 물건은 하나도 없거든요. 각하께서 갈아입을 옷이 필요할 것 같다 하셔서 급한 대로 준비했습니다. 두고 갈게요.”

사제가 침상 끄트머리에 옷을 두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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