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황자는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다며 그 영애를 조사해 줄 것을 명했다.
“찾았느냐?”
“빌론으로 돌아갔는데 프리지아 자작가에는 그런 여자가 없었습니다.”
“뭐?”
시종장이 놀란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빌론으로 돌아간 것까진 알겠는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황자 전하께서 찾으시는 분도 녹색 눈에 금발 아닙니까? 그분도 그랬잖습니까.”
시종장과 시종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설마… 그분이….”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살아계신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종은 다시 황자의 곁에 있는 란셀롯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분이 살아있다면, 그래서 황자 전하의 곁으로 온다면 저 영애는 이제 막 피어난 제 마음을 접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그녀가 몹시 안타까웠다.
*
그 날 이후로, 나일은 알레나를 집무실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와 알레나는 황자의 집무실을 나서 방까지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방금도 그와 닿고 나오던 참이었다.
“손 줘봐.”
옆에서 나란히 걷는 알레나에게 말을 걸며 그녀의 손을 잡아채자, 알레나가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은 왜.”
“너랑 내 손이랑 차이가 큰가 싶어서. 혹시 모르잖아.”
방금도 알레나 대신 황자의 손을 잡고 있던 것은 나였으니까.
그가 그렇게까지 예민해서 의문을 가질까 싶긴 하다만은,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팔을 들어 내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만지자마자 알 수 있는 굳은살이 있다든가, 다른 이와 구별되는 특이점 따위 없는 평범한 손이었다.
지금은 황자의 눈이 안 보이는 상태니까 알레나랑 나랑 자리를 바꿔치기할 수 있지만, 점차 치료되면서 그의 시력이 돌아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알레나는 계속 치료제인 척을 하고, 나는 다른 식으로 그와 닿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와 손을 잡으면 어떤 느낌이야?”
“음… 되게 따듯하고 좀 야윈 편이라 손마디가 잘 느껴져.”
“그럼 나는?”
물으며 알레나가 내게 손을 겹쳐왔다.
“네 손? 네 손은 말랑말랑하고 건강한 손이지.”
“….”
“왜?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해줄게 말해봐. 야 말해야 알지~”
“됐어. 됐다고.”
뭐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무튼 그녀는 또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좋게 말해줘도 만족 못 할 거면서.
‘어?’
방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서 프리츠 오센 공주 일행이 보였다.
이 길로 쭉 걸어가면 황자의 집무실이 나오는데 그리로 가는 길일 것이다.
다가오는 한 무리의 여자들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곳은 내 방이 아닌 알레나의 방이었다.
“그런데 말야. 왜 쫓아내지 않는 걸까? 다른 치료제들 말이야.”
“….”
알레나가 테이블에 앉으며 물어왔다.
들어오면서 그녀도 오센 공주 일행을 보았겠지.
그건 나야말로 궁금한 문제였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그들을 궁에 두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대답 없는 내 얼굴에서 나 또한 답을 모른다는 걸 읽었나 보다.
알레나가 이야기를 다른 주제로 틀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라면?”
“뭐?”
“치료제 말야… 꼭 저주에 걸린 황자 한 사람, 그와 짝을 이루는 치료제 한 사람 이렇게 둘뿐이어야 하는 걸까. 진짜 치료제가 한 명 이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네가 진짜 치료제인 걸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들이 가짜겠거니 생각했는데… 정작 그들이 가짜라는 걸 확인한 적은 없잖아.”
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원작 소설에서 치료제를 맡았던 피비는 황자와 공작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갈등의 요소로만 쓰였기 때문에.
저주란 무엇인지, 치료제란 무엇인지 원작은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저주도 치료제도 그저 황자가 알고 있는 선에서 보여준 게 다일 뿐.
‘게다가 난 소설을 중간까지 밖에 읽지 않았고….’
내가 치료제라고 하지만 난 그의 저주에 대해서도 치료제에 대해서도 아는 사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자주 닿고, 더 강한 스킨쉽을 할수록 빨리 치료된다는 사실 뿐.
“너는? 가짜 치료제로 들어올 준비 하면서 알아낸 사실 없어?”
알레나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정도일 거야.”
황자의 하녀에게 문양 정보를 빼내며 이것저것 다른 정보도 얻으려 했지만 하녀가 별로 아는 것이 없어 그게 다였다는 게 알레나의 설명이었다.
동제국의 첫째 황자에게 내려지는 저주는 몇 대를 걸쳐서 이어지고 있는데 누적된 정보가 이렇게나 없을까?
그 하녀가 정보에 접근을 못 한 것이겠지.
치료제에 관한 정보는 황자의 생명과도 직결된 것이니, 황실에서 얼마나 꽁꽁 감춰왔겠냐고.
말단은 접근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느 선까지 정보가 오픈되어 있을까, 고위 귀족?
아니….
고위 귀족이 영원히 황실에 충성한다면 모를까, 만약 황실에 역심을 품는다면 황자와 치료제에 관한 정보는 그들이 휘두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칼이 되어주겠지. 내가 황제라면 오히려 고위 귀족일수록 절대 정보를 넘기지 않을 거야.
‘결국 황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인 건가.’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야 했다.
이건 남의 일도 아니고 이제 내 일인걸.
치료제는 바로 나라고.
황실도 말이야, 적어도 치료제들한테는 뭔가 더 해줄 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당사자들인데 말야. 이렇게 아무 말이 없다니.
