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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2)화 (62/134)

62화

‘사랑.’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겠군.”

“….”

“그럼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목이 탔다. 애간장이 녹아 들어간다.

나 이 사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걸까.

기대하는 말이라도 있는 건가.

왜 이리 혀 아래로 자꾸만 침이 고여 들까.

“헷갈리는 감정입니까?”

“음.”

그가 뜸을 들였다. 뜸 들이는 그 시간 동안 심장이 졸아드는 기분이었다.

“보고 싶은 장면을 이제는 볼 수가 없는데도 내가 지금 기뻐하고 있다면 이게 뭔 것 같나.”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돌려 말하기 대회에 나가면 최소 우수상은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사랑했다. 아니 사랑 정도는 아니었고 고마웠던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말해주면 안 되는 거냐.

“보고 싶은 걸 못 보게 되었는데 기분이 좋으면 그거 사이코 아닙니까?”

나는 괜스레 기분이 상해 빈정거렸다.

“황자한테 사이코라고 말한 방금의 무례한 언사를 취소할 기회를 주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이게 다 그가 예전 이야기를 끄집어낸 덕분이다.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마치 그가 내방에 딸린 작은방에서 생활하던, 귀족 아가씨와 병사 사이일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지 뭔가.

“영애가 부럽군.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용서를 구할 텐데.”

그는 잔디 위에 한쪽 발을 쭉 뻗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앞에 앉았다.

도대체 남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얼굴이라도 살펴보면서 들어야겠다 싶었다.

그래야 저게 다 무슨 소리인지….

마른세수를 하던 그의 손이 눈언저리 위에 자리를 잡고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이 얼굴을 덮기 전, 그의 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았는데.

생각 같아서는 당장 저 손을 잡아 내리고 싶었다.

“내가 나아도 되겠느냐.”

“….”

“나는 그 여자를 차디찬 겨울 호수 바닥에 버려두고 왔다. 그래도 내가 나아야겠느냐. 너라면 어찌하겠느냐.

너를 죽게 만든 사람이… 너를 까맣게 잊고 사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네 마음은 편안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원망스럽겠지? 나는 그 여자한테 기다려달라고 하였는데, 원망하지 않을까? 참 뻔뻔한 사람이라 비난하지 않을까?”

“….”

손으로 눈을 가려봤자 그 아래로 흘러내리고 마는 눈물을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울고 있었다. 

아 나는 이 사람에게 죄책감으로 남아버렸구나.

나는 네게 사랑이면 사랑이었지 죄책감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너의 삶에서 아주 가끔씩 내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길, 기억해주길 바랐지만 그게 당신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조금도 원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을 수면 위로 밀어낸 그 날부터 나는 얼어붙은 그 호수를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단 말이다.

오히려 당신은 내게 기쁨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볼 순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간 행복한 얼굴을 상상하곤 했다.

2년 동안 간간히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너는 내게 기쁨이었다.

그날의 내 선택을 기쁨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당신이 잘 지낼 거란 생각 때문이었는데.

당신을 살리는 결정을 했던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너는 죽은 나와 함께 그 호수 안에 갇혀 있었구나.

당신이 앞을 볼 수 없도록 저 눈을 가리고 있는 건 나였어.

“그래서 치료제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혼자 행복해지는 게 미안해서요?”

남자의 눈물이 툭툭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참 바보 같으십니다.”

이렇게 나 때문에 울고 있으면, 빛을 찾아주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온 내가 뭐가 됩니까.

내가 쫓아내 버려야 할 게 저주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당신에게 매달려 있던 나일 줄이야.

눈치채지도 못한 새에 내 손이 얼굴을 덮은 남자의 손등을 향해갔다.

야윈 그 손등을 매만졌다.

나는 우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리 죽여 울고 있으니, 내가 앞에 있는 호수를 향해 걸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맨발에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는, 제 곁에서 우는 남자를 어쩌지 못해 당황하던 여자가 호수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커다란 덩어리에 의해 잔잔했던 수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잠시동안 그는, 왜 저 영애가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별걱정은 하지 않겠지.

호수는 사람이 잠길만한 깊이지만 그리 깊지는 않으니까.

또 나는 저 멀리서 그를 따라 호수를 수영해왔지 않은가.

그러나 그 얼마간, 출렁이던 수면이 다시 고요해지는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된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는 우는 것을 멈추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날 부르겠지.

“영애?”

“….”

“란셀롯 영애.”

그가 갑자기 물에 빠진 영애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답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영애!!”

아마 날 부르는 것 같은데 물속이라 정확히 들려오진 않았다.

나는 호수 바닥에 누워 그를 기다렸다.

수면 위 일렁이는 햇살과 함께 호수 안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출렁거렸다.

아 눈 따가워, 감고 있어야겠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손끝이 날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호수 바닥을 헤집던 그의 손끝이 내 몸에 닿았다.

그가 날 끌어올렸다.

힘겹게 끌어올린 내 몸을 그가 잔디밭 위로 내동댕이쳤다.

그가 많이 힘들까 봐 물속에서 은근히 발장구를 쳤는데, 부족했나 보다.

남자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차오른 숨을 뱉어내던 그가 잔디밭 위 내게로 기어왔다.

보이질 않으니 그가 내 몸을 더듬었다.

더듬던 손이 점점 올라와 내 뺨을 잡고 흔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

“왜 갑자기 뛰어든 거냐고! 미쳤어!? 이봐!”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참 고약한 면이 있다.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남자의 얼굴을 바닥에 누워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 겨울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얼굴도 이랬을까.

어땠을까. 적어도 이보다 더 담담하지는 않았겠지.

많이 슬퍼했겠지.

그나저나 언제까지 소리만 지르고 있을 건데.

이 사람아, 물에 빠진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이 세계에도 인공호흡이 있겠지?

있었으면 좋겠다. 인공호흡 당하고 싶다.

입술을 맞대면 오늘 그는 엄청난 효율로 치료될 텐데.

그리고 나도 나쁘지 않을 것 같….

“악!”

그가 큰 손으로 뺨을 확 갈기는 바람에 목이 돌아가 버렸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터트렸다.

“정신이 들어?”

일부러 물에 빠지고 정신을 잃은 척해, 그를 놀라게 한 죗값을 이렇게 바로 치르게 된다니.

역시 세상은 인과응보인가.

나는 머금었던 물을 뱉어내며 맞은 뺨을 문질렀다.

“도대체 왜…!”

화가 났겠지.

화가 나라고 한 행동이었으니 괜찮다. 그러라고 일부러 한 행동이다.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모르는 죄를 묻고 싶었으니까.

“구해주실 줄 알았으니까요.”

“….”

“황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까.”

“….”

“그분도 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 구해주셨을 거 아닙니까.”

그가 내 말에 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대는 정말 쓸데없는 짓 하는 걸 좋아하는군.”

어디다 또 손을 올려. 이번엔 안 봐준다.

나는 남자의 얼굴에 붙어 떼어지지 않는 손을 잡아끌었다.

우는 얼굴을 들키기 싫겠지.

그래도 안 돼. 어떻게 우는지 하나하나 다 볼 거다.

그가 고개를 돌렸지만 안 된다 안 돼.

나는 고집스럽게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분도 이렇게 구해주셨읕테죠.

방금처럼 차가운 물 속에서 끌어내 손잡고 같이 오셨을 거예요, 그렇죠? 그분도 다 아실 거랍니다. 다 아세요.”

그가 제 얼굴을 내 양손에 붙들린 채로 운다.

굵은 눈물방울이 상기된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와 내 손을 거쳐 팔을 타고 흘렀다.

달아오른 그의 두 볼 만큼이나 팔꿈치 안쪽에 고이는 눈물이 따듯했다.

울 때 엄청 인상 쓰고 우는구나.

콧잔등을 잔뜩 구긴 채로,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샘솟았다.

이렇게 서럽게 울 만큼 힘들었구나.

내가 피었다 지고 난 자리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다니요.

그런 건 싫습니다.

다시 꽃을 피우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하고 사랑받으셨으면 좋겠어요.

“나으세요 전하. 건강해지세요. 다시 빛을 되찾으세요. 행복해지세요.”

“네가 뭐라고 내게….”