아 여기는 교수님 시험 출제 성향 물어볼 선배 같은 거 없나….
‘선배?’
나는 허벅지를 탁 치며 일어났다.
그래 선배. 치료제 선배!
저주가 몇 대째 내려왔다는 건 저주에 걸렸던 황자도 몇 명이나 있었다는 거고, 그들을 치료했던 치료제들도 몇 명이나 된다는 거잖아.
치료제의 주인은 무작위로 뽑힌다.
그렇다면 황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제국민 중에서 치료제가 나왔다는 소리다.
아니 오히려 제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평민들이니 치료제는 평민 출신이 훨씬 많겠지.
과연 황실에서 평민 출신 치료제들의 입단속을 얼마나 잘 해왔을까.
‘분명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될 수 있을 거야.’
내 바로 윗대 치료제.
그러니까 현 황제의 치료제를 담당했던 이는 지금도 살아있겠지.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을 그 전전 치료제들도 자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남겼을 수도 있고.
일단 움직여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녀가 진짜 치료제인지 가짜 치료제인지 알아보자.”
내 말에 소파에 느른하게 기대어 있던 알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일단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자.”
*
“혹시 황제 폐하의 치료제였던 분을 기억하세요?”
내 물음에 하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황자궁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하녀였다.
그런데 왜 모른다는 걸까.
본궁과 교류없이 황자궁에서만 일한 사람인가? 아무도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 아싸이신가.
“이름이라든가, 뭐든 좋으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네.”
하녀는 짧게 단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할 말 없으니까 그만 질문하고 보내줘라, 였다.
나와 알레나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도 꽝이네, 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알겠어요. 가보세요.”
내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인 중년의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황자궁을 빠져나갔다.
곁에 서서 멀어지는 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레나가 입을 열었다.
“다 똑같네, 똑같이 아무것도 몰라. 이상할 정도로.”
“그래. 이상할 정도야.”
그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사용인 식당에서 만난 하녀부터 황자궁의 하녀까지.
몇몇 사용인들에게 황제의 치료제였던 이에 관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는 게 없다는 말뿐이었다.
현 황제와 치료제의 이야기면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물론 20년이란 세월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까맣게 모를 일인가.
어린 사용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나이가 지긋한 사용인들은 그때에도 황궁에 있었을 거 아닌가.
그럼 분명 직접 모시거나 본 일이 없어도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을법한데, 이렇게 안다고 나서는 이가 한 명도 없다고?
“멘데 공작님이 알 확률은 없어?”
은근슬쩍 알레나의 아버지 이야길 꺼냈다.
나이도 있으시고, 한 왕국의 왕이셨던 분 아닌가.
“그런 걸 알 정도로 강대국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던 사람이면 왕국이 망하지도 않았어.”
헤에.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냉철하네.
가족이라고 봐주는 거 절대 없는 그녀의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과거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래야만 질문을 던졌을 때, 사용인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그 일에 연루되기 싫다는 표정들인 게 설명이 될 테니까.
“황실 서고를 가볼까?”
가볍게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동제국의 역사가 몇 년인데 기록물이 뭐라도 남아있겠지.
*
두 명의 경비병을 통과해 들어간 황실 서고는, 들어서자마자 붉은 융단이 쭉 깔린 길이 나왔다.
건물 구조는 단순했다.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중앙 홀이 있고, 그 홀의 양옆으로 분류된 서고의 입구가 나왔다.
‘리베르 12세랑 황실의 저주에 관한 것들….’
관련된 문서를 찾아 들고 중앙 홀의 책상에 가 앉았다.
맞은편에서 나타난 알레나도 품에 서적이 한 아름이었다.
이 중에 조금이라도 몰랐던 것들이 있겠지.
나는 빠르게 저주, 치료제외 관련된 부분을 찾아 읽어나갔다.
- 저주는 리베르 황가의 첫째 아이에게 나타난다. 저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그 시작을 누군가는 리베르 5세로 보고 누군가는 그의 첫째 아이였던 리베르 6세로 본다. 리베르 5세 역시 동일한 저주의 증상을 겪었지만 그는 첫째도 아니었고 시기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
- 리베르 황가가 저주를 끊어내기 위해, 황제의 핏줄 중 저주에 걸리지 않은 자를 차기 황제로 세워도 어김없이 그의 첫째 아이는 저주에 걸렸다. -
- 리베르 황가는 저주를 절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대를 거듭해도 저주의 굴레는 계속되었고… -
“끔찍하네.”
알레나가 조용히 읊조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주에 관해 서술한 내용을 읽어가며 경악하고 있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나일은 황제가 될 것이었다.
하면 그는 자신의 저주가 치료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 아이에게서도 나타나는 저주를 다시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치료제라고 하지만 그 세대를 치료할 뿐이지 저주를 끝내지는 못하는군.’
동제국 황실은 저주를 끝내려는 노력을 해 온 건가? 물론 그랬다고 적혀있긴 하지만.
아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계속 저주에 걸린 황손을 낳는 리베르 황가는 예전의 강력했던 황권에 비한다면 점점 황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후페이 공작가가 없으면 리베르 황가는 무너졌을 거란 말도 나오니까.
황가는 저주가 치 떨리게 싫을 텐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주를 절멸하기 위한 노력을 안 했을 리 없지.
그런데도 끊어내지 못한 건가?
저주가 시작된 리베르 5세를 파다 보면 뭔가 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리베르 5세에 대해 나온 거 있어?”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