그가 코를 훌쩍이며 말꼬투리를 잡았다.

대답하는 걸 보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있는 모양이네. 그래그래. 그래야지.

“전하께 뭣도 아닌 저도 아는 거니… 그분도 다 알 겁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아요. 전하의 그 마음을 다 아는데 어찌 원망한답니까.”

그는 살면서 별로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가.

사람이 울면 콧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데 제 코에서 나오는 콧물에 놀라고 있다.

나는 얼른 손으로 그의 콧물을 훔쳐 대충 젖은 드레스에 문질렀다.

“황자님이 좋아하셨던 분이 상대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 같은 분이셨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럴 리 없지요. 그러니….”

“그 여자는 눈치가 없었다.”

“….”

“정말 없었다….”

예… 예….

제가 그랬던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그걸 님은 모르시니까 그 발언은 제가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바보 같은 건 황자님이십니다. 그분은 황자님이 행복하시길 바랄 텐데요.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황자님이야 말로 눈치가 꽝이네요.”

나는 당신에게 한 번 피었던 것으로 이미 충만합니다.

저는 그걸로 좋은걸요.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불모지로 만들 생각 따위야말로 호수 바닥으로 버려버리세요.

“행복해지세요.”

그가 입을 벌린 채 아이처럼 엉엉 운다.

네, 더 열심히 울어주세요.

오늘은 그래 주세요.

그리고 다음 날부터 행복 해주세요.

변태 같은 나는 오늘 당신의 눈물에 위로받았습니다.

당신이 펑펑 울면 울수록 이상하게 더 힘을 얻었어요.

그렇지만 오늘까지만요.

충분히 위로받았으니 되었답니다.

“빨리 나으세요.”

“주제넘는 말인지도 모르고 계속 해대는구나.”

“예예.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이제 알면 되죠.”

나는 젖은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

걱정된 마음에 황자를 따라왔던 시종과 시종장은 먼발치에서 둘을 지켜보았다.

옆을 쓱 보니 시종장이 벌게진 눈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다.

시종 벤자민은 제 눈물을 먼저 훔치고 나서 옆으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놈아 젖었잖아.”

“눈물은 어르신만 흘렸답니까. 한 장뿐입니다. 싫으시면….”

“됐다.”

눈물 닦으라고 줬더니 팽하고 콧물 푼 손수건을 되돌려준다.

에휴 진짜. 시종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참 건방진 영애로구나. 그렇지 않으냐?”

“네 엄청 건방진 분입니다. 그런데….”

콧물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 이건 아니다 싶은 시종은 그냥 들고 있기로 했다.

한 손에 손수건을 들고서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려면 저 정도의 건방진 용기는 있어야 하나 봅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전하께서 실종된 여자분을 계속 찾으셔서… 마음을 많이 주셨나 보다 생각은 했지만….”

“그저 단순한 그리움이라고만 생각했지 나도… 이제 딛고 앞으로 나아가셔야 할 텐데.”

“그러시겠죠. 전 전하를 강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종의 말에 시종장은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강한 분이시다. 아니 억지로 강해진 분이시다.

“하지만….”

어린 시절 황자 전하께서는 아랫것들의 멸시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던가.

황후의 그 모진 말에서 도망쳐와 얼마나 많이 우셨던 분이신가.

언제부턴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어, 유약했던 전하가 강성해지셨으니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다 크신 줄 알았는데 저 안에 울보를 감춰두고 계셨던 거야.”

“….”

“둑이 터지기 전에 저 영애가 그 울보를 불러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게요. 정말 감사한 분입니다.”

시종은 잔디밭에 누워 제 주인의 얼굴을 어르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손길이 자못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어르신, 저 피기 란셀롯이란 영애 말입니다… 황자 전하를 연모하는 걸까요?”

“네 눈에도 그리 보이느냐? 내 눈에도 그렇다.”

“음.”

“우리 황자 전하 같은 미인을 보고 나니 한눈에 홀라당 빠져버린 것이겠지.”

그거야 당연한 말이긴 한데, 시종은 걸리는 게 있었다.

“전에 황자 전하께 무례를 범해서 입단속을 시킨 영애 있잖습니까… 그 프리지아라는 성을 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